터널 속 기차, 시골뜨기 여자애, 평범한 기사로 도배된 석간.-이것이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고 비루하고 따분한 인생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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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내부에서 초래된 ‘쇼크‘의 다수는 실은 그 사회가 범한 몇겹의 ‘실패‘가 낳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사회에는 이렇게 해서 발생한 다양한 참사를 사회 ‘실패‘의 결과라기보다 외부에서 초래된 ‘쇼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 P161

버블붕괴도, 중간층의 붕괴를 초래한 격차확대도 ‘1.57쇼크‘로 알려진 초저출산도 ‘지방소멸‘로 일컬어지는 인구감소도, 모두 헤이세이 일본이 불가항력적으로 입은 사회적인 ‘쇼크‘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이렇듯 ‘쇼크‘로 간주하고 요령부득의 일로 받아들이는 수용 패턴은 사회가 정책이나 정치적 타협이 야기한 실패들을 ‘실패‘로 인식하며 그 구조적 문맥을 정면에서 응시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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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타 정권 붕괴 후 일본의 총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속속 교체된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권력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고, 형편에 맞아 총리 자리에 오른 ‘장식물‘에 불과했음을 입증한다. 당시, 정국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질적인 중심은 구 다나카파 세력을 승계한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을 중심으로 한 게이세이카이에 있었다. - P98

리쿠르트 사건이 일본 정치에 던진 충격의 마이너스 효과가 이런 정치 혼란과 일탈이었다면, 플러스 효과는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개혁‘이 최대과제라는 공통인식이 생겨난 것이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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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소닉은 2007년부터 박막형TV에 매년 2000억 엔 전후의 투자를 이어갔고, 샤프는 2009년 사운을 걸고 오사카부 사카이에 대형 액정패널 제조공장을 건설했다. 둘다 아날로그 방송에서 지상파 디지털방송으로의 이행을 염두에 둔 투자였지만, 이 무렵은 이미 ‘방송‘에서 ‘인터넷‘으로의 미디어 전환을 예견할 수 있던 시기였다. 플라즈마든 액정이든 TV는 이제 우리 생활의 기간 미디어가 아닌 것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 P68

1990년대 컴퓨터의 주류가 메인프레임에서 PC로 변화하자 IBM도 후지쓰도 함께 힘을 잃었다. 얼마 안가 후지쓰는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사업을 차례로 잘라내 매각하기 시작한다. 컴퓨터는 지금은 ‘전자계산기‘에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 그 존재양태를 전환해가고 있지만, IBM도 후지쓰나 NEC, 히타치도 이 전환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 P71

고도성장기 성공체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본기업은 그 시기 확립된 ‘일본적 경영‘의 질서유지에 집착했다. 버블붕괴 후 위기의 와중에서도 질서 파괴를 기피함으로써 전체가 서서히 침몰해갔던 것이다. - P85

곤이 이끌던 닛산의 성공은 일본 사회에 ‘신화‘를 만들어냈다. 해외에서 온 ‘이방인‘ 경영자가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일본기업에 대해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고, 차례로 장벽을 돌파하며 성장으로 이끌어가는 신화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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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의 최적화는 전체의 최적화와 다르다. 부분적으로는 아무리 똑바로 쌓아올려도, 전체가 똑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 P9

사람들은 성공에서는 배우지 못한다. 오히려 실패로부터, 성공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배운다. 참고로 스웨덴에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멀지 않은 헬싱보리에 규모는 작지만 민간이 지은 실패 박물관도 있다. 20세기 산업디자인의 실패작을 모아놓은 것으로 바사호 박물관과는 무관하지만, 나라에는 ‘실패에서 배운다‘는 사고방식이 시민들 사이에 널리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 P10

이데이의 경영은 매니지먼트적으로는 합리적이었지만, 소니라는 특이한 기업체의 독창성을 빼앗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전문성이 높은 사일로를 만드는 것에 의해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회사의 효율화를 높이는 듯" 보였으나 각 사일로의 경영진은 "라이벌 기업뿐 아니라 회사 내 여타 부서로부터도 ‘몸을 지키려‘ 했다. 타부서와 참신한 아이디어를 공유하지 않게 되고, 우수한 사원의 타부서 이동도 꺼리게 됐다. 부서 간 협력이 사라졌고, 실험적인 브레인스토밍이나, 단기간에 이익을 창출할 수 없는 장기투자도 미루게 됐다. 어느 누구도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에 소극적이 되어버렸다. " - P14

일본의 전기산업은 한국과 대만에 완패했다. 이 패배의 원인을 반드시 버블붕괴와 대불황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소니가 워크맨 이후 아이패드와 아이폰이 등장할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당시 가정에 인기가 있던 게임기 개발에 열중했던 것처럼, ‘가전‘ 카테고리가 붕괴한 정보사회의 미래상을 일본 기업들이 진지하게 내다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주요 원인이다. - P16

‘헤이세이‘의 30년을 일본의 단계적인 쇠퇴과정으로 본다면, 4개의 ‘쇼크‘가 이 과정에 박차를 가했다. 제1의 쇼크는 1989년에 정점을 찍은 버블경제의 붕괴이고, 제2의 쇼크는 1995년의 한신·아와지대지진과 옴진리교 사건이다. 제3의 쇼크는 2001년의 미국 동시다발테러와 이후 국제정세의 불안정화, 제4의 쇼크는 물론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전사고다. ‘헤이세이‘는 일본사회가 이 4개의 국내외 쇼크와 이후 변화에 대한 대응을 강요받으며 스스로의 모습을 바꿔간 과정이다. - P30

이 두 번의 쇼크가 발생한 시점의 정권이, 전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후자는 간 나오토라는 비자민당 총리의 지휘 하에 있었던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번의 쇼크와 자민당의 총리는 조우하지 않았다. 이 자체는 역사의 우연이지만, 이후 정치의 변화에는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닐까. - P33

어떤 경우든 쇼크 몇년 뒤에는 자민당의 포퓰리즘 정권이 탄생했다. 미국처럼, 쇼크 뒤 재난자본주의가 직접 도입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1995년 쇼크 발생 몇년 뒤 정국은 우정민영화로 향했고, 2011년 쇼크 이후 도쿄올림픽 개최로 나아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재해와 심각한 사고, 불황과 국가 이벤트 개최, 공공부문의 민영화 사이에는 분명 노골적인 연계가 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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