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전범재판은 ‘승자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행사했던 일로 여겨져 그 정당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많은 일본인은 누가 전범으로 기소되고, 누가 기소되지 않았는가는 상당 부분 운의 좋고 나쁨의 문제였고, 실제로 얼마나 책임 있느냐보다는 누가 더 관료사회 내부의 정치에 능했는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 P483

세계는 일본이 왜 1930년대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독일처럼 반성하지 못하는가 의아해한다. 하지만 많은 일본인에게 있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이나 마찬가지다. 1930년대의 전쟁과 그로 인한 여파를 겪고도 독일에서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조국과 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뿐이다. - P484

고이즈미와 아베 신조를 포함해 수많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은 현대 일본의 병이 사회경제적 문제의 껍데기를 썼을 뿐 사실은 정신적 위기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자신의 리더십만이 국민이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P484

중국의 통제권 아래로 들어가느니, 변덕스러운 미국의 비위를 계속 맞추고 짜증을 달래는 편이 나았다. 중국은 미국처럼 감언이설로 손쉽게 조종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은 이미 60년간 미국을 상대로 비위를 맞춰왔던 경험이 있고, 우익들은 그것을 통해 일본이라는 국가의 본질이라고 여겼던 것을 보존할 수 있었다. 우익들이 보기에 중국과는 그런 관계가 불가능해 보였다. - P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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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는 현대의 미디어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법을 완벽하게 파악한 일본의 첫 정치인이었다. 미디어를 잘 활용해 국가수반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미국의 레이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고이즈미도 보수적인 반동적이기까지도 한 어젠다를 친근하고, 개혁가적이며, TV화면에 잘 받는 이미지로 포장해서 성공할 수 있었다.
- P477

그러나 고이즈미의 신자유주의에 관한 발언과 시대의 흐름에 합류하는 듯한 모양새는, 진짜로 개혁(신자유주의 개혁이건 다른 형태의 개혁이건)을 추진하기 위한 제스처라기보다는, 일본 정치를 다나카가 패권을 쥐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시도였다. 즉, 고이즈미는 잘 훈련된 전문가 엘리트 관료들이 온전히 다스리는 나라로의 회귀를 지향했던 것이다.
- P478

일본의 우체국은 알고 보면 세계에서 가장 큰 은행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깔려 있는 우체국들은, 친절한 서비스와 약간 더 높은 이자율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의 대형 민간 은행들보다도 더 많은 예금을 유치한다. 이 예금이 정부의 재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비밀자금‘이 된다. - P479

미국에게 그렇게 비위를 맞추던 고이즈미는 동전의 양면처럼 이웃 국가들에게는 줄곧 도발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도발 또한 상징적인 행위이긴 마찬가지였다. 다른 무엇보다 고이즈미는, 중국과 남북한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다니기 시작했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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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잠깐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곳에 두 가지 상반된 세계가 공존한다는 것을 안다. 어둠의 세계가 빛의 세계에 마치 사악한 쌍둥이처럼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빛의 세계에는 숨 막힐 정도의 세련됨이 일본의 미술품과 디자인에 녹아 있고, 양가의 부인이나 고위 관료들이 사용하는 일본어의 절묘한 뉘앙스 및 형식미에도 스며들어 있다. 비즈니스 미팅에서부터 각종 공식 만찬과 황실 행사를 아우르는 일본의 모든 의식에는 우아함이 넘친다. 반면 어둠의 세계에는 도쿄와 오사카 같은 대도시의 길거리에서 접하는 난잡하고 광적인 풍경이 있다. 거기에는 폭력배들의 위협적인 말투 및 몸짓에서 드러나는 계산된 무례함이 있고, 가부키정과 난바에 있는 술집과 카바레들의 음탕함이나 추잡함에 흥청망청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기모노나 샤넬 정장을 입은 고전적인 일본 미인 곁에는 앞 장에서 보았던 호스티스나 갸루가 있다. 짧은 바지와 단정한 머리에 넥타이를 맨 영민한 젊은 남자 옆에는 왁스로 뾰족 세운 머리를 한 체 소음기를 뗀 오토바이를 타고 폭주하는 친피라가 있다. 요새는 자신이 집착하는 물건들의 잔해로 가득한 지저분하고 좁은 방에 사는 오타쿠도 점점 늘어난다.
- P467

오자와는 수많은 일본인을 당혹케 만든 일본 정치의 암묵적이고도 공고한 특징들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동시에그는 일본에서 그 특징들을 청산하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자와의 청산 방식은, 그 특징들로 인해 이익을 누리던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것이었다. - P468

일본의 정치는 어떤 정치인이라도 언제든 이런저런 법률 위반으로 기소될 수 있는 환경에서 작동하고 있다. 법률은 모호한 문구로 쓰여 있기 때문에, 누구를 어떤 근거로 기소할지 결정할 때는 검찰의 자의적 판단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다.

이들은 다나카에 의해 밀려난 지난 한 세대 동안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 정치에서 성공하려면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그럴듯하게 연기해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진짜 목적은 개혁의 정반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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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카를라 3부작 1
존 르카레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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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별명인 거 <스노 화이트>보단 <백설왕자>쯤으로 번역하면 더 와닿지 않았을까..?
이러면 너무 의역인가 싶어 원서를 찾아보니 ˝Snow-white˝도 아니고 대놓고 ˝Snow White˝네. 그럼 백설왕자라고 한 게 맞는 것 같은데...

헤이든은 그를 <예비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라고 불렀다. 경비원들은 백발 때문에 그를 <스노 화이트〉라고 불렀다. 토비 이스터헤이스는 남자 모델처럼 옷을 입고 다녔지만 어깨를 웅크리거나 자그마한 손을 꽉 움켜쥘 땐 영락없는 전사였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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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권력자들은 자기 손에 권력이 전혀 없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혹은 권력이 있더라도 극도로 조심해서 사용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들은 또한 국민, 천황, 국가, 회사와 또는 다른 그 무언가를 위해 본인의 행복을 포기한 것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다나카는 이런 쓸데없는 가식에 코웃음을 치며 일본의 총리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고 자부했다. 마치 가능성은 있으나 경험이 부족한 학생들에 대해 논하는 선생님과도 같이 총리들을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과 일본 정부 사이의 관계를, 과반의 주식을 소유한 대주주와 회사 경영진 사이의 관계에 비교했다. - P451

1990년 버블이 끝나고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면서 일본 금융계의 썩은 속살이 속속 드러났다. 정계와 금융계의 부적절한 유착관계가 노출되었음은 물론, 특히 정계와 금융계의 최상위 단계에까지 범죄 조직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스캔들과 더불어 지하 범죄세계의 역할이 드러나자, 1955년 체제를 간신히 유지하던 정통성의 마지막 꺼풀이 벗겨지면서 마침내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오직 탁월한 정치인만이 정치인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에너지를 동력 삼아 낡은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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