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중국 지식인이나 청년 · 학생이 (5·4운동기에 성취감을 추동력으로 하여 자발적 조직을 통해 민중과 결합하던 양상과 달리) 민중의 자생적 항의운동과 결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노동자와 학생의 연대의 움직임은 톈안먼사건과 같은 커다란 대중운동으로 발전할까 봐 (문화대혁명의 악몽속에) 엄히 금지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톈안먼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비관적 전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 P328

톈안민사태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작가들의 경험과 기억이 형상화된 중국 현대미술은 역사와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기억이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해서가 아니라 사건이 당사자와 훗날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수용되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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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거행된 공산당 제11기 3회 중앙위 전체회의(12월 18~22일)는 덩샤오핑체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회의였다. 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농업·공업·국방 ·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마오쩌둥의 과오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1978년에서 1981년에 걸쳐 점차 복권시켰다. 바야흐로 개혁·개방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 P281

경제개혁이 진행되면 될수록 국가로부터 고정급을 받는 지식층의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하였다. 당이 공식적으로 지식인을 9개 계층 중 세번째로 인정해 지식층의 독자적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소득과 사회적 지위 간의 불균형이 극심했다. 게다가 전통사회의 지식인과 달리 민중의 지지도 받고 있지 못해 그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니 학생에게 학업동기가 부여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은 교수, 바보 같은 사람은 박사"라는 말이 떠돌았다 한다. - P287

톈안먼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두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소수 분자로 민주라는 가치를이 운동의 목표로 삼은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참여 학생에 해당하는데, 확산되는 시장경제에 적응하기 힘들어한 유형이다. - P289

1980년대 문화담론의 핵심은 계몽과 서구의 재발견이었다. 이른바 게몽주의 지식인이 재등장한 셈이다. 1980년대는 5. 4 시대에 이은 ‘새로운 전면적 서구화‘의 시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서구와 근대화는 하나이고 전통 역시 단일한 봉건적 유물이었다. 그때의 쟁점은 ‘현대화‘ 였다. - P292

개혁정책에 대한 노동자의 비판적 인식은 학생의 인식과 온도차가 생길 수 있다. 학생은 시장을 낡은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혁신적 제도라고 보는 반면, 노동자는 1980년대 들어 시장화 과정을 겪었기에 시장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P323

"(문혁기) 10년의 소란을 겪은 후 사람들이 끊임없는 운동과 투쟁에 대해 극도로 피로감을 느껴 안정과 정상적 생활질서의 회복을 갈망하며 뚜렷한 물질 생활의 개선을 희망하고 있음을" 당시 톈안먼광장의 지도자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6·4 사건이 지난 지 1주일 만에 베이징 주민이 일상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비밀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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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주의사회‘론에 입각한 국가 운영이 적어도 15년간 지속될 것이라는 애초의 약속은 단기간에 폐기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54년 ‘과도기 총노선‘을 공식 채택하여 신민주주의적 실천을 중단하였고, 마오쩌둥은 1956년 사회주의 개조 사업이 결정적으로 승리했음을 톈안먼에 올라 선언하였다. - P221

중공이 추진한 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전정(專政)‘부터 검토해보자.
그것은 인민 내부에 대해서는 민주, 그리고 반동파에 대해서는 독재(專政)를 적용하는 양면성을 가진 정치체제이다. 민주는 인민에게만 적용되는 민주이고, 그 실행의 전제는 ‘비인민‘을 도려내고 그에 대해 ‘독재‘
를 실행하는 것이다. 그 주체는 인민이나 국가가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인민은 주체이자 개조대상이 된다. 정확히 말해 자아를 개조해 혁명표준에 부합하는 민중이 비로소 인민이 되고 혁명정원의 기초를 구성한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란 형식규칙 곧 절차적 민주주의(나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동적 · 피동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 P228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직후 구현된 신민주주의 사회는 반(半)식민지·반(半)봉건사회라는 조건의 제약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긍정하는 혼합경제와 동시에 연합정부를 통해 계급연합의 민주를 발전시켜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기반을 다지는 것을 기본 과제로 삼았다. - P235

일본이 패전하고 중국에서 철수함에 따라 일본 언론은 중국 정보 입수에 심한 제약을 받게 되어 현장취재가 자유로운 구미 언론에 대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방의 입장에서 중공의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기사나 르포가 전해짐으로씨 일본 언론은 전쟁 전에 후진국 중국에 대한 멸시의식을 자신들에게 심어준 일본의 ‘지나통‘ 이나 ‘지나학자‘에게서 벗어날 여건이 생겼다. 게다가 전쟁가해자로서 깊은 속죄의식도 작동하여 ‘신중국‘을 긍정적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다. 심지어 "전후일본의 중국사 연구는 재생일본의 ‘양심의 거점‘ 이라는 도덕적 정당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하며 중국 현실에 밀착하는 경향까지 생겼다. - P241

요컨대 1949년은 일본의 패전, 중국내전 및 미소 냉전이라는 세 겹의 난국 속에서 국제사회에의 복귀를 모색하던 일본이 중국이라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면서 일본 미래의 지향과 연결시키고 그 진로를 둘러싸고 갈등하던 시기였다. - P242

『경향신문』이 1949년에 파견한 중국 현지 특파원인 김병도는 상하이와 광저우 시민의 반응을 취재하여 "중국 5억 인민이 모두 공산주의를 환영은 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며, 결국 중공이 헤게모니를 잡게 된 원인이 "국민당 일당 전제정치의 부패상과 미의 대중원조정책이 너무 애매하였다는 것"에 있다고 분석한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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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공산당에 대한 신임이 (적어도 건국 초기에) 높지 않은 점은 확인된다. 군중들은 공산당 간부에 대해 과거 국민당의 경찰이나 법원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공산당이 표방한 신민주주의사회 초기의 관대한 정책을 오히러 두려워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즉 군중운동을 통해 ‘나쁜 사람‘과의 투쟁에 나서게 되었지만, 공산당이 그들을 쉽게 석방해버림으로써 그들이 다시 나와 보복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이른바 군중 속의 ‘세상이 오래지 않아 변하리라는 생각‘이 적극적 참여를 제어하는 요소였다. - P190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면서 중국사회는 신민주주의사회로 접어들었는데 그 핵심을 간단하게 말하면, 공산당의 지도 아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노선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정치 면에서는 공산당 지도하에 각 민주당과와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인민민주통일전선, 곧 연합정부론이다. 경제 면에서는 생산력 발전을 핵심으로 하되 국영경제 부문의 주도하에 각종 부문이 병존하여 공동 발전하고 공과 사를 모두 고려하며 노동과 자본에 모두 이익이 되면서 도시와 농촌이 서로 돕는 것 곧 혼합경제론이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민족적이고 과학적이며 대중적인 문화와 교육의 발전, 곧 신민주주의문화론이다. - P198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건국 초기 건립된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체제 속의 ‘연합집정‘ 기록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1954년의 헌법은 민주적 협상의 느낌이 약간 남아 있던 연합정부를 당국체제로 재편한 정치체제의 전환을 보여준다. - P207

군중운동은 사회 각 부문, 공작 단웨이, 가정, 심지어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과 내면세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에 힘입어 이들은 구미 열강이 중국을 침략해 안겨준 굴욕과 좌절감을 청산하고 민족과 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증강시킬 수 있었고, 이와 더불어 광범위한 사회동원과 교육운동을 통해 신정권과의 일체감을 높였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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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 톈안먼집회가 지니고 있던, 베이징정부의 정당성을 비판하던 장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고, 원래의 축제 형식이 갓 수립된 정치권력을 경축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게 되었다. - P136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소련은 중공이 중국 전역을 장악할 전망이 보이자 그때가 되어서야 중공을 명백히 지지했으며, 중공도 소련의 주도적 위치를 본격적으로 강조한 것은 1948년 11월이고, ‘소련 일변도‘ 정책을 선언한 것은 1949년 6월이다. 건국에 필요한 소련의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었다. - P139

공산당이 추진한 사회개혁(근거지에서의 ‘토지개혁‘과민주적 정책)이 중시되면서 그것이 항일민족주의와 결합하였음이 곧잘 중시된다. 즉 공산당은 중일전쟁과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온 중국사회의 내재적 위기 상황에서 대중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동원하고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여, 최종적으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 P143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하자, 이에 대응해 중공은 독자적인 무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홍군을 건설했다. 그에 힘입어 1927년 8월 1일 장시성 난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었다. (공산당의 첫 군사봉기여서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봉기는국민당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로 그쳤다. 그 이후, 공산당은 후베이와 후난에서 가을 수확기를 맞은 농민이 수확을 확보하기 위해 호응할 것을 기대하고 또다시 농민폭동을 일으켰다(이른바 추수봉기). 이 역시 좌절했다.
마오는 패잔부대 이끌고, 장시성과 후난성 경계에 위치한 산악지대인 징강산에 들어가, 홍군이라는 군사력에 의존해 ‘농촌혁명근거지‘를 세웠다. 이것은 마오와 주더 등이 주도한 농촌을 거점으로 삼은 혁명전략으로 중공 전략의 방향 전환을 상징했다. 공산당은 곳곳에서 홍군의 게릴라전에 힘입어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정책을 실시했다. - P152

항일전기 공산당의 토지정책의 목적은 감조감식을추진해 지주의 이익을 줄이고 농민에게 그 이득을 주는 개혁이었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계급혁명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공격목표도 소작료문제나 지주의 경제착취가 아니라 관청의 악폐나 폭력징수였다. 국민정부의 지원이 줄자 공산당이 농민의 조세부담을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의 부패에 비하면 공산당은 청렴해서 통치비용이 적었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 P157

중공은 결국 농민의 소극적 반응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선전과 교육을 통해 농민들을 의식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공이 농민을 동원해 토지개혁을 적극 추진한 성과를 일컬어 농민해방, 곧 ‘번신‘이라고 한다. 토지개혁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번신의 일차적 의미는 "지주의 족쇄를 깨고 토지 · 목축 · 농구 및 가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공으로서는 번신이 최종 목적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 해방‘ (‘번심‘)이었다. 즉 농민들이 자기 빈곤의 근원이 착취를 당한 데 있음을 꿰뚫어보고 지주에 대한 복수심리를 일으키며 고통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그 원한을 공산당의 군사적·정치적 적대자인 국민당으로 돌리도록 하는 것, 곧 죄의 귀착지를 찾는 책략이었다. 농민의 고통과 지주계급 및 그 대리자인 국민당을 하나로 연결시켜 그로부터 당한 고통을 농민들이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곧 행동(투쟁)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 P160

공산당이 장시 시기 (1928~34)와 그에 이은 옌안을 가는 장정 도중에 ‘감정공작‘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았다면, 항전 시기(1937~45)에 그들은 이러한 경험의 교훈을 제대로 흡수해 ‘감정공작‘을 아주 잘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지개혁이 전쟁 시기 근거지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었기에, 세심하게 짜여진 비판투쟁대회의 일정을 통해 농민은 비로소 무엇이 토지개혁인지 인식했다. 감정을 동원해 공산당의 혁명목적을 실현하는 토지개혁은 일종의 대중화된 연극 공연이나 다름없었다. - P162

토지개혁믄 명확한 절차, 규정, 통제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기보다는 불합리한 계급구분과 폭력이 구사된 무질서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양쿠이쑹은 토지개혁에 적용된 착취의 기준과 획일적 계급구분 방식은 농촌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토지개혁에 대한 당 중앙의 최대 관심은 "토지 재산의 분배였다기보다는 농민 군중을 동원하여 구세력을 일소하고 신정권의 영도 권위를세우는 것"에 있었다고 본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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