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거행된 공산당 제11기 3회 중앙위 전체회의(12월 18~22일)는 덩샤오핑체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역사적 회의였다. 공산당은 개혁·개방을 선언하고 농업·공업·국방 ·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에서 마오쩌둥의 과오를 부분적으로 인정하였으며,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1978년에서 1981년에 걸쳐 점차 복권시켰다. 바야흐로 개혁·개방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 P281

경제개혁이 진행되면 될수록 국가로부터 고정급을 받는 지식층의 경제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하였다. 당이 공식적으로 지식인을 9개 계층 중 세번째로 인정해 지식층의 독자적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했지만 소득과 사회적 지위 간의 불균형이 극심했다. 게다가 전통사회의 지식인과 달리 민중의 지지도 받고 있지 못해 그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그러니 학생에게 학업동기가 부여되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난한 사람은 교수, 바보 같은 사람은 박사"라는 말이 떠돌았다 한다. - P287

톈안먼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두 유형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소수 분자로 민주라는 가치를이 운동의 목표로 삼은 유형이다. 다른 하나는 대부분의 참여 학생에 해당하는데, 확산되는 시장경제에 적응하기 힘들어한 유형이다. - P289

1980년대 문화담론의 핵심은 계몽과 서구의 재발견이었다. 이른바 게몽주의 지식인이 재등장한 셈이다. 1980년대는 5. 4 시대에 이은 ‘새로운 전면적 서구화‘의 시대가 되었다. 그들에게 서구와 근대화는 하나이고 전통 역시 단일한 봉건적 유물이었다. 그때의 쟁점은 ‘현대화‘ 였다. - P292

개혁정책에 대한 노동자의 비판적 인식은 학생의 인식과 온도차가 생길 수 있다. 학생은 시장을 낡은 체제를 개혁할 수 있는 혁신적 제도라고 보는 반면, 노동자는 1980년대 들어 시장화 과정을 겪었기에 시장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 P323

"(문혁기) 10년의 소란을 겪은 후 사람들이 끊임없는 운동과 투쟁에 대해 극도로 피로감을 느껴 안정과 정상적 생활질서의 회복을 갈망하며 뚜렷한 물질 생활의 개선을 희망하고 있음을" 당시 톈안먼광장의 지도자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6·4 사건이 지난 지 1주일 만에 베이징 주민이 일상으로 돌아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비밀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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