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톈안먼집회가 지니고 있던, 베이징정부의 정당성을 비판하던 장으로서의 역할이 사라지고, 원래의 축제 형식이 갓 수립된 정치권력을 경축하는 새로운 내용을 담게 되었다. - P136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소련은 중공이 중국 전역을 장악할 전망이 보이자 그때가 되어서야 중공을 명백히 지지했으며, 중공도 소련의 주도적 위치를 본격적으로 강조한 것은 1948년 11월이고, ‘소련 일변도‘ 정책을 선언한 것은 1949년 6월이다. 건국에 필요한 소련의 지원을 획득하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었다. - P139

공산당이 추진한 사회개혁(근거지에서의 ‘토지개혁‘과민주적 정책)이 중시되면서 그것이 항일민족주의와 결합하였음이 곧잘 중시된다. 즉 공산당은 중일전쟁과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어온 중국사회의 내재적 위기 상황에서 대중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동원하고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여, 최종적으로 군사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 P143

1927년 제1차 국공합작이 붕괴하자, 이에 대응해 중공은 독자적인 무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홍군을 건설했다. 그에 힘입어 1927년 8월 1일 장시성 난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있었다. (공산당의 첫 군사봉기여서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 봉기는국민당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로 그쳤다. 그 이후, 공산당은 후베이와 후난에서 가을 수확기를 맞은 농민이 수확을 확보하기 위해 호응할 것을 기대하고 또다시 농민폭동을 일으켰다(이른바 추수봉기). 이 역시 좌절했다.
마오는 패잔부대 이끌고, 장시성과 후난성 경계에 위치한 산악지대인 징강산에 들어가, 홍군이라는 군사력에 의존해 ‘농촌혁명근거지‘를 세웠다. 이것은 마오와 주더 등이 주도한 농촌을 거점으로 삼은 혁명전략으로 중공 전략의 방향 전환을 상징했다. 공산당은 곳곳에서 홍군의 게릴라전에 힘입어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가난한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정책을 실시했다. - P152

항일전기 공산당의 토지정책의 목적은 감조감식을추진해 지주의 이익을 줄이고 농민에게 그 이득을 주는 개혁이었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계급혁명은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공격목표도 소작료문제나 지주의 경제착취가 아니라 관청의 악폐나 폭력징수였다. 국민정부의 지원이 줄자 공산당이 농민의 조세부담을 대폭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공산당을 지지한 이유는 국민당의 부패에 비하면 공산당은 청렴해서 통치비용이 적었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 P157

중공은 결국 농민의 소극적 반응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선전과 교육을 통해 농민들을 의식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중공이 농민을 동원해 토지개혁을 적극 추진한 성과를 일컬어 농민해방, 곧 ‘번신‘이라고 한다. 토지개혁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번신의 일차적 의미는 "지주의 족쇄를 깨고 토지 · 목축 · 농구 및 가옥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공으로서는 번신이 최종 목적이 아니고 더 중요한 것은 ‘심리적 해방‘ (‘번심‘)이었다. 즉 농민들이 자기 빈곤의 근원이 착취를 당한 데 있음을 꿰뚫어보고 지주에 대한 복수심리를 일으키며 고통의 근원을 파고들어가 그 원한을 공산당의 군사적·정치적 적대자인 국민당으로 돌리도록 하는 것, 곧 죄의 귀착지를 찾는 책략이었다. 농민의 고통과 지주계급 및 그 대리자인 국민당을 하나로 연결시켜 그로부터 당한 고통을 농민들이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곧 행동(투쟁)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 P160

공산당이 장시 시기 (1928~34)와 그에 이은 옌안을 가는 장정 도중에 ‘감정공작‘의 중요성을 비로소 깨달았다면, 항전 시기(1937~45)에 그들은 이러한 경험의 교훈을 제대로 흡수해 ‘감정공작‘을 아주 잘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지개혁이 전쟁 시기 근거지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관건이었기에, 세심하게 짜여진 비판투쟁대회의 일정을 통해 농민은 비로소 무엇이 토지개혁인지 인식했다. 감정을 동원해 공산당의 혁명목적을 실현하는 토지개혁은 일종의 대중화된 연극 공연이나 다름없었다. - P162

토지개혁믄 명확한 절차, 규정, 통제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기보다는 불합리한 계급구분과 폭력이 구사된 무질서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양쿠이쑹은 토지개혁에 적용된 착취의 기준과 획일적 계급구분 방식은 농촌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토지개혁에 대한 당 중앙의 최대 관심은 "토지 재산의 분배였다기보다는 농민 군중을 동원하여 구세력을 일소하고 신정권의 영도 권위를세우는 것"에 있었다고 본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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