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책장에 꽂아 두는 ‘쓸데없는 일‘을 하는 것일까요? 그 일이 의무처럼 관념화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 제 가설인데, 이유인즉 이렇습니다. 그 나름의 사회적 성공을 거두고 넓은 서재와 응접실을 갖춘 집에 살게 된 사람에게는 ‘자신이 읽지 않은 책에 둘러싸여 만년을 보낼 의무‘가 부과된 것입니다. 그런 암묵적 규칙이 있을 겁니다.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은 ‘가시화된 자신의 무지‘이기 때문이죠. - P150

기시감을 갖고 책을 읽을 때 우리는 ‘다름 아닌 지금 이 책을 읽을 것이 먼 옛날부터 숙명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감각에 사로잡히지요. 그것은 가장 행복한 독서 체험입니다. ‘문자 읽기‘란 아마도 그런 것일 겁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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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의 탄탄한 층이란 책에 관여한 모든 사람이 절실히 바랄 만할 일입니다. 예를 들면 도서관은 살아 있는 독서인 층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 장치 때문에 ‘자신에게 들어와야 했던‘ 얼마간의 인세가 줄어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작가가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 P139

책장에 어떤 책을 어떻게 꽂느냐 하는 문제에는 수행적인 목적이 동반됩니다. 저는 결코 산 순서대로 꽂아 둔다든지, 저자명을 알파벳순으로 분류해 꽂아 두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기묘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책을 사서 순서대로 꽂는 특이한 사람으로 여겨 달라‘는 욕망에 지배되고 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 P141

인간은 자신이 달성한 일에 관해 종종 ‘바람‘과 ‘사실‘을 혼동합니다. 똑같은 일이 책장에서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자주 경험하는 일인데요. 우리 집에 와서 제 책장을 본 사람들은 제가 거기에 있는 책을 전부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하죠. 설마 그럴 리가요.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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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대학 입학시험이 재개되었는데, 10년 동안 놓친 기회를 보상해주기 위해 응시 연령 제한을 37세로 상향했다. 역사상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 시험에 약 600만 명이 응시해 5퍼센트만이 대학에 합격했다. 이 ‘77학번‘은 여전히 주목할 만한 인구 집단으로 여겨진다. - P187

하지만 비판자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문화대혁명은 비판하면서 대약진운동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당이 1957년의 반우파투쟁을 부인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혁명 자체를 부인하기를 원했다. 당과 국가 지도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삶이 나아진 노동자들부터 심한 고초를 겪은 지식인들까지 모든 중국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중국은 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과거를 다루는 데 (다른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불만을 야기할 만한 여러 제한을 두었다.
이런 제한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이 보낸 신호는 분명했다. 중국공산당은 다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마오쩌둥과 4인방에게 최대한 많은 책임을 전가한 뒤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를 바라보자‘고 촉구한 것이다. - P191

6월 4일 베이징 대학살 이후 당은 정치적 장악력을 회복하더니 문화대혁명을 이전보다 가볍게 대중적으로 다룰 수 있게 했고, 행복했던 시절로 문화대혁명을 기억하는 전례없는 향수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 P196

중국은 문화대혁녕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가 커질수록 좋든 나쁘든 마오쩌둥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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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상징했으며, 문화대혁명은 사회공학에서의 대담한 실험처럼 보였다. 서구에서 마오쩌둥에 열광한 사람들은 중국이 서구 자본주의나 소비에트의 하향식 계획경제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시위대는 홍위병의 에너지에 감탄했고,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는 마오쩌둥주의의 슬로건을 차용했다.(중략) 계급투쟁, 사회주의의 의미, 혁명운동의 미래 등 문화대혁명의 이슈는 중국 밖에서는 꽤 원대하게 보였다. 하지만 중국 내부를 들여다보면 근저에 있는 현실적인 문제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 문제와 흡사했는데, 쌓여가는 불만, 불만을 분출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거래와 같은 것들 등이다. - P155

많은 서양인들은 중국이 세계혁명의 요체가 되기를 기대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중국을 단순하게 불평등으로 갈라진 현실세계에서 일종의 도덕적 힘으로 보았다. - P157

1970년까지 베트남, 북한, 파키스탄, 알제리, 알바니아를 제외한 중국에 우호적인 정부는 소수에 불과했다. 중국은 각국의 정부보다는 세계 ‘인민‘들의 사랑에 의존했지만 인민은 군대나 무역을 통제하지는 않는다. - P167

그 모든 실책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이후 이어진 급속한 성장에 없어서는 안 될 물리적인 공장시설과 인적자원을 구축했다. 자국을 현대 세계로 이끌고, 문맹을 근절하고, 만성질환을 퇴치하고, 산업화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한 혁명가들의 공헌을 깎아내리는 것은 비뚤어진 심보이다. 마오쩌둥주의 중국의 차고 넘치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경제 호황은 국가적·사회적 해방을 포함한 중국의 성과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이 경제 분야에서 좀더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문화대혁명을 중국의 발전에서 잃어버린 10년으로만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에야 이전에는 없었던 더 큰 국제적인 기회를 발견했다. 중국과 세계자본주의의 경제적 재통합은 세계자본주의가 중국의 방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할 때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조건은 1960년대 중반의 소규모 세계경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 P177

개혁 프로그램이 경제를 아무리 자유화했다고 하더라도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본주의에게 나라의 문을 활짝 연 순진한 개방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국가가 주도한 모험이었다. 문화대혁명을 포함한 중국의 혁명은 중국이 더 넓은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장기적으로 중국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중국이 돈을 받고 세계자본주의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고도로 계산된 전략이었으며, 초기 마오쩌둥주의자들이 정치 캠페인을 동원해가며 이러한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려고 했던 노력과 매우 비슷하다. - P178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중국이 파산한 미국의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를 구제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때 혁명의 배후 지원자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중국이 세계자본주의가 세계에서 안심하고 번성할 수 있게 만드는 중국이 된 것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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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갱생‘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경제를 이끈 슬로건으로, 중국이라는 나라의 고립된 처지와 경제발전 전략으로 부족한 자본을 풍부한 노동력으로 대체하려던 마오쩌둥주의의 욕망을 모두 반영한 말이다. - P118

중국은 가난했다. 1978년 1인당 국민소득은 2010년 달러기준으로 859 달러였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평등했다. 혁명은 가장 사치스럽게 살던 계급을 제거함으로써 부의 격차를 줄였다.(중략)
문화대혁명은 평등주의를 강화시켰다. 홍위병의 ‘부르주아‘ 생활방식에 대한 공격은 기존의 국가정책을 강조했을 뿐이다. 자영업자를 반복적으로 규제한 결과,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소비재가 심각하게 부족해졌다. - P119

재화와 서비스에 더욱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 이제는 부(富)를 대신해서 관료적 직위가 되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들이 누리는 사치품을제외하고는 관료 특권의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전통적으로 사대부들이 긴 손톱과 긴 가운을 입고 육체노동을 면제받는 것을 과시하던 이 땅에서 육체노동이 찬양받았다. - P120

사회주의는 소비에서 평등주의를 위한 체제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생산 증대를 위한 동력이어야 하는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기는 어렵다. 사회주의 정부는 이러한 긴장을 해소하거나 최소한 모호하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중국이 아직은 평등주의적 빈곤만을 달성할 수 있는 사회라고 인식하고 개인의 내핍과 검박한 소비를 이상으로 치켜세우면서 더 많은 공공투자를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그런데 문화혁명주의자들은 종종 이러한 투자를 비효율적으로 배분했다. - P121

유토피아주의와 실용주의의 이분법은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은 겉보기에 무엇이든 평등주의적이었지만 끈질기게 발전주의적 의제를 유지했다. - P122

문화대혁명은 경제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주의의 급진파는 대중매체, 문화, 선전 부문에 대해서는 확고하게 장악했지만 생산을 감독하는 부처에 대한 통제력은 약했다. - P124

‘자력갱생‘은 마오쩌둥주의의 많은 프로그램이 그렇듯이 가난하고 외진 북서부에 위치한 항전 시기 공산주의 혁명의 수도 옌안의 유산을 이어받았다.(중략) 이제 옌안의 이상은 전국적인 규모로 더욱 정교하게 중화인민공화국에 적용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주의시대의 ‘자력갱생‘은 갑작스러운 대외원조 중단에 대한 적응이기도 했다. 1960년 중소분쟁이 격화되자 모스크바는 갑자기 (중국에 파견했던) 6,000명의 고문들을 본국으로 소환했고, 진행중이던 156개의 대형 경제 프로젝트의 작업이 중지되었다. 구소련의 고문들은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가지고 귀국해버렸다. 그렇게 자력갱생은 중국의 유일한 현실적인 진로가 되었다. - P126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선언을 혁명적 수사학으로 포장하면서 사회주의가 아니면 무조건 자본주의라는 식으로 암시했다. 그러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충돌은 최근의 평론가들이 아무리 그러길 바란다고 해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결전이 결코 아니었다. - P127

한편 문화대혁명의 수사학은 순수한 혁명적 의지가 물질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다는, 하늘을 찌르는 전투적인 스타일을 수용했다. - P128

각종 모범 사례가 문화대혁명의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다면 도시 시민에 대한 사회통제의 기본 요소는 그들의 노동 단위, 즉 그들을 고용하는 직장과 공장이었다. 직장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주택 보조, 의료, 연금, 학교, 휴가, 오락, 버스표 및 기타 서비스 등을 제공했다. 직장이 이처럼 방대한 범위의 필수 서비스를 제공했으므로 노동자의 직장에 대한 의존성이 높았던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 P132

마오쩌둥주의의 평등주의적 운동은 중국 사회의 지속적인 물질적 불평등을 제거할 수 없었다. 그중 일부는 지역적 불평등이었다.(중략)
또다른 고질적인 불평등은 농민과 도시 노동자를 나누는 ‘만리장성‘이었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으려면 도시 호적에 등록해야 했다. 인구의 5분의 4가 농촌에 거주했고, 농민들은사실상 시골에 갇혀 살아야 했다. - P133

마오쩌둥주의자들조차 농민의 지위를 바람직한 수준으로 높이지는 못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노동자와 군인의 일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두 직업 중 어느 하나를 얻게 되면 농장 노동을 면할 수 있도록 보호받을 수 있었으므로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신종의 사회적 지위 상승을 의미했다. - P136

중국은 농촌생활을 순수하고목가적인 것으로 이상화하면서도 실제 농민은 경멸하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친농민적이었지만 공산당이 농민 혁명가들에게 진 막대한 빚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시의 속물근성을 피할 수는 없었다. - P137

가장 큰 경제적인 성공은 중국의 인적자본을 향상시킨 점이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가능한 한 풍부한 노동력으로 부족한 자본을 대체했는데, 그들은 노동자의 건강과 교육을 개선하고 더 많은 여성들을 일터로 끌어들임으로써 이러한 접근법을 확대했다 - P138

약 200만 명의 농민들이 야심찬 농촌 준의료 네트워크에서 ‘맨발의 의사‘로 훈련받았다. 이 맨발의 의사들은 특별히 장비를 잘 갖추고 있거나 의술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났으며 거의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는 이전 시기 동안 크게 증가한 농촌 의료서비스에서 가장 칭송받은 부문이었다. - P139

교육 분야에서 이룬 유사한 성과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1964년 중국의 성인 문해율 (15세 이상)은 43퍼센트였으나 1982년에는 65퍼센트로 증가했다.(중략) 중국의 문해력이 급격히 증가한 것은 1965년에서 1976년 사이에 농촌 중학교가 전례없이 15배나 증가했기 때문이다. - P141

1972년부터 1976년까지 대학은 신입생을 국가 입학시험으로 선발하는 대신 지방 관리들이 지원자의 가족 배경과 직장 성과를 바탕으로 후보자를 추천하면 등록시켰다. - P142

기본적인 보건과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노동력의 질이 향상되었고, 여성의 유급 고용이 확대되면서 노동력의 규모가 커졌다. 문화대혁명은 "여성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친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인 성차별적 고용 장벽에 맞서 싸웠다. 도시에서는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노동 인구에 합류했다. - P143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덩샤오핑의 개혁은 의, 식, 연료, 교육, 장례식 등 ‘5대보장‘을 포함한 중국 농촌의 집단 농업, 교육, 보건, 사회 시스템을 폐지했다. 스스로 해결하도록 남겨진 농촌 가정은 다시자녀를 일종의 노후 보장 시스템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는 인구 증가를 제한하기 위해 더욱 가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포스트 문화대혁명 정책의 부담을 떠안았으며, 국영산업이 폐쇄되면서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다. 이 두 ‘개혁‘은 모두 장칭에 대한 공격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여성 혐오의 색채가 강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시기에 이루었던 여성 문제에서의 진척은 후퇴했다. - P146

자력갱생에는 친환경적인 측면이 있다. 가난은 낭비를 하지 못하게 만들고, 지역 상품의 소비는 수송에 따른 오염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끊임없는 개발 의제는 환경에 악영향을 미쳤다. 자력갱생은 환경적으로 곡물 재배가 유해한 지역까지 포함해 모든 지역사회에 무조건 곡물을 재배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 P147

이처럼 방어적이고 때로는 편집증적이기까지 한 모습은 문화대혁명의 경제정책에 만연해 있었다. 자력갱생은 외세의 침략에 대한 현실적인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때 중국공산당은 시민들에게 "땅굴을 깊게 파고 곡물을 곳곳에 저장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중국의 운송 시스템에 대한 구소련의 공격을 견디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 P149

삼선건설의 종식과 함께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지지를 얻어 경제정책의 대전환을 주도했는데, 서방에서 11개의 대규모 비료 공장을 수입(플랜트수입)하기로 한 것이 대표적이다. 저우언라이가 ‘4대 현대화‘를 선언한 연설은 문화대혁명 말기의 모험적인 시도였다. 마오쩌둥에서 덩샤오핑으로의 경제 전환은 문화대혁명 이후가 아니라 문화대혁명 기간중에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마오쩌둥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다기보다는 점진적인 거부였다고 할 수 있다. - P149

마오쩌둥주의의 발전이 없었다면 덩샤오핑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다. 덩샤오핑 경제개혁의 토대가 된 문화대혁명의 성과에는 높아진 문해율과 개선된 보건, 다수확 쌀 품종, 마오쩌둥주의의 노동 동원으로 건설된 관개 및 수송 프로젝트 등이 있다. 공업 인프라는 종종 비효율적으로 구축되었지만 문화대혁명 이후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유산을 제공했다. 덩샤오핑은 외채로부터 자유로운 경제를 물려받았다. - P150

개혁이 실제로 1978년이 아닌 1971년에 시작되었는지를 묻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다. 덩샤오핑이 1978년이라는 연도를 고집한 이유는 시장 개혁으로 전환하면서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일부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대혁명 10년 동안의 모든 정책을 (자신이 시행한 정책까지 포함하여) 나쁘게 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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