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대학 입학시험이 재개되었는데, 10년 동안 놓친 기회를 보상해주기 위해 응시 연령 제한을 37세로 상향했다. 역사상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이 시험에 약 600만 명이 응시해 5퍼센트만이 대학에 합격했다. 이 ‘77학번‘은 여전히 주목할 만한 인구 집단으로 여겨진다. - P187

하지만 비판자들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문화대혁명은 비판하면서 대약진운동은 왜 비판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당이 1957년의 반우파투쟁을 부인하기를 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혁명 자체를 부인하기를 원했다. 당과 국가 지도자들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삶이 나아진 노동자들부터 심한 고초를 겪은 지식인들까지 모든 중국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결국 중국은 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과거를 다루는 데 (다른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불만을 야기할 만한 여러 제한을 두었다.
이런 제한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이 보낸 신호는 분명했다. 중국공산당은 다소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마오쩌둥과 4인방에게 최대한 많은 책임을 전가한 뒤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를 바라보자‘고 촉구한 것이다. - P191

6월 4일 베이징 대학살 이후 당은 정치적 장악력을 회복하더니 문화대혁명을 이전보다 가볍게 대중적으로 다룰 수 있게 했고, 행복했던 시절로 문화대혁명을 기억하는 전례없는 향수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 P196

중국은 문화대혁녕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가 커질수록 좋든 나쁘든 마오쩌둥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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