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라_ 오탈자가 생각보다 좀 많은;;;

칸트의 철학은 흔히 초월론적 [transzendental]-이는 초월적[transzendent]과는 구별된다-이라고 한다. 알기 쉽게 말해 초월론적 태도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즉 경험에 선행하는 형식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처음부터 그러한 반성적 태도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철학이란 그런 반성에 의해 오류나 가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칸트는 어떤 부분에서 다를까? 칸트 이전에는 가상이란 감각에 근거해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이성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칸트가 문제 삼은 것은이성 자신의 욕동에 의해 생겨나는 가상, 그러므로 단순한 반성으로는 제거될 수 없는 가상, 즉 초월론적 가상이었다.
따라서 칸트의 반성이란 프로이트가 철학적 반성에 관해 지적한 것처럼 표층적인 것일 수 없다. 프로이트가 생각하기에 ‘무의식‘이란 분석자와 피분석자의 관계, 특히 피분석자의 저항에만 존재한다. 타자 없이 이루어지는 한 사람만의 내성省에서는 그런 무의식이 드러날 수 없다. 칸트는 곧잘 주관성의 철학자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반성에는오히려 ‘타자‘가 개재되어 있었다. - P23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의 비판이 항상 ‘이동‘과 그 결과인 ‘강한 시차‘에서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칸트가 발견한 ‘강한 시차‘는 그의 주관주의를 비판하고 객관성을 강조한 헤겔에 의해 지워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발견한 ‘강한 시차‘는 엥겔스나 마르크스주의자에 의해 지워지고 말았다. 그 결과 견고한 체계를 쌓아올린 칸트나 마르크스라는 이미지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으면그와 같은 이미지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칸트나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이동‘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담론체계로의 이동이야말로 ‘강한 시차‘를 가져온다. 망명자였던 마르크스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그는 공간작으로는 전혀 이동하지 않았지만 이동을 향한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그리고 코즈모폴리턴이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망명자일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사이‘에서 초월론적인 비판을 수행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시령자의 꿈』과 같은 기묘하게 자학적인 에세이를 보면, 칸트가 단순히 ‘사이‘에서 사고했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칸트도 독단적인 합리론에 맞서서는 경험론으로 대항하고 독단적인 경험론에 맞서서는 합리론적으로 대항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이동에 칸트의 ’비판‘이 있다. ‘초월론적인 비판‘이란 어떤 안정된 제3자의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트랜스버셜한(횡단적인), 또는 트랜스포지셔널한(전위적位的인) 이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 P27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이 물욕이나 진보를 향한 신앙에 의거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생각을 바꾸어 합리적으로 컨트롤할 수있을 것처럼, 혹은 자본주의를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자본의 ‘욕동‘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멈추는 게 아니다. 이성적인 억제, 국가적인 강제에 의해 멈추는 것도 아니다. 『자본론』에 혁명의 필연성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다. 우노 고조가 올바로 지적한것처럼 『자본론』은 공황의 필연성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리고 공황은 자본제 경제의 고유한 질병이지만 자본제 경제가 영속적으로 발전해가는 메커니즘의 일환이기도 하다. 자본제 경제는 공황을 제거할 순 없지만 그로 인해 소멸할리도 없다. 자본제 경제는 환경론자가 말하듯이 장래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본제 경제가 끝날 리는 없다. 나아가 향후 상품화가 한층 철저하게 진행되었을 때, 그 극한에서 그런 진행이 반전되어 자본제 경제가 끝날 가능성도 없다.
이럴 경우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일은 국가의 규제다. - P37

그는 이렇게 쓴다. "만약 연합한 협동조합조직 단체들(united cooperative societies)이 공동의 계획에 기초하여 전국적인 생산을 조정하고, 그렇게 그것을 여러 단체의 컨트롤 아래에 둠으로써 자본제 생산의 숙명인 끊임없는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 변동을 끝낼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 바로 그것이야말로 공산주의 [코뮤니즘], ‘가능한‘ 공산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프랑스 내전』) 이런 협동조합의 어소시에이션은 로버트 오언 이래의 유토피안들이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것이다. 『자본론』에서 마르크스도 그것을 주식회사와 나란히 고찰하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식회사가 자본제 내부에서의 ‘소극적인 지양‘이라고 한다면 어소시에이션은 ‘적극적인 지양‘이라고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코뮤니즘이란 근본적으로 어소시에셔니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그것의 ‘한계‘를 보고 있었다. 자본과의 경쟁에 노출되어 패배하거나 스스로 주식회사로 바뀌게 될 운명이었다. - P44

그람시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계급적 봉기를 기대했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다양한 문화적 헤게모니를 발견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과정을 자본이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통과정으로서 파악하는 일, 그리고 그 유통과정을 노동자가 주체적일 수 있는 ‘장(position)‘으로서 다시 파악하는 일이다. - P51

마찬가지로 칸트는 경험론처럼 감각에서 출발하는가 합리론처럼 사유에서 출발하는가라는 대립을 벗어나고 있다. 그가 가져온 것은 감성의 형식이나 지성의 카테고리 같은, 의식되지 않는,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초월론적인 구조이다. 감성이나 지성이라는 말은 옛날부터 있었다. 그것은 ‘느낀다‘거나 ‘생각한다‘는 활동을 개념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것들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고 있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에게서 지구나 태양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떤 구조의 항으로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다.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감성이나 지성 같은 말을 특별히 그대로 사용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제시한 초월론적인 구조이다. 그리고 그 구조는 칸트의 언어를 포기할지라도 다른 형태로 발견될 것이다. 그 한 가지 사례를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찾을 수 있다. 토머스 쿤은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관해 말하면서 정신분석을 언급하고 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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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7-05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사람... 칸트도 놀라운데....... 가라타니 고진? 뭘 갈아타요?..... 이 사람도 유명한 사람 맞쥬?ㅋㅋㅋㅋ 칸트라니.. 에잇 칸트라니....

수이 2024-07-07 21:40   좋아요 0 | URL
친구분들과 좋은 시간 잘 보내셨습니까? 다음주에도 비 어지간히 내린다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