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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이다. 날이 춥지만 오늘은 단단하게 여미고 밖으로 나갔다 오려고 한다. 어제도 죽을 먹었고 오늘 남은 죽을 아침에 데펴서 먹었다. 아이는 싫어했다. 온종일 죽만 먹으니까 싫어! 하고 딱 다섯 숟가락 먹고 갔는데 아 그냥 더 열 숟가락 퍽퍽 퍼먹고 가면 얼마나 좋은가 싶었지만 그냥 사과만 먹는 걸 허락했다. 술을 많이 퍼마시고 다니던 시절에는 죽집에 가서 죽을 많이 먹었다. 내 몸은 술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 소화기관 역시 약하기 그지 없다. 조금만 질기고 조금만 역한 걸 먹으면 어린 시절에도 심하게 배앓이를 하며 끙끙 앓았다. 신경줄이 예민해서 큰일이라고 나를 키워준 할머니들은 말씀하시곤 했다. 이 험한 세상에 신경줄이 예민하면 좋지 않다고. 할머니들보다 더 직설적인 우리 엄마는 승질머리가 개 같아서_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개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승질머리가 개 같아서 그런가. 지나가는 개들을 보면 안녕 귀여운 멍뭉아, 라고 이제는 말이라도 건넬 태세다. 못 마시는 술을 미친듯 퍼마시던 때, 본죽 말고 할머니들이 이모님들이 하시는 죽집을 골라서 가곤 했다. 그 죽을 먹고 있노라면 행복해서 때때로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대체 이 아름다운 음식은 누가 발명했단 말인가 하고. 광화문 뒷편에 할머니 두 분이서 하시는 죽집이 있었다. 공간도 협소했고 환기도 잘 되지 않았지만 항상 밥때가 되면 직장인들이 줄을 서서 먹던 곳. 그 죽집의 모든 메뉴를 섭렵했다. 밥때 줄 서는 거 싫어해서 그 전이나 그 후에 가곤 했다. 뭔가 살기가 싫어지는구나 그런 마음이 들 때도 그곳을 찾곤 했다. 어머님들이 해주시는 뜨끈한 죽 한 사발을 다 먹고나면 온몸에서 기운이 넘쳐 흘렀다. 연로하셔서 언제 문이 닫힐까 걱정이 되었는데 다닌지 채 2년도 되지 않아 가게 문은 닫혔다. 공간이 사라져 괴롭고 슬퍼서 그 닫힌 가게 앞에서 영업 종료_라고 커다랗고 굵은 매직펜으로 대충 휘갈겨쓴 문구를 바라보며 그 앞에서 오래도록 담배 한대를 폈다. 어머님들이 건강하시기를 빌었고 만일 소천하셨다면 좋은 곳으로 가셨으면 싶은 마음을 담아 향에 불을 켜고 제단 앞에 놓듯 그렇게 그 앞에서 오래도록 담배를 폈다. 종로2가의 지하 재즈 카페 엘르 다음으로 그냥 상호명도 없이 죽집_이라고 쓰인 그 공간에서 얼마나 수많은 위로를 얻었는지 모른다. 사람이 낯선 사람에게 무언가를 건네줄 경우가 생긴다면 거기에 마음이 일부나마 담겨 있다면 좋은 일이로구나 그걸 깨달았다. 천명관의 고래를 이미 읽은 이들은 단톡방에서 기괴하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다. 그 기괴함이 인간 얼굴의 한 면모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타이핑을 치다가 딜리트 버튼을 눌러 문장을 올리지 않았다. 천명관의 고래를 다 읽고난 후 너무 좋아서 오빠를 졸라 천 작가님 한 번만 만나게 해주라 아무리 졸라대도 오빠는 못 만나게 했다. 나빴네, 흥! 삐쳤던 20년 전의 내가 보이는 것 같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독서가 취미라고 시간만 나면 책을 읽는다고 우리집에는 책이 많다고 넘쳐서 속갈이해주듯 한 번씩 내다버린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들을 보면 어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그냥 가만히 침묵한다. 책에 미친 인간들 사이에 뒤섞여 책에 미쳐서 일정 시간을 살아본 후 어디 가서 함부로 책 좀 읽는다고 나대지 말자, 어린 시절에 언니오빠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더 이상 밤을 지새워 책을 읽지 않는다. 몸을 아끼기 때문이다. 친구 남편이 병에 걸려 일을 관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나마 내가 일을 하고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어. 아이들도 지금 항상 클 때고. 병에 걸려 일을 관두고 병원에서 3개월 넘게 입원해 큰 수술을 했다고 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더라, 돈 벌겠다고 지금 한창 벌어야 할 때라고 노후 자금 모아서 노년에 고생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벌어야 한다 그랬는데 사람이 아프고 나니까 알겠더라. 돈은 아무것도 아니더라. 친구는 오랫만에 회사 사람들과 송년회를 했다면서 소주를 마셨다면서 이야기했다. 친구가 술에 취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통화를 끝내고난 후 엄마가 해준 점쟁이가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음이 있어야 기도가 제대로 하늘에 가닿는다고 했던.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 이차저차해서 거짓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다면 하늘에 가닿기는 커녕 그 안 좋은 마음을 하늘이 아시고 오히려 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고 한. 그러니 이미 떠난 마음으로는 뭔가 소원을 빌지 말라고 조언을 받았다고 엄마는 이야기했다. 상스럽고 속되게 내 마음을 거울 위에 립스틱으로 형상화하고 싶기도. 민이가 먹다 남긴 사과를 먹으면서 커피를 마신다. 아이는 노래와 영상과 문자 속으로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던져 지내고 있다. 전기값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나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들을 아이와 함께 이야기했다. 아이가 강의 하나 더 듣고 갈게, 먼저 자고 있어_ 했고 응, 엄마 좀 졸린듯. 난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스크팩을 얼굴에서 떼어 집어던지고 불을 끄자마자 3분도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새벽에 발딱 일어나 죽을 데피는 동안 만일 뭔가를 해야 한다면 죽을 이것저것 배워 죽집을 차릴까 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가 관뒀다. 돈까스를 튀기는 1년 동안 그 시간이 겹쳐졌기에. 그곳에는 어떤 낭만도 어떤 여유도 없다. 나는 넉넉한 시간을 그리고 낭만을 원하고 있는지라 그건 아무래도 무리다 곧 알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아름답고 예쁜 것들이 좋고 그 사이에 마음을 집어넣을 수 있다면 더 좋다. 요리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는 제부는 내게 이야기했다. 다시는 음식 만들어 파는 일은 하지 마, 누나는 이쪽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이 서운하기도 했고 또 좋기도 했다. 난 그냥 아빠 말대로 그렇게 내가 내 마음을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는, 지쳐 간혹 슬라이스라도 해서 던질 수 있는 그런 작업들을 하면서 살아야겠다_ 하고 오늘 아침에 다시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