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까지 나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들은 올리브 키터리지와 루시 바턴이라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인물이나 배경이 모두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었다. 바로 직전의 소설 “Tell Me Everything" 에서는 올리브와 루시가 결국 만나서 좋은 관계를 쌓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 신작은 완전히 새로운 배경 속에 사는 아티 댐(Artie Dam)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주 살짝 “올리브 키터리지”가 언급되기는 하는데 실존하는 사람이 아닌, 주인공 아티가 예전에 읽었던 소설작품으로 떠올리고 있다. 그러니까 올리브 키터리지는 이 책 속에서 허구의 인물인 셈이다.
아티 댐은 매사추세츠 해안가에 살고 있는 57세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다. 학생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고 교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다. 착한 심성을 가진 친절한 사람이고 수업을 열정적으로 이끄는 좋은 선생님이다. 부인 에비(Evie)와 30년 넘게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고 자식은 아들 롭 한명이다.
아티의 아버지는 아파트 관리인이었고 어머니는 정신병을 앓고 있어서 입원한 적도 있었다. 그런 어머니는 아티의 누나 마리아에게 폭언과 폭행을 쏟아 붓곤 했다.
아티의 기억 속에서 반복해서 소환되는 장면. 어렸을 때 아티가 지하 창고에 내려갔다가 누나가 제과 설탕을 퍼먹고 있던 현장을 목격한다. 아티는 누나의 그 행동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고 비밀로 간직하면서 어린 마음에도 누나를 이해한다. 누나는 자신의 삶에 그저 절실하게 달콤함을 원했던 거라고.
아티의 부모는 아티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두 분 다 돌아가셨다. 아티의 누나는 결혼해 아기를 낳다가 죽었다.
아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대학을 간다는 꿈을 꾸지 못 했지만 고등학교 때 좋은 선생님이 아티를 이끌어 주어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역사를 전공하던 중 무료 급식소 봉사를 갔다가 같이 봉사 활동을 하던 에비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알고 봤더니 에비는 엄청난 부잣집 딸이었다. 결혼 전 상견례 자리에서 아티의 부모가 입고 있던 옷차림은 아직까지도 그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부모가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에비의 집안과 차이가 나던 그 모습들은 아티의 마음속에 내내 남아서 문득 문득 떠오른다.
현재 에비의 부모가 상속해준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있는 아티는 보트를 몰고 바다에 나가는 취미생활도 즐기는 사람이 되어있다. 그의 아버지는 꿈도 꾸지 못 할 보트를 소유하고, 부유하고 평온한 결혼 생활을 이어온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장본인 같은 인물이지만 그 속은 모를 일이다.
아들 롭이 17살 때 교통사고를 내서 옆에 타고 있던 여자친구가 죽는 비극이 있었다. 그때부터 롭은 침울하게 변해서 아티와 거리를 두었고, 에비도 냉담하게 변했다. 롭은 현재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고 연상의 피아니스트와 결혼했는데 갈라서기로 합의하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나고 있는 상태다. 에비는 롭이 낸 사고 이후 가족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퇴근하면 아티에게 상담했던 고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최근 몇 달 사이 아티는 에비와의 대화가 삐걱거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티가 하는 이야기들을 에비가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티가 꺼내 놓는 과거의 기억들,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들에 에비는 그저 “그렇군” 하는 식의 반응뿐이다. 단절된 느낌, 외로움. 아티가 요즘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떠오르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어떻게 하면 부인과 아들에게 자신이 자살했다고 보이지 않게 자살할 수 있을지를 내내 생각한다.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은 배를 타고 나가서 사고로 물에 빠져 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티는 계속 자살할 방법을 고민하다.
아티는 예전에 읽은 고약한 노인이 나오는 책을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올리브 키터리지”다) 그 노인의 아버지는 그 여자가 어렸을 때 자살을 했었다. 그리고 나이를 더 먹고 여자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외로움 때문에 죽는다고. 이 소설을 떠올리며 아티는 공감한다. 사람은 정말 외로움 때문에 죽는다고. 자신도 그렇게 될 거라고.
사람들은 어째서 진짜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라고 아티는 물었다. 사람들은 재활 치료, 낙태, 불륜, 정치 같은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동료 교사와의 파티에서 정작 중요한 이야기들은 나누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아티는 외로움을 느꼈다. 이에 에비는 “그 누구도 섬이 아니다 라는 말은 개소리고 우리 모두는 섬이야” 라고 말했다던 부부의 친구이자 얼마 전 죽은 레그의 말을 인용한다. 그런 에비의 반응에 아티는 더욱더 우울해진다. 서로는 정말 닿을 수 없는 섬인 걸까? 그래서 아티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걸까?
그리고 아티는 정말로 오랫동안 감춰졌던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다. 충격적인 비밀을 알고 나서 고민하는 시간동안 그 또한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비밀을 드러내면 우리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고, 비밀을 품고 있었을 사람에 대한 연민 또한 작용했을 것이다.
아티의 삶을 보여주며 작가는 말한다. 사람들은 결국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사실 잘 알지 못 한다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나는 완벽하게 알지 못 한다고. 우리 모두는 그런 상태로 살아간다. 눈이 먼 상태로 마치 그림자 속을 살아가며 어둠 속에서 타인과 닿았다고 생각하듯이.
하지만 인간이 늘 섬인 채로만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점도 보여준다. 잠깐의 구원, 스트라우트 소설 속에서 매번 등장하는 2월의 햇살 같은 은총도 이 소설에 있다.
아티는 거짓 속에서 살기로 선택하고 잠시 일탈을 하는데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잘 알지 못 하는 사람의 선의였다. 또한 아티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과는 단 몇 번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가장 내밀한 비밀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순간을 맞기도 한다. 아티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위로를 받는다. 아티는 알지 못 하겠지만 그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학생의 인생에 오랫동안 남아있기도 한다. 미래를 좌우할 만큼.
하지만 이 소설은 내가 이때까지 읽은 스트라우트 소설 중에 가장 희망적이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잠깐의 위로가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이 소설은 202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기에 시작해서, 소설 속에서 결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그 사람이 당선된 후 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아티의 내면적 우울과 바깥세상의 혼란이 겹쳐지면서 이야기는 내내 침울한 분위기로 흐른다. 소설 속에서 자살을 하거나 자살을 시도하는 인물들이 여럿 등장하고 아예 이 나라가 자살을 하고 있다고 까지 작가는 쓰고 있다. 암울하고 비관적인 정치가 개인의 삶까지 잠식해 버리는 지점을 주인공 아티의 삶에서 여실히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래도 시대에 대한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분노와 절망이 가장 잘 보이는 작품이 이 소설이지 않을까한다.
담백한 문장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스트라우트의 문장은 여전히 놀라웠다. 정말 간단하게 절제해서 툭툭 던지는 문장이 깊은 울림을 주어서 어느 순간은 눈물도 살짝 흘리기도 했다. 문장만 그러냐하면 소환되는 이야기들 또한 감동적이었다. 떠올리는 기억들, 그 짧은 에피소드 안에 인간의 풍성한 감정을 담아내는 깊이. 그런 이야기를 지을 수 있는 작가의 통찰력이 나는 너무 좋았다. 스트라우트의 작품들을 계속 읽고 싶다. 매년 장편소설을 써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