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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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출신의 '미겔 데 우나무노'는 초기 실존주의자이자이자 14개 언어에 능통한 석학이다.
<<안개>>는 기존의 스페인 소설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새로운 신 소설로서 만들어진 작품이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작가는 허구이면서도 실제를 혼돈으로 내모는 관계를 보여준다. 철학적이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려는 그의 <<안개>>는 가공의 인물이 서문을 쓰고, 주인공이 기르던 개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작가 자신과 소설 속 등장인물의 대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함을 안겨준다.

<<안개>>는 제목 그대로 허구와 실제 가운데 등장하는 애매모호한 기운이 휩쓰는 작품이다. 몽환적인 비현실적인 공간과 리얼리즘으로 점철된 공간 가운데 소설 속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창조주인 '미겔'과 꿈과 현실 가운데 만나고 이야기 한다. 작품 속 주인공들은 그들의 창조주에 대하여 반항할 수 없다. 주인공의 삶은 창조주의 뜻에 따라 움직이며 그 결말에 대하여 고민하고 고뇌하나 결국 창조주의 의지대로 마무리된다. 그러한 기존의 작품에 반하는 <<안개>>속 주인공은 창조주인 '미겔'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며 심지어는 명령한다. 작가는 고뇌하며 작품 속 주인공의 의지에 맞춰 글을 쓴다. '아우구스토 페레스'의 죽음과 에필로그에 대하여 작가와 주인공이 기르던 개가 말하는 그의 삶에 대하여 우리는 철학적이며 대단히 실험적인 작품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부터 끝까지 그저 평범하게 전개되는 평이한 작품들과는 다른 관점과 사고를 제시하는 <<안개>>의 특징은 도전적이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사고가 멈춰지고 모든 틀에 막혀있을때 그 사고의 틀을 깨고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이 제시하는 그 끝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주로서 새로움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담습하는 가운데서 죽은 작품만을 만들어 내는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은 <<안개>>라는 작품을 통해서 절정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소설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전복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안개>>를 읽어본다면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실험정신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것이다.
스페인 문단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실험적인 정신을 전수한 <<안개>>를 통해 새로운 문학 장르로의 한발 나아감을 통하여 보다 넓은 세계로 지평을 넓혀갈 수 있다는 점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과 뼈를 가지고 살아있는 인간' 그러한 인간이 살아 숨쉬는 작품 그리고 주인공은 이미 그러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안개>>속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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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의 고독 속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4
베르나르마리 콜테스 지음, 임수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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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극작가로 데뷔한 '베르나르마리 콜테스'는 프랑스 출신으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그는 41세라는 짧은 생을 보냈지만 그의 작품은 그의 생에보다 더욱 긴 시간을 보내며 사랑받고 있다. 전 세계에 30개 언어로 번역되고 47개국에서 공연된 프랑스 현대 연극을 만들어낸 '베느나르마리 콜테스'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와 <<슾에 이르기 직전의 밤>>을 통해서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 '욕망'이라는 감정을 내포한 '현대의 모습'을 설명하며 작가는 '실존주의적 탐구'를 통한 무대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함께 수록되어져 있다. 연극과는 다른 결말 내용전개 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작가의 순수한 의도 '실존주의적 인간 탐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텍스트 또한 새롭고 흥미로운 내용전개가 묘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작품의 저작 시대대로 따라가자면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은 내면과의 대화를 통한 독백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긴 독백이 하나의 문장으로 이뤄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전하고 불연속적이며 숨가쁘게 내용이 전개됨을 느낄 수 있다. '내면 속'존재에 대한 형상화와 그에 대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우리는 불안과 초조 그리고 비판과 적의를 발견한다. 주인공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으며 방황하며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갈망한다. 그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던 주인공은 그곳을 찾기전 '내면 속'나를 찾아낸다. 하나의 장 문장이 가진 힘 그 안에서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주인공을 발견하고 주인공의 생명과 호소를 바라볼 수 있다. 이러한 장문이 무대에 올려져서 공연되었을때 가지게 될 힘 그 힘을 정말 보고 싶게 만들어 내는 텍스트를 통해 작품의 힘을 우리는 느낄 수 있을듯 싶다.

두번째 작품이자 첫번째로 수록되어져 있는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는 연극과는 다른 엔딩을 보여준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두인물 딜러와 손님은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며 자신의 영역 속(욕망)으로 상대를 끌어 들인다. 타인의 영역으로 끌려들어가길 원치 않는 두 인물의 대립은 갈등과 긴장 그리고 파국이라는 극단적 형태로 이어지게 된다. 자신의 것은 감추고 유혹하는 두 인물의 대립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며 한치의 양보도 없는 가운데서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의 붕괴를 통해 우리는 '고독'과 '불안'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발견할 수 있다.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가능성으로의 초대와 <<목화밭의 고독 속에서>>보여준 인간의 실존주의적 탐구는 작가의 짧은 생애를 보여주듯 강렬하고 통렬한 비판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독자는 이 두 작품을 통해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파국을 만들어 내는 '욕망'을 발견한다. 이러한 '욕망'이라는 소재를 작품에 살리고 무대위로 끌어 올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준 작가의 역량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을 보내며 두 작품외에도 많은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하며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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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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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뉘어진 소련 출신의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공산주의 체제의 초기와 중기시절을 보낸 인물이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 안에서 성장하며 체제가 가르키는 방향의 끝에 무엇이 있는가를 질문하며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묘사한다. '유토피아'로 알려진 그곳은 모든이들의 이상향이지만 그 뜻이 의미하는대로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체제와 계급이 존재하며 자본주의의 또 다른 형태의 새로운 지배체제가 자리 잡는 가운데 민중이 원하는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산업혁명 가운데 생겨난 병폐와 기존의 지배계급에 절망의 흐름을 끝내고 개인이 아닌 집단을 강조하며 외치는 선동은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부름이었다. 공산주의의 대표 지도자였던 '스탈린'은 민중들을 선동하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것을 이야기 한다.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격변하는 공산주의의 혁명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며 시대의 관찰자이자 체험자로서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느낀바를 <<구덩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과연 '유토피아'란 존재하는가? 그리고 '집단'이 가진 본질은 무엇인가? 두 가지의 질문을 생각하며 공산주의의 모순과 체제에 대한 비판 그리고 집단주의에 경종을 울린 이 작품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먼저 출판된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작가의 의지는 비록 살아 생전 꽃을 피우지 못하였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사회를 고발하며 역사의 거울이 되어 오늘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다시 돌아봄을 알려주는 <<구덩이>>를 통해서 오늘 우리의 삶과 사회의 특징을 한번쯤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구덩이>>에 등장하는 구덩이란 '토공사' 즉 구조물을 시공함에 있어서 기초나 지하실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지반면까지의 공간을 굴착, 완료한 뒤에 지반면까지 다시 메우는 작업을 가리키는
공사의 용어이다. 즉 '토공사'는 어떠한 구조물을 시공하기전에 기초적으로 꼭 해야만 하는 일이다.
'유토피아'로 제시되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로 대변되는 구조물을 완성하기 위해 작품 속
인물들은 끝나지 않는 공기를 완성하기 위해 '불합리'하고 '모순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힘은 미약하기에 '집단화'를 만들어 낸다. 만들어진 '집단'은 개개인이 수많은 시간을 노력해야할 일들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하지만 이 '집단' 속 '개인'들은 '집단'을 위해 '개인'의 속성과 권리를 포기하며 '집단'가운데서 등장하는 또 다른 개인들의 지배자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핍박'받는다. 한때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이끌어낸 운동들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토목공사들도 '집단'을 위한 또 다른 '구덩이'를 파고 있는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구덩이>>는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집단 속 개인'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람들은 절대적 권력 혹은 악과 선으로서 이야기 되는 것이 아닌 상호간의 교류 속에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장은 직설적이며, 대화가 많으며,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보여준다. 비극을 향해서 나아가는 가운데서도 <<구덩이>>는 유령기차가 되어 전진한다. 사람이 중심되어 '유토피아'로 전진하고 있더라면 <<구덩이>>의 후반부는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상태로 그저 쪼개어진 '집단'이 되어 '집단 아닌 집단'으로서 비극적 최후를 향해 전진한다. 이러한 작품의 특징은 체제에 대한 고발의 역할과 알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인간들의 내면과 삶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구덩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소탈한 모습과 이기적인 모습 그리고 체제의 모습은 이념과 이상을 넘어 오늘날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모습과도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모두를 하나로 묶어서 움직이는 '집단화'가 지향하는 것은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 말로 '유토피아'의 주인이며 그들이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임을 우리는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구덩이>>를 통해 인간을 전체의 일부로 전락 시키는 '집단화'를 보며 어리석은 사회에 대한 풍자를 마음껏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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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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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문호 '이탈로 칼비노'의 <<우리의 선조들>>3부작에 속한 <<나무위의 남작>>은 경쾌하고 즐거운 상상력이 발휘된 글이다. 반면 가벼워 보이는 글 가운데 인간과 사회의 갈등을 생각하며 지적하는 작가의 글 속에서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인 '이탈로 칼비노'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나무위라는 한정된 공간 가운데서 세상을 바라보며 영향을 미치는 '남작 코지모'의 모습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위의 남작>>의 추천 키워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나무 위'그곳에 코지모가 있었다.
열두 살에 불과한 코지모가 '나무 위'로 도망간것은 식사시간에 벌어진 권위적인 아버지의 달팽이 요리 때문이다. 먹느냐 마느냐를 놓고 티격태격 하던 코지모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평소 자주 올라가던 즐거웠던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다. 한정 된 그리고 불안한 '나무 위'라는 공간은 불편하고 좁아보이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그곳은 주인공 '코지모'에게 있어선 안식처이자 도피처이며 기반이었다.  사고의 틀을 넓히면 전혀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만일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우리 또한 코지모의 아버지처럼 조만간 금방 나무에서 내려올 수 밖에 없을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만큼 제한되고 불편한 공간이라는 인식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생각을 편협하게 만든다. 반면 코지모는 나무위에서 모든것을 이루어 낸다. 자연을 느끼고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코지모의 반항은 가족들로 대변되는 이들의 혐오에 있다.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한 코지모의 행위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부분을 일부 포기하였지만 '조망'과 새로운 생각을 얻게된다.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공부한다. 그리고 세상과 소통한다. 사람들을 선동하기도 하며 사랑도 나눈다. 그의 독특하고 고집스러운 일생의 삶은 '나무 위'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한정된 공간이라는 수식은 그의 삶에서 해방된 공간으로 바뀌어 진다. 코지모의 삶은 그가 죽고 나서 새겨진 비석 가운데 요약되어진다. 그는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자유분방함 가운데서 살아간 그의 삶은 오늘날 지식인들 혹은 선구자들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해야할 일들을 보여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계몽주의' 18세기를 노래하다.
17세기와 18세기의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의 흐름을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이성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와 법칙을 찾아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기준이 된 계몽주의는 코지모가 좋아한 '이성'이 높이 자리매김하며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보수적 사고체계와의 안녕을 고하는 흐름을 보여주던 계몽주의는 가치와 이성을 중시하는 사고관으로서 코지모가 세상을 바라보며 사고하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사회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무위의 남작>>에 등장하는 코지모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말하는 인물 가운데서 이상적인 형태의 인물로 보인다. 그는 낡은 것과 부당한것에 굴하지 아니하며 스스로의 판단과 노력이라는 '이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야기 한다. 비록 '나무 위'라는 공간 가운데에 자신의 몸을 두지만 '이성'은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며 시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닿아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연구하며 공부하는 가운데서 지식의 장을 열어가는 가운데서 '진리'에 가까운 '이성' 획득을 이루고 그 '이성'을 가지고 세상에 영향을 미친 코지모의 삶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자 현대인들 그리고 앞장서야 할 이들에 대한 이상적인 형태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유쾌한 상상력과 즐거움을 가지고 우리는 작가의 꿈을 볼수 있었다. 이 꿈이 현실 가운데 어떻게 적용될지는 모르나 하나의 방법과 나아갈길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책의 가치는 더욱 드높아 진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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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적정기술총서 1
스미소니언연구소 지음, 허성용 외 옮김, 홍성욱 감수 / 에딧더월드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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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정기술 입문서 
 
  이 책을 읽기전 먼저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 하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적정기술'의 원조에 관하여 본문을 인용하자면 '인도의 간디'를 생각하면 좋을듯 싶습니다. 간디는 전통적 방식이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누구든지 필요한 만큼을 생산할 경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다고 말합니다. 영국 직물의 우수성은 단기적으로 좋아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인도에 손해가 미친다는 간디는 간파했습니다.

  이후 '적정기술'은 영국의 슈마허이 기본을 제시하고 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여집니다. 현재는 정부와 민간기관으로 영역이 확대되어 디자인, 경제, 공학, 공적개발원조 등에서 활용되어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40~50년 정도 연구되었지만 국내에는 2000년 무렵부터 관심을 받고 있으며 외국에 비해 '적정기술'관련 서적과 연구가 부족합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적정기술'영역에서 디자인이 소수를 위한 이익창출에 기여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깨고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특별히 소외되는 지역민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재 탄생시키고 발전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소외된 자들을 위한 디자이너들의 관심

  현대 생활 영역에서 디자인이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소비를 촉진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예술적 가치와 수준을 더욱 끌어 올립니다. 디자인이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저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의 삶의 윤택함을 가장 많이 누리는 이들은 경제적 차상위 계층의 사람들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첨단의 기술과 디자인의 접목된 생활의 편리함은 부자들에게 집중된듯한 착각마저 일으킵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에 실린 디자이너들은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지향합니다. 그들은  모 방속국의 디자이너분들의 기적의 도서관, 행복한 집짓기등에서 활약하던 디자이너들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의 영역이 '적정기술'과 결합하여 경제적 빈곤과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디자이너들이 말하는 '적정기술'


  '적정기술'로서의 디자인을 지향할때 목표와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소외된 자들'이라는 제목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이들도 있겠지만 책의 내용은 분명한 목적 '그들을 위한 디자인'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생각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대상이 되는 이들을 위한 이해와 소득 창출 그리고 지속성과 의존이 아닌 존엄성을 우선하며 효율성과, 문화적 수용도 그리고 환경적 지속 가능성등 다양한 영역을 고려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큐 드럼 & 항아리 속 항아리 


  거대한 물동이를 머리에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이동성을 용이하게 해주고 그들의 건강을 고려한 큐드럼은 작은 디자인 변화가 미치는 건강과 삶의 편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항아리 속 항아리는 더운 날씨 가운데 보존성이 떨어지는 과일과 야채를 전기시설이 없는 가운데서도 신선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소득증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디자인은 '적정기술' 가운데서 '경제적 빈곤'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면서 인류를 위한 디자인이라는 모티프를 실제적으로 실현합니다.



<인체의 불편함을 고려한 큐드럼& 전기부족을 감안한 간이저장기술 개발 항아리속항아리>

  한국 디자인의 길을 묻다. 

  디자인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책 속에 나타난 다양한 사례들은 디자이너들에게 서구식 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하는 디자인을 우회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낮았던 필자 또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을 보기 까지 많은 시간을  디자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해봅니다. 만일 우리의 디자인이 '기술'에 따뜻함을 더하고 생태친화적인 것을 지향하며 본래의 주인들에게 기술을 돌려주는 과정을 거쳐 나간다면 '소수'의 디자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위대한' 디자인으로 거듭나지 않을까요?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에 관하여 필자는 환경을 위한 인간을 위한 그리고 미래를 위한 디자이너들의 노력의 방향에 긍정적 영향력을 미침으로서 사회의 다양한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이바지하는 책으로 가슴에 담아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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