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 괴물은 백두산 천지의 괴물은 말하자면 `네스류'이다.
모든 탐사에서 괴물의 존재가 확인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렇지만 괴물 애호가들과 인근주민들은 낙담하지 않는다. 호수밑 동굴에 숨었다든가 하는 이유를 댄다. 탐사 자체가 완벽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다른 동물이나 물고기 또는 자연현상을 괴물로 착각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목격담이 주로 나오는 이른 봄과 늦가을에 호수물에 밀도가 다른 층이 생기고, 그곳에 `정 진동'이라는 거대한 물살이 생겨 바닥에 가라앉은 나무둥치를 괴물처럼 움직이게 만든다는 설득력 있는 이론도 제시됐다. 무엇보다 진화생물학은 한 종이 수만년 동안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500마리는 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괴물은 떼로 존재하거나 아예 없거나 둘중의 하나라는 얘기다.
천지의 괴물 괴물이 나타났다는 말 때문에 천지는 더욱 신비로움을 갖게 되었다.
이 괴물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부석이라고 하며 어떤 사람들은 곰이 천지를
헤엄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1903년에 천지에서 화산폭발이 있었기에 괴물이 있을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역사적 자료와 목격담에 의해 천지에 괴물이 있다고 인정한다.
1908년에 출판된 '장백산지략(長白山志略)', 1928년에 출판된 '무송현지 (撫松縣志)',
1992년에 출판된 '안국현지(安國縣志)'에는 천지에서 괴물을 보았다는사실이 적혀 있다. 또 괴물을 직접 본사람들도 적지않다.
목격담
1962년 8월 중순에 주봉영이 천문봉에서 6배 망원경으로 천지 동쪽 천지 수면에 있는
괴물을 보았다고 하는데 몸체는 흑갈색으로 머리는 개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76년9월 천문봉에서 휴식하고 있던 36명의 유람객들이
천지 복판으로 헤엄쳐 가는 괴물을 보았는데 크기는 소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80년8월 기상소의 많은사람들이 사흘동안에 세 차례나
보았는데 머리는 사람머리 정도이고 눈은 밤알만큼 컸다고 했다.
1981년 6월 백두산 자연보호국에 있는 6명의 직원들이 괴물을 보았는데
길이는2미터,머리는 표범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였다.
1981년9월 이소빙 기자가 천지 괴물의 사진 찍었다.
1962년부터 1993년에 이르는30여 년 동안에 수백 명이 수십 차례나 천지의 괴물을 보았다.
괴물을 본사람들의 말을 정리하여 괴물의 모습을그리면 소만큼
크고 회색이고 반지르하다. 머리는 개 머리와 비슷하고 눈은 밤알만하며 주둥이는 앞으로 나왔다. 목의 지름은 약 10cm, 길이는 1.5 ~2m, 몸체 쪽에는 흰 무늬가 있다.
또다른 모습은 몸의 길이는 2미터 정도이고 머리는 표범 비슷하고 머리 위와 앞턱은 흰색이고 다른부위는
노란색이라 한다.
괴물을 본사람들의 시간기록을 정리해 보면6월 중순, 8월 중순,9월 중순인데 8월 중순에 나타난 것이 가장 많다.
그러므로 백두산을 관광하는 사람들은 어느달이든 괴물을 볼수있는가능성이 있게 된다.
특히 천지의 괴물은 길상의 상징이므로 순간을 잡아 보기만
하면 그들에게는 행운이 기다리고 있다고 전한다.
피흘리는 석가상
원흥사(경기도 가평군 소재)사찰에서 지난 6월 21일부터
사찰 법당내 관세음부처님의 팔에서 피를 흘리고 딱지가 붙은 기적 같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부처님의 피 흘리는 현상은
우연하게도 불교일보 취재팀이 7월 11일에 미리 약속했던 원흥사 천도재의식을 취재하고 있던 중, 기자가 부처님의 상태가 이상함을 주지 스님에게 지적하자 주지 스님이 그간의 일을 알려주어서 본지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주지 구천 스님의 말에 따르면
지난 6월 21일(음력 5월1일)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처럼 새벽 예불을 드리고 난 후 법당을 살피던 중
관세음부처님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게 보임을 느끼고 자세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왼쪽 팔 부분에
핏물이 흐른 흔적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관세음부처님은 원흥사 법당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부처님 세분 중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피를 흘린 자국과 딱지가 붙은 위치는
관세음부처님 오른쪽 팔의 팔꿈치부분과 피가 흐른 오른쪽 발 아래부분,
왼쪽 감로수를 든 팔꿈치 부분(오른쪽 팔꿈치 부분과 비슷하다) 피가 흐른 오른 발 옷부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딱지의 상태는 보통 피가 흐르다 멈춘 피딱지와 같이 보이고 있으며 딱지가 두꺼운 상태로 있다.
구천 스님은 그 당시 부처님에 핏물이 흐르는 등의 기이한 현상은
나라가 어려울 때에 나타나는 징조로 판단하고 이 사실을 일절 외부에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나라의 안녕을 비는 국태민안 기도를 하루 6시간이상씩 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구천 스님의 기도원력 덕분인지 그동안 20일이 넘게 흐르던 핏물은 2,3일전부터 조금씩 멈추기
시작했으며 11일 오후에는 딱지가 생성되었음을 불교일보 취재팀이 확인했다
땀흘리는 비석
『사명대사에 고향에 전각을 세우고 그곳에 스님의 진영을 봉안하여
훗날까지 스님의 충혼을 모시도록 해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사명대사의 출생지인 경남 밀양군 무안면 산강리에는 사당이 세워지고
스님의 영정이 봉안됐으며, 선조는 이 전각을 「표충사」라 사액했다.
『누구든 이 표충사 근처를 어지럽히거나 신성시 하지 않을시는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
친히 사액한 선조는 고을 원에게 이처럼 신신당부하여 사명 스님의 호국정신을 치하했다.
그로부터 관료는 말할 것도 없고
백설들까지도 그 사당 앞을 지날 때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를 올렸다.
그렇게 백 여 년의 세월이 흘러 당우가 퇴락하자
사명 스님의 5대 법손인 남봉선사는
표충사를 중수하는 동시에 스님의 공적을 기리는
표충비를 세웠다.
때는 영조 14년, 1738년이었다.
표충비를 세울 돌을 고르기 위해 경상도 경산까지 가서 높이 3.9m, 폭 97cm, 두께 70cm 크기의
돌을 구해온 남봉 스님은 당시 정승 이익현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내 본시 승려의 부탁으로 글짓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나 오직 대사님의 사정이 간절하여
이를 물리치기 어려워 특례로 곧 비에 글월을 새기는 것입니다.』
배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했던 당시의 정승 역시
사명대사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표충비가 세워지고 다시 백 년 후, 그러니까 조선 제24대 헌종 5년(1839),
사명대사의 8대 법손인 월파선사는 표충사를 밀양 영정사로 옮기고 절 이름을「표충사」로 바꿨다.
표충서원을 옮겨 가자 사명 스님의 고향엔 표충비만 남게 됐다.
지방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지난날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는 이 비석은
현재 몸체에 금이 간 채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표충비각
비석 몸체에 금이 간 것은 일제 때였다.
사명대사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일본 사람들은
잔꾀를 냈다.
『저 비석은 보기만 해도 왠지 섬뜩하단 말이야.
마치 사명대사 귀신이라도 담긴 것만 같으니
무슨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떻겠소?』
『좋소. 나도 동감입니다.
저 비석 옆에다 담배 창고를 옮겨 짓도록 합시다.』
일본인들이 사명대사의 혈맥을 끊기 위해 비석 옆에다 창고를 세우던 날이었다.
비석은 마치 살아있는 듯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한동안 못 견딜 정도로 몸부림치니 비석 몸체에 마치 피를 흘리는 듯한 형상으로 「쫙」금이 갔다.
일본 사람들이 표충비를 무서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물론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용맹스런 승장의 비라는 점도 없지 않으나
마치 스님의 구국혼이 비석에 어린 듯 나라에 큰일이 일어날 때면
비석에서 땀이 흐른다는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진 것이다.
예전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비석이 세워진 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첫기록은
1894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기 7일 전으로 되어 있다.
비석이 있는 곳을 지나던 한 아낙은
매서운 겨울 날씨인데도 비석 몸체에서 땀이 흐르듯 물기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낙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 역시 가만히 두고만 볼 일이 아니다 싶어 관가로 달려가 고했다.
표충비
당시 비석이 흘린 땀이 3말 1되나 된다고 한다.
그 뒤,
군지(郡誌)에 기록된 표충비의 땀 기록은
경술합방 , 기미독립만세운동 , 8·15 해방 ,
6·25 동란, 4·19 학생의거, 5·16 혁명 등
여섯 차례이다.
그 중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은
기미년 만세사건 때와 5·16 혁명 때로
기미독립운동 때는 19일간에 걸쳐 5말 7되를,
5·16 혁명 때는 5일간 5말 7되를 흘렸다.
군(郡)의 공식 기록은 없으나
육영수 여사가 입적한 다음 날도
비석은 땀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나라에 중대사가 있을 때면
미리 땀을 흘려 어려움을 예고해 주니,
마을 사람들은 비석의 영험을 받아들여
대소사에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6·25 동란 때는 전쟁이 일어나기 25일 전부터 3말 8되나 흘렸다.
『표충비가 땀을 흘린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하자
주민들은 아무래도 무슨 변이 있을 조짐인 듯하다며 양식이며 비상약품 등을 준비했지요.』
6·25 무렵을 회고하는 주민 이씨의 말처럼 마을 사람들은 땀 흘리는 비석의 영험을 믿으며
크고 작은 일에 조심하고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
『우리 마을에선 사명대사의 구국 충혼이 이 표충비에 서려 있다고 믿고 있지요.
매년 관광철이면 이 비석을 보려고 1백 여 명의 관광객이 들르는데 주민들은 너나없이
사명대사의 호국정신을 강조하며 자랑스럽게 안내합니다.』
사명당 추모회 구장회 회장의 말처럼
마을 주민들은 사명대사의 정신을 이어 대체로 정의감이 강하다는 소문이다.
비석이 땀을 흘릴 때는
사람이 땀 흘리는 형상과 똑같아서 앞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뺨으로 흘러내리는 듯
비석 전후면 머리 쪽에서 땀이 나와 비문 글귀 사이를 타고 흘러내린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외지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기후·습도 운운하지만 여러 차례 땀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저희들은
사명대사의 충혼이 서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을 촌노 한 분은 자신의 믿음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62년 장마 때는 보리가 썩어 나갈 정도였는데도 비석엔 습기 하나 차지 않았다."며
사명대사의 높은 도력을 거듭 강조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는 이 비석이 나라의 경사로 땀 흘리는 일이 많기를 발원하고 있다.
*엥, ㅜㅜ 상상하면 은근히 무서워요. 우으 ~ 그나저나 나도 한번 천지에 가보고싶네.
그걸 보면 행운이 온다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