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메인주 크로스비에서 삶은 이어졌다. 마거릿은 전에 걸핏하면 잠을 자는 신자였던 에이버리 메이슨이 죽은 뒤로 다시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설교도 여전히 진지하고 좋다는 것을 밥은 알아차렸다. 그리고 해셀벡부인은 밥에게 격주에 한 번씩 가져오던 진을 다시 물로 희석해달라고 부탁했다. 정말로 크게 넘어질 뻔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고, 그래서 밥은 절반보다 더 많이 희석해서 갖다주었다. 헤로인중독이었던 열쇠 가게 주인은 플로리다로 떠났다. 혹은 그렇다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6월이 되었다. 비가많이 오고 쌀쌀했지만, 메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이었다. - P435

마음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것은 사실이고, 밥의 마음은 여전히 루시를 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고려할것이 있는데, 마음은 유기체의 한 부분일 뿐이고, 유기체의일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살아남고자 하는 그 욕망이 이미 밥에게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 욕망은 자라났다. 마음의 욕망ㅡ그것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계속 자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이 으레 그렇듯 당연하게도 그것에는 불편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밥은 마거릿과 함께하는삶에서 느낀 새 희망을 붙잡았다. 밥은 건망증 증세 때문에 마거릿을 유심히 지켜보았지만 아직 별다른 일은 없었다. - P495

올리브 키터리지는 슬펐다.
그녀는 이제 아흔한 살이었고, 친구 이저벨 굿로는 점점더 잠이 늘었다. 바로 요전날에는 심지어 올리브가 신문을읽어주는 동안에도 잠들어버렸다. 그래서 올리브는 루시가전화를 걸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올리브"라고 말했을 때 기뻤다.
올리브는 아무때나 오라고 했다.
그래서 ㅡ밥이 사무실을 청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ㅡ루시가 올리브의 아파트로 왔고, 루시는ㅡ올리브가 보기에ㅡ눈부셨다. 녹색 스니커즈와 평범한 노란색 상의에 청바지를입고 있었다. 루시가 카우치에 앉아 말했다. "좋아요, 올리브ㅡ내 이야기는 이거예요. 지금까지 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슬픈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면 잘못된 문장일 거예요. 하지만 이 안에는 슬픔이 담겨 있고,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이야기가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말해줘요."  - P505

우선 떠오르는 대로 써보면, 밥에게는 이런 모습들이 있다. 성찰하는 유의 사람이 아닌 밥, 죄를 먹는 사람 밥,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큰 사건에 평생 붙잡혀 살아온 밥, 예순다섯 살에 사랑에 빠진 밥, 사랑하는 형수를 잃고 당장 슬픔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에 의아한 밥, 루시와 만나면서 ‘확장된 의식‘을 경험하는 밥. 하지만 그 모든 모습을 아우르면서, 이것이 밥의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이것일 것이다. "이유가 뭔지 알아요? 당신은 여전히 밥 버지스니까요. 누구도그 사실은 뺏어갈 수 없어요." (매슈 비치의 말),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괜찮아요. 당신의 머리가 잘렸다고 해도당신은 여전히 - 여전히 밥일 거예요."(루시의 말) "그리고그게 가능했던 건 당신이 밥 버지스이기 때문이야." (마거릿의 말) 밥과 루시의 사랑도 그 결말은 ‘밥은 밥이다‘로 정리된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이 소설의 핵심 아닐까. 그리고 루시가 던진 이 모든 기록되지 않은 삶의 의미에 대한답이 아닐까.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인 한, 그 삶이 우리의 삶인 한, 우리는 우리라는 것. - P521

옮긴이의 말 제목인 ‘걷고 말하고 그저 행복했다‘는 이소설의 본문에서 가져왔다. 이유라면, 그저 그 문장을 만났을 때 ‘이러면 정말로 행복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작 중 하나인 『무엇이든 가능하다』(2019)의 옮긴이의 말 제목으로 썼던, 그리고 역시 그 책의 본문에서 가져왔던 ‘햇볕 속에 (함께)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행복해지는문장이었다.
그들이 이제 무르익은 노년기이거나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들었음을 고려하면 ‘걷고 말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또한,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그런 시기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평범한 것이 어렵고 힘들 - P524

게 느껴지는 시기와. 그러니 우리가 평생 걷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일이 될 테고, 내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너무도 깊은 연결감을 주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삶이 기록되지 않더라도, 우리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무소음 객차에서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루시의 그 엉뚱한 사랑 이야기처럼, 일상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마음을 일렁이게 한 그런 아주 엉뚱한 이야기라도 모든 것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마지막에 루시가 올리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었듯이, 그렇게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그런 행운은 없다. 지금자신이 너무나 외롭고 영영 그럴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정말로 어떤 것과도 아무런 연결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가 우리로서 그저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감각을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올리브가 올리브이기에, 루시가 루시이기에, 밥이 밥이기에 그렇듯, 우리가 우리이기에. - P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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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별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산다. 지은 책으로[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돌봄과 작업」(공저) 등이 있으며, 클레어 키건,
애나 댄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 P-1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무려 135장(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래 같은 책이다. 줄거리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축약할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에이해브 선장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거대한 흰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흰 고래를 추적하다 마침내 최종 한판을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이 책으로 먼저 「모비 딕을 접한 사람은 원본의 두께에 당황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가? 그리고 한없이 곁가지를 뻗는 서술 방식에 또다시 당황한다. 이 책은 모비딕을 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광폭으로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도대체 모비 딕은 언제 나오나?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는책의 4분의 1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 "물줄기다! 고래가물을 뿜고 있다! 눈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모비 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 - P13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하는가?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중요한문제가 하나 이상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투명한 번역이라는 말이 두 가지 정반대의 뜻으로 버젓이 쓰인다는 점이다.
대개 번역이 투명하다고 하면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다. 특이하거나 거슬리는 단어나 표현 없이 술술 읽히고, 번역문이 아니라 마치 원문인 것처럼 읽힌다는 뜻이다. 그럴듯하고 자연스럽고 가독성이 높은 번역문을 만들어서 독자가 번역 과정을 인식하지 않고 원문을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되면 번역과 번역자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보이지않게 된다. - P15

텍스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꿰뚫지 않으면, 그것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텍스트를 투명해질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벽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텍스트 너머의 침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 번역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투명하다는 말조차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데(사실 나도 이 글에서 같은 말을 두 가지 이상 다른 뜻으로 썼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용어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란 무엇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은 특수한 상황과 개별 사례를 아우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만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 - P20

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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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버지스는 거리에 비스듬히 내리쬐는 햇빛과 자신이 사는 블록의 건물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4월 말의 토요일 오후였고, 블록에는 튤립이 활짝 피어 있었다. 목련나무는 벌써 꽃잎을 세상에 펼쳐냈고, 어떤 꽃은 이미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파크슬로프 지역은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생일파티에 가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부모, 혹은 걸음걸이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걱정없는 표정의 부모 옆에서 인도를 걸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한 젊은 남자ㅡ그는 짐에게는 젊어 보였는데, 사실 집에겐 모두가 젊어 보였다ㅡ - P329

"매트가 실제로 알고 있는 건 내게 말해준 것 이상이에요. 그리고 점점 더 우울해지는 것 같고요. 그는 휴대전화가 아주 마음에 들지만, 본인 말로는 그걸로 게임을 한대요."
"그의 집에서 라이플을 가지고 나와요." 루시가 말하자 밥은 말했다. "나도 그러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는 월마트에가서 하나 더 사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거기 두기로 한 거죠. 그러니까ㅡ "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건 그의 삶이다." 루시가 말했다.
"음. 네ㅡ"하지만 밥은 매트와 그날 대화를 나눈 뒤로 확신이 없었다. 그는 루시를 보았고, 그녀가 말했다. "네, 골치아픈 사건이네요. 그래도 다이애나와 한번 더 이야기를 나눌필요는 있겠어요." 루시가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전화로 이야기하느니 직접 만나는 게 낫겠어요. 그녀가 언제 여기 다시 오는지 매트에게 물어봐야겠어요."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 두 사람은 걷고 대화하고 그저 행복했다. - P353

짐은 여전히 이따금 조용히 울었지만, 이제는 울음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었다. 래리가 그에게 다정하다는 것! 래리가 그를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다!
래리가 말했다. "오, 아빠, 아빠 때문에 죽을 만큼 마음이아파요. 아, 어떡하지, 아빠 때문에 죽을 만큼 마음이 아파요. 우린 이제 괜찮은 거죠. 그렇죠?"

짐이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아주 고양되어 있었다. 헬렌에 대한 모든 슬픔 그리고 그가 느끼기에, 자신의 인생 전체에대한 모든 슬픔이 쏟아져나와 아들에 대한 이 새로운 상태로 전이된 듯했다.
그리고 래리에게 잘못한, 자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것 많이 있었다 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너를 여름캠프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말했다. 그 진실이, 래리가 운동을 잘하지 못하고 집을 그리워하며 결코 잘 어울리지 못했기에 그 바보 같은 여름 캠프에서 경험했을 고통이 - P416

그의 마음을 스쳤다.
하지만 이제 래리는 그저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왜 괜찮은지 아시겠죠? 아빠가 진심인 걸 아니까요." 어느 날 그가 농담처럼 말했다. "아빠, 나는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러자 짐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짐은 헬렌이 겨우 몇 달 전에 누워 있던 것과 같은 병실용 침대에 누운 래리를 보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자신에게 많은 선물이 주어졌다고 느꼈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다른 세상으로 보내진 것 같았다. 오로지 사랑과 슬픔의 감정만이 존재하는 세상. 하지만 사랑이 슬픔보다 더 강했다. 그것은 강했고, 딸들이 그를 보러 왔을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가 돌연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유가 뭐였건ㅡ그건 신의 선물이었는가? ㅡ그는이제 완전히 다른 나라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수의 나라였다.

그것이 짐이 래리의 아파트에서 두 주 동안 지내면서 느낀것이었다. - P417

"내 이야기를 들을 거니? 듣지 않을 거면 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듣고 있어요." 래리가 말했다.
"메인에서 얼마 전에 일어난 그 사건에 대해 말해주고 싶구나, 어머니를 돌보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실종됐지. 결국 그의 누이가 어느 날 밤 어머니를 차에 태우고 채석장으로 간 것이 밝혀졌어. 이유를 알겠니?"
래리는 그를 지켜보다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누이가 어렸을 때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기 때문이었어.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았고. 그리고 아버지가 집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가 그녀를 데리고 놀러 나갔어. 그러고는 그녀를 그 채석장으로 데려가강간한 거야. 그녀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그녀를 창녀라고 불렀어. 이제 그걸 잠시 생각해봐, 래리."
래리가 조용히 말했다. "맙소사."
밥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그녀의 어머니를 판단하기 전에, 그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거였어. 어머니도 어렸을때 오랫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고, 삼촌이 임신을 시켰어. 그녀의 부모가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고,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는 대가로 아기를 데리고 모텔에서 지냈지. 모텔 - P428

주인도 그녀를 성적으로 학대했어. 내가 왜 이걸 너한테 이야기하는지 알겠니. 래리?"
"그게 악이기 때문에요?" 래리가 물었다.
"아니. 그건 악이 아니야, 래리 부서진 사람들이지. 부서진 사람이 되는 것과 악이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혹시 네가 그걸 모른다면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부서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거야. 내가 네게 이걸 말해주는 이유는, 너는 그런 부서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살면서 운이 아주좋았기 때문이야."
래리는 그저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것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니?" 밥이 물었다.
잠시 뒤에 래리가 말했다. "음,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그들은 내 아버지가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런 일을 전혀 겪지 않았는데도 악이 되었으니까요. 아빠가 삼촌에게 한 일은 악이었어요. 밥 삼촌."

밥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고, 이제 점점 화가 나고 있었다. "네 아버지는, 래리, 엄청난충격을 받고 어쩔 줄 몰랐던 것뿐이야. 그게 다야. 왜 충격을 - P429

받았는지 아니?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또다른 사실이 있는데, 그거 알아? 우리 아버지를 죽인사람이 누구였는지,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는 거야. 네 아버지는 그날 나무에서 잎이 떨어지고 비가 왔다고 생각했어.
음, 2월에 돌아가셨는데 낙엽이 있을 리 없지. 그리고 수지와 나는 밝은 햇살을 기억했고, 누구도 몰라, 래리. 누구도 영원히 알지 못해.
그리고 네 아버지는 그냥 엄청난 충격을 받고 어쩔 줄 몰랐던 것뿐이야. 그래, 아버지가 너를 여름 캠프에 보냈지. 아이들은 으레 그런 데 가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그걸 싫어했어. 하지만 아버지는 너를 계속 거기 있게 했지. 끔찍한 일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거 아니, 래리? 네가 가진 건 그저 아주 일반적이고 더럽게 돈이 많은 배경이었어. 그 이상은 없다."
밥이 일어섰다. 그는 이제 몹시 화가 났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전부다. 래리. 아버지를 계속미워해라. 그리고 언젠가 지금으로부터 그리 머지않은 언젠가 아버지는 죽음을 맞겠지. 기억날지 모르겠다만, 네가 살아나려고 발버둥칠 때 아버지가 병실에 앉아 네 곁을 지키며 울었다는 걸 기억해라. 아마 기억나지 않을 텐데, 네 아내 - P430

에게 물어봐 그애가 기억할 거다. 그리고 네 아버지는 악한사람이라면 그러지 못할 방식으로 아주 괴로워했어 내 말듣고 있니? 그리고 네 아버지가 죽고 네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어 그 아이가 ㅡ딸일지 아들일지 몰라도ㅡ 네가 생각하는모습과 다를 때, 그때 너는 아버지에게 얼마간 연민을 느끼게될거다.
하지만 바로 지금, 나는 너에 대한 연민이 없다. 너는 여전히 너무 어려. 나는 네 평생 네게 연민을 느꼈지만, 네 아버지가 악이라고 말한다면, 음, 네 아버지는 악이 아니야. 그가부서졌느냐고? 그래, 우리 모두 부서졌지. 솔직히."
그리고 밥은 다시 앉아야 했다. 가슴이 아팠다. 
그가 래리를 쳐다보았고, 래리는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이것이 밥의마음을 스쳤다. 이 아이가 어른이어야 할 이 아이가 입술을 내밀고 앉아 있구나. 그리고 그 모습은 밥이 보기에 매력적이지 않았다. - P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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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하지만,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ㅡ본문에서


책장 정리를 하다가 여기에 꽂혀 [작은 일기]를 다시 읽는다. 여전히 진행형인... 명치 끝이 찌르르해지는 아픔에 화들짝 놀랐다.
황정은의 소설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이 길어지겠단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늘고 있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지귀연, 그리고 조희대.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본 문장.
"연결성이라는 사슬로 이어져 모두가 동등하다" 나도 이런 말을 쓰고 싶다. 이런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향해 돌돌 구부러드는 생각은 접어두고, 보고 듣는 것만을, 찰나의 생각만을 기록하며, 삶이 내게 주는 감각을 편견 없이 흠뻑 음미하고, 그렇게 살고, 쓰고 싶다. 그런데자꾸 더러워진다.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 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이런 오염은 싫다.
- P114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내란 이후로 엘리트 카르텔과 부패의 면면을 이렇게 속속 확인하고 보니 이 사회의 ‘공부‘가 틀렸다는 걸 새삼, 정말로 뼈가 아프게 알겠다. 이제이 사회에서 어떤 이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건, 그를 양육한 보호자들에게 경제적, 문화적, 인적 자원이 충분했다는 것 말고,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이었는가를 오늘 알겠다. 윤석열이 구속되고 내가 꼬박 이틀을 잤다. 계엄 이후로 오늘이 가장 불안하다. - P115

윤석열의 석방 장면이 내게 그랬던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안긴 충격이 상당한가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까지 매일 동십자각에서 저녁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내란에 저항하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지난 토요일 집회에서는 비상행동 의장단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동십자각 앞에서 듣고 눈물이 찔끔 났다.
사람들이 또 몸을 다치는구나. 그게 싫다. 이날 행진은 평소보다 좀 길었는데 김보리는 잘 걷지 못했다.

오늘도 수 차례 가정한다.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걸 고민하면서 살아야하겠지. 지금보다 더.

머릿속이 맑지 않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 - P120

록산 게이의 칼럼 모음집을 읽기 시작했다. 희망보다는 가능성을 믿는다는 이야기에 깊이 감응했다. 나도 그렇다. 진작 그래왔다고 중얼거리며 서문을 읽었다. 희망을 나는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세상을 보는 마음엔 늘 모종의 믿음이 남아 있고 이것이 뭘까, 이것을 다른 이들은 뭐라고 부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가능성.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그 말을 발견하는 데 오래 걸렸다. 가능성을 믿는 마음, 그걸 믿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내게도 있다. 언제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 P171

나는 내가 본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내가 들은 것, 만진 것, 맡은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시선에 욕심을 담을까봐 거기 갈 수 없었다. 관찰의 눈으로, 목격하고자 하는 눈으로 그곳을 볼까봐. "내가 이 두 눈을 가지고, 거길 갈 수가 없어."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당시에 하고는했다.
했다.
보는 것 자체가 이렇게 두려우니 작가로서는 끝일까.
이렇게 약해서, 글쓰기가 되겠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반년이 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결벽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 P180

노동자, 농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온갖 시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어떤 부침을 겪고 있든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통당한 경험으로, 그 고통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감을 잃지 않는다면, 잊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그리고 다른 광장에서 옆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방석을 빌려주고 그와 먹을 걸 나누며다른 자리에서 이미 마주친 사람들이라는 걸 슬쩍슬쩍 알아본 것처럼, 앞으로 살아갈 시간 안에서 수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그도 곁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하니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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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나무 울타리 옆에 서서 기다리던 루시가 밥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루시 스스로는 아마 모르고 있겠지만, 그녀에게 순수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그녀가 서 있는 모습을 본 그의 내면에서 뭔가 금색의 것이 일렁였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그리고 그는 걸음을 멈추어야 했는데, 그가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정확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P295

루시가 한참 동안 강을 응시하다 이윽고 말했다. "밥, 우리모두는 흐르는 모래 위에 서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말로 알지는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삶에 언제들어오는지에 따라 그들의 허상을 만들어내죠. 젊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젊을 때 결혼하는데, 그 사람이 정말로 어떤사람인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해요. 그래서 같이 몇 년이고살면서 집을 같이 쓰고 아이들도 낳고ㅡ"그녀가 말을 멈추고 말했다. "미안해요."
"아니, 아니에요. 계속해요." 밥이 말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누군가와 결혼한다고 해도 그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그게 무서워요.
당신이 겁에 질려 있었다고 했잖아요? 내가 아는 한은 아마 모두가 겁에 질려 있을 거예요.  - P305

"내 나이에 지금의 자기 삶을 떠나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해요." 그녀는 그런 다음 침묵했다.
한참이 지나 밥이 말했다. "아, 루시 그건 가공의 인물이잖아요. 가공의 인물을 부러워할 수는 없어요."
"음, 난 부러운데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의 자기 삶을 떠나고 싶은 건가?) 그가 그녀를 흘끗 돌아보며 덧붙였다. "나도 알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알 거예요."
그가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당연한 거죠." 그녀가 말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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