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한별 글을 읽고 쓰고 옮기면서 산다. 지은 책으로[아무튼, 사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공저),[돌봄과 작업」(공저) 등이 있으며, 클레어 키건, 애나 댄스, 가즈오 이시구로, 데버라 리비, 버지니아 울프, 수전 손택, 시그리드 누네즈, 앨리스 오스월드, 조앤디디온, 리베카 솔닛 등의 책을 옮겼다. [밀크맨]으로 제14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 P-1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은 무려 135장(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래 같은 책이다. 줄거리는 어린이용 그림책으로 축약할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다. 에이해브 선장이 자신의 한쪽 다리를 앗아간 거대한 흰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흰 고래를 추적하다 마침내 최종 한판을 벌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린이 책으로 먼저 「모비 딕을 접한 사람은 원본의 두께에 당황하게 된다. 이렇게까지 길게 할 이야기인가? 그리고 한없이 곁가지를 뻗는 서술 방식에 또다시 당황한다. 이 책은 모비딕을 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광폭으로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도대체 모비 딕은 언제 나오나? 에이해브는? 에이해브는책의 4분의 1지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고래 뼈로 만든 의족을딛고 등장한다. 모비 딕은 135장으로 이루어진 책의 133장까지 가야 마침내 드디어 흰빛을 번뜩인다. "물줄기다! 고래가물을 뿜고 있다! 눈 덮인 산처럼 하얀 혹이다! 모비 딕이다!" 돌아버릴 지경으로 지연된 클라이맥스. - P13
번역을 시도한 적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흰 고래 같은 텍스트를 만났을 것이다. 잡히지 않는 공허. 포착할 수 없는 의미. 이쪽을 붙들면 저쪽을 놓치고, 저쪽을 잡으면 이쪽이 사라지는단어를, 의미를 고정하는 순간 무수한 틈이 생겨버리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붓질을 더할수록 더럽혀지기만 하는 순백을?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번역은 얼마나 투명해져야하는가?
번역은 투명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말에는 중요한문제가 하나 이상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투명한 번역이라는 말이 두 가지 정반대의 뜻으로 버젓이 쓰인다는 점이다. 대개 번역이 투명하다고 하면 번역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다. 특이하거나 거슬리는 단어나 표현 없이 술술 읽히고, 번역문이 아니라 마치 원문인 것처럼 읽힌다는 뜻이다. 그럴듯하고 자연스럽고 가독성이 높은 번역문을 만들어서 독자가 번역 과정을 인식하지 않고 원문을 읽듯이 읽을 수 있게 되면 번역과 번역자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보이지않게 된다. - P15
텍스트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그것을 꿰뚫지 않으면, 그것을 해방시키지 않으면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텍스트를 투명해질 정도로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벽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해도, 그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텍스트 너머의 침묵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아니, 번역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투명하다는 말조차 사람들이 서로 다른 뜻으로 쓰는데(사실 나도 이 글에서 같은 말을 두 가지 이상 다른 뜻으로 썼다)? 그래서 번역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번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용어와 개념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란 무엇이다, 번역은 어떠해야 한다는 논쟁은 특수한 상황과 개별 사례를 아우르지 못한 채 엉뚱한 곳에서 맴돌고 만다. 나는 번역을 명료하게 정의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 - P20
신은 없으니, 비유를 통해 비스듬하게 다가가려 한다. 내가 이책에서 하려는 이야기는 흰 고래를 정의하려는 이슈메일의 시도 같은 것이 될지 모른다. 이슈메일이 그랬던 것처럼, 번역의 사례를 들고, 번역을 분석하고, 번역을 해부하고, 번역을 설명하려다가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 쓴 글들은사람들이 저마다 번역을 어떻게 (같은 말로) 다르게 말하고 있느냐는 이야기이자, 번역이라는 실체 없는 행위를 말로 설명하려는 기도이자, 불가능한 번역을 정의하려는 불가능한 몸짓이자, 흰 고래를 그리려는 시도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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