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하지만,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ㅡ본문에서


책장 정리를 하다가 여기에 꽂혀 [작은 일기]를 다시 읽는다. 여전히 진행형인... 명치 끝이 찌르르해지는 아픔에 화들짝 놀랐다.
황정은의 소설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이 길어지겠단 생각을 한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기억해야할 이름들이 늘고 있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지귀연, 그리고 조희대.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본 문장.
"연결성이라는 사슬로 이어져 모두가 동등하다" 나도 이런 말을 쓰고 싶다. 이런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향해 돌돌 구부러드는 생각은 접어두고, 보고 듣는 것만을, 찰나의 생각만을 기록하며, 삶이 내게 주는 감각을 편견 없이 흠뻑 음미하고, 그렇게 살고, 쓰고 싶다. 그런데자꾸 더러워진다.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 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이런 오염은 싫다.
- P114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내란 이후로 엘리트 카르텔과 부패의 면면을 이렇게 속속 확인하고 보니 이 사회의 ‘공부‘가 틀렸다는 걸 새삼, 정말로 뼈가 아프게 알겠다. 이제이 사회에서 어떤 이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건, 그를 양육한 보호자들에게 경제적, 문화적, 인적 자원이 충분했다는 것 말고,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이었는가를 오늘 알겠다. 윤석열이 구속되고 내가 꼬박 이틀을 잤다. 계엄 이후로 오늘이 가장 불안하다. - P115

윤석열의 석방 장면이 내게 그랬던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안긴 충격이 상당한가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까지 매일 동십자각에서 저녁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내란에 저항하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지난 토요일 집회에서는 비상행동 의장단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동십자각 앞에서 듣고 눈물이 찔끔 났다.
사람들이 또 몸을 다치는구나. 그게 싫다. 이날 행진은 평소보다 좀 길었는데 김보리는 잘 걷지 못했다.

오늘도 수 차례 가정한다.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걸 고민하면서 살아야하겠지. 지금보다 더.

머릿속이 맑지 않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 - P120

록산 게이의 칼럼 모음집을 읽기 시작했다. 희망보다는 가능성을 믿는다는 이야기에 깊이 감응했다. 나도 그렇다. 진작 그래왔다고 중얼거리며 서문을 읽었다. 희망을 나는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세상을 보는 마음엔 늘 모종의 믿음이 남아 있고 이것이 뭘까, 이것을 다른 이들은 뭐라고 부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가능성.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그 말을 발견하는 데 오래 걸렸다. 가능성을 믿는 마음, 그걸 믿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내게도 있다. 언제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 P171

나는 내가 본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내가 들은 것, 만진 것, 맡은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시선에 욕심을 담을까봐 거기 갈 수 없었다. 관찰의 눈으로, 목격하고자 하는 눈으로 그곳을 볼까봐. "내가 이 두 눈을 가지고, 거길 갈 수가 없어."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당시에 하고는했다.
했다.
보는 것 자체가 이렇게 두려우니 작가로서는 끝일까.
이렇게 약해서, 글쓰기가 되겠나.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반년이 넘도록 글을 쓰지 못했다.
결벽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 P180

노동자, 농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온갖 시민,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어떤 부침을 겪고 있든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통당한 경험으로, 그 고통으로 이미 연결되어 있다는 감을 잃지 않는다면, 잊지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남태령에서 한강진에서 그리고 다른 광장에서 옆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고 방석을 빌려주고 그와 먹을 걸 나누며다른 자리에서 이미 마주친 사람들이라는 걸 슬쩍슬쩍 알아본 것처럼, 앞으로 살아갈 시간 안에서 수없이 서로를 알아보고 그도 곁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서,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가능하니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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