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나는 입체시가 생기기 전에도 내가 3차원으로 세상을 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는 3차원 세상에서 움직였고 원근과 음영, 그림자, 사물의 중첩 (뒤에 있는 사물이 앞에 있는 사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쪽 눈으로도 깊이를 지각할 수 있는 단서들을 통해 거리를 파악했다. 그러나 입체시가 생기자 나의 공간감은 질적으로 달라졌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 속의 반사된 공간에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입체맹이었을 때는 내 모습이 거울 표면 위에 있었다. 반사된 내 모습과 거울 표면 사이의 빈 공간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거울 유리에 묻은 얼룩은 마치 내 몸 위에 있는것처럼 보였고, 나는 옷에서 그 얼룩을 닦아 내려 했다. 요즘은거울을 보다가 잠시 한쪽 눈을 감아도 거울 속의 반사된 공간에있는 내가 보인다. 입체시가 생기자 한쪽 눈으로 보는 방식까지달라진 것이다. 그러니 평소에 늘 입체시가 있던 사람이 한쪽 눈을 감는다고 해서 늘 입체맹이었던 사람처럼 세상이 납작해 보이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은 평생 쌓아 온 입체시의 경험으로 입체 정보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운다.
입체시로 세상을 보자 물체 사이의 공간이 손에 만져질 듯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이 새로움이 무척이나 놀랍고 기뻤다.  - P45

수에게,


12일에 보내신 놀라운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방금 읽었는데, 완전히 빨려들어서 끝까지 집중해서읽었습니다(그래도 수차례 재독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 편지 이후로 논문 찾는 거며 연락 취하는 거며조사를 엄청 많이 하셨더군요- 그리고 생각도 무척이나많이 하셨고요. 어느 프랑스인의 말마따나, 교수님(그리고다른 사람들도)의 경험이 과연 "생각의 폭풍"을 일으켰나봅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수술 정보와 단안시가 된 
의사의 흥미로운 사례를 전해 주신 이전 편지에 제가 감사를 표했는지 잘 모르겠네요(요즘 집을 자주 떠나 있었습니다).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뒤늦게나마 지금이라도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4월 12일자의) 새 편지도 밥 와서먼과 랠프에게 한 부 복사해서보내겠습니다(며칠 뒤 직접 만날 예정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마저리 리빙스턴과 주고받은 편지였습니다-최근 뉴욕과학아카데미모임에서 허블과 비셀을 만나 (두 사람은 전에도 만난 - P73

적이 있습니다) 간략하게 교수님 이야기를 전했더니, 둘다 크게 관심을 보이며 저더러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하더군요. 교수님 말처럼 정설이 자리 잡았을지는몰라도, 둘은 생각이 활짝 열린 사람입니다.. 교수님께처음 편지를 받았을 때부터 줄곧 이 사안을 널리 (그리고현명하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지금으로선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지, 누가 그 일을 맡아야 할지 잘모르겠네요. 입체적인 안부를 전하며. - P74

자신의 경험이 일반적인 믿음이나 확고한 정설과 반대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자기 경험을 편향적이고 결함 있는것으로 치부해 버릴까, 아니면 권위에 의문을 제기할까? 올리버가 내 편지를 더없이 진지하게 받아 준 덕분에, 나는 자신감을가지고 내 경험을 신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올리버와 나의 공통점은 집요한 성격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둘 다 글을 쓸 때 생각이 가장 잘 풀렸다. 올리버가 나를 주인공으로 글을 써서 발표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올리버에게편지를 보냈다. 내 이야기를 검토하고 정리하고 결국 책으로 낼수 있었던 건 올리버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환자에서 주체로, 다시 저자로 변신했다. 하지만 너무 앞서나가진 말자. 그전에 먼저 "스테레오 수"가 있었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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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 퀸스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베스에이브러햄병원, 컬럼비아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신경과 의사, 교수로 활동했다.
독특한 신경학적 문제를 겪는 환자들의 사연을 따뜻한 시선과 아름다운 언어로 담아 낸<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뮤지코필리아> 등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증상과 병명으로 환자를 분류하기보다, 그들 각자가 세상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고유한 방식을 포착하고자 한 색스의 기록은 인간 뇌에 관한 현대의학의 이해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타임스》로부터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록펠러대학에서 탁월한 과학 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토머스상을 수상했다.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0여 년간 친구이자 동료 과학자인 수전 배리와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 P-1

수전 배리 Susan Barry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시건대학 재활의학과 조교수를 거쳐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 재직했다. 어릴 때 사시 교정 수술을 받았으나, 48세에 시력 훈련을 받고서야 난생처음 입체시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 경이로운 시각적 모험을 글로 써서 올리버 색스에게 보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입체시는 유년기의 ‘결정적 시기‘에만 발달할 수 있다는 의학계의 통념을 무너뜨린 배리의 이야기는 색스의 글 <스테레오 수>와 배리 자신의 저서 《3차원의 기적>을 통해 널리알려졌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에릭 캔델은 《3차원의 기적》에 대해 "한 편의 시이자 과학이며,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마법 같은 책"이라고 극찬했다. - P-1

우리의 눈알은 동그랗다. 허나 눈 뒤편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망막은평평하다. 사물이 내뿜는 빛은 망막을 통해 뇌에 2차원으로 전송될 수밖에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이다. 그래서 뇌는 움직이는2차원의 정보로 3차원의 입체를 만들어 낸다. 태양빛은 항상 위에서쏟아져서 명암이 지고, 눈은 두 개라서 위치를 미묘하게 다르게 볼 수 있기때문이다.
<디어 올리버>의 발신자 수는 어렸을 때 사시가 있었다. 두 눈의 초점이맞지 않으므로 수의 뇌는 한쪽 눈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래서수는 사물이 2차원으로 보이는 입체맹이 되었다. 뇌의 입체맹은 특정시기가 넘으면 극복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는 마흔여덟살에 훈련을 통해 기적적으로 입체맹을 극복했다. 학계에 보고된 바가없었던 이 사례는 올리버 색스와의 교류를 통해 <스테레오 수〉라는 불후의 칼럼이 된다. 수가 바라보는 세상이 평면에서 입체(스테레오)로 변모하는일대기가 이 서간에서 생생하다. - P-1

이후에도 그들의 지적 교류는 멈추지 않는다. 수는 신경생물학자기도했다. 두 사람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으로 화두를 돌리고,
서간을 통해 그들의 시야는 점차 넓고 깊어진다. 감각, 감정, 정신을다루는 문장의 영민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모든 생명체가 그들의 펜 끝에서 특별하게 변모한다. 둘은 150통의 편지를주고받으며 지적 존재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한 두뇌의 교류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 그들의 육체는 인간의 것이기에 점차 시들어 간다. 심지어색스 박사는 암 진단을 받고 시력을 점차 상실해 간다. 정신은 스스로를분석하고 진보하지만 결국 육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 P-1

없다. 투병 중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지적 항해를 계속하는 색스박사와 슬픔에만 침잠하지 않는 위로를 보내는 수의 우정이 눈부시다.
마지막으로, 영면에 드는 순간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을 탐구했던 올리버 색스를 애도한다.

남궁인 의사, 작가 - P-1

내가 처음으로 올리버 색스의 책을 접한 지 거의 이십 년이 흘렀지만, 그는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를 통해 배운 것들이너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알고 싶다면, 말을 건네야 한다는점이다. 이를테면, 당신, 어디가 아파요? 라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참, 이 단순해 보이는행위가 왜 그리도 어려운지! 올리버 색스는 바로 이 단순하고도 어려운행위의 대가였다.
어쩌면 이 책은 ‘입체맹‘이었던 수전이 입체시를 찾은 후 올리버와 함께이 세계의 모습을 새롭게 탐험한 여정의 기록이자, 그토록 이 세계의구석구석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던 올리버가 시력을 잃어 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기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삶은 지긋지긋한 고난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그 고난을 이겨 내게하는 건, 서로를 꽉 끌어안는 힘이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쳐 버린 것을위해 기꺼이 멈추어 서고, 타인을 바라보기 위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 그런 식으로 타인의 행복과 슬픔과 기쁨과 상실⋯을 알아보는 것. 그렇게 탄생하는 방대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연결, 연결들, 고동치는위로와 사랑, 누구든지 도달하고 싶은 눈부시게 새로운 세상이 이 책 안에,
수전과 올리버의 문장 속에 다 있다.

손보미  소설가 - P-1

올리버 색스가 이 편지를 내게 썼을 무렵, 우리는 이미 2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종이 위에 써서 봉투에 넣고 미 우편국을 통해 보낸 실물 편지였다.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50대였고 올리버는 70대였다. 나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신경생물학과 교수였고, 올리버는 신경학 병례집으로 이름을 떨친 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우리는 전부 합쳐서 150통이 넘는 편지를 썼고,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받았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갈림길을 만난다. 그중 어떤 것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선택할 때처럼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저멀리서 꺾이는 우회로처럼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다가 나중에야 인생을 바꾼 중요한 결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색스 박사에게 ‘정말이지 놀라웠던 그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만 해도, 나는 이 편지가 내 생각과 일, 심지어 정체성에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영향 - P14

을 미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을 뻔했다.
원래 그 편지는 내 ‘시력 일지‘에 적은 글이었다. 나는 마흔여덟 살까지 사시‘에 입체맹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두 눈의 초점을한곳에 맞춘 다음, 양쪽 눈에 입력된 정보를 뇌에서 통합해 단일한 3차원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내 눈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한쪽 눈으로만 보고 다른 한쪽의 정보는 무시했다. 그래서 3차원으로 볼 수 없었다. 입체시가 없을 때세상은 어수선하고 납작해 보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몇 달간시력 훈련을 받은 끝에 결국 두 눈의 초점을 한곳에 맞춰 입체의깊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고, 나는 이 놀라운 변화를 일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시력 일대기를 올리버 색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정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색스 박사를 그의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환자에게 깊이 공감하는 통찰력 있는 글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를 직접 만난적도 있었다. 9년 전쯤 우주비행사인 내 남편 댄이 존슨우주센터에서 색스 박사와 만나 안면을 텄다. 그 뒤로 첫 우주선 탑승을 기념하는 행사에 색스 박사를 초대했고, 그가 초대에 응했다 - P15

는 소식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행사 때 우리는 고작 5분간 대화했을 뿐이지만, 그날 색스 박사가 내게 던진 질문은 이후로도 계속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나는 시력 훈련을 통해 시각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잇달아 경험하면서 점점 더 자신감 있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었고, 머릿속에서 색스 박사와 몇 번이고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지는 그 내적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 P16

잭스 박사님께,
우리는 1996년 1월 10일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남편댄 배리가 우주왕복선을 타고 첫 임무를 떠나기 전날밤이었어요. 우리가 만난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저는 우주선 발사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을 대접하고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저는제 지각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다소 다르다고, 그건 늘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사시였고,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사님은 양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상상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상상할 수 있다고답했고요. 어쨌든 저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 P-1

신경생물학 교수니까요. 시각 처리와 양안시, 입체시에관한 논문을 그간 수없이 많이 읽었지요. 저는 그렇게얻은 지식으로 제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어요.
뛰어난 검안사의 조언에 따라 새 안경을 맞추고 매일시력 훈련을 거듭한 덕분에, 지난 2년간 저는 비로소 두눈을 함께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시각의 변화는 정말 대단했어요. 이제 세상은 더 둥글고, 더 넓고, 더깊고, 더 질감이 살아 있고, 더 세밀합니다. 가장 놀라운점은 물체 사이의 빈 공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시력은 계속해서 바뀌며 나날이 제게 새로운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하는사람을 본 적이 없는 터라,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상세히 풀어놓으려 합니다. - P17

잿빛만 보다가 갑자기 총천연색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갈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요?
매일 저는 강렬한 3차원의 감각을 느끼려고 꽃이나 제 손가락, 수도꼭지 같은 평범한 사물을 빤히 쳐다봅니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 입체경을 들여다봐요. 거의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로운 시력이 놀랍고 즐겁습니다.
어느 겨울날 저는 후딱 점심을 해치우려고 강의실에서 매점으로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어요. 강의실 건물에서겨우 몇 발짝 걸어 나왔을 때, 저는 돌연 멈춰 섰습니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송이들이 제 주위로 나풀나풀 떨어지고있었어요. 이제 눈송이 사이사이의 공간을 볼 수 있었고, 모든 눈송이가 아름다운 3차원의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옛날 같았다면 눈은 제 바로 앞에 펼쳐진 한 겹의 막 속에서 평평하게 떨어졌을 거예요. 마치 그와 동떨어진 곳에서 눈을 건너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죠. 하지만 그날 저는 떨어지는 눈 속에, 눈송이 사이에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한참 동안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눈은 대단히 아름다울수 있습니다. 눈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요. - P24

다음 날 댄에게 글을 보여 주자 댄은 색스 박사에게 보내 보라고 부추겼다. 나는 망설였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을 사시로 살다가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입체시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시각 발달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반세기간의 연구결과를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입체시는 오직 유아기에만 발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서 이 연구들을 잘 알았고, 수업 시간에 이 결정적 시기에 대해 수차례 가르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내가 3차원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 납득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색스 박사가 내 말을 믿어 준다고 해도, 내 시력에 일어난 변화가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운지 과연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힘겹게 새로 얻은 입체시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다른 사람이 내 경험을 심하게 부풀린 과장으로, 더 나아가 망상으로 치부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올리버 색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색스 박사의 저서 《깨어남》을 읽고 받은 첫인상을 다시 떠올렸다. 그 책에서 그는 중증 파킨슨병으로 수십 년간 움직임과 생각이 얼어붙은 사람들을 묘사했다. 색스 박사가 엘도파를 투약 - P25

하자 환자들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움직이고, 말하고, 머릿속에생각이 밀려들었다. 색스 박사는 이 환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파킨슨병을 앓는다는 것, 엘도파를 투약받는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상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색스박사는 환자들을 연민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공감했다.
물론 나의 시력 변화는 이 환자들의 변화만큼 파란만장하진않았지만 어쨌든 인생을 바꾼 뜻밖의 사건이었다. 어쩌면 색스박사는 세상이 내게 얼마나 달라 보이고, 다르게 느껴지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희망을 품고, 또 댄의 격려에 힘입어, 일지에 기록한 편지를 색스 박사에게 보내기로 했다. 편지 마지막에 짧은 글과 서명을 덧붙였다.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입니다. 시간과 의향이 있을 때 박사님의 의견을 보내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아, 저는 물론 박사님의 다음 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마음을 담아,
Sue Barry

그리고 용기를 잃기 전에 편지를 얼른우체통에 집어넣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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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노론에서 임금으로 추대하는 경우뿐이었다. 노론 외에는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를 지지하는 소론과 남인이은언군을 추대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은언군 문제는 정순왕후와 노론이정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정조보다정순왕후를 임금으로 받드는 노론의 속마음이었다.
정조가 은언군을 만난 것은 전날인 4월 13일이었다.
"그를 어제 만나 보았더니 살가죽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서 내려가거나 여기 머물러 있거나 아무 관계될 것이 없었다. 애당초 데리고 오게한 뜻에 비하면 지금 돌려보내는 것도 걸맞지 않은 일이지만 한 해에 한 번만나겠다는 뜻은 사사로운 정을 공법(法) 밖에서 펴자는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노론이 아니었다. 다시 김희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끝내 사(私) 한 글자를 끊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이런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사자를 제거하소서."
사간원 정언 안정선(廷) 등은 한술 더 떴다.
"이 역적이 한 번 섬에서 나오자 온 나라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만일 제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하면 종묘사직이 당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공법(法)일 뿐입니다.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 버리고 의리로 처단하소서."
은언군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정조는 다시 타협에 나섰다. - P139

이른 아침.
정조는 동궐(東闕)로 향했다. 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먼저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있는 동궐로 가서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촌수로는 할머니지만 영조 21년(1745) 생으로서 영조 28년(1752) 생인 정조보다 불과 일곱 살이 많을 뿐이었다. 사가 같으면 누이가 될 정도의 나이차였으나 열다섯 살에 예순여섯의 할아버지 영조와 대혼(婚)을치름으로써 법적인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영조 11년생(1735)인 혜경궁홍씨보다는 열 살이 적었으나 혜경궁 역시 어머니로 깍듯이 섬겨야 했다.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시켰다가 쫓겨난 전례가 있으므로 정순왕후를 대할 때 정조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국왕은 효도에 있어서도 모범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음은 모두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부친 김한구, 홍계희 - P152

짬禧) 등과 짜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 배후에는 정순왕후가있었다. 김귀주는 과거 급제도 못한 처지였으나 여동생이 국모가 되자 음보(蔭補)로 조정에 나와 왕비의 오라비라는 배경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는 그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정견을 갖고 있던 노른 벽과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정순왕후 또한 정조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조 즉위 후 오라비 김귀주가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 갔다가 끝내 나주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정순왕후의 친정에서 제공했다. 김귀주가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이런 인과관계를 무시했다.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에만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틈만 나면 언문 하교를 내려 정조의하나 남은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핏줄인 은언군을 죽이려 압박했다. 명분은 ‘국왕을 보호한다‘, ‘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구보다 그녀가정조를 저주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순왕후에게 은언군은 정조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먹이였다. 정조는 자신이 이 여인보다 먼저 죽으면 강화도의 은언군은 죽은 목숨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153

그러나 이때까지도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하나로 묶인 운명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에는 따랐으나 아들을 제거하려는 당론에는 강력히 저항했다. 자신의 저항이 없었어도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들의 즉위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했고, 비로소 혜경궁은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천생(天生)의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모두모순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친정을 몰락시켰다. 숙부는 사형당했고 부친은 연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격을받았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동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아들이 부친 사도세자의 복수에 나서면 모친인 자신의 친정이 다치는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혜경궁 자신과 국왕 아들이 함께 져야 할 업보였다.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상소에 아들은 "처분이 곧 뒤따를 것이다(從當處分)"라고 답했다. 처분이 뒤따른다는 것은 곧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혜경궁은 단식으로 맞섰고 아들은 겨우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혜경궁은 자신과 정조 모두가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정조가 이미 죽은 부친을 잊고 살아 있는 자신만을 위해 주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지만 정조는 부친을 잊지 않았다.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다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56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창밖은 어슴푸레했지만 정조는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난밤 야연 (야간 경연)에서 김재찬에게 한 말이 생각나 입가에 가만히 웃음이 떠올랐다.
"한번은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이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졌는데, 갑자기 한 줄기 닭 울음소리를 듣자 몽롱한 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청명(淸明)한 기운이 저절로 생겨서 이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일득록』4)
어제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을 다 읽지 못했기때문이다. 정조는 경연 후 시신(臣)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뒤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일득록』 1)
정조는 하루의 독서 목표량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무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독서할 틈을 찾을 수없었다. 정조는 일을 적체시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날 처리할 일은 그날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만기(萬機)를 친림(親臨)하는 국왕의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지들은 괴로워했다. 매일 새벽부터 출근해서 업무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 P172

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10)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 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받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이렇게 정조가 옥사를 재심리해 사형수를 사면하자 비방하는 소리가 나왔다. 국법과 기강이 무너진다는 비방이었다. 정조는 남공철에게 자신의옥사 판결 원칙을 설명하면서 비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나는 살릴 만한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한고조(高祖)의 약법(法)에 ‘남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 하였고, 당(唐) 태종(太宗)이 경계하여 삼간 바는 대옥)에 있었다. 죽여야 하는데 살린다면 죽은 자에게 원한이 남게 하는 것이고, 살릴만한데 죽인다면 살인자와 차이가 없다. 삼척(三尺)의 법이 지극히 엄한데내가 어찌 은혜로운 사랑으로 억지로 살리기 좋아한다는 이름을 붙이려 하겠는가... 나를 모르는 자들은 혹 반드시 죽일 자를 살리려 하는 것이라의심하는데 내 어찌 죽여야 하는 자를 살려 주려 하겠는가." (일득록」8)
정조의 옥사 판결은 살인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한 일과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 P217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 혜경궁)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모두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법도 때문이었다. 좌의정 심환지 등은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잠시 후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혜경궁이 세자와 함께 돌아가자 심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고, 부제조 조윤대가 정순왕후가 말한 성향정기산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가락을 정조의 입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도해 내기도 했다. 이시수가 강명길에게 진맥하게 했고, 진맥을 마친
강명길이 엎드려 말했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내시를 통해 다시 말을 전한것이다.
"주상의 병세는 풍 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했다.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약원 제조 김재찬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들여왔으나 정조는 마시지 못했다. 도제조 이시수는 이때 엉뚱하게도 수정전으로 달려가 정순왕후에게 경 - P246

과를 보고한다.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이시수가 통곡하자 정순왕후가 분부한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둘만 있었다. 위독한 정조 곁에 최대 정적 정순왕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 방 안에서 정순왕후의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론 벽파 심환지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전하(妃殿下: 정순왕후)와 자궁저하(慈宮邸下: 혜경궁 홍씨) - P247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문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 순간 대비 정순왕추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은 정조의 최대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숨을 거두었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조손(孫)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인 두 사람이었다.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의 나이는열한 살이었으므로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몰락했던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의 집안이 사는 것이었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조는 정순왕후와단둘이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정조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는알 수 없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4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양주(楊州)와 장단(長湍등의 고을에서는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이는 상복을입는 벼(居喪稻"라며 슬퍼했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꾸었던 갑자년의 구상도 개혁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P249

순조 1년(1801) 노론 벽파 정권은 정조의 사망 이후 풍천 부사에서 쫓겨난 유득공을 북경으로 보낸다. 「주자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거부하려 했으나, 순조 즉위 후 정조의 사랑을 받던 모든 이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든 노모가 적극 권유하자 마음을 바꿔 사은사 조상진(趙尙鑛)의 사행 행렬을 따라갔다. 유득공은 북경에서 과거 친분을 쌓았던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자 기윤(紀)을 만나 『주자』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다.
명백한 자멸의 길이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民)이 빈발하였다. 정조 재위 때는 민란이 없었다. 정조가 재위에 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군부(君父)께 아뢰기만 하면 억울함을 풀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사망하자 백성들은 임금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남에서 북에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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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 억지로 애써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몸소 행한 효과가 있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지금 도리어 온 세상이 사치스럽고 화려할 뿐 변화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다. 아마도 나의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습속이갑자기 변화하기 어려워 그런 것인가." (일득록」7)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발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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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난을 달관하며 이덕무는 독서에 열중했다. 그가 세상에서 집착하는 유일한 분야는 독서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눌해서 말은잘하지 못하고, 성격은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지금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 • 남창· 서창의 세창이 있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며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으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면 꺼리지 않고, "이덕무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새로운 책이 나오면 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싸서 보내 주기도 했다. 이덕무가 자신의 책을 빌려 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되었다. 그러나 책은 싸서 빌려 주었어도 음식을 싸서 보내 주지는 않았다. 기아는 늘 이덕무 곁에 있는 친구였다. - P162

박지원은 밖으로 나갔다. 뭘 하는가 보았더니 몸소 쌀을 씻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 출신이 쌀을 씻는 모습은 박제가로서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아주 익숙한 솜씨였다. 그제야 비로소 박제가는 이덕무가 박지원은 다르다‘고 거듭 말한 것이 이해가 갔다. 고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덕무가 칭찬하는 양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박지원은 그 예상까지 뛰어넘었다.
쌀을 다 씻은 박지원은 다관(茶罐)에 쌀을 넣고 익숙하게 밥을 지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장을 읽는 것보다 그의 밥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양반, 그것도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가 직접 밥을 하는 모습이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원은 흰 주발에 밥을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왔다. 반찬은 서너 가지뿐이었지만 술도 한 병 있었다. 박지원은 술잔을 들어 박제가를 축수했다.
박제가는 감격에 겨워 글을 지어 화답했고 박지원은 탄복했다.
백탑은 양반과 서얼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기도 했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서 부친 이원(李)은 영의정까지 추증 받은 명가 후손이었다. 이덕무보다는 열네 살, 유득공보다는 일곱 살, 박제가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으므로 학문과 시를 배울 목적으로 백탑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백탑은 여전히 서얼들의 무대였다. 서상수. 윤가기 • 이희경 같은 서얼들은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시 동인모임을 만들어 시를 지었다. 백탑파(白塔派)라는 명칭도 생겼다. 한시를 능숙하게 짓는 이 서얼들은 그러나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제 사회의 그늘일 뿐이었다. 그 그늘 속에서 그들의 학문은 햇볕보다 빛났다.
•166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P166

"수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평소 듣지 못하던 사실을 들었고, 중국의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옛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은 사실에 감탄했다. 그래서그들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하게 할 만한 것은 글로기록하고 아울러 그것을 시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설을 만들었다."(박제가, 「북학의 서문
북학파라는 실학의 중요한 한 조류는 벼슬길을 꿈도 꾸지 못하던 서얼출신 스물아홉 백두(白頭)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북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무릇 사대부로서 장차 팔짱 낀 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인습에 안주해 편안한 안락을 누리면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체할 것인가?"
그러나 「북학의에 아무리 조선을 잘살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내용을담았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학을 주장하는 박제가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최고의 학문과 경험을 지녔다 해도 서얼은 절대 등용될 수 없는 것이 곧 법이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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