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가난을 달관하며 이덕무는 독서에 열중했다. 그가 세상에서 집착하는 유일한 분야는 독서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눌해서 말은잘하지 못하고, 성격은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지금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 • 남창· 서창의 세창이 있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며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으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면 꺼리지 않고, "이덕무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새로운 책이 나오면 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싸서 보내 주기도 했다. 이덕무가 자신의 책을 빌려 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되었다. 그러나 책은 싸서 빌려 주었어도 음식을 싸서 보내 주지는 않았다. 기아는 늘 이덕무 곁에 있는 친구였다. - P162

박지원은 밖으로 나갔다. 뭘 하는가 보았더니 몸소 쌀을 씻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 출신이 쌀을 씻는 모습은 박제가로서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아주 익숙한 솜씨였다. 그제야 비로소 박제가는 이덕무가 박지원은 다르다‘고 거듭 말한 것이 이해가 갔다. 고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덕무가 칭찬하는 양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박지원은 그 예상까지 뛰어넘었다.
쌀을 다 씻은 박지원은 다관(茶罐)에 쌀을 넣고 익숙하게 밥을 지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장을 읽는 것보다 그의 밥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양반, 그것도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가 직접 밥을 하는 모습이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원은 흰 주발에 밥을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왔다. 반찬은 서너 가지뿐이었지만 술도 한 병 있었다. 박지원은 술잔을 들어 박제가를 축수했다.
박제가는 감격에 겨워 글을 지어 화답했고 박지원은 탄복했다.
백탑은 양반과 서얼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기도 했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서 부친 이원(李)은 영의정까지 추증 받은 명가 후손이었다. 이덕무보다는 열네 살, 유득공보다는 일곱 살, 박제가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으므로 학문과 시를 배울 목적으로 백탑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백탑은 여전히 서얼들의 무대였다. 서상수. 윤가기 • 이희경 같은 서얼들은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시 동인모임을 만들어 시를 지었다. 백탑파(白塔派)라는 명칭도 생겼다. 한시를 능숙하게 짓는 이 서얼들은 그러나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제 사회의 그늘일 뿐이었다. 그 그늘 속에서 그들의 학문은 햇볕보다 빛났다.
•166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P166

"수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평소 듣지 못하던 사실을 들었고, 중국의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옛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은 사실에 감탄했다. 그래서그들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하게 할 만한 것은 글로기록하고 아울러 그것을 시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설을 만들었다."(박제가, 「북학의 서문
북학파라는 실학의 중요한 한 조류는 벼슬길을 꿈도 꾸지 못하던 서얼출신 스물아홉 백두(白頭)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북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무릇 사대부로서 장차 팔짱 낀 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인습에 안주해 편안한 안락을 누리면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체할 것인가?"
그러나 「북학의에 아무리 조선을 잘살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내용을담았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학을 주장하는 박제가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최고의 학문과 경험을 지녔다 해도 서얼은 절대 등용될 수 없는 것이 곧 법이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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