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노론에서 임금으로 추대하는 경우뿐이었다. 노론 외에는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를 지지하는 소론과 남인이은언군을 추대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은언군 문제는 정순왕후와 노론이정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정조보다정순왕후를 임금으로 받드는 노론의 속마음이었다. 정조가 은언군을 만난 것은 전날인 4월 13일이었다. "그를 어제 만나 보았더니 살가죽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서 내려가거나 여기 머물러 있거나 아무 관계될 것이 없었다. 애당초 데리고 오게한 뜻에 비하면 지금 돌려보내는 것도 걸맞지 않은 일이지만 한 해에 한 번만나겠다는 뜻은 사사로운 정을 공법(法) 밖에서 펴자는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노론이 아니었다. 다시 김희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끝내 사(私) 한 글자를 끊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이런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사자를 제거하소서." 사간원 정언 안정선(廷) 등은 한술 더 떴다. "이 역적이 한 번 섬에서 나오자 온 나라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만일 제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하면 종묘사직이 당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공법(法)일 뿐입니다.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 버리고 의리로 처단하소서." 은언군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정조는 다시 타협에 나섰다. - P139
이른 아침. 정조는 동궐(東闕)로 향했다. 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먼저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있는 동궐로 가서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촌수로는 할머니지만 영조 21년(1745) 생으로서 영조 28년(1752) 생인 정조보다 불과 일곱 살이 많을 뿐이었다. 사가 같으면 누이가 될 정도의 나이차였으나 열다섯 살에 예순여섯의 할아버지 영조와 대혼(婚)을치름으로써 법적인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영조 11년생(1735)인 혜경궁홍씨보다는 열 살이 적었으나 혜경궁 역시 어머니로 깍듯이 섬겨야 했다.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시켰다가 쫓겨난 전례가 있으므로 정순왕후를 대할 때 정조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국왕은 효도에 있어서도 모범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음은 모두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부친 김한구, 홍계희 - P152
짬禧) 등과 짜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 배후에는 정순왕후가있었다. 김귀주는 과거 급제도 못한 처지였으나 여동생이 국모가 되자 음보(蔭補)로 조정에 나와 왕비의 오라비라는 배경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는 그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정견을 갖고 있던 노른 벽과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정순왕후 또한 정조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조 즉위 후 오라비 김귀주가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 갔다가 끝내 나주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정순왕후의 친정에서 제공했다. 김귀주가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이런 인과관계를 무시했다.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에만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틈만 나면 언문 하교를 내려 정조의하나 남은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핏줄인 은언군을 죽이려 압박했다. 명분은 ‘국왕을 보호한다‘, ‘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구보다 그녀가정조를 저주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순왕후에게 은언군은 정조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먹이였다. 정조는 자신이 이 여인보다 먼저 죽으면 강화도의 은언군은 죽은 목숨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153
그러나 이때까지도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하나로 묶인 운명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에는 따랐으나 아들을 제거하려는 당론에는 강력히 저항했다. 자신의 저항이 없었어도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들의 즉위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했고, 비로소 혜경궁은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천생(天生)의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모두모순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친정을 몰락시켰다. 숙부는 사형당했고 부친은 연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격을받았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동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아들이 부친 사도세자의 복수에 나서면 모친인 자신의 친정이 다치는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혜경궁 자신과 국왕 아들이 함께 져야 할 업보였다.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상소에 아들은 "처분이 곧 뒤따를 것이다(從當處分)"라고 답했다. 처분이 뒤따른다는 것은 곧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혜경궁은 단식으로 맞섰고 아들은 겨우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혜경궁은 자신과 정조 모두가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정조가 이미 죽은 부친을 잊고 살아 있는 자신만을 위해 주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지만 정조는 부친을 잊지 않았다.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다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56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창밖은 어슴푸레했지만 정조는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난밤 야연 (야간 경연)에서 김재찬에게 한 말이 생각나 입가에 가만히 웃음이 떠올랐다. "한번은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이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졌는데, 갑자기 한 줄기 닭 울음소리를 듣자 몽롱한 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청명(淸明)한 기운이 저절로 생겨서 이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일득록』4) 어제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을 다 읽지 못했기때문이다. 정조는 경연 후 시신(臣)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뒤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일득록』 1) 정조는 하루의 독서 목표량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무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독서할 틈을 찾을 수없었다. 정조는 일을 적체시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날 처리할 일은 그날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만기(萬機)를 친림(親臨)하는 국왕의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지들은 괴로워했다. 매일 새벽부터 출근해서 업무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 P172
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10)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 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받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이렇게 정조가 옥사를 재심리해 사형수를 사면하자 비방하는 소리가 나왔다. 국법과 기강이 무너진다는 비방이었다. 정조는 남공철에게 자신의옥사 판결 원칙을 설명하면서 비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나는 살릴 만한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한고조(高祖)의 약법(法)에 ‘남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 하였고, 당(唐) 태종(太宗)이 경계하여 삼간 바는 대옥)에 있었다. 죽여야 하는데 살린다면 죽은 자에게 원한이 남게 하는 것이고, 살릴만한데 죽인다면 살인자와 차이가 없다. 삼척(三尺)의 법이 지극히 엄한데내가 어찌 은혜로운 사랑으로 억지로 살리기 좋아한다는 이름을 붙이려 하겠는가... 나를 모르는 자들은 혹 반드시 죽일 자를 살리려 하는 것이라의심하는데 내 어찌 죽여야 하는 자를 살려 주려 하겠는가." (일득록」8) 정조의 옥사 판결은 살인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한 일과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 P217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 혜경궁)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모두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법도 때문이었다. 좌의정 심환지 등은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잠시 후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혜경궁이 세자와 함께 돌아가자 심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고, 부제조 조윤대가 정순왕후가 말한 성향정기산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가락을 정조의 입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도해 내기도 했다. 이시수가 강명길에게 진맥하게 했고, 진맥을 마친 강명길이 엎드려 말했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내시를 통해 다시 말을 전한것이다. "주상의 병세는 풍 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했다.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약원 제조 김재찬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들여왔으나 정조는 마시지 못했다. 도제조 이시수는 이때 엉뚱하게도 수정전으로 달려가 정순왕후에게 경 - P246
과를 보고한다.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이시수가 통곡하자 정순왕후가 분부한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둘만 있었다. 위독한 정조 곁에 최대 정적 정순왕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 방 안에서 정순왕후의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론 벽파 심환지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전하(妃殿下: 정순왕후)와 자궁저하(慈宮邸下: 혜경궁 홍씨) - P247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문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 순간 대비 정순왕추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은 정조의 최대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숨을 거두었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조손(孫)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인 두 사람이었다.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의 나이는열한 살이었으므로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몰락했던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의 집안이 사는 것이었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조는 정순왕후와단둘이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정조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는알 수 없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4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양주(楊州)와 장단(長湍등의 고을에서는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이는 상복을입는 벼(居喪稻"라며 슬퍼했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꾸었던 갑자년의 구상도 개혁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P249
순조 1년(1801) 노론 벽파 정권은 정조의 사망 이후 풍천 부사에서 쫓겨난 유득공을 북경으로 보낸다. 「주자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거부하려 했으나, 순조 즉위 후 정조의 사랑을 받던 모든 이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든 노모가 적극 권유하자 마음을 바꿔 사은사 조상진(趙尙鑛)의 사행 행렬을 따라갔다. 유득공은 북경에서 과거 친분을 쌓았던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자 기윤(紀)을 만나 『주자』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다. 명백한 자멸의 길이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民)이 빈발하였다. 정조 재위 때는 민란이 없었다. 정조가 재위에 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군부(君父)께 아뢰기만 하면 억울함을 풀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사망하자 백성들은 임금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남에서 북에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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