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장만하시려고요? 이왕이면 십장생으로 하지 그러세요?"
"병풍은 십장생보다 신사임당 초충도가 끌린단 말이야. 풀하고 꽃하고 곤충 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노는 모습이 묘하게 흥분을 일으키커는 화사하면서도 소박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재치와 농담이 넘친단 말이야. 섬세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단순하고 담박해."
"신사임당 초충도 8폭 병풍이라면 우리 친정에도 있는걸요.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손수 수를 놓으신 병풍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1폭에 가지하고 방아깨비가 수놓아져 있던 게 기억나네요………."
"어디 가지하고 방아깨비뿐인가! 개미도 기어다니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벌도 날아다니지 2폭에는 수박하고 들쥐하고 패랭이꽃하고 호랑나비가 등장하는데 들쥐 두 마리가 수박을 파먹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단 말이야. 3폭에는 어숭이, 개구리, 원추리, 매미가..... 4폭에는 여뀌, 메꽃, 잠자리, 벌, 사마귀......"
"5폭에는요?"
맨드라미, 산국화, 나비, 쇠똥벌레………"
"그럼 6폭에는요?" - P264

"어숭이꽃, 도라지, 나비, 벌, 잠자리, 개구리, 메뚜기......
"형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세요?"
"보고, 보고, 보다 보면 저절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나는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가물가물만 하지 뭐예요."
"감탄을 하면서 봐야 기억이 되지. 한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 하고, 백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천번을 봐도요?"
"천번이 아니라 천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어떻게 천만 번 다 감탄을 하면서 본데요."
"천만 번이 아니라 백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제대로 감탄을 할 줄 아는 것도 재능이야." - P265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 중의 명물(物)이요, 철 중의 쟁쟁이라. 민첩하고날래기는 백대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추호(秋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뚜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독수리요?"
"누라와 비단에 난봉과 공작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미칠 바리요."
"아, 바늘이요!"
"바늘에 대한 글귀들중에 유씨 부인의 초침문을 따라갈 글귀가 또 있을까."
해가 기울도록 여자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서쪽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건어물 행상 여자로부터 사두었던 멸치를한 주먹 우려 국물을 내고, 배추전을 부칠 밀가루를 반죽했다.  - P267

장독에서 간장을 뜨고 돌아서던 금택은 화들짝 놀랐다. 간장 뜨는모습을 지켜보았는지 옥 사모님이 금택의 뒤에 서 있었다.
"짐승의 눈동자 같구나."
"네?"
"흰 종지에 담긴 간장이 짐승의 눈동자 같아."
금택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종지를 들여다보았다. 옥 사모님의 말대로 종지 속 간장은 짐승의 눈동자 같았다. - P267

명주 한 필은 치마와 저고리 한 벌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명주를 가슴에 끌어안고 서쪽 방에서 나온금택은 마당을 건너다 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꽁꽁 언 밤하늘은 무쇠 가위나 무쇠 식칼을 갈 때 숫돌에 흐르는 물빛이었다. 뭉텅뭉텅 떨어져 흐르는 구름들은 생인손을 앓는 손톱처럼 검푸르고 아파 보였다. 금택은 불현듯부령할매가 그리웠다. 까맣게 잊고 있던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오르려고 해서 얼른 고개를 저어 지워버렸다.
부령할매를 만나면 금택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늘이 쥐날인지, 호랑날이지, 뱀날인지, 돼지날인지, 원숭이날인지······ 쥐날이었다면 부령할매는 하루 종일 바늘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옷감이 풀리는 방향인 식서 방향으로 올을 튕기는 것은 집중을요구했다. 튕길 올을 골라내는 것부터가 벌써 까다로웠다. 가위로 재단한 부분은 올이 약간 풀려 있기 마련이었다.  - P271

올 여섯 줄을 튕기고 나서야 금택은 한숨 돌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올을 튕겨 표시한 누비 선들을 바라보았다. 0.3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표시된 누비 선들이 금택은 거문고 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손으로 튕기면 소스라치듯 떨면서 ‘덩‘ 하고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타듯 누비 선들을 타면 ‘덩, 둥, 등, 당, 동, 징‘ 울림과 높낮이가 다른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명주실로 만든다는소리를 금택은 음악 시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올을 튕길 때 어머니는 거문고나 가야금 줄을 고르는 것 같았다.
딸들이 올을 튕겨 가져다준 명주로 어머니는 저고리와 치마를 한벌 지었다. - P273

화순에게 바늘을 들게 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금택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친딸이 금택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바늘을 들었다. 금택에게 진실을 똑똑히 일깨워주기 위해
바늘만큼 진실을 분명하게 깨우쳐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화순은 알았다. 바늘은 화순이 말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진실을 금택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금택이 특별히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것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우물집으로 달려오는 것은, 순전히 바늘 때문이었다. 금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끝내듯 자신 몫의 집안일을 한 뒤 바늘을 들었다. - P282

어머니의 오른손 흉터가 북두칠성처럼 신비롭게 다가온 뒤로, 금백은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흉터를 고스란히 자신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것은 바늘을 훔치고 싶던 충동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활동에 사로잡힌 금택은 바늘 끝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지느러미처럼 붙어 있는 살을 찔렸다.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혔다. 반짝이는 그 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을 또 바늘로 찔렀다. 바늘끝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히는 순간 황홀감으로 바뀌었다.
황홀감에 취해 눈동자 초점이 몽롱하게 풀어진 금택의 귀에 화순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황홀감에 취한 금택은 비로소, 바늘땀과 바늘땀의 거리가 별과 별의 거리만큼 멀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늘땀과 바늘땀 사이, 기껏해야 좁쌀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안에는 몇 백 광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했다.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지만 바늘땀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다. - P286

지독한 무기력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소일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우물집에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언젠가 자신과 화순 둘 중 하나는 우물집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은 고질적이 것이었다. 자신과 화순둘 다 우물집에, 어머니 곁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금택은 화순과 자신이 급격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질적으로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았다. 두 기질이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밀어낸다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우물집을, 어머니를 떠나는 날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다.
그녀는 떠나는 쪽이 자신이 될까 봐 두려웠다. 화순이 어머니의 친딸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화순이 스스로 떠남으로써, 그녀의 고질병처럼 오래된 강박과 두려움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 P305

며칠 뒤, 금택은 서쪽 방에 들었다가 어머니가 새로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보았다. 화순이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우물집을 떠날 즈음부터 짓던 누비저고리였다. 누비대 위에 놓여 있는 누비저고리는 언젠가 화순이 우물 속에 수장시킨 누비저고리와 비슷했다. 한 마리의두루미 같던.
어머니는 서쪽 방에도, 부엌에도 없었다. 석 달에 걸쳐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누비대 위에 펼쳐놓고 뒷산에 든 것이 틀림없었다.
금택은 누비저고리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골이 지게 반복해서뜬 바늘땀들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바늘땀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0.2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떠 넣은 바늘땀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바늘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미묘한 역동 속에서 서로 밀고 끌어당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누비저고리 앞섶을 들추고 그안으로 손가락들을 밀어 넣고는 더듬기 시작했다. 더듬으면 심장이 만져질 것 같아서. - P319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을 태우고, 새로 옷을 해 입혔다. 어머니의 단골들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었다. 그녀들이 죽은 뒤 남겨질 옷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들이 어머니에게서 지어다 입은 누비저고리나 누비치마나 누비마고자가 남겨질 생각을 하자.
검정 저고리를 금택은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서쪽방에서 주운 천 조각들 위에, 검정 저고리는 죽는 까마귀였고, 천 조각들은 새들의 찢긴 날개였다. 온갖 새의 찢긴 날개를 죽은 까마귀가 품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마을 어떤 여자가 죽은 사람 옷을 태우는 것을 봤어요. 죽은 사람옷을 죄다 마당에 끌어내놓고 태우고 있었어요. 한 장, 한장 불길 속으로 던지면서 태우고 있었어요……"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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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점에 살 때, 부령할매에게서 수의를 해간 여자가 붉은 팥 한 말과 노란 좁쌀 한 말을 싸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가 원삼을 입혀드리자 기적처럼 성불(成佛)하셨다고,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붉은 팥과 노란 좁쌀을 앞에 펼쳐놓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연둣빛 길에 자줏빛 깃을 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색동으로 소매를 단 원삼을 입혀드리자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성불하셨어요.....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는 걸 일평생 위안 삼아 사셨을 만큼 박색인 어머니가 천하일색 양귀비나 황진이 뺨치게 어여뻐 보이더라니까요."
중얼거리는 내내 여자는 붉은 팥알을 손으로 집었다 놓았다 했다.

금택은 장의사의 한지꽃을 접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내내 한지꽃을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불어나 무덤처럼 자신을 덮도록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 무덤 속에서도 여자가 한지꽃을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읍내 거리를 덮도록 접을 것 같았다. 읍내 전체가 한지꽃으로 뒤덮인 거대한 상여가 될 때까지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 P192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또다시 금택을 찾아왔다. 그 소리는 금택이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금택은 서쪽 방 들창 밑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 어느 날처럼 부령할매가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그곳까지 따라와 떠돌았다. 뒷산으로 난 들창은 한 뼘 정도 들려 있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에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겉돌았다.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다가 어느 순간 화음을 만들어냈다.
광목 조각 같은 참새들이 탱자나무 가시들 속으로 날아들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 금택은 기분이 이상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가 산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서. 죽음이 목숨을 불러온 것 같아서. - P204

누비옷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옥 사모님은 오랜 단골들과 달랐다. 어머니가 자리라도 비우면 어머니에 대해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다른 단골과도 달랐다. 옥 사모님은 햇수로 치자면 어머니와 인연이 가장 짧았지만, 어머니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른 단골과 다르게 어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문한 누비옷이 완성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삼회장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입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닷새 전에도 옥 사모님은 우물집에 다녀갔다. 어머니가 두 달 내내매달려 완성한 누비치마를 두르면서 그녀는 말했다.
"땅을 두르는 것 같아." - P219

옷감이 다양하지 않다는 단골들의 불만을 금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우물집 마당과 뒷산에서 얻은 씨앗이나 잎, 열매, 나무껍질, 뿌리 등을 재료로 내는 색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색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색을 입은 옷감들 역시 그 어디에도 없는, 서쪽 방에만 있는 옷감들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끊어오는 옷감들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차원이 다른 옷감들로 재탄생했다. 무명이면서, 무명과 다른 차원의 옷감이 되었다. 염색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깔을 입고, 푸새와 다듬이질을 거쳐 이 세상 어디에도없는 질감과 광택을 띤.
나흘 전 어머니가 양파 껍질을 재료로 무명에 들인 노란색은 엄밀히 말해 노란색이 아니었다. 노란색을 넘어서는 그 어떤 색이었다. - P223

버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난 뒤에는 삼베휴먼지가 날리듯 일했다. 부슬비가 온종일 촉촉하게 내린 이튿날에는 명주휴먼지가 차분하고 우아하게 일었다. 얌전하고 새침한 여학생의 까만 운동화 뒤회에서는 자미사흙먼지가 자미사는 얇고 부드러워 초가을 옷감
으로 쓰였다. 그것으로 치마를 해 입으면 걸을 때 사각사각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신작로를 따라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필즈음이면 노방흙먼지와 한라흙먼지가 한복 치마의 안감과 겉감처럼 겹쳐 일었다. 소의 혀같은 구름이 낮게 하늘을 뒤덮어 바람이 거의 일지 않는 날에는 양단홈먼지가 낮고 묵직하게 깔려 일었다. 바람이 잔잔하고 햇빛이 화창한 날에는 숙고사흙먼지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듯 일었다. 초봄에는 결이 촘촘하고 빳빳한 옥사흙먼지가 쌀쌀하게 손사래 치듯 일었다. 초복부터 중복까지 한여름에는 주로 툭툭한 광목흙먼지가, 건조하고 맑은 가을날에는 까끌까끌하고 쌍그런 모시흙먼지가 일었다.
모시흙먼지와 삼베흙먼지는 비슷한 듯 천지 차이였다. 모시흙먼지는 곱고 빛깔이 매화꽃처럼 고왔지만, 삼베흙먼지는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황달이 든 듯 누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P239

건어물 행상 여자가 다녀갔는지 마루에 멸치가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넉 달 전쯤 찾아왔을 때 그녀의 배는 불러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새로 짓고 들깨토란탕을 끓여 그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을만 들깨토란탕을 연신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말했다. 배가 불러 행상을 다니는 자신이 불쌍하고 안쓰러운지 문전박대하는 집 없이 냉수라도 한 대접 먹여 보내더라고, 목이 타입이 간장좋지 같을 때는 냉수가 꿀물이라고… 금택은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지 딸을 낳았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가 또 딸을 낳았을 것 같아서였다.
걸쭉한 들깨 국물에 희멀건 토란이 둥둥 떠다니는 들깨토란탕은 운문 양단이었다. - P243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누비옷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는 바늘과 실로 꽃이나 나비를 그리지 않았다. 흠질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바느질로, 가장 작은 바늘땀을 반복해서떴다. 점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떴다.
누비 바느질은 점을 통해 선에 도달했지만, 자수는 선을 통해 면에도달했다.
금택에게는 황금색 실로 입체감 있게 수놓은 나비나 꽃보다 0.2. 0.3센티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그리는 선이 훨씬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금택은 어머니가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이라는 말을입속에서 중얼거리는 순간 갈비뼈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 같은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떨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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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랑몰랑한 백설기를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오전일한시경 부스에 든 뒤로 화장실에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사이 햇살요양원 마당을 거닐던 노인들은 사라지고 없다. 늦은 오후의 산책을 끝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증발해버린 것 같다.
그녀는 의자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은색 파우치를 꺼낸다.
화장품 가게에서 사은품으로 얻은 파우치다. 파우치 지퍼를열고 립스틱을 꺼내든다. 립스틱을 바르자 입이 얼굴과 겉돌면서 붉게 떠오른다. 그녀는 립스틱을 덧바른 뒤 도로에 두눈을 고정시킨다.
석양이 깔려와 부레처럼 부풀어 보이는 도로 위로 차가 한대 나타난다. 차는 음산요금소를 향해 느리지도, 빠르지도않은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온다. 차 종류와 색깔이 잘 분별이 안 된다. 그녀는 방금 립스틱을 발랐다는 것을 망각하고는 립스틱을 덧바르며, 검은색 그랜저가 아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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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생각했다. ‘릴리트‘라는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의사진이 그토록 끔찍하진 않았으리라.
릴리트는 유대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로, 최초의 여자이자아담의 첫 아내였다. 민담에 따르면, 하느님은 릴리트를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은 뒤 코에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릴리트는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첫날밤, 아담이 동침하려 했지만 릴리트는 그의 밑에 깔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주인이자 남편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릴리트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다. 얼마 뒤 하느님은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여자이자 아담의 아내는 릴리트가 아닌 하와가 되었다. - P21

철식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어깨를 움츠렸다. 한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카메라 렌즈를향했고, 철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흑백사진 속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내질렀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이 자신이 생각했던것보다 훨씬슬픈 얼굴이어서, 슬픔이 깊어지면 감탄을 자아낸다는 걸,
어머니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녀는 철식에게 물었다.
"악랄한 포주처럼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럽지 않을까? 더구나 아이가 아버지의 눈빛을 하고 있으면 그아이가 끔찍하지 않을까?"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 - P44

깻잎 밑에서 뛰고 있는 것은 아가미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어머니의 오그라든 심장이, 깻잎 밑에서 자맥질하듯 뛰고있었다.


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 P46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 P58

불멸할 것 같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는 생각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은 아버지에게 가장 존귀한사람을 보내주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 사람을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고. - P62

지난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게 아니야‘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들은 뒤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한 말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오래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걸.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자신의 영혼조차 어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혼이 나는 통과의례 같아. 나도, 당신도 피할 수 없는통과의례, 시속 백이십 킬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그래...... "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그래야겠지......" - P64

울산요금소를 통과하는 기분이 어떤지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 육 년 전 폐쇄된 요금소를 통과해 흘러든 뒤로 도시를벗어났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 화투장처럼 쌓인 ‘고속도로 통행권‘들이 미처 지불하지못한 고지서 같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순간순간 청구된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요금이 적힌 고지서들이 그녀 자신 앞에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쌓여 있는 것 같다. 뒤적뒤적 통행권들을 살피던 그녀는 한 장을 집어들고, 그것에 인쇄된 문장을소리내 읽는다. "통행료 미납, 기타 부정한 통행료 면탈의 경우 당행 통행료 외에 열 배의 부가 통행료를 부과합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하이패스 구간을 통과해 도시를 빠져나간다. 1.5톤 트럭 적재함에 실린 세간들이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것 같다. 그녀가 음산요금소 부스를 지키는 동안, 그녀의 원룸 세간들이 꾸려져 다른 도시로 보내지는 것같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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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니는 바늘하고 인연이 있는가 봐예. 스물네 살에 잡은 바늘로 먹고살고 있으니예. 남들은 시집 가서 아를 낳아도 둘은 거뜬히낳았을 나이에 바늘을 다 잡았네예?"
여자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다문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예, 역마살이 끼어서 바늘하고 인연이 안 된 것같아예, 의성서 만난 관상쟁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예,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대예. 도화살까지 끼었으면 폐가망신할 팔자였다고하대예. 엉덩이가 벌레 묵은 복숭아츠럼 짓무르도록예, 진득하니 앉아서 해야 하는 게 바느질인데예, 그놈의 역마살이 끼었으니 말이지예. ……더듬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예. 할머니하고 천쪼가리들 이어 조각보 지을 때가에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 그림자하고 내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지예.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어예." - P121

일곱 살에 바늘을 든 여자는 건어물 행상을 업으로, 스물네 살에바늘을 든 여자는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가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은 금택에게 불가해한 일처럼 신기하고 두렵게 다가왔다. 그것은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이라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과는 또 달랐다.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운명은 엇갈렸지만, 그녀들은어쨌든 둘 다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고 있었다. 바느질하는 여자라는운명으로 묶여 있었다. 어쨌든 복래한복 주인 여자도 바느질하는 여자였고, 월성댁도 바느질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금택은 자신과 화순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려 전개될지 궁금했다.
건어물 행상 여자와 어머니의 엇갈린 운명과도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엇갈린 운명과도 다르게 전개되리라는 짐작만 막연히들었다. - P124

어머니는 감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면 씨를 받기 위해 부추를 더는베어 먹지 않고 꽃이 피도록 내버려두었다. 꽃이 피었다 져야만 씨를 받을 수 있다는 걸 금택은 부추를 통해 깨달았다. 처서가 지나면감나무 가지들은 시합하듯 지붕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그림자를길게 드리웠다.
우물집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바늘이었고, 햇살은 햇살실이었다.
햇살실에는 명주햇살실과 무명햇살실과 초를 먹여 빳빳해진 명주햇살실이 있었다.
바람바늘의 귀는 누비 바늘의 귀보다 작았다. 동틀 즈음에야 바람바늘의 귀에 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바람바늘이 부드럽게 감치고지나간 자리마다 바늘땀이 떠졌다. 파리가 똥 싸듯 바늘땀이 떠졌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할 즈음이면 바람바늘의 귀에는 초를 먹인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정오 즈음에는 무명햇살실로 바뀌어 꿰어졌다. - P127

자연과 밀접한 낱말을 먼저 자신들에게 가르쳤다. 계절을 가르치고,
낮과 밤과 새벽 같은 시간대를 가르쳤던 것이다.
새벽이라는 낱말을 먼저 써 보이기 전에 어머니는 말했다.
"새벽은 세상 모든 눈동자가 익은 밤송이처럼 열리는 시간이야."
자매가 갱지에 ‘새벽‘을 반복해서 쓰는 동안, 어머니는 누비대 위양단 조끼에 바늘땀을 떠 넣었다.
겨울이 깊어지자 어머니는 거울과 빗 같은 사물 이름을 가르쳤다.
금택과 화순은 비슷한 속도로 낱말을 익혀 나갔지만, 저마다 더 빨리 익히는 낱말이 있었다. 금택은 자연과 계절이나 시간과 밀접한낱말을 더 빨리, 화순은 사물 이름을 더 빨리 익혔다. 금택이 단번에외운 새벽이라는 낱말을 화순은 백 번 넘게 반복해서 쓰고 나서야 겨우 익혔다.
가을과 겨우내 어머니가 가르쳐준 서른 개 남짓한 낱말들 중 금택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낱말은 ‘땅‘이었고, 화순은 ‘거울‘이었다.
‘땅‘이라고 갱지에 쓸 때마다 금택은 그 낱말이 나무뿌리를, 뱀을,
죽은 새를, 죽은 사람을, 씨앗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33

"씨실과 날실이 가로, 세로로 반복 교차해 얽히고설켜 짜인 게 천이란다. 가로 방향으로 놓인 씨실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늬가 결이지 천을 다루려면 결을 읽을 줄 알아야 해. 결을 못 읽으면 천을망치기 십상이야..... 결이 읽히니?"
어머니는 바늘 끝으로 씨실과 날실을 짚어 보이면서 설명했다.
"읽혀요……."
"결대로 바늘땀을 떠야 하는데 너는 결을 거스르면서 바늘땀을 떴구나......"
어머니가 씨실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새치를 뽑듯 잡아당겼다.
"올을 튕기는 거란다."
씨실이 당겨지면서 잡아당긴 자국이 명주 조각에 칼로 그은 자국처럼 나타났다. 어머니는 명주 조각을 사방으로 잡아당겨 씨실을 도로 제자리에 넣어주었다.
"선이 보이지?"
· 보여요."
"이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보렴."
어머니가 건네는 명주 조각을 받아드는 금택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올을 튕겨 보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금택은 누비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 P139

어머니와 자신, 둘의 관계에서 금택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화순이 백일도 안 되어 버려졌다는 것을 금택은 화순에게 들어서 알았다. 젖먹이 딸을 버릴 만큼 무서운 데가 있는 어머니가 자신을 거둔 게 금택은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화순을 데려오기전까지 금택은 복래한복에 딸린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부령할매의 수의점을 떠나 복래한복에서 자리를 잡은 어머니는두 달쯤 지난 어느 날 화순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가 거두기 전까지 금택은 부령할매와 살았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서 ‘부령할매‘
하고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둥글납작하게 뭉친 청국장 덩어리 같은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경북도 부령이 고향이라 그녀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령이 어디에 있는지 금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령이 얼마나 먼 곳인지 금택이 물을 때마다부령할매는 바늘이나 놋숟가락, 무쇠 가위, 무명이나 명주 실타래가들린 손을 들어 천장을 찌르듯 가리켰다. 폐병쟁이의 늑골처럼 서까래가 흉측하게 드러난 천장 저 너머에 부령이라는 곳이 있다는 듯. - P159

금택은 부령할매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짓는 그녀가 영원히 죽지않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았다. 돼지의 간 같은 고무 대야에 달리아를 키우고, 괘종시계의 건전지를갈아주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녀의 환영 같은 늙은 여자들을 불러다수의를 지으면서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죽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수의를 지을 일이 없을 때까지 언제까지나금택은 종종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간절했다. 봉제 공장수십 대의 미싱이 한꺼번에 돌아가면서 내지르는 굉음을 타이르고어르는 듯한 그 소리가 어머니의 친딸이 자신이 아니라 화순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때 특히나 그랬다. 그럴 때면 금택은 서쪽 방 쪽마루로 가 기둥 뒤에 숨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비대 위에서 떠도는 바늘땀 뜨는 소리에 집중했다. 창틀을 타고 넘어오는 그소리는 그러나 부령할매의 바늘땀을 뜨는 소리를 외려 더 간절하게했다. - P174

봉제 공장 안을 들여다보던 금택은 갑자기 의문스러웠다. 여럿이서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제각각인데도 묘한 조화를만들어내지만, 수십 대의 미싱이 일제히 돌아가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거의 같은 같은데도 전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십 대의미싱이 돌아가는 소리는 악다구니를 치면서 더 빨리 돌라고, 계속돌고 돌라고 서로를 닦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창에서 돌아서서 철제 계단을 내려오던 금택은 그만 발을 헛디뎌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번데기들이 철제 계단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번데기들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던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철제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는 금택의 발아래로 기와지붕과 판자지붕과 슬레이트지붕들이 펼쳐졌다.
엉성하게 이어 붙인 천 조각들처럼. 전깃줄들은 듬성듬성 뜬 바늘땀같았다. - P179

문지방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누비대위 저고리가 숨을 들이마시듯 들썩일 때 누빌 선을 따라 떠 넣은 바늘땀들이 한꺼번에 숨구멍처럼 오소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뒤로, 금택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들이 가방이나 신발 같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으로인식되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 어떤 것으로, 토끼나 염소나 고양이처럼 심장도 있고, 귀도 있고, 눈도 달린 그 어떤 것으로.
금택은 여전히 기회가 되면 서쪽 방에 들어 새의 찢긴 날개 같은천 조각을 주웠고, 그 천 조각들에 바늘땀을 떴다. 집안일을 돕고,
숙제를 끝내고, 일기를 쓴 뒤 잠들기 전까지 바늘땀을 떴다. 기러기의 찢긴 날개 같은 흰 옥양목에, 산비둘기의 찢긴 날개 같은 회색 명주에, 공작의 깃털 같은 연보라색 양단에.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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