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 장만하시려고요? 이왕이면 십장생으로 하지 그러세요?" "병풍은 십장생보다 신사임당 초충도가 끌린단 말이야. 풀하고 꽃하고 곤충 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노는 모습이 묘하게 흥분을 일으키커는 화사하면서도 소박하고, 우아하고 품위 있으면서도 재치와 농담이 넘친단 말이야. 섬세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단순하고 담박해." "신사임당 초충도 8폭 병풍이라면 우리 친정에도 있는걸요.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손수 수를 놓으신 병풍이라고 들은 것 같아요. 1폭에 가지하고 방아깨비가 수놓아져 있던 게 기억나네요………." "어디 가지하고 방아깨비뿐인가! 개미도 기어다니고, 나비도 날아다니고, 벌도 날아다니지 2폭에는 수박하고 들쥐하고 패랭이꽃하고 호랑나비가 등장하는데 들쥐 두 마리가 수박을 파먹는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단 말이야. 3폭에는 어숭이, 개구리, 원추리, 매미가..... 4폭에는 여뀌, 메꽃, 잠자리, 벌, 사마귀......" "5폭에는요?" 맨드라미, 산국화, 나비, 쇠똥벌레………" "그럼 6폭에는요?" - P264
"어숭이꽃, 도라지, 나비, 벌, 잠자리, 개구리, 메뚜기...... "형님은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하세요?" "보고, 보고, 보다 보면 저절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지." "나는 보고, 또 보고, 아무리 봐도 가물가물만 하지 뭐예요." "감탄을 하면서 봐야 기억이 되지. 한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 하고, 백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천번을 봐도요?" "천번이 아니라 천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어떻게 천만 번 다 감탄을 하면서 본데요." "천만 번이 아니라 백만 번을 봐도 감탄을 하면서 봐야지, 제대로 감탄을 할 줄 아는 것도 재능이야." - P265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 중의 명물(物)이요, 철 중의 쟁쟁이라. 민첩하고날래기는 백대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추호(秋같은 부리는 말하는 듯하고, 뚜렷한 귀는 소리를 듣는 듯한지라." "독수리요?" "누라와 비단에 난봉과 공작을 수놓을 제, 그 민첩하고 신기함은귀신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이 미칠 바리요." "아, 바늘이요!" "바늘에 대한 글귀들중에 유씨 부인의 초침문을 따라갈 글귀가 또 있을까." 해가 기울도록 여자들이 갈 생각을 하지 않자 어머니는 서쪽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건어물 행상 여자로부터 사두었던 멸치를한 주먹 우려 국물을 내고, 배추전을 부칠 밀가루를 반죽했다. - P267
장독에서 간장을 뜨고 돌아서던 금택은 화들짝 놀랐다. 간장 뜨는모습을 지켜보았는지 옥 사모님이 금택의 뒤에 서 있었다. "짐승의 눈동자 같구나." "네?" "흰 종지에 담긴 간장이 짐승의 눈동자 같아." 금택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 들린 종지를 들여다보았다. 옥 사모님의 말대로 종지 속 간장은 짐승의 눈동자 같았다. - P267
명주 한 필은 치마와 저고리 한 벌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양이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명주를 가슴에 끌어안고 서쪽 방에서 나온금택은 마당을 건너다 말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꽁꽁 언 밤하늘은 무쇠 가위나 무쇠 식칼을 갈 때 숫돌에 흐르는 물빛이었다. 뭉텅뭉텅 떨어져 흐르는 구름들은 생인손을 앓는 손톱처럼 검푸르고 아파 보였다. 금택은 불현듯부령할매가 그리웠다. 까맣게 잊고 있던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오르려고 해서 얼른 고개를 저어 지워버렸다. 부령할매를 만나면 금택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늘이 쥐날인지, 호랑날이지, 뱀날인지, 돼지날인지, 원숭이날인지······ 쥐날이었다면 부령할매는 하루 종일 바늘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옷감이 풀리는 방향인 식서 방향으로 올을 튕기는 것은 집중을요구했다. 튕길 올을 골라내는 것부터가 벌써 까다로웠다. 가위로 재단한 부분은 올이 약간 풀려 있기 마련이었다. - P271
올 여섯 줄을 튕기고 나서야 금택은 한숨 돌리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올을 튕겨 표시한 누비 선들을 바라보았다. 0.3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표시된 누비 선들이 금택은 거문고 줄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손으로 튕기면 소스라치듯 떨면서 ‘덩‘ 하고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타듯 누비 선들을 타면 ‘덩, 둥, 등, 당, 동, 징‘ 울림과 높낮이가 다른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문고 줄을 명주실로 만든다는소리를 금택은 음악 시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올을 튕길 때 어머니는 거문고나 가야금 줄을 고르는 것 같았다. 딸들이 올을 튕겨 가져다준 명주로 어머니는 저고리와 치마를 한벌 지었다. - P273
화순에게 바늘을 들게 하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금택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친딸이 금택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바늘을 들었다. 금택에게 진실을 똑똑히 일깨워주기 위해 바늘만큼 진실을 분명하게 깨우쳐주는 것이 없다는 것을 화순은 알았다. 바늘은 화순이 말로는 전달하지 못하는 진실을 금택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금택이 특별히 친구를 사귀지 않는 것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우물집으로 달려오는 것은, 순전히 바늘 때문이었다. 금택은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끝내듯 자신 몫의 집안일을 한 뒤 바늘을 들었다. - P282
어머니의 오른손 흉터가 북두칠성처럼 신비롭게 다가온 뒤로, 금백은 그것을 훔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흉터를 고스란히 자신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로 옮겨오고 싶었다. 그것은 바늘을 훔치고 싶던 충동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활동에 사로잡힌 금택은 바늘 끝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지느러미처럼 붙어 있는 살을 찔렸다. 밤하늘에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혔다. 반짝이는 그 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을 또 바늘로 찔렀다. 바늘끝이 살을 파고드는 고통은, 별이 떠오르듯 피가 맺히는 순간 황홀감으로 바뀌었다. 황홀감에 취해 눈동자 초점이 몽롱하게 풀어진 금택의 귀에 화순이 내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황홀감에 취한 금택은 비로소, 바늘땀과 바늘땀의 거리가 별과 별의 거리만큼 멀다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늘땀과 바늘땀 사이, 기껏해야 좁쌀 정도밖에 안 되는 공간 안에는 몇 백 광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했다. 서로 유기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지만 바늘땀들은 결코 서로 만나지 못했다. - P286
지독한 무기력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소일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우물집에 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언젠가 자신과 화순 둘 중 하나는 우물집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은 고질적이 것이었다. 자신과 화순둘 다 우물집에, 어머니 곁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금택은 화순과 자신이 급격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기질적으로 자신들이 다르다는 것을 그녀들은 잘 알았다. 두 기질이 서로 충돌하고 서로 밀어낸다는 것을. 둘 중 하나가 우물집을, 어머니를 떠나는 날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다. 그녀는 떠나는 쪽이 자신이 될까 봐 두려웠다. 화순이 어머니의 친딸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사실이었다. 화순이 스스로 떠남으로써, 그녀의 고질병처럼 오래된 강박과 두려움은 쓸데없는 것이 되었다. - P305
며칠 뒤, 금택은 서쪽 방에 들었다가 어머니가 새로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보았다. 화순이 대학교에 다니기 위해 우물집을 떠날 즈음부터 짓던 누비저고리였다. 누비대 위에 놓여 있는 누비저고리는 언젠가 화순이 우물 속에 수장시킨 누비저고리와 비슷했다. 한 마리의두루미 같던. 어머니는 서쪽 방에도, 부엌에도 없었다. 석 달에 걸쳐 완성한 누비저고리를 누비대 위에 펼쳐놓고 뒷산에 든 것이 틀림없었다. 금택은 누비저고리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가 골이 지게 반복해서뜬 바늘땀들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던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바늘땀들이 숨을 쉬고 있었다. 0.2센티 간격으로 고르게 떠 넣은 바늘땀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었다. 바늘땀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미묘한 역동 속에서 서로 밀고 끌어당기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누비저고리 앞섶을 들추고 그안으로 손가락들을 밀어 넣고는 더듬기 시작했다. 더듬으면 심장이 만져질 것 같아서. - P319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그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을 태우고, 새로 옷을 해 입혔다. 어머니의 단골들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이었다. 그녀들이 죽은 뒤 남겨질 옷들을 생각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들이 어머니에게서 지어다 입은 누비저고리나 누비치마나 누비마고자가 남겨질 생각을 하자. 검정 저고리를 금택은 앉은뱅이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서쪽방에서 주운 천 조각들 위에, 검정 저고리는 죽는 까마귀였고, 천 조각들은 새들의 찢긴 날개였다. 온갖 새의 찢긴 날개를 죽은 까마귀가 품고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그녀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마을 어떤 여자가 죽은 사람 옷을 태우는 것을 봤어요. 죽은 사람옷을 죄다 마당에 끌어내놓고 태우고 있었어요. 한 장, 한장 불길 속으로 던지면서 태우고 있었어요……" -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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