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생각했다. ‘릴리트‘라는 제목만 아니었어도 최의사진이 그토록 끔찍하진 않았으리라. 릴리트는 유대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로, 최초의 여자이자아담의 첫 아내였다. 민담에 따르면, 하느님은 릴리트를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은 뒤 코에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 그러니까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릴리트는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첫날밤, 아담이 동침하려 했지만 릴리트는 그의 밑에 깔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주인이자 남편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릴리트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다. 얼마 뒤 하느님은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여자이자 아담의 아내는 릴리트가 아닌 하와가 되었다. - P21
철식이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머니는 반사적으로어깨를 움츠렸다. 한순간 어머니의 눈동자가 카메라 렌즈를향했고, 철식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흑백사진 속 정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을보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에 가까운 탄식을 내질렀다. 사진 속 어머니의 얼굴이 자신이 생각했던것보다 훨씬슬픈 얼굴이어서, 슬픔이 깊어지면 감탄을 자아낸다는 걸, 어머니의 얼굴이 그녀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머니의 사진을 앞에 놓고 그녀는 철식에게 물었다. "악랄한 포주처럼 자신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그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건 어떤 걸까? 그런 여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원망스럽고 저주스럽지 않을까? 더구나 아이가 아버지의 눈빛을 하고 있으면 그아이가 끔찍하지 않을까?"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지?"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 - P44
깻잎 밑에서 뛰고 있는 것은 아가미가 아니라 심장이었다. 어머니의 오그라든 심장이, 깻잎 밑에서 자맥질하듯 뛰고있었다.
한때 그녀는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폭력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세상모든 폭력의 근원이 아버지 같았다. 심지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폭탄 테러도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것만 같았다. - P46
"당신, 무엇을 위해 시를 쓰지?" "무슨 말이야?" "시 말이야. 무엇을 위해 쓰지? 응?" 그녀가 차가운 침묵으로 일관하자 감정이 격해진 그가 다그치듯 물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 아니었어?" "영혼...…? 나는 당신과 이혼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러니까 날 버리겠다는 거 아니야?" 버리다니? 누가 누구를?" "네가 나를!" "나는 지금 당신을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 P58
불멸할 것 같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날, 그녀는 생각했다.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은 아버지에게 가장 존귀한사람을 보내주었다고. 그런데 아버지가 그 사람을 가장 비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고. - P62
지난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게 아니야‘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난을 들은 뒤로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그러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한 말이 여전히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걸. 오래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리라는 걸.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을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자신이, 자신의 영혼조차 어쩌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이혼이 나는 통과의례 같아. 나도, 당신도 피할 수 없는통과의례, 시속 백이십 킬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그래...... "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그래야겠지......" - P64
울산요금소를 통과하는 기분이 어떤지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 육 년 전 폐쇄된 요금소를 통과해 흘러든 뒤로 도시를벗어났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 화투장처럼 쌓인 ‘고속도로 통행권‘들이 미처 지불하지못한 고지서 같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순간순간 청구된 반드시 치러야만 하는 요금이 적힌 고지서들이 그녀 자신 앞에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쌓여 있는 것 같다. 뒤적뒤적 통행권들을 살피던 그녀는 한 장을 집어들고, 그것에 인쇄된 문장을소리내 읽는다. "통행료 미납, 기타 부정한 통행료 면탈의 경우 당행 통행료 외에 열 배의 부가 통행료를 부과합니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하이패스 구간을 통과해 도시를 빠져나간다. 1.5톤 트럭 적재함에 실린 세간들이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것 같다. 그녀가 음산요금소 부스를 지키는 동안, 그녀의 원룸 세간들이 꾸려져 다른 도시로 보내지는 것같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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