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점에 살 때, 부령할매에게서 수의를 해간 여자가 붉은 팥 한 말과 노란 좁쌀 한 말을 싸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자신의 죽은 어머니가 원삼을 입혀드리자 기적처럼 성불(成佛)하셨다고,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붉은 팥과 노란 좁쌀을 앞에 펼쳐놓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연둣빛 길에 자줏빛 깃을 달고, 일곱 빛깔 무지개 색동으로 소매를 단 원삼을 입혀드리자 새색시처럼 수줍게 웃으면서 성불하셨어요..... 일색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는 걸 일평생 위안 삼아 사셨을 만큼 박색인 어머니가 천하일색 양귀비나 황진이 뺨치게 어여뻐 보이더라니까요."
중얼거리는 내내 여자는 붉은 팥알을 손으로 집었다 놓았다 했다.

금택은 장의사의 한지꽃을 접는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내내 한지꽃을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불어나 무덤처럼 자신을 덮도록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 무덤 속에서도 여자가 한지꽃을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한지꽃들이읍내 거리를 덮도록 접을 것 같았다. 읍내 전체가 한지꽃으로 뒤덮인 거대한 상여가 될 때까지 접고, 또 접을 것 같았다. - P192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또다시 금택을 찾아왔다. 그 소리는 금택이 가는 곳마다 따라왔다.
금택은 서쪽 방 들창 밑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 어느 날처럼 부령할매가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그곳까지 따라와 떠돌았다. 뒷산으로 난 들창은 한 뼘 정도 들려 있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에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박자를 맞추지 못하고 겉돌았다.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다가 어느 순간 화음을 만들어냈다.
광목 조각 같은 참새들이 탱자나무 가시들 속으로 날아들었다.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어머니의 바늘땀 뜨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 금택은 기분이 이상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가 산 사람의 옷을 짓는 소리를 불러온 것 같아서. 죽음이 목숨을 불러온 것 같아서. - P204

누비옷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도 옥 사모님은 오랜 단골들과 달랐다. 어머니가 자리라도 비우면 어머니에 대해 이런저런 별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는 다른 단골과도 달랐다. 옥 사모님은 햇수로 치자면 어머니와 인연이 가장 짧았지만, 어머니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른 단골과 다르게 어머니를 재촉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문한 누비옷이 완성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삼회장 누비저고리와 치마를 지어 입기 위해 1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닷새 전에도 옥 사모님은 우물집에 다녀갔다. 어머니가 두 달 내내매달려 완성한 누비치마를 두르면서 그녀는 말했다.
"땅을 두르는 것 같아." - P219

옷감이 다양하지 않다는 단골들의 불만을 금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우물집 마당과 뒷산에서 얻은 씨앗이나 잎, 열매, 나무껍질, 뿌리 등을 재료로 내는 색들은 그 어디에도 없는 색들이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색을 입은 옷감들 역시 그 어디에도 없는, 서쪽 방에만 있는 옷감들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대구에서 끊어오는 옷감들은 어머니의 손을 거쳐 차원이 다른 옷감들로 재탄생했다. 무명이면서, 무명과 다른 차원의 옷감이 되었다. 염색을 통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색깔을 입고, 푸새와 다듬이질을 거쳐 이 세상 어디에도없는 질감과 광택을 띤.
나흘 전 어머니가 양파 껍질을 재료로 무명에 들인 노란색은 엄밀히 말해 노란색이 아니었다. 노란색을 넘어서는 그 어떤 색이었다. - P223

버스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난 뒤에는 삼베휴먼지가 날리듯 일했다. 부슬비가 온종일 촉촉하게 내린 이튿날에는 명주휴먼지가 차분하고 우아하게 일었다. 얌전하고 새침한 여학생의 까만 운동화 뒤회에서는 자미사흙먼지가 자미사는 얇고 부드러워 초가을 옷감
으로 쓰였다. 그것으로 치마를 해 입으면 걸을 때 사각사각 치맛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신작로를 따라 코스모스가 지천으로 필즈음이면 노방흙먼지와 한라흙먼지가 한복 치마의 안감과 겉감처럼 겹쳐 일었다. 소의 혀같은 구름이 낮게 하늘을 뒤덮어 바람이 거의 일지 않는 날에는 양단홈먼지가 낮고 묵직하게 깔려 일었다. 바람이 잔잔하고 햇빛이 화창한 날에는 숙고사흙먼지가 아련한 추억이 떠오르듯 일었다. 초봄에는 결이 촘촘하고 빳빳한 옥사흙먼지가 쌀쌀하게 손사래 치듯 일었다. 초복부터 중복까지 한여름에는 주로 툭툭한 광목흙먼지가, 건조하고 맑은 가을날에는 까끌까끌하고 쌍그런 모시흙먼지가 일었다.
모시흙먼지와 삼베흙먼지는 비슷한 듯 천지 차이였다. 모시흙먼지는 곱고 빛깔이 매화꽃처럼 고왔지만, 삼베흙먼지는 투박하고 거칠었으며 황달이 든 듯 누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 P239

건어물 행상 여자가 다녀갔는지 마루에 멸치가 한 상자가 놓여 있었다. 넉 달 전쯤 찾아왔을 때 그녀의 배는 불러 있었다. 어머니는 밥을 새로 짓고 들깨토란탕을 끓여 그녀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밥을만 들깨토란탕을 연신 숟가락을 떠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말했다. 배가 불러 행상을 다니는 자신이 불쌍하고 안쓰러운지 문전박대하는 집 없이 냉수라도 한 대접 먹여 보내더라고, 목이 타입이 간장좋지 같을 때는 냉수가 꿀물이라고… 금택은 그녀가 아들을 낳았을지 딸을 낳았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가 또 딸을 낳았을 것 같아서였다.
걸쭉한 들깨 국물에 희멀건 토란이 둥둥 떠다니는 들깨토란탕은 운문 양단이었다. - P243

그럼에도 예술이라는 단어는 어머니의 누비옷들을 떠올리게 했다. 어머니는 바늘과 실로 꽃이나 나비를 그리지 않았다. 흠질이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한 바느질로, 가장 작은 바늘땀을 반복해서떴다. 점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모여 하나의 선이 될 때까지 반복해서 떴다.
누비 바느질은 점을 통해 선에 도달했지만, 자수는 선을 통해 면에도달했다.
금택에게는 황금색 실로 입체감 있게 수놓은 나비나 꽃보다 0.2. 0.3센티에 불과한 바늘땀들이 그리는 선이 훨씬 매혹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예술이라면 금택은 어머니가하는 누비 바느질 역시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예술이라는 말을입속에서 중얼거리는 순간 갈비뼈들이 갈라지고 벌어지는 것 같은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떨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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