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니는 바늘하고 인연이 있는가 봐예. 스물네 살에 잡은 바늘로 먹고살고 있으니예. 남들은 시집 가서 아를 낳아도 둘은 거뜬히낳았을 나이에 바늘을 다 잡았네예?"
여자가 물었지만 어머니는 다문 입을 벌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예, 역마살이 끼어서 바늘하고 인연이 안 된 것같아예, 의성서 만난 관상쟁이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예, 역마살이 끼었다고 하대예. 도화살까지 끼었으면 폐가망신할 팔자였다고하대예. 엉덩이가 벌레 묵은 복숭아츠럼 짓무르도록예, 진득하니 앉아서 해야 하는 게 바느질인데예, 그놈의 역마살이 끼었으니 말이지예. ……더듬어보면 그때가 가장 행복했어예. 할머니하고 천쪼가리들 이어 조각보 지을 때가에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할머니 그림자하고 내 그림자가 작아졌다 커졌다 했지예.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았어예." - P121

일곱 살에 바늘을 든 여자는 건어물 행상을 업으로, 스물네 살에바늘을 든 여자는 바느질을 업으로 살아가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은 금택에게 불가해한 일처럼 신기하고 두렵게 다가왔다. 그것은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이라는 두 여자의 엇갈린 운명과는 또 달랐다.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운명은 엇갈렸지만, 그녀들은어쨌든 둘 다 바느질하는 여자로 살고 있었다. 바느질하는 여자라는운명으로 묶여 있었다. 어쨌든 복래한복 주인 여자도 바느질하는 여자였고, 월성댁도 바느질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금택은 자신과 화순의 운명이 어떻게 엇갈려 전개될지 궁금했다.
건어물 행상 여자와 어머니의 엇갈린 운명과도 복래한복 주인 여자와 월성댁의 엇갈린 운명과도 다르게 전개되리라는 짐작만 막연히들었다. - P124

어머니는 감나무 그림자가 길어지면 씨를 받기 위해 부추를 더는베어 먹지 않고 꽃이 피도록 내버려두었다. 꽃이 피었다 져야만 씨를 받을 수 있다는 걸 금택은 부추를 통해 깨달았다. 처서가 지나면감나무 가지들은 시합하듯 지붕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그림자를길게 드리웠다.
우물집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바늘이었고, 햇살은 햇살실이었다.
햇살실에는 명주햇살실과 무명햇살실과 초를 먹여 빳빳해진 명주햇살실이 있었다.
바람바늘의 귀는 누비 바늘의 귀보다 작았다. 동틀 즈음에야 바람바늘의 귀에 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바람바늘이 부드럽게 감치고지나간 자리마다 바늘땀이 떠졌다. 파리가 똥 싸듯 바늘땀이 떠졌다. 아침 먹은 설거지를 할 즈음이면 바람바늘의 귀에는 초를 먹인명주햇살실이 꿰어졌다. 정오 즈음에는 무명햇살실로 바뀌어 꿰어졌다. - P127

자연과 밀접한 낱말을 먼저 자신들에게 가르쳤다. 계절을 가르치고,
낮과 밤과 새벽 같은 시간대를 가르쳤던 것이다.
새벽이라는 낱말을 먼저 써 보이기 전에 어머니는 말했다.
"새벽은 세상 모든 눈동자가 익은 밤송이처럼 열리는 시간이야."
자매가 갱지에 ‘새벽‘을 반복해서 쓰는 동안, 어머니는 누비대 위양단 조끼에 바늘땀을 떠 넣었다.
겨울이 깊어지자 어머니는 거울과 빗 같은 사물 이름을 가르쳤다.
금택과 화순은 비슷한 속도로 낱말을 익혀 나갔지만, 저마다 더 빨리 익히는 낱말이 있었다. 금택은 자연과 계절이나 시간과 밀접한낱말을 더 빨리, 화순은 사물 이름을 더 빨리 익혔다. 금택이 단번에외운 새벽이라는 낱말을 화순은 백 번 넘게 반복해서 쓰고 나서야 겨우 익혔다.
가을과 겨우내 어머니가 가르쳐준 서른 개 남짓한 낱말들 중 금택이 가장 흥미 있어 하는 낱말은 ‘땅‘이었고, 화순은 ‘거울‘이었다.
‘땅‘이라고 갱지에 쓸 때마다 금택은 그 낱말이 나무뿌리를, 뱀을,
죽은 새를, 죽은 사람을, 씨앗을 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33

"씨실과 날실이 가로, 세로로 반복 교차해 얽히고설켜 짜인 게 천이란다. 가로 방향으로 놓인 씨실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늬가 결이지 천을 다루려면 결을 읽을 줄 알아야 해. 결을 못 읽으면 천을망치기 십상이야..... 결이 읽히니?"
어머니는 바늘 끝으로 씨실과 날실을 짚어 보이면서 설명했다.
"읽혀요……."
"결대로 바늘땀을 떠야 하는데 너는 결을 거스르면서 바늘땀을 떴구나......"
어머니가 씨실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새치를 뽑듯 잡아당겼다.
"올을 튕기는 거란다."
씨실이 당겨지면서 잡아당긴 자국이 명주 조각에 칼로 그은 자국처럼 나타났다. 어머니는 명주 조각을 사방으로 잡아당겨 씨실을 도로 제자리에 넣어주었다.
"선이 보이지?"
· 보여요."
"이 선을 따라 바늘땀을 떠보렴."
어머니가 건네는 명주 조각을 받아드는 금택의 손이 떨렸다. 어머니가 눈앞에서 올을 튕겨 보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니 금택은 누비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 P139

어머니와 자신, 둘의 관계에서 금택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화순이 백일도 안 되어 버려졌다는 것을 금택은 화순에게 들어서 알았다. 젖먹이 딸을 버릴 만큼 무서운 데가 있는 어머니가 자신을 거둔 게 금택은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화순을 데려오기전까지 금택은 복래한복에 딸린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부령할매의 수의점을 떠나 복래한복에서 자리를 잡은 어머니는두 달쯤 지난 어느 날 화순을 데리고 왔다.
어머니가 거두기 전까지 금택은 부령할매와 살았다.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서 ‘부령할매‘
하고 중얼거렸고, 그때마다 둥글납작하게 뭉친 청국장 덩어리 같은부령할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함경북도 부령이 고향이라 그녀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령이 어디에 있는지 금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부령이 얼마나 먼 곳인지 금택이 물을 때마다부령할매는 바늘이나 놋숟가락, 무쇠 가위, 무명이나 명주 실타래가들린 손을 들어 천장을 찌르듯 가리켰다. 폐병쟁이의 늑골처럼 서까래가 흉측하게 드러난 천장 저 너머에 부령이라는 곳이 있다는 듯. - P159

금택은 부령할매가 죽지 않고 아직 살아있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짓는 그녀가 영원히 죽지않을 것 같았다. 죽은 사람이 입을 옷을 지어야 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 같았다. 돼지의 간 같은 고무 대야에 달리아를 키우고, 괘종시계의 건전지를갈아주고, 윤달이 돌아오면 그녀의 환영 같은 늙은 여자들을 불러다수의를 지으면서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죽지 않을 때까지, 그래서 수의를 지을 일이 없을 때까지 언제까지나금택은 종종 부령할매의 바늘땀 뜨는 소리가 간절했다. 봉제 공장수십 대의 미싱이 한꺼번에 돌아가면서 내지르는 굉음을 타이르고어르는 듯한 그 소리가 어머니의 친딸이 자신이 아니라 화순이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을 때 특히나 그랬다. 그럴 때면 금택은 서쪽 방 쪽마루로 가 기둥 뒤에 숨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누비대 위에서 떠도는 바늘땀 뜨는 소리에 집중했다. 창틀을 타고 넘어오는 그소리는 그러나 부령할매의 바늘땀을 뜨는 소리를 외려 더 간절하게했다. - P174

봉제 공장 안을 들여다보던 금택은 갑자기 의문스러웠다. 여럿이서 바늘땀을 뜨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제각각인데도 묘한 조화를만들어내지만, 수십 대의 미싱이 일제히 돌아가는 소리는 박자와 강약이 거의 같은 같은데도 전혀 조화롭게 들리지 않았다. 수십 대의미싱이 돌아가는 소리는 악다구니를 치면서 더 빨리 돌라고, 계속돌고 돌라고 서로를 닦달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창에서 돌아서서 철제 계단을 내려오던 금택은 그만 발을 헛디뎌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번데기들이 철제 계단에 어지럽게 흩어졌다. 번데기들을 주우려고 고개를 숙이던 금택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철제 계단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서 있는 금택의 발아래로 기와지붕과 판자지붕과 슬레이트지붕들이 펼쳐졌다.
엉성하게 이어 붙인 천 조각들처럼. 전깃줄들은 듬성듬성 뜬 바늘땀같았다. - P179

문지방을 타고 넘어온 바람에 누비대위 저고리가 숨을 들이마시듯 들썩일 때 누빌 선을 따라 떠 넣은 바늘땀들이 한꺼번에 숨구멍처럼 오소소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 뒤로, 금택은 어머니가 짓는 누비옷들이 가방이나 신발 같은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 어떤 것으로인식되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그 어떤 것으로, 토끼나 염소나 고양이처럼 심장도 있고, 귀도 있고, 눈도 달린 그 어떤 것으로.
금택은 여전히 기회가 되면 서쪽 방에 들어 새의 찢긴 날개 같은천 조각을 주웠고, 그 천 조각들에 바늘땀을 떴다. 집안일을 돕고,
숙제를 끝내고, 일기를 쓴 뒤 잠들기 전까지 바늘땀을 떴다. 기러기의 찢긴 날개 같은 흰 옥양목에, 산비둘기의 찢긴 날개 같은 회색 명주에, 공작의 깃털 같은 연보라색 양단에.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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