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Oliver Sacks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 퀸스칼리지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베스에이브러햄병원, 컬럼비아대학, 뉴욕대학 등에서 신경과 의사, 교수로 활동했다.
독특한 신경학적 문제를 겪는 환자들의 사연을 따뜻한 시선과 아름다운 언어로 담아 낸<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화성의 인류학자> <뮤지코필리아> 등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증상과 병명으로 환자를 분류하기보다, 그들 각자가 세상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고유한 방식을 포착하고자 한 색스의 기록은 인간 뇌에 관한 현대의학의 이해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뉴욕타임스》로부터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록펠러대학에서 탁월한 과학 저술가에게 수여하는 루이스토머스상을 수상했다.
2015년 안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0여 년간 친구이자 동료 과학자인 수전 배리와 이 책에 실린 편지들을 주고받았다. - P-1

수전 배리 Susan Barry

프린스턴대학에서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시건대학 재활의학과 조교수를 거쳐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 재직했다. 어릴 때 사시 교정 수술을 받았으나, 48세에 시력 훈련을 받고서야 난생처음 입체시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다. 이 경이로운 시각적 모험을 글로 써서 올리버 색스에게 보내면서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싹텄다.
입체시는 유년기의 ‘결정적 시기‘에만 발달할 수 있다는 의학계의 통념을 무너뜨린 배리의 이야기는 색스의 글 <스테레오 수>와 배리 자신의 저서 《3차원의 기적>을 통해 널리알려졌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에릭 캔델은 《3차원의 기적》에 대해 "한 편의 시이자 과학이며,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마법 같은 책"이라고 극찬했다. - P-1

우리의 눈알은 동그랗다. 허나 눈 뒤편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망막은평평하다. 사물이 내뿜는 빛은 망막을 통해 뇌에 2차원으로 전송될 수밖에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계는 3차원이다. 그래서 뇌는 움직이는2차원의 정보로 3차원의 입체를 만들어 낸다. 태양빛은 항상 위에서쏟아져서 명암이 지고, 눈은 두 개라서 위치를 미묘하게 다르게 볼 수 있기때문이다.
<디어 올리버>의 발신자 수는 어렸을 때 사시가 있었다. 두 눈의 초점이맞지 않으므로 수의 뇌는 한쪽 눈의 정보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그래서수는 사물이 2차원으로 보이는 입체맹이 되었다. 뇌의 입체맹은 특정시기가 넘으면 극복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는 마흔여덟살에 훈련을 통해 기적적으로 입체맹을 극복했다. 학계에 보고된 바가없었던 이 사례는 올리버 색스와의 교류를 통해 <스테레오 수〉라는 불후의 칼럼이 된다. 수가 바라보는 세상이 평면에서 입체(스테레오)로 변모하는일대기가 이 서간에서 생생하다. - P-1

이후에도 그들의 지적 교류는 멈추지 않는다. 수는 신경생물학자기도했다. 두 사람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으로 화두를 돌리고,
서간을 통해 그들의 시야는 점차 넓고 깊어진다. 감각, 감정, 정신을다루는 문장의 영민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 주변에 흔히 존재하는모든 생명체가 그들의 펜 끝에서 특별하게 변모한다. 둘은 150통의 편지를주고받으며 지적 존재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한 두뇌의 교류를 보여 준다.
그럼에도 그들의 육체는 인간의 것이기에 점차 시들어 간다. 심지어색스 박사는 암 진단을 받고 시력을 점차 상실해 간다. 정신은 스스로를분석하고 진보하지만 결국 육신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 P-1

없다. 투병 중에도 다정함을 잃지 않고 지적 항해를 계속하는 색스박사와 슬픔에만 침잠하지 않는 위로를 보내는 수의 우정이 눈부시다.
마지막으로, 영면에 드는 순간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을 탐구했던 올리버 색스를 애도한다.

남궁인 의사, 작가 - P-1

내가 처음으로 올리버 색스의 책을 접한 지 거의 이십 년이 흘렀지만, 그는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를 통해 배운 것들이너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다른 사람을 알고 싶다면, 말을 건네야 한다는점이다. 이를테면, 당신, 어디가 아파요? 라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은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참, 이 단순해 보이는행위가 왜 그리도 어려운지! 올리버 색스는 바로 이 단순하고도 어려운행위의 대가였다.
어쩌면 이 책은 ‘입체맹‘이었던 수전이 입체시를 찾은 후 올리버와 함께이 세계의 모습을 새롭게 탐험한 여정의 기록이자, 그토록 이 세계의구석구석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던 올리버가 시력을 잃어 가는 동안에도,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행위를 멈추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기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삶은 지긋지긋한 고난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그 고난을 이겨 내게하는 건, 서로를 꽉 끌어안는 힘이다. 남들은 무심코 지나쳐 버린 것을위해 기꺼이 멈추어 서고, 타인을 바라보기 위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 그런 식으로 타인의 행복과 슬픔과 기쁨과 상실⋯을 알아보는 것. 그렇게 탄생하는 방대한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연결, 연결들, 고동치는위로와 사랑, 누구든지 도달하고 싶은 눈부시게 새로운 세상이 이 책 안에,
수전과 올리버의 문장 속에 다 있다.

손보미  소설가 - P-1

올리버 색스가 이 편지를 내게 썼을 무렵, 우리는 이미 2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종이 위에 써서 봉투에 넣고 미 우편국을 통해 보낸 실물 편지였다. 편지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50대였고 올리버는 70대였다. 나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신경생물학과 교수였고, 올리버는 신경학 병례집으로 이름을 떨친 신경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우리는 전부 합쳐서 150통이 넘는 편지를 썼고,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받았다.


누구나 살면서 중요한 갈림길을 만난다. 그중 어떤 것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선택할 때처럼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어떤 것은 저멀리서 꺾이는 우회로처럼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다가 나중에야 인생을 바꾼 중요한 결정이었음이 드러난다. 색스 박사에게 ‘정말이지 놀라웠던 그 첫 번째 편지‘를 보낼 때만 해도, 나는 이 편지가 내 생각과 일, 심지어 정체성에 이렇게까지 오래도록 영향 - P14

을 미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부치지 않을 뻔했다.
원래 그 편지는 내 ‘시력 일지‘에 적은 글이었다. 나는 마흔여덟 살까지 사시‘에 입체맹이었다. 대다수 사람은 두 눈의 초점을한곳에 맞춘 다음, 양쪽 눈에 입력된 정보를 뇌에서 통합해 단일한 3차원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내 눈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한쪽 눈으로만 보고 다른 한쪽의 정보는 무시했다. 그래서 3차원으로 볼 수 없었다. 입체시가 없을 때세상은 어수선하고 납작해 보인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몇 달간시력 훈련을 받은 끝에 결국 두 눈의 초점을 한곳에 맞춰 입체의깊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고, 나는 이 놀라운 변화를 일지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내 이 시력 일대기를 올리버 색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정리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색스 박사를 그의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고, 환자에게 깊이 공감하는 통찰력 있는 글에 감탄했다. 게다가 그를 직접 만난적도 있었다. 9년 전쯤 우주비행사인 내 남편 댄이 존슨우주센터에서 색스 박사와 만나 안면을 텄다. 그 뒤로 첫 우주선 탑승을 기념하는 행사에 색스 박사를 초대했고, 그가 초대에 응했다 - P15

는 소식에 나는 무척이나 기뻤다. 행사 때 우리는 고작 5분간 대화했을 뿐이지만, 그날 색스 박사가 내게 던진 질문은 이후로도 계속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나는 시력 훈련을 통해 시각적인 깨달음의 순간을 잇달아 경험하면서 점점 더 자신감 있게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었고, 머릿속에서 색스 박사와 몇 번이고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지는 그 내적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 P16

잭스 박사님께,
우리는 1996년 1월 10일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 남편댄 배리가 우주왕복선을 타고 첫 임무를 떠나기 전날밤이었어요. 우리가 만난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저는 우주선 발사를 구경하러 온 손님들을 대접하고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방식으로 세상을 지각한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저는제 지각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다소 다르다고, 그건 늘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사시였고, 오로지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박사님은 양쪽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상상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상상할 수 있다고답했고요. 어쨌든 저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 P-1

신경생물학 교수니까요. 시각 처리와 양안시, 입체시에관한 논문을 그간 수없이 많이 읽었지요. 저는 그렇게얻은 지식으로 제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어요.
뛰어난 검안사의 조언에 따라 새 안경을 맞추고 매일시력 훈련을 거듭한 덕분에, 지난 2년간 저는 비로소 두눈을 함께 사용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시각의 변화는 정말 대단했어요. 이제 세상은 더 둥글고, 더 넓고, 더깊고, 더 질감이 살아 있고, 더 세밀합니다. 가장 놀라운점은 물체 사이의 빈 공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 시력은 계속해서 바뀌며 나날이 제게 새로운 기쁨과 놀라움을 안겨 줍니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말하는사람을 본 적이 없는 터라, 지금부터 제 이야기를 상세히 풀어놓으려 합니다. - P17

잿빛만 보다가 갑자기 총천연색을 볼 수 있게 된 사람을 상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아마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넋이 나갈 겁니다. 그가 보는 것을 멈출 수 있을까요?
매일 저는 강렬한 3차원의 감각을 느끼려고 꽃이나 제 손가락, 수도꼭지 같은 평범한 사물을 빤히 쳐다봅니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 입체경을 들여다봐요. 거의 3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로운 시력이 놀랍고 즐겁습니다.
어느 겨울날 저는 후딱 점심을 해치우려고 강의실에서 매점으로 서둘러 이동하고 있었어요. 강의실 건물에서겨우 몇 발짝 걸어 나왔을 때, 저는 돌연 멈춰 섰습니다. 커다랗고 촉촉한 눈송이들이 제 주위로 나풀나풀 떨어지고있었어요. 이제 눈송이 사이사이의 공간을 볼 수 있었고, 모든 눈송이가 아름다운 3차원의 춤을 추는 것 같았습니다.
옛날 같았다면 눈은 제 바로 앞에 펼쳐진 한 겹의 막 속에서 평평하게 떨어졌을 거예요. 마치 그와 동떨어진 곳에서 눈을 건너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테죠. 하지만 그날 저는 떨어지는 눈 속에, 눈송이 사이에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점심 먹는 것도 잊고 한참 동안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눈은 대단히 아름다울수 있습니다. 눈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요. - P24

다음 날 댄에게 글을 보여 주자 댄은 색스 박사에게 보내 보라고 부추겼다. 나는 망설였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평생을 사시로 살다가 마흔여덟 살의 나이에 입체시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시각 발달에 ‘결정적 시기‘가 있다는 반세기간의 연구결과를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들에 따르면 입체시는 오직 유아기에만 발달할 수 있었다. 나는 마운트홀리요크칼리지의 생물학 및 신경과학 교수로서 이 연구들을 잘 알았고, 수업 시간에 이 결정적 시기에 대해 수차례 가르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 내가 3차원을 보고 있다고 스스로 납득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색스 박사가 내 말을 믿어 준다고 해도, 내 시력에 일어난 변화가 얼마나 새롭고 경이로운지 과연 그가 이해할 수 있을까? 힘겹게 새로 얻은 입체시는 내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다른 사람이 내 경험을 심하게 부풀린 과장으로, 더 나아가 망상으로 치부하는 건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올리버 색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까?
색스 박사의 저서 《깨어남》을 읽고 받은 첫인상을 다시 떠올렸다. 그 책에서 그는 중증 파킨슨병으로 수십 년간 움직임과 생각이 얼어붙은 사람들을 묘사했다. 색스 박사가 엘도파를 투약 - P25

하자 환자들이 되살아났다. 그들은 움직이고, 말하고, 머릿속에생각이 밀려들었다. 색스 박사는 이 환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의말에 귀 기울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파킨슨병을 앓는다는 것, 엘도파를 투약받는다는 것,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상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색스박사는 환자들을 연민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공감했다.
물론 나의 시력 변화는 이 환자들의 변화만큼 파란만장하진않았지만 어쨌든 인생을 바꾼 뜻밖의 사건이었다. 어쩌면 색스박사는 세상이 내게 얼마나 달라 보이고, 다르게 느껴지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망설이면서도 희망을 품고, 또 댄의 격려에 힘입어, 일지에 기록한 편지를 색스 박사에게 보내기로 했다. 편지 마지막에 짧은 글과 서명을 덧붙였다.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입니다. 시간과 의향이 있을 때 박사님의 의견을 보내주신다면 무척 감사하겠습니다. 아, 저는 물론 박사님의 다음 책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답니다.
마음을 담아,
Sue Barry

그리고 용기를 잃기 전에 편지를 얼른우체통에 집어넣었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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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경우는 단 하나, 노론에서 임금으로 추대하는 경우뿐이었다. 노론 외에는 은언군을 임금으로 추대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조를 지지하는 소론과 남인이은언군을 추대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은언군 문제는 정순왕후와 노론이정조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정국의 가장 큰 문제는 정조보다정순왕후를 임금으로 받드는 노론의 속마음이었다.
정조가 은언군을 만난 것은 전날인 4월 13일이었다.
"그를 어제 만나 보았더니 살가죽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상태로서 내려가거나 여기 머물러 있거나 아무 관계될 것이 없었다. 애당초 데리고 오게한 뜻에 비하면 지금 돌려보내는 것도 걸맞지 않은 일이지만 한 해에 한 번만나겠다는 뜻은 사사로운 정을 공법(法) 밖에서 펴자는 것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나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노론이 아니었다. 다시 김희 등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끝내 사(私) 한 글자를 끊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매번 이런조치가 있는 것입니다. 빨리 사자를 제거하소서."
사간원 정언 안정선(廷) 등은 한술 더 떴다.
"이 역적이 한 번 섬에서 나오자 온 나라가 몹시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만일 제 마음대로 왕래하도록 하면 종묘사직이 당장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오직 공법(法)일 뿐입니다. 자전의 뜻을 체득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끊어 버리고 의리로 처단하소서."
은언군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정조는 다시 타협에 나섰다. - P139

이른 아침.
정조는 동궐(東闕)로 향했다. 대비에게 문안하기 위해서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먼저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있는 동궐로 가서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일은 괴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촌수로는 할머니지만 영조 21년(1745) 생으로서 영조 28년(1752) 생인 정조보다 불과 일곱 살이 많을 뿐이었다. 사가 같으면 누이가 될 정도의 나이차였으나 열다섯 살에 예순여섯의 할아버지 영조와 대혼(婚)을치름으로써 법적인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영조 11년생(1735)인 혜경궁홍씨보다는 열 살이 적었으나 혜경궁 역시 어머니로 깍듯이 섬겨야 했다. 광해군이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시켰다가 쫓겨난 전례가 있으므로 정순왕후를 대할 때 정조는 정성을 다해야 했다. 국왕은 효도에 있어서도 모범이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그녀의 친정이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직접 가담했음은 모두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부친 김한구, 홍계희 - P152

짬禧) 등과 짜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다. 그 배후에는 정순왕후가있었다. 김귀주는 과거 급제도 못한 처지였으나 여동생이 국모가 되자 음보(蔭補)로 조정에 나와 왕비의 오라비라는 배경으로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는 그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정견을 갖고 있던 노른 벽과의 맹장으로 활약했다.
정순왕후 또한 정조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다. 정조 즉위 후 오라비 김귀주가 탄핵을 받아 흑산도로 유배 갔다가 끝내 나주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정순왕후의 친정에서 제공했다. 김귀주가 사도세자 죽이기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정순왕후는 이런 인과관계를 무시했다. 원인은 무시하고 결과에만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 원한을 풀기 위해 틈만 나면 언문 하교를 내려 정조의하나 남은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핏줄인 은언군을 죽이려 압박했다. 명분은 ‘국왕을 보호한다‘, ‘사직을 위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구보다 그녀가정조를 저주하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정순왕후에게 은언군은 정조를 압박할 수 있는 좋은 먹이였다. 정조는 자신이 이 여인보다 먼저 죽으면 강화도의 은언군은 죽은 목숨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P153

그러나 이때까지도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하나로 묶인 운명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을 제거하려는 노론의 당론에는 따랐으나 아들을 제거하려는 당론에는 강력히 저항했다. 자신의 저항이 없었어도 아들이 왕위에 올랐을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들의 즉위에 일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들은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했고, 비로소 혜경궁은 남편과 자신과 아들이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천생(天生)의 인연으로 맺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과 아들 모두모순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자신의 친정을 몰락시켰다. 숙부는 사형당했고 부친은 연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공격을받았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동조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아들이 부친 사도세자의 복수에 나서면 모친인 자신의 친정이 다치는 모순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혜경궁 자신과 국왕 아들이 함께 져야 할 업보였다. 홍봉한이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이라는 상소에 아들은 "처분이 곧 뒤따를 것이다(從當處分)"라고 답했다. 처분이 뒤따른다는 것은 곧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혜경궁은 단식으로 맞섰고 아들은 겨우 부친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혜경궁은 자신과 정조 모두가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졌음을 절감했다. 정조가 이미 죽은 부친을 잊고 살아 있는 자신만을 위해 주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지만 정조는 부친을 잊지 않았다.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다 죽은 아버지의 원혼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P156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창밖은 어슴푸레했지만 정조는일어나 옷을 입었다. 지난밤 야연 (야간 경연)에서 김재찬에게 한 말이 생각나 입가에 가만히 웃음이 떠올랐다.
"한번은 한밤중까지 책을 읽다가 피곤이 몰려오고 졸음이 쏟아졌는데, 갑자기 한 줄기 닭 울음소리를 듣자 몽롱한 기운이 단번에 사라지고 청명(淸明)한 기운이 저절로 생겨서 이 마음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일득록』4)
어제도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읽기로 마음먹었던 책을 다 읽지 못했기때문이다. 정조는 경연 후 시신(臣)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언제나 반드시 일과를 정해 놓고 글을 읽었다. 병이 났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과를 채우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았고, 임금이 된 뒤에도 폐지하지 않았다. 저녁에 신하들을 만난 후에 깊은 밤까지 촛불을 켜고 책을 읽어 일과를 채우고 나서 잠을 자야만 비로소 편안하다."(『일득록』 1)
정조는 하루의 독서 목표량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정무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독서할 틈을 찾을 수없었다. 정조는 일을 적체시키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날 처리할 일은 그날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만기(萬機)를 친림(親臨)하는 국왕의 업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승지들은 괴로워했다. 매일 새벽부터 출근해서 업무 보고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할 수도 없었다. - P172

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10)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 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받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만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이렇게 정조가 옥사를 재심리해 사형수를 사면하자 비방하는 소리가 나왔다. 국법과 기강이 무너진다는 비방이었다. 정조는 남공철에게 자신의옥사 판결 원칙을 설명하면서 비방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나는 살릴 만한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지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을 살리려는 것이 아니다. 한고조(高祖)의 약법(法)에 ‘남을 죽인 자는 죽인다‘고 하였고, 당(唐) 태종(太宗)이 경계하여 삼간 바는 대옥)에 있었다. 죽여야 하는데 살린다면 죽은 자에게 원한이 남게 하는 것이고, 살릴만한데 죽인다면 살인자와 차이가 없다. 삼척(三尺)의 법이 지극히 엄한데내가 어찌 은혜로운 사랑으로 억지로 살리기 좋아한다는 이름을 붙이려 하겠는가... 나를 모르는 자들은 혹 반드시 죽일 자를 살리려 하는 것이라의심하는데 내 어찌 죽여야 하는 자를 살려 주려 하겠는가." (일득록」8)
정조의 옥사 판결은 살인자는 처벌해야 한다는 원칙 속에서도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는지를 세밀하게 살피는 것이었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한 일과는 늦은 밤까지 계속 이어졌다. - P217

자전(慈殿: 정순왕후)이나 자궁(慈: 혜경궁)이 나타나면 신하들은 모두 문 밖으로 물러나야 했다. 외간 남녀가 얼굴을 마주칠 수 없는 법도 때문이었다. 좌의정 심환지 등은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잠시 후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혜경궁이 세자와 함께 돌아가자 심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고, 부제조 조윤대가 정순왕후가 말한 성향정기산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시수가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가락을 정조의 입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도해 내기도 했다. 이시수가 강명길에게 진맥하게 했고, 진맥을 마친
강명길이 엎드려 말했다.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정순왕후가 등장한다. 내시를 통해 다시 말을 전한것이다.
"주상의 병세는 풍 기운 같은데 대신이나 각신이 병세에 적절한 약을 의논하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기색만 있으니 무슨 일이오."
좌의정 심환지가 회답했다.
"이제는 성상의 병세가 이미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가 망극할 뿐 더이상 아뢸 말이 없습니다."
약원 제조 김재찬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들여왔으나 정조는 마시지 못했다. 도제조 이시수는 이때 엉뚱하게도 수정전으로 달려가 정순왕후에게 경 - P246

과를 보고한다.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이시수가 통곡하자 정순왕후가 분부한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심환지 등이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다. 방 안에는 정조와 정순왕후 단둘만 있었다. 위독한 정조 곁에 최대 정적 정순왕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 방 안에서 정순왕후의 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론 벽파 심환지와 같은 당파 이시수가 문 밖에서 말했다.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왕대비전하(妃殿下: 정순왕후)와 자궁저하(慈宮邸下: 혜경궁 홍씨) - P247

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두문께 있는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지극히 엄중한 국가의 예법‘이란 비록 대비나 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조선의 예법을 말한다. 따라서 이 순간 대비 정순왕추가 다른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정조의 병석을 지킨 것은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국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은 정조의 최대 정적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다. 연훈방을 제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소개한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영조의 계비였던 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가 숨을 거두었다 해서 목놓아 통곡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따지면 조손(孫)지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원수인 두 사람이었다. 정조 24년인 이해, 세자의 나이는열한 살이었으므로 정조가 세상을 떠날 경우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가 섭정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경우 정조의 즉위와 동시에 몰락했던 정순왕후의 친정이 다시 살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죽어야 정순왕후의 집안이 사는 것이었다. 이런 정순왕후가 정조를 살리기 위해 성향정기산을 올렸다고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정조는 정순왕후와단둘이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정조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는지는알 수 없지만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4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양주(楊州)와 장단(長湍등의 고을에서는 한창 잘 자라던 벼 포기가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이는 상복을입는 벼(居喪稻"라며 슬퍼했다. 시골 노인들이 벼가 상복을 입었다고 전할정도로 백성들을 사랑했던 개혁군주 정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꾸었던 갑자년의 구상도 개혁의 꿈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 P249

순조 1년(1801) 노론 벽파 정권은 정조의 사망 이후 풍천 부사에서 쫓겨난 유득공을 북경으로 보낸다. 「주자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다. 유득공은 거부하려 했으나, 순조 즉위 후 정조의 사랑을 받던 모든 이들이 처벌받는 것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든 노모가 적극 권유하자 마음을 바꿔 사은사 조상진(趙尙鑛)의 사행 행렬을 따라갔다. 유득공은 북경에서 과거 친분을 쌓았던 『사고전서(四庫全書)』책임자 기윤(紀)을 만나 『주자』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다.
명백한 자멸의 길이었다.
정조 사후 조선에는 민란(民)이 빈발하였다. 정조 재위 때는 민란이 없었다. 정조가 재위에 있을 때만 해도 백성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군부(君父)께 아뢰기만 하면 억울함을 풀어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정조가사망하자 백성들은 임금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이제 자신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목숨 걸고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남에서 북에서 백성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시대 흐름과는 거꾸로 질주했다. 그 결과는조선 전체의 멸망이었다. 한 개혁 군주의 자리는 이토록 컸던 것이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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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자리는 천하의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자리였다. 정조에게는 더위도 장마도 모두 걱정이었다. 무더위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별전으로 옮길 것을 거부했지만 정조는 사실상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었다. 재위 22년(1798) 정조는 각신 이만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더위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매년 삼복더위가 지나고 서늘한바람이 처음 불어오면 마치 옛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기쁘다. 그러나 올해는 가뭄 때문에 농사가 아직 제대로 되지 않아서 날씨가 일찍 서늘해지는것을 꺼리고 있다. 백성을 위하는 나의 일념 때문에 날씨가 서늘해져도 기쁜 줄을 모르겠다. 방백(方伯: 감사)과 수령들도 이러한 나의 마음을 체득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또한 검소함에 대해 김조순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 (일득록」
그랬다. 부지런히 일하되 검소하게 생활하는 것이 정조가 생각하는 조선 왕가의 법도였던 것이다. 영조도 그랬고 자신도 그랬다.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했지만 그 누구보다 검소했다. 규장각 각신들은 정조의 검소함에여러 차례 탄복했다. 각신 서유방(徐有防)의 기록에 따르면 재위 11년(1787)정조의 거처는 벽지를 바른 지 오래되어 검게 변했고, 기둥과 서까래도 계속 내린 비로 다 썩었다. 경연 신하가 유사(有司)에게 고치게 하자고 청하자 정조는 서두르지 말라고 말렸다. - P178

"나는 사치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옷은 모시와 목면에 지나지 않고 음식은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데 억지로 애써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몸소 행한 효과가 있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지금 도리어 온 세상이 사치스럽고 화려할 뿐 변화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다. 아마도 나의 정성이 감동시키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습속이갑자기 변화하기 어려워 그런 것인가." (일득록」7)
정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명주옷, 즉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부드러운명주옷보다 거친 무명옷을 선택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사람은 대체로 화려한 옷을 한 번입으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므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이는 재물을 축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실로 끝없는 폐해와 연관된다. 내가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발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1)
그 무명옷도 여러 번 빨아 입었다. 대개 군주들은 옷을 빨아 입지 않고새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조는 달랐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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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가난을 달관하며 이덕무는 독서에 열중했다. 그가 세상에서 집착하는 유일한 분야는 독서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바보)라고 부르자 스스로「간서치전(看書痴傳)」을 지었다.
"목멱산(남산)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어눌해서 말은잘하지 못하고, 성격은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 따위는 더욱 알지 못했다. 남들이 욕해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해도 지금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동창 • 남창· 서창의 세창이 있었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가며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사람들은 그가 웃으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장안의 양반 장서가들은 그가 책을 빌리면 꺼리지 않고, "이덕무는 참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의 눈을 거치지 않은 책이라면 어찌 책 구실을 하겠는가"라면서 새로운 책이 나오면 빌려 달라고 하기도 전에 먼저 싸서 보내 주기도 했다. 이덕무가 자신의 책을 빌려 갔다는 것이 자랑거리가되었다. 그러나 책은 싸서 빌려 주었어도 음식을 싸서 보내 주지는 않았다. 기아는 늘 이덕무 곁에 있는 친구였다. - P162

박지원은 밖으로 나갔다. 뭘 하는가 보았더니 몸소 쌀을 씻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 출신이 쌀을 씻는 모습은 박제가로서는 처음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는 아주 익숙한 솜씨였다. 그제야 비로소 박제가는 이덕무가 박지원은 다르다‘고 거듭 말한 것이 이해가 갔다. 고고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덕무가 칭찬하는 양반이라면 뭔가 다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박지원은 그 예상까지 뛰어넘었다.
쌀을 다 씻은 박지원은 다관(茶罐)에 쌀을 넣고 익숙하게 밥을 지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장을 읽는 것보다 그의 밥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양반, 그것도 노론 출신의 양반 사대부가 직접 밥을 하는 모습이니 재미있지 않을 수 없었다.
박지원은 흰 주발에 밥을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왔다. 반찬은 서너 가지뿐이었지만 술도 한 병 있었다. 박지원은 술잔을 들어 박제가를 축수했다.
박제가는 감격에 겨워 글을 지어 화답했고 박지원은 탄복했다.
백탑은 양반과 서얼들이 어울리는 신분 타파의 장이기도 했다. 이서구는 선조(宣祖)의 부친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서 부친 이원(李)은 영의정까지 추증 받은 명가 후손이었다. 이덕무보다는 열네 살, 유득공보다는 일곱 살, 박제가보다는 다섯 살이 어렸으므로 학문과 시를 배울 목적으로 백탑을 자주 찾았다. 그러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고 백탑은 여전히 서얼들의 무대였다. 서상수. 윤가기 • 이희경 같은 서얼들은 ‘백탑시사(白塔詩社)‘라는 시 동인모임을 만들어 시를 지었다. 백탑파(白塔派)라는 명칭도 생겼다. 한시를 능숙하게 짓는 이 서얼들은 그러나 능력과 관계없이 신분제 사회의 그늘일 뿐이었다. 그 그늘 속에서 그들의 학문은 햇볕보다 빛났다.
•166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1 - P166

"수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평소 듣지 못하던 사실을 들었고, 중국의옛 풍속이 여전히 남아 옛사람이 나를 속이지 않은 사실에 감탄했다. 그래서그들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하게 할 만한 것은 글로기록하고 아울러 그것을 시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설을 만들었다."(박제가, 「북학의 서문
북학파라는 실학의 중요한 한 조류는 벼슬길을 꿈도 꾸지 못하던 서얼출신 스물아홉 백두(白頭) 지식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제가에게 북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곤궁해지고, 재정은 날로 궁핍해지고 있다. 무릇 사대부로서 장차 팔짱 낀 채 구제하지 않을 것인가? 과거의 인습에 안주해 편안한 안락을 누리면서 아는 것을 모르는 체할 것인가?"
그러나 「북학의에 아무리 조선을 잘살게 할 수 있는 획기적인 내용을담았다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 북학을 주장하는 박제가가 서얼이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최고의 학문과 경험을 지녔다 해도 서얼은 절대 등용될 수 없는 것이 곧 법이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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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정조는 없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
세손은 대렴까지 마치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성복날에야 비로소 즉위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도 조건을 내걸었다.
" 뭇 신하들의 심정에 몰리어 장차 왕위에 서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차림으로 예식을 거행하기에는 내 마음속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의장복인 면복 차림이 아니라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겠다는 뜻이었다. 상복 차림으로 즉위한 사례는 개국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학자군주답게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상복 차림도 가하다는 예(禮)는 『서경』의 강왕지고)에 보인다. 소식의 주설에 ‘상복 차림 그대로 관례(冠禮: 성인 의식)를거행해야 한다‘고 한 대문을 인용하여 예법이 아니라고 비난해 놓은 것을 채침이 서집전(書傳)』에 수록해 놓았다."
상복 차림으로 관례를 행해도 된다는 구절을 즉위로까지 확대 해석한것이었다. 한 개인이 어른이 되는 관례와 한 나라의 임금이 되는 즉위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전례도 없었다.
대신과 신하들이 거듭 말리자 할 수 없이 면복을 입는 것으로 물러선 세손은 부축을 받으며 빈전(殿 국왕의 시신을 모신 곳)에 네 번 절하는 사배례(禮)를 거행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이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왕 영조의 유교를 받들었고, 좌의정 신회가 대보(大寶:옥새)를 받들어 올렸다. 명실상부하게 영조의 후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이다가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한 듯 유교와 옥새를받았다. 이제 비로소 대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 P39

속광이었다. 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끊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세손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라."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대신들이 또 속광을 청했다. 통곡 속에서 세손이 말했다.
"그리 하라."
솜은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영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춘추 여든셋. 왕위에 있은 기간만 무려 52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고, 그누구보다 인자했으나 때로는 그 누구보다 냉혹했던 그런 임금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아니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그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 P53

그러자 김양택은 정후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정후겸은 대관도 아니니 사는 더욱 실형(刑)하는 것입니다."
"결안 죄를 시인함)을 받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사사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전에도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홍인한과 정후겸은 이렇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즉위방해 사건을 단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몬 데 대한 단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란 말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이 사건에 대한 주모자들을 이렇게 처벌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일단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 P75

1759년(영조 35년) 6월 22일 오시(吾時: 11~1시).
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於義宮)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친형제(無刃)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이를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출漢書)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운관(書雲觀)에서 길일(吉日)에 길시(時)라고 점쳐 택일한 날에 거행하는 대혼(婚)이 축복이 아니라 왕가의 피로점철된 저주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구나 조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줄을.
대혼날까지 그 아버지 김한구는 벼슬하지 못한 유학신세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척신(戚臣)으로 등장했다. 자신보다 서른살이나 많은 사위를 둔 새로운 국구(國: 왕의 장인)의 등장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진 김한구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금위대장이 되어 궁중의 실세가 되어 갔다.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왕후보다 다섯 살 위인 그 역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백두였으나 동생이 왕비가 되면서 음보로 벼슬에올랐다.
이렇게 딸과 여동생 덕분에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김한구 ·귀주 부자 - P78

는 홍봉한 · 인한 형제 못지않게 권력욕이 많았다. 기묘하게도 두 외척은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중진들과 두 외척의 협공을 받아 영조 38년 살해되고 말았다. 궁중의 두 여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모두 안에서 호응했다.
그러나 세자를 제거한 후 두 외척의 자세는 달라졌다. 공동의 적이었던사도세자가 사라지자 외척 가문 사이에 노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김한구 ·귀주 부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노론벽파의 맹장이 되었고,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노론 시파의영수가 되었다. 같은 노론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10년이 지난 영조 48년(1772) 7월 21일, 두 외척은 드디어 정면충돌했다. 영조가 재위 42년 병석에 누웠을 때 홍봉한이 영조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공조참판 김귀주가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 P79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조실록』이 "특별히 발탁했다"고 적고 있듯이 이례적인 발탁이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넉 달 후에는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9월에는 규장각을 만들면서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에게 군권까지주었다. 정조는 즉위년 11월 홍국영을 수어청종2품 수어장관인사(守禦使)로 임명했다. 홍국영이 장수까지 겸임할 수 없다며 소명을 거부했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지신사(事: 도승지)의 품질을 올려 장수의 임무를 맡기려 한 지오래되었다. 지금의 국세에 맡길 수 있는 심복 신하에게 위호(護: 호위)하는 직임을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을 진정시키고 왕실을 돕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듬해(1777) 5월에는 홍국영을 총융사로 삼았다가 다시 금위대장大將)으로 삼았다. 금장)이라고도 하는 금위대장은 국왕 경호 책임자로서 종친이나 외척들이 맡아 오던 자리였다. 금장까지 겸임함으로써 홍국영은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도승지는 정3품, 금위대장은 종2품으로 극품(極品: 정1품)은 아니었지만 조정의 실권은 홍국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불과서른이었다. - P131

홍국영의 충격은 컸다.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세태에 대한 마음속의 울분을 끝내 이기지 못했는지 혹두봉조하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4월 5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였다.
이날 정조는 경연에서 홍국영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이는 곧 나의 과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국영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그의 시대도완전히 막을 내렸다. 「정조실록』(3년 9월 26일)은 홍국영이 정조 즉위 후 "국변인(人나라 쪽의 사람)으로 자처하고 역적을 친다는 핑계로 제 뜻대로다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또한 "지신사(知事: 도승지)로서 숙위대장大)을 겸해서 이조와 병조의 모든 인사를 먼저 다 결정한 뒤에야 위에 올렸다"고도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뜻밖의 재앙이 당장 오므로, 온 세상이두려워서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여염집에서 사사로이말하는 자일지라도 다 지신사라 부르고 감히 그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권력자일수록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일찍 권력을 잡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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