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정조는 없었다. 영조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노론 벽파라는 철벽을 넘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영조가 없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손의 감정은 복잡했다.
세손은 대렴까지 마치고 상복으로 갈아입는 성복날에야 비로소 즉위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때도 조건을 내걸었다.
" 뭇 신하들의 심정에 몰리어 장차 왕위에 서기는 하겠지만, 면복(冕服)차림으로 예식을 거행하기에는 내 마음속에 더욱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의장복인 면복 차림이 아니라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겠다는 뜻이었다. 상복 차림으로 즉위한 사례는 개국 이래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학자군주답게 상복 차림으로 즉위하는 근거를 제시했다.
"상복 차림도 가하다는 예(禮)는 『서경』의 강왕지고)에 보인다. 소식의 주설에 ‘상복 차림 그대로 관례(冠禮: 성인 의식)를거행해야 한다‘고 한 대문을 인용하여 예법이 아니라고 비난해 놓은 것을 채침이 서집전(書傳)』에 수록해 놓았다."
상복 차림으로 관례를 행해도 된다는 구절을 즉위로까지 확대 해석한것이었다. 한 개인이 어른이 되는 관례와 한 나라의 임금이 되는 즉위를 같은 차원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다. 전례도 없었다.
대신과 신하들이 거듭 말리자 할 수 없이 면복을 입는 것으로 물러선 세손은 부축을 받으며 빈전(殿 국왕의 시신을 모신 곳)에 네 번 절하는 사배례(禮)를 거행했다. 영의정 김상철(金尙)이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왕 영조의 유교를 받들었고, 좌의정 신회가 대보(大寶:옥새)를 받들어 올렸다. 명실상부하게 영조의 후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세손은 눈물을 흘리며 망설이다가 거듭된 재촉에 마지못한 듯 유교와 옥새를받았다. 이제 비로소 대권을 손에 쥔 것이었다. - P39

속광이었다. 솜이 움직이지 않으면 숨이 끊어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세손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 더 기다리라."
아직 날이 밝기 전이었다. 대신들이 또 속광을 청했다. 통곡 속에서 세손이 말했다.
"그리 하라."
솜은 미세한 움직임도 없었다. 영조는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춘추 여든셋. 왕위에 있은 기간만 무려 52년이었다. 그 누구보다 눈물이 많았고, 그누구보다 인자했으나 때로는 그 누구보다 냉혹했던 그런 임금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세손은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아니었다면 사도세자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열한 살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그 소년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스물다섯의 나이였으나 그 25년 동안 그가 감내했던 고통과 사색과 번민의 무게는 동시대의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것이었다. - P53

그러자 김양택은 정후겸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정후겸은 대관도 아니니 사는 더욱 실형(刑)하는 것입니다."
"결안 죄를 시인함)을 받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사사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전에도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홍인한과 정후겸은 이렇게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 겉으로는 즉위방해 사건을 단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몬 데 대한 단죄였다. 정조는 사도세자란 말을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이 사건에 대한 주모자들을 이렇게 처벌했다. 이로써 정조는 과거사 정리가일단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시작에 불과했다. - P75

1759년(영조 35년) 6월 22일 오시(吾時: 11~1시).
예순여섯의 영조는 어의궁(於義宮)으로 향했다. 새로 신부를 맞이하는친형제(無刃)를 행하기 위해서였다. 2년 전 사망한 정성왕후 서씨의 뒤를이를 한 소녀가 어의궁에서 영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삼간택 끝에 뽑힌 김한구(출漢書)의 딸로 불과 열다섯 살짜리 소녀였다. 며느리 혜경궁 홍씨보다 무려 열 살이나 어렸다.
영조는 어의궁에서 수줍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 소녀가 훗날 이나라에 가져올 파란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손자를 죽이고, 손자며느리는 물론 증손며느리의 피까지 손에 묻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서운관(書雲觀)에서 길일(吉日)에 길시(時)라고 점쳐 택일한 날에 거행하는 대혼(婚)이 축복이 아니라 왕가의 피로점철된 저주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더구나 조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 줄을.
대혼날까지 그 아버지 김한구는 벼슬하지 못한 유학신세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그는 또 한 명의 척신(戚臣)으로 등장했다. 자신보다 서른살이나 많은 사위를 둔 새로운 국구(國: 왕의 장인)의 등장이었다. 딸이 왕비가 되면서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에 봉해진 김한구는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고, 금위대장이 되어 궁중의 실세가 되어 갔다.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귀주도 마찬가지였다. 정순왕후보다 다섯 살 위인 그 역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백두였으나 동생이 왕비가 되면서 음보로 벼슬에올랐다.
이렇게 딸과 여동생 덕분에 정계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김한구 ·귀주 부자 - P78

는 홍봉한 · 인한 형제 못지않게 권력욕이 많았다. 기묘하게도 두 외척은사도세자 제거에는 뜻을 같이했다. 사도세자는 김상로. 홍계희 등 노론중진들과 두 외척의 협공을 받아 영조 38년 살해되고 말았다. 궁중의 두 여인,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모두 안에서 호응했다.
그러나 세자를 제거한 후 두 외척의 자세는 달라졌다. 공동의 적이었던사도세자가 사라지자 외척 가문 사이에 노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졌던 것이다. 김한구 ·귀주 부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노론벽파의 맹장이 되었고,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노론 시파의영수가 되었다. 같은 노론 내에서 파벌이 갈린 것이었다.
사도세자가 살해되고 10년이 지난 영조 48년(1772) 7월 21일, 두 외척은 드디어 정면충돌했다. 영조가 재위 42년 병석에 누웠을 때 홍봉한이 영조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공조참판 김귀주가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 P79

정조는 즉위 3일 만인 3월 13일 홍국영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삼았다. 정조실록』이 "특별히 발탁했다"고 적고 있듯이 이례적인 발탁이었으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넉 달 후에는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9월에는 규장각을 만들면서 규장각 직제학을 겸임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에게 군권까지주었다. 정조는 즉위년 11월 홍국영을 수어청종2품 수어장관인사(守禦使)로 임명했다. 홍국영이 장수까지 겸임할 수 없다며 소명을 거부했으나 정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가 지신사(事: 도승지)의 품질을 올려 장수의 임무를 맡기려 한 지오래되었다. 지금의 국세에 맡길 수 있는 심복 신하에게 위호(護: 호위)하는 직임을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것을 진정시키고 왕실을 돕게 할 수 있겠는가?"
이듬해(1777) 5월에는 홍국영을 총융사로 삼았다가 다시 금위대장大將)으로 삼았다. 금장)이라고도 하는 금위대장은 국왕 경호 책임자로서 종친이나 외척들이 맡아 오던 자리였다. 금장까지 겸임함으로써 홍국영은 국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와 경호실장격인 금위대장을 한 손아귀에 장악한 조선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도승지는 정3품, 금위대장은 종2품으로 극품(極品: 정1품)은 아니었지만 조정의 실권은 홍국영의 손아귀에 있었다. 사실상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 불과서른이었다. - P131

홍국영의 충격은 컸다.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세태에 대한 마음속의 울분을 끝내 이기지 못했는지 혹두봉조하 홍국영은 정조 5년(1781) 4월 5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불과 서른넷의 나이였다.
이날 정조는 경연에서 홍국영 문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책했다.
"일언이폐지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이는 곧 나의 과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홍국영은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동시에 그의 시대도완전히 막을 내렸다. 「정조실록』(3년 9월 26일)은 홍국영이 정조 즉위 후 "국변인(人나라 쪽의 사람)으로 자처하고 역적을 친다는 핑계로 제 뜻대로다했다"며 비판하고 있다. 또한 "지신사(知事: 도승지)로서 숙위대장大)을 겸해서 이조와 병조의 모든 인사를 먼저 다 결정한 뒤에야 위에 올렸다"고도 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어기는 일이 있으면 뜻밖의 재앙이 당장 오므로, 온 세상이두려워서 마치 조석(朝夕)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여 여염집에서 사사로이말하는 자일지라도 다 지신사라 부르고 감히 그 이름을 가리켜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권력자일수록 처신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일찍 권력을 잡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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