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때마다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지구 멸망이나 홀로코스트를 맞더라도,
사랑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힘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이 최고의 힘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그러나 내겐 너무 아프고 부담스러운-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 P126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내가 가장 동일시한 인물은 작품속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원작자다. 이 영화는 감독과 출연을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원작에 빚지고 있다. 20년 동안 링 위에서 컷맨(cut man, 복싱 선수가 경기 중피가 나면 응급처치를 해주는 스태프)으로 일한 소설가는 흔치 않다. 원작을 쓴 제리 보이드(JerryBoyd, 1930~2002, 필명 F. X. 툴)는 생년월일이 불명일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단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실린 소설집 《불타는 로프(Rope Burns)》(2000년)가 그가 생전에 남긴 단 한 권의 작품이다.
투우사, 택시 운전사, 술집 주인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40년간 혼 - P126

자서 글을 썼다. 이 책 이전까지 그의 글은 모두 출판사로부터거절당했다. 첫 책이 출간되고 2년 후에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는 알코올과 노숙, 중노동과 글쓰기를함께하면서 69세에 첫 소설집을 낸 소설가가 감히 부럽다. 그의삶은 고달팠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고 영원으로 남았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넘치는데, 거의 메타포다. 이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쓴 인생과 고통에 관한 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가 왜 공화당원인지 진정 이해하게 되었다. 항상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위는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복싱에서 중요한 것은 자세라는 것・・・・・ - P127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해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사건,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오늘 만날 수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거나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상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 P134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친구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 - P135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더러운 커튼이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무슨 일 있니?" "건강해라."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그만 주무세요."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상처도 두 배로 커질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 P137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 P141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중년들과 중년의 배우와 동일시한 나는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이 다 부드럽게 흘러갔다. 제주도가 배경이고 다양한 연령대가 나오지만 내게 이 작품의 주제는 ‘나이 듦‘이었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 이정은 배우, 엄정화배우의 ‘인간적 고민‘을 나는 알 것 같다. 연령은 계급, 젠더와함께 중요한 사회구성 요소로, 모든 분야에서 노소(老少)에 따른 ‘우선권‘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의 전쟁터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싸운다.
- P145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삶은 기존의읽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P148

토박이 제주 사람들은 주로 그들끼리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 "우리 집 귤이 제일 맛있다!" 제주도(濟州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산(한라산)이다. 산 전체에 도심, 해변, 중산간(中山間), 정글도 있고 습지도있다. 제주는 하나의 섬이자 산이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라는 얘기는 섬의 일부에서 섬의 일부인 ‘꼭대기‘
가 가장 잘 보이는가 하는 문제다. 내부에서 어느 내부가 가장잘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 P150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임종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날 선 얼치기 유물론자지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않을 때가 있다. 인생이 한 번이라는 사실은 너무 불공평하다.
이럴 때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윤여정 배우의 ‘말씀‘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영화처럼) 살라"고 한다. 더 화가 난다. 나는 아직은퇴 자금이 없으며, 여행할 체력이 안 되고, 연애가 성립(?)된적이 없다. 내세에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으로태어난다는 믿음 없이는, 현실을 버틸 수 없는 세상이다. - P156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이들.
조혼과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내전 상황의 물 없는 마을, 굶고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상황부터 그렇다. 내가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92년 미군의 잔인한 폭력으로 숨진 윤금이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
내 또래였다.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었다. 충격과 슬픔이 나를 압도했다. 그저 나는 그와는 다른환경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 P157

‘제2의 성‘인 여성의 삶은 원래 시민인 남성보다 사회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대화는 어쨌든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자본주의의 변화는 여성 개인의 노력보다 생년(生年)이 삶을 결정해 왔다. "시절을 잘만나서"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나의 의지로 살았고, 내 어머니는 외할머니보다는 오래 그리고 ‘배운 여성‘으로 사셨다. 개인의 노력보다 시대적 조건이 여성의 삶을 좌우했다. 아무리 행복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해도 여성들의 삶이 이전 시대보다 ‘나은 상황임은 분명하다(물론 성차별이 나아졌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 P157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극중 영옥(한지민)은 바다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영희(정은혜)가 없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그는언니를 홀로 부양해야 했다. 몸에 철근을 두른 듯한 부담감과그래서 바다에서는 혼자인 해방감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한다.
그는 울먹이며 연인에게 말한다.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억울해. 왜 우리 부모님은 착하지도 않은 나한테 저런 애를 버려두고 가셨는지. 억울해.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저렇게 태어난 영희는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렇다. 내세를바라는 게 아니라 이러한 태도가 정의다.  - P158

당대는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혁명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없다. 나는 티모테 샬라메나 아미 해머(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 출신이다)가 아니다. 유물론자인 나의태도는 내세를 기도하기보다 현실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과 상부상조,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 남부유럽의 햇살은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보기로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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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을 때 몸은 의지로 움직인다. 죽음이란 몸에서 의식이빠져나간 이후를 말한다. ‘몸‘만 남는 것이다(영어 body의 대표적인 뜻은 ‘시체‘이다). 경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울증은 의지-의식의욕, 이 세 가지 상실이 혼재된 상태다. 한마디로 무기력의 연속이다. 그래서 온종일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할 수없는 상태가 몇 년간 지속되어 근육 쇠약으로 사망하는 이도있고, 우울한 상태에서 자신과 극한 투쟁을 벌이며 생활을 이어 나가는 이도 있다. 우울을 잊기 위해 미친 듯이 일이나 공부,
글쓰기에 몰두하여 생산력이 높은 ‘고기능 우울증 환자‘도 있다(어니스트 헤밍웨이, 버지니아울프………).  - P117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universal gravi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gravity), 중력(力)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리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의한 원심력이더해져 우리가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지구의의지, 중력의 법칙에서 버려진 이들이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의고통에 비하면 ‘우울(憂鬱)‘이라는 표현은 우아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스펙터클하고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 다니며 먹고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 환자는 이와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떠 있는 상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다.  - P118

삶은 인간관계다. 그것이 전부다. ‘인간(人間)‘은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 단어다. 죽음과 더불어인생에서 이것만이 진실이다. 이를 잊을 때 우리는 크고 작은실수를 한다. 관계(성)를 독자성, 자유, 자율, 의존 같은 개념과혼동한다. 의존도 독립도 관계다. 반대항으로 보이는 이런 단어들 자체가 관계성의 반증이다. 삶에서 관계성과 대립하는 개념은 없다. 최근 중년 남성들의 로망인 은둔자 ‘자연인‘ 되나
‘관종‘도 ‘집콕‘도 관계적 삶이다.
인간관계 중에서 우리가 가장 고민하는 주제는 넓은 의미의
‘사랑‘이다. 이 글에서 배타적 로맨스 관계는 논외다. 로맨스는제도이지만 가장 복잡한 담론이다. 후유증도 커서 심장이 뭉개지게 아프다.  - P123

한편 사랑의 정의가 다르다는 사실보다 더 복잡한 문제는논의의 범주가 넓다는 점이다(애국, 모성, 이성애, 예술 애호, 신앙····…). 사랑은 내용, 대상, 인식(감정), 심지어 섹스 여부에 따라 개념이 달라진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요소는 관계의 사회적 맥락을 합의하는 것이다. 이 또한 지성과용기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문제다. 대표적으로 제도화된 사랑인 이성애나 모성에 대한 공부, 자신의 위치, 사회에 대한 이해 같은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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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살 수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손쉬운 발상인 저항이나진실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의 위치를 질문한다.
문제는 ‘도쿄‘와 ‘서울‘이 특정 지역(후쿠시마, 밀양, 강정…………)에 위험 시설을 건설하여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내는현실이다. 한국은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p78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
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악‘은 없다.p79


TV에 나와 후쿠시마 생선을 먹어도 문제가 없다고 직접 시식하는 일본 총리의 모습은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품게한다. 문제가 없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조차 쓰지 않는다. 모두가 슬퍼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원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 기지・・・・・・ 해결할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p80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스톱]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톱과 그의 사망 소식에 더해 정희진쌤의 생각들을 읽는다. 김기덕, 조재현은 성폭력 가해자, 조직범죄자다.

공감한다.

대추리에서 촛불을 든 대부분의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처음든 생각이 이랬다. 먹고 살아야할 문제와 해먹여할 식구들로 하루 종일 논밭과 부엌에서 동동거린 할머니들이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에 촛불까지 들게 만드는 세상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세상일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미군 기지 이전일까?
언제든 약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 가능할까? 2022년 가을, 더욱 불가능한 꿈이다.
이런 저런~ 뉴스의 뒷면을 보면 울적한 추석이다. 에구~ 달이나 보러 가야겠다.




이 표현들로 지난 제20대 대선의 핵심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가. 나는 선거 기간 내내 몹시 괴로웠다. 가부장제가 부추기는 여성의 자원(몸, 외모)이 결과를 좌우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 개혁이슈가 젠더로 은폐되었다. 김건희 씨의 섹슈얼리티는 성산업과 무관하다. 소송때마다 검사와유착해 자신을 자원으로 이용한 경우인데, 나는 이와 관련한글을 썼다가 여성주의자들에게 "왜 김건희 씨를 비판하냐, 여성혐오다!"라는 (분노에 찬 지적을 받고 절망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혐오‘ 단어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절망한 이들이 선택한 간단한 존재 증명이다. - P50

나는 모든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모두 부분적 세계관이다. 개인이 단 하나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바람직한가?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부분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공부일 뿐이다. - P50

우리는 매일매일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낸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가장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명언, 미디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 그래서미디어가 발달할수록, 다양할수록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합의도 힘들고 중간 지대는 사라지고 삶의 전반이 양극화된다. 계급의 양극화는 물론이고 건강, 문화, 앎, 만들어진 외모까지 양극단화된다. 지금의 플랫폼 자본주의처럼 완벽하게승리한 지배 체제는 없다는 절망적 생각이 든다.  - P51

어느 분야나 자기 언어를 갖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정도의
‘엉덩이 훈련‘이 필요하고, 사회는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들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되지 않는(?) 여성주의 공부를 선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 자기방어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여성들에게 여성주의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공부 무용론‘ 선동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여성끼리 작은 공부 모임을 만들어공부만 해도 지구의 반을 구할 수 있다. 지역 도서관에 여성주의 책을 희망 도서로 신청하고, 온라인에 성의 있는 댓글을 달자, 잔물결이면 충분하다. - P52

최근 작고한 철학자 장춘익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주 인용하게 된다. "오래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나는데, 별로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네가 세저쪽은 짜증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흡페미니즘(다른 입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장도 마찬가지다-필자)이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P53

앞의 사례들은 성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아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 P56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자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이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해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 P59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따위가 얽힌 지점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제주 4·3 사건, 호모포비아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 P61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이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의 반응이다. "안정돼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 P63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은 원래부터 세상이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이미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이 왜곡된다. 그러므로 ‘정신이 안정되고 멀쩡한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속이는기득권자들이다. 극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너 걱정되게 왜 그래?" "말도 안 돼." "미쳤군."・・・・・…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 P64

 윤리성 추구와 지향, 가장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게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앞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색깔에 달려 있다. - P67

암수살인의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이 다르게 분배되는 현실을 이만큼 성실히 추적한 영화도 드물 것이다. 한국판 페미사이드(여성 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안전이라는 사회적 공공재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다. - P70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만만치 않은 요구다. - P72

남성, 단 한 명의맥주 회동 사진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사진 속 세 사람의표정은 무의식의 ‘바닥‘을 드러낸 듯 적나라했다. 그들은 서로눈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백인 경찰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지구상 유일한 제국인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대통령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열받은 상태를 감추는 것이었을까? 자기 집에 들어갔는데 강도로 오인받아 체포된 교수는 주눅 든 듯 얌전히 앉아 있다. 그의 작은 몸은 더 작아 보였다. - P93

이 사진이 나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당시도 지금도 나는 분노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차별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 심지어 비열한 인간‘이, 인종이나 젠더만 작동해준다면 언제든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몰역사적 현실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겪었지만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위협감, 공포감 그리고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늘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 사실 인종이나 젠더 문제가 아니더라도, 단지 자신의 지위나 직업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판치 - P93

는 시대다. 그들은 작은 특권이라도 120퍼센트 활용한다. 이 사진은 정의란 올바름이 아니라 여론과 문화 권력임을, ‘흑인 대통령 시대‘의 미국 사회를,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I AmNot Your Negro)〉(2016년)의 현재성을 집약한다. - P94

‘객관적‘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는맥락에 따라 그 범주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집단이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늘 있기 마련"인 그런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어야만 사회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흑백 갈등이지만 실제 미국의 흑인 인구는 12퍼센트 내외다. 인구에 비하면 상당한 ‘영향력‘이다. 그만큼 흑인운동이 활발하다는 얘기다. 사회적 약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인한 가시화 여부이기 때문이다. - P9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내가 상대하는 이들을 아는 일이다. 이 두 문제는 서로 겹쳐 있다. ‘나‘는 타인과사회와 맺는 관계를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레너드 코언의 명곡 <아임 유어 맨 (I‘m Your Man)>의 가사를 보자. "나는 당신과당신을 향해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살아왔어요.
기어가 당신 발밑에 엎드리겠어요. 난 당신의 아름다움 앞에 헐떡이는 한 마리 개. 만일 당신이 혼자이길 원한다면 난 사라져주겠어요." 한마디로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나는 당신의 사람이라는 사랑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주체(subject)이고 너는 대상(object)이다. - P99

 영화 속 볼드윈의 말대로 "당신(백인)은 나(흑인, 여성을 비롯한 피억압자)를 보지 않아도 됐지만, 난 당신을봐야 했다. 당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더 당신을 잘 안다.
인종 모순과 젠더 모순의 공통점은 지배자의 무지다. 지배자들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도 되는 것이다. 몰라도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알게 되면 자기 분열과 긴 성찰의 시간으로 인생이 뒤죽박죽될지 모른다. 하지만 억압받는 이들은 자신과 상대방, 세계를 알지 못하면 생존할 수없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다. - P108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사무치게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영화 초반에 제임스 볼드윈의 "이제 쉰다섯 살이 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내레이터 새뮤얼 잭슨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나는 볼드윈처럼 살지도 않았지만, 나 역시 지쳤다. 어느 시대나 저항의 지도자는 적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나 열렬한 지지자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흑인도, 여성도,
그 어떤 정체성의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저항은 일시적인 내부의 통일 전선일 뿐이다. 흑인도, 여성도 내부에 같은 인간은 없다. - P108

내겐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감독이 <청년 마르크스(TheYoung Karl Marx)〉(2017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이는 리들리 스콧이 ‘마초 영화‘의거장이기도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얘기와는 다른 문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인간 마르크스는 매우 싫어한다. 마르크스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라울 펙 감독은 어떻게 제임스 볼드윈과 마르크스에게 재현 대상으로서 같은 애정을 품을 수 있었을까.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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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문을 나서며 
wyiscie z kina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의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연주한다.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그곳으로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읽다가 갑자가 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극장 문을 나서며] 때문이었던가 보다. 극장? 사라져가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에 시 보다는 ‘극장‘에 꽂혔던.
시장에 가야하는데,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생각과 달리 몸뚱이는 [끝과 시작]을 펄럭거리고 앉아 있다. 이 짓도 나쁘지는 않네.

시는. . .
가까운, 어렵지 않은,
매일 매일의 일상이다.
요즘 내 생각과 같은 [나에게 던진 질문],
깊은 눈의 시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





나에게 던진 질문
 Pytania zadawane sobie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어떤 사람들은 시를좋아한다 
Nicktórzy lubia poche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푸른색을 유달리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므로,
낡은 목도리에 애착을 갖기도 하고,
뭐든 제멋대로 하기를 즐기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으므로,

시를 좋아한다는 것一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

끝과 시작
 Konice poczatek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험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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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열풍의 시대지만 쓴 글이 출간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책으로 나올 필요도 의사도 없더라도 매일매일 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언어는 현실보다 늦게당도한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시간차를 메우려는 예언자는 사기꾼이다.
현실을 드러내는 재현의 언어는 글쓴이의 노동으로서만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내가 나를 알지 못할까 봐 두렵고, 나를 몰라서 실패를 반복해왔다. 앞으로도 쉽게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만드는 과정을 넘어 내가 내글로 재귀(歸)함으로써 새로운 내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
언제나 내 몸 전부를 바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해 찝찝함과 죄책감이 든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진부한말인지만, 진심으로 나는 내 글이 부끄럽다. 늘 그렇듯 출판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그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고인이 된 후, ˝당신 없이 누구랑 영화 이야길하지?˝라고 썼다. ‘당신‘이 없을 때 이 책이 ‘당신‘이기를 바란다. 큰 욕심이라 부끄럽지만, 감출 수 없다.


인류세를 영화로 건너며
슬픔의 힘을 믿으며
2022년 한여름
정희진

p35, 36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2020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있다. 이 책은 그 반대 방향에서 쓰였다. 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 P10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년)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 제목이 정말 좋다. 제목만으로 여러 가지 글감이 된다. 비윤리, 무지, 권력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대상(작품)이 아니다.  - P11

글을 쓰는 주체인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대상으로 삼은(는)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 이것이 맥락적 지식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객관성을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관점은 부분적 시각(partial perspective)일 뿐이다. 이에 더해 ‘왔다 갔다(流)‘ 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삶이고 쾌락임을 받아들일 때 외로움도 덜하고 인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이것이 지식의 본질인 맥락성, 상황이다. 언어가 아무 데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소통 가능하다. "거대 담론 말고 일상성"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 P12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 중 하나는 덧칠된 그림 이전의 작품을 상상하는 것이다. 덧칠은 최종 버전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만든 이의 몸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무의식이 의식화된 형태나 불필요한 장면 따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반전‘은 덧칠 이전의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까. - P13

영화의 ‘보이는 밑그림들‘은 관객들의 개인적 사건이 된다.
개별적인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버전일 수밖에 없다(야오이.장르처럼 이미 퀴어 예술가들은 이러한 작업을 해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래서 맥락적이다. 어느 장면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장면이아니라 그 장면 전후의 서사와 나의 이야기가 조우할 때 가장인상적인 장면이 탄생한다.
나는 언제나 나만의 부분적 시각이 독창적 글쓰기가 될 수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부분적 시각은 당파성을 전제한다. 당파성은 글의 필수 요건이다. 아니, 당파성이 없는 글은 없다. 흔히 말하는 무당파도 당파니까. 주장이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없다. 하지만 그 주장은 선언될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한다. - P14

시피물론 이 책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는 독자의 가치관과 ‘좋은 글‘에 대한 취향에 달려 있다. 과정이 곧 결과의 일부)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수단이 중요한가 목적이 중요한가라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글쓰기 과정이 ‘공개되는‘
글,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판단 기준이 명확한 편이다. 글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글을 읽고 글쓴이의 성격, 인격심지어 그의 팔자, 글쓴이로서 롱런할지 아닐지까지 파악할 수있다면, 일단 무언가를 보여준 것이다. 글을 읽었는데 글쓴이에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글, 즉 글 제목 아래 어떤 이름을 붙여도 무관한 글은 생산자 표시가 없는 상품이다. 사기요, 불량품이다. 자기도취적인 글, 현학적인 글, 진부한 글은 좋은 글은아니지만, 일단 그런 글들은 읽고 작자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어쨌든 판단 가능한 영역에 들어오는 글이다. - P15

사회는 ‘우리‘의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밀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실한 이야기, 당연한 정의, 상식적인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군 위안부에 대한 다른 목소리도 논란이 된다. 똑같은 목소리, 부담스럽지 않은 이야기 말고는 위험하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가 문제인 이유는 전체주의 차원의 이슈가 아니다. 이야기가 없는 사회에서는 돈과건강만 중요하다. 돈과 건강을 극소수가 독점한 시대에 이 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인류에게 절실한 것은 그야말로 나눔이다. 돈과 건강 외에 언어, 보살핌, 존중의 가치가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되고 평범한 이들이 이런 것들을 ‘보유해야 한다. - P20

어떻게 살 것인가. 엣지(edge, 벼랑 끝에서 말해야 한다. 말장난 같지만, 그러면 조금은 ‘엣지 있게 들릴 것이다. 엣지는 말하는 장소, 글자 그대로 절박하게 확보한 부분적인 공간이다.
그곳엔 여러 사람이 설 수 없다. 벼랑 끝은 선택의 여지가많지 않기에 ‘가장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장소다. 독창성은 글의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독창성은벼랑 끝이라는 맥락, 부분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부분적 관점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실천이다. 지배 세력이 그들만의 가치를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선망한다면? 동일시한다면? 나를 억압하는이들을 내가 지지한다면? 당대의 한계 없는 발전주의가 그 위험한 스토리 중 하나다. 예전에는 역지사지가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내 몸에서 타인을 생각할 공간은 좁아져만 간다. - P21

말하는 사람의 위치가 없는 곳은 없다. 장소 없음은 곧 말의의미 없음이다. 우리는 자기 위치를 말하지 않고 신이나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말하기가 없다면 권력은 작동하지 않는다. 흔히 듣는 "국민이 원한다" "이것이 대의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자연의 이치다" "과학적 사 - P23

실" 따위는 실상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른 의견일 뿐이다. 요즘은 "돈이 전부다" "유명해야 한다"라는 권위도 추가되었다. 자기 말에 특권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말하기 방법이다.
이런 말하기 방식에 대한 저항이 예술이요, 사회 정의다.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저항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이 사유들은 말하는 사람(주체)과 규정되는 대상(텍스트,
영화·………) 간의 관계에서, 주체의 일방성을 성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체의 말이 상대화되고 부분화될 때 대상도 여러 모습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관점은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더 개방할 수 있고 더 다양하게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주의와 반대다. 상대주의는 인식자의 위치, 부분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다. 부분적 관점은 모두를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元), 위치, 체현(embodiment)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 P24

반복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영화를 볼 때 특정부분에 깊게 ‘꽂힌다‘.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 ‘꽂힌‘ 부분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그 부분에 나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 ‘꽂힌‘ 부분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일까도 생각하지만, 그걸 감독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두어시간짜리 영화에서 모든것을 압축하는 어떤 장면 하나, 대사 한마디는 관객의 경험과기억의 선택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킬링 타임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택부터가 일종의 입장이다. 어떤 영화도 다음과같은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떻게 볼 것인가? 어디로부터 볼 것인가? 무엇이 나의 관찰력을 제한하는가?  - P27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의 현지인 학살을 다룬 <기억의 전쟁>(2018년)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베트남 여성은 ‘약간은 수치스럽고 뭔가 찝찝하고 머뭇거리고 불편한‘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 단체들에서 증언의 대가로 돈을 받은 적은절대 없어…………. 선물 정도 받을 뿐이지." 이 장면에 꽂힌 나는한국의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해 백 매짜리 원고를 썼다. 한 장면,
이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대개 부분적 진실이 ‘큰 이야기‘를 배경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게 <기억의 전쟁>은 그 장면에서 ‘소임‘을 다했다. 역사와 일상,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보편성과 특수성·····… 이것들은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경험, 위치, 동일시한 부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면 영화보다 더한 나의 영화가만들어질 것이다. - P30

<우리는 매일매일>(2019년),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흥미롭다. 마치 글쓰기 대회의 시제(題)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매일매일 글을 쓴다, 약을 먹는다, 우엉차를 마신다,
영화를 본다, 물건을 찾는다, 잔다………. 써놓고 보니, 나는 상당히 단순하게 사는 사람인데도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제법 많다. - P39

이번에도 강유가람 감독에게 내 글을 보내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만들게 된 계기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묻고 답하는메일이 오갔다. 모든 내용이 좋았지만, 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감독은 말한다. "요즘 페미니스트가 공부를 안 한다는 말은 1020세대뿐만 아니라, 저에게도(감독) 해당되는 말인거 같습니다. 저도 공부가 필요한데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를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세대가 공부를 안 한다기보다는 여성은 여성의 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에, 제도권 교육이든어디서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41

남자들의 지식은 전수되는데, 왜 여성은 처음부터 똑같은 질문을 반복할까. 나를 비롯해 여성도, 여성주의자도 젠더에 대해 알기 어렵다. 여성주의는 과정의 사유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사유이기 때문에 매 순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누가 여성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현실이 계급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듯, 젠더만으로는 설명할 수없다. "여성은 구조적 피해자"는 상식이지 논쟁거리(?)가 아니다. 젠더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남녀 간 권력관계로 ‘보이는‘ 젠더는 여성들 간의 차이와 남성들 간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작동한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빼어난 인식론일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다른사유처럼 공부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 P43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빼어난 인식론일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다른사유처럼 공부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여성 - P43

(female)‘이 ‘여성(women)‘이 되는 과정 그리고 ‘우먼‘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모두 엄청난 정치적 노정(路程)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현실과 지식을 만나게 된다. 문제는 사상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 멀고 동시에 너무 가까운 듯 보여서,
누구도 이정표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젠더에 관심 있는 사람도, 젠더가무엇인지 아는 이들도 없다고 본다. 여성운동단체 출신 의원도 마찬가지다. 표싸움일뿐이다. 2022년 윤석열 정권이 무슨심각한 가치관이 있어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당선 후 여가부 장관을 비롯해 몇몇 여성 장관을 임명했다). ‘여성계‘를 포함해 한국 사회는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등 모든 분야에서 인식론으로서 젠더의 지위가 매우 낮다. 젠더가 문제가될 때는 정치인의 성범죄로 상대방을 공격할 명분이 생겼을 때뿐이다. 그들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무엇이 성차별인지 ‘여성 우대‘인지 분별력이 없다. 그냥 젠더에 무지해도 되는 권력을 가졌을 뿐이다. - P44

나는 당대 여성주의의 곤란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집단의 등장 때문이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재앙이긴 하다-여성주의 대중화에 대한여성주의적 해석이 빈곤한 데 있다고 본다. "사회적 모순으로서성차별은 없다"는 인식은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 특유의 발전주의 때문이다. 발전주의 세계관에서는그 어떤 사회적 약자도 사회 정의도 "나중에" 다.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언어는 현실을 가시화하지 못한다.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인식된다면, 이미 가부장제사회가 아니다. 역사상 그 어느 사회에서도 지배적 언어(인식)는 단 한 번도 약자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기반이었지만, 현대 페미니즘은 1949년에 출간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기준으로 해서 백 년이 안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는 30~40여년되었다. 그 시간도 법 제정과 젠더 주류화라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의 철학‘ 자유주의의 자장 안에서였다. - P45

공부가 부족하니 매일 발생하는 현안에 대처하지 못한다. ‘이준석‘ 같은 이들과 ‘덤앤더머‘ 경쟁(?)으로 소진하기에는 여성의 삶은 소중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 공부를 적대시하고 스펙이 공부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교육 붕괴, ‘부모 찬스‘, 문해력 부재, 온라인글쓰기, 상업화된 출판 시장, 온라인 서점이라는 폐가식 도서관………. 여성주의자가 아니라도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이유는너무 많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이 여성주의와 결합했다. 여성주의 관련 책은 전체 출판시장의 0.00001 퍼센트? 가늠하지 못할만큼 작다. 일단 인문사회과학 분야 자체가 취약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주의 책을 구입하는 이들은 40~5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도서별로 구입자의 남녀노소 분포도가 나오는데, 20대 남녀는 모두 여성학 책을 읽지 않는다. - P47

가부장제 사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성의 언어를 부정하고 편협하다, 특수하다, 자의적이다 운운한다. 여성주의를체계적으로 가르치기는커녕,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에서 여성학 책을 구입하는 사서를 고발한 남자 고등학생도 있다. 세금 낭비에다 남성학 책이 없으므로 남녀평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나는 대학에서 융합 글쓰기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여성(학자)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말한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괜찮지만, 여성주의를 강요하지는 마세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글쓰기는 어느 사상과도대립하지 않으며, 제 강의가 어떤 내용이든 수업 시간에 중요한내용을 강조할 수는 있어도 강요는 있을 수 없습니다." - P48

가부장제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이 언어를 갖는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질색한다. 여성의 언어가 남성의 기득권을 빼앗고 그들의 특권을 위협한다고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대개 못 알아듣는 경우다. 마치 미국인이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그러니 혐오발화나 횡설수설밖에는 할 말이 없고, 젠더를 주제로 한 논의는거의 불가능하다. - P48

여성에게 유일한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우리가 총칼로 싸우겠는가. ‘미러링‘이라는 이름의 욕설로 싸우겠는가.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위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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