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국외자라는 사실을 모른다. 전체의 동등한 일부,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불행은 남의 일이다. 나에게일어날 리 없다. 국가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는 희망이 없다면살 수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손쉬운 발상인 저항이나진실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의 위치를 질문한다.
문제는 ‘도쿄‘와 ‘서울‘이 특정 지역(후쿠시마, 밀양, 강정…………)에 위험 시설을 건설하여 끊임없이 내부 식민지를 만들어내는현실이다. 한국은 문제가 생기면, 은폐(그것도 대충), 책임자의거짓말, 손바닥으로 하늘 가림, 여론이 조용해질 때까지 방관소 잃고 외양간도 안 고치기, 피해자 고립을 대책으로 삼는 나라다.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음으로써 피해자를 고사시키고 문제를 떠넘긴다. 통치 세력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대단히 발전된 메커니즘과 언어를 갖고 있다. p78
슬픔은 소비의 적이다. 권력은 희로애락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시민만을 보호한다. 이처럼 기쁨과슬픔을 자율적으로 나눌 수 없게 될 때, 정의를 실현하는 방식은 피해를 특정인의 몫으로 치부하지 않고 ‘바로 당신의 문제‘
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이다.
필요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을 뜻하는 용어, ‘필요악‘.
인식과 문법 면에서 모두 틀린 표현인데 사회는 이 말을 좋아한다. 불의와 불평등을 손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원전, 성매매, 누가 군대에 갈 것인가 같은 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일상에서 가장 만연한 필요악 논리는 아마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매는필요악이다? 누구의 입장에서 필요하고, 누구의 입장에서 악이란 말인가. 필요도 악도 모두 남성의 시각이다. 악은 악일 뿐이다. 사회 문화적으로 제도화하면서까지 유지해야 할 ‘필요한악‘은 없다.p79
TV에 나와 후쿠시마 생선을 먹어도 문제가 없다고 직접 시식하는 일본 총리의 모습은 오히려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품게한다. 문제가 없다면 증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속임수조차 쓰지 않는다. 모두가 슬퍼하는 것보다 ˝산 사람이라도 살자˝고 주장한다. 언뜻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생각이 문제의 원인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고기, 가기 싫은 군대, 환경 오염된 미군 기지・・・・・・ 해결할수 없다면 다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야 개선된다. 자기 집에 물난리가 날 때, 기름이 유출될 때, 자식이 군대에서 자살할 때,
세월호에 탔을 때‘만‘ 권력은 움직이게 되어있다. 불행하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는 모두가 혹은 다수가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다. p80
[피해를 공유하는 윤리 -스톱]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 스톱과 그의 사망 소식에 더해 정희진쌤의 생각들을 읽는다. 김기덕, 조재현은 성폭력 가해자, 조직범죄자다.
공감한다.
대추리에서 촛불을 든 대부분의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처음든 생각이 이랬다. 먹고 살아야할 문제와 해먹여할 식구들로 하루 종일 논밭과 부엌에서 동동거린 할머니들이 이제는 쉬어야 할 시간에 촛불까지 들게 만드는 세상이, 동북아 평화를 위한 세상일까?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미군 기지 이전일까?
언제든 약자는 배제된다.
‘배제된 사람이 없는 사회‘ 가능할까? 2022년 가을, 더욱 불가능한 꿈이다.
이런 저런~ 뉴스의 뒷면을 보면 울적한 추석이다. 에구~ 달이나 보러 가야겠다.

이 표현들로 지난 제20대 대선의 핵심 사안을 분석할 수 있는가. 나는 선거 기간 내내 몹시 괴로웠다. 가부장제가 부추기는 여성의 자원(몸, 외모)이 결과를 좌우한 선거였기 때문이다.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 개혁이슈가 젠더로 은폐되었다. 김건희 씨의 섹슈얼리티는 성산업과 무관하다. 소송때마다 검사와유착해 자신을 자원으로 이용한 경우인데, 나는 이와 관련한글을 썼다가 여성주의자들에게 "왜 김건희 씨를 비판하냐, 여성혐오다!"라는 (분노에 찬 지적을 받고 절망했다. 지금 한국 사회의 ‘혐오‘ 단어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절망한 이들이 선택한 간단한 존재 증명이다. - P50
나는 모든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도 없다. 페미니즘이든 마르크스주의든모두 부분적 세계관이다. 개인이 단 하나의 가치관을 갖는 것이바람직한가? 페미니즘은 남녀 모두에게 부분적으로 필요한 중요한 공부일 뿐이다. - P50
우리는 매일매일 온라인에서 시간을 보낸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가장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명언, 미디어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미디어 자체가 메시지다. 그래서미디어가 발달할수록, 다양할수록 소통은 더욱 어려워진다. 최소한의 합의도 힘들고 중간 지대는 사라지고 삶의 전반이 양극화된다. 계급의 양극화는 물론이고 건강, 문화, 앎, 만들어진 외모까지 양극단화된다. 지금의 플랫폼 자본주의처럼 완벽하게승리한 지배 체제는 없다는 절망적 생각이 든다. - P51
어느 분야나 자기 언어를 갖기 위해서는 최소 10년 정도의 ‘엉덩이 훈련‘이 필요하고, 사회는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들은 드물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되지 않는(?) 여성주의 공부를 선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 자기방어를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여성들에게 여성주의 공부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나는 최근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공부 무용론‘ 선동에 큰 좌절감을 느낀다. 여성끼리 작은 공부 모임을 만들어공부만 해도 지구의 반을 구할 수 있다. 지역 도서관에 여성주의 책을 희망 도서로 신청하고, 온라인에 성의 있는 댓글을 달자, 잔물결이면 충분하다. - P52
최근 작고한 철학자 장춘익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주 인용하게 된다. "오래가는 항의는 아무튼 짜증나는 거야 내가 잘 돌보고 싶은 아이도 자꾸 울면 짜증나는데, 별로동의해주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자꾸 하면 정말 짜증이 안 나겠어? 항의는 내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이야기하는것이고, 같은 항의가 오래 반복된다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결핍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항의 기간이 길어지면네가 세저쪽은 짜증나고 이쪽은 초라하고 비참한 거야. 상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을 흡페미니즘(다른 입수하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는 것이야. 장도 마찬가지다-필자)이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아니라, 너의 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페미니즘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P53
앞의 사례들은 성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내가 경험한 것과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회와 주변 사람들과 충돌하는일이 잦다. 평소 나 자신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정신 차리자."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돼." "가만 생각을 하자." 나는 거의매일, 이렇게 중얼거리고 다짐을 거듭한다. 객관적으로 그럴 만한 상황인가 아니면 내가 예민한 건가?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아니다. 어떤 경우는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는 사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당하지 않고 살려면, 혹은 당한이유라도 알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 P56
‘여성‘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있고, 민초들이 자각하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가 왜 그토록 미움을받았겠는가. 이것이 인간의 역사다. 말할 것도 없이 권력자들은 비밀을 통제하고 관리한다. 그래서 피억압자들에게 앎, 깨달음은 해방이기도 하고 기꺼운 고통의 시작이기도 하다. 만일 여성들이 밥하는 일이 여자의 ‘운명‘(성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남자들은 삼시 세끼 준비 스트레스로 평생을 전전긍긍하느라 역사를 창조하지 못했으리라. 최저 임금이 정규 고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당대 자본주의의본질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은 이들이 있다면? 이들이 매복해 있다가 어딘가를 습격한다면? - P59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성별, 계급, 인종 따위가 얽힌 지점에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산다. 인간은 각자 하나의 섬이다. 서로를역지사지(易地思之)할 수 ‘없다‘. 어렵다. 역지사지는 상대와 다른 땅(위치)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섬에서 땅으로 이동이 쉽겠는가. 같은 여성이라도 강간을 경험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은 젠더에 대해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인간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홀로코스트, 제주 4·3 사건, 호모포비아처럼 타인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말하기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일단 자신이 경험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 자기도 못 믿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이야기하겠는가. 자기 검열과 정치적, 사회적 검열은 연속선을 이룬다. 그래서 평생을 특정 사건의 후유증(aftermath)으로 보내는 인생이 존재하는 것이다. - P61
이 영화에서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는 할 일이 많을 때 나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본 것과 남편)이 말하는 것이불일치할 때 나온다. 삶에서 가장 두려운 상황은 자신을 믿을수 없을 때다. 그럴 때 세계는 혼돈(dis/order)의 연속이다. 질서(order)는 ‘저들의 것‘이다. 저들의 질서가 나를 점령하고 있기때문에 나만의 삶의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불안이 정상이다. 불안은 몸의 외부와 자신의 몸이 불일치할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이성(理性)의 반응이다. "안정돼 보인다." 나는 이 말,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안정을 욕망하는 현실이 싫다. 안정만큼 계급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넉넉하고 아쉬움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며 사랑받고 아프지 않은 상태, 어떤 부정의에도 분노하지 않는우아한 세계, 불일치와의 투쟁이 필요 없는 삶. 이런 인생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사실상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 P63
동시에 피억압자를 ‘비정상‘으로 내모는 말이다. 악은 원래부터 세상이 내 것이라고 믿는 ‘정신 승리자들‘의세계다. 승리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인데, 승리를 이미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 한가한 사람들 때문에 현실이 왜곡된다. 그러므로 ‘정신이 안정되고 멀쩡한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속이는기득권자들이다. 극중 연홍이 자기 경험을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너 걱정되게 왜 그래?" "말도 안 돼." "미쳤군."・・・・・… 그러니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의 판단을 믿고 마법을걸 수밖에 없다. "정신을 차리자." "생각을 하자." 외롭고 서러운 일이다. - P64
윤리성 추구와 지향, 가장기본적인 윤리적 자세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지식은 공부하고 조사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어딘가에 있어서 찾아내는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시각이 없다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이다. 시각이 지식을 드러나게 하므로 지식은 발명(making)되는 것이다. 그래서객관적인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다. 시각이 앞을 결정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는 우리가 끼고 있는 렌즈의색깔에 달려 있다. - P67
암수살인의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라는 점, 피해자의 신분이나언론의 관심도에 따라 사회적 자원(수사)이 다르게 분배되는 현실을 이만큼 성실히 추적한 영화도 드물 것이다. 한국판 페미사이드(여성 살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안전이라는 사회적 공공재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권력, 경제력에 의해 좌우되는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다. - P70
저항이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의심해야 하는데, 이는 기득권과 연결된 문제다. 여성주의는 가부장제 세계관과 협상할 수는 있지만 양립할 수는 없다. 환경운동은 발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모든 인식이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상은 매 순간의 긴장을 요구하는만만치 않은 요구다. - P72
남성, 단 한 명의맥주 회동 사진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사진 속 세 사람의표정은 무의식의 ‘바닥‘을 드러낸 듯 적나라했다. 그들은 서로눈을 맞추지 못하고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백인 경찰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지구상 유일한 제국인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대통령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열받은 상태를 감추는 것이었을까? 자기 집에 들어갔는데 강도로 오인받아 체포된 교수는 주눅 든 듯 얌전히 앉아 있다. 그의 작은 몸은 더 작아 보였다. - P93
이 사진이 나의 무엇을 건드렸을까. 당시도 지금도 나는 분노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차별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 심지어 비열한 인간‘이, 인종이나 젠더만 작동해준다면 언제든 무조건 이길 수 있다는 몰역사적 현실이 나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이 겪었지만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위협감, 공포감 그리고 아무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늘 느끼는 외로움과 서러움…………. 사실 인종이나 젠더 문제가 아니더라도, 단지 자신의 지위나 직업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판치 - P93
는 시대다. 그들은 작은 특권이라도 120퍼센트 활용한다. 이 사진은 정의란 올바름이 아니라 여론과 문화 권력임을, ‘흑인 대통령 시대‘의 미국 사회를, 영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I AmNot Your Negro)〉(2016년)의 현재성을 집약한다. - P94
‘객관적‘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약자는맥락에 따라 그 범주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존재다.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서 존재해야만 하는 집단이지,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늘 있기 마련"인 그런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에 있어야만 사회가 움직인다는 뜻이다. 미국의 이미지 중 하나는 흑백 갈등이지만 실제 미국의 흑인 인구는 12퍼센트 내외다. 인구에 비하면 상당한 ‘영향력‘이다. 그만큼 흑인운동이 활발하다는 얘기다. 사회적 약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인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사회운동으로 인한 가시화 여부이기 때문이다. - P9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알고, 내가 상대하는 이들을 아는 일이다. 이 두 문제는 서로 겹쳐 있다. ‘나‘는 타인과사회와 맺는 관계를 통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레너드 코언의 명곡 <아임 유어 맨 (I‘m Your Man)>의 가사를 보자. "나는 당신과당신을 향해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살아왔어요. 기어가 당신 발밑에 엎드리겠어요. 난 당신의 아름다움 앞에 헐떡이는 한 마리 개. 만일 당신이 혼자이길 원한다면 난 사라져주겠어요." 한마디로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겠다. 나는 당신의 사람이라는 사랑 이야기다. 여기서 나는 주체(subject)이고 너는 대상(object)이다. - P99
영화 속 볼드윈의 말대로 "당신(백인)은 나(흑인, 여성을 비롯한 피억압자)를 보지 않아도 됐지만, 난 당신을봐야 했다. 당신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더 당신을 잘 안다. 인종 모순과 젠더 모순의 공통점은 지배자의 무지다. 지배자들은 세계와 인간에 대해 무지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도 되는 것이다. 몰라도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알게 되면 자기 분열과 긴 성찰의 시간으로 인생이 뒤죽박죽될지 모른다. 하지만 억압받는 이들은 자신과 상대방, 세계를 알지 못하면 생존할 수없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기도 하다. - P108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사무치게 공감한 부분이 있었다. 영화 초반에 제임스 볼드윈의 "이제 쉰다섯 살이 된다"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내레이터 새뮤얼 잭슨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나는 볼드윈처럼 살지도 않았지만, 나 역시 지쳤다. 어느 시대나 저항의 지도자는 적이 아니라 내부 분열이나 열렬한 지지자에 의해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한 일이다. 흑인도, 여성도, 그 어떤 정체성의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저항은 일시적인 내부의 통일 전선일 뿐이다. 흑인도, 여성도 내부에 같은 인간은 없다. - P108
내겐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의 감독이 <청년 마르크스(TheYoung Karl Marx)〉(2017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이는 리들리 스콧이 ‘마초 영화‘의거장이기도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얘기와는 다른 문제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인간 마르크스는 매우 싫어한다. 마르크스의 오리엔탈리즘, 백인 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라울 펙 감독은 어떻게 제임스 볼드윈과 마르크스에게 재현 대상으로서 같은 애정을 품을 수 있었을까. - P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