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때마다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지구 멸망이나 홀로코스트를 맞더라도,
사랑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힘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슬픔이 최고의 힘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그러나 내겐 너무 아프고 부담스러운-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 P126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내가 가장 동일시한 인물은 작품속 캐릭터가 아니라 영화 원작자다. 이 영화는 감독과 출연을겸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원작에 빚지고 있다. 20년 동안 링 위에서 컷맨(cut man, 복싱 선수가 경기 중피가 나면 응급처치를 해주는 스태프)으로 일한 소설가는 흔치 않다. 원작을 쓴 제리 보이드(JerryBoyd, 1930~2002, 필명 F. X. 툴)는 생년월일이 불명일 정도로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단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실린 소설집 《불타는 로프(Rope Burns)》(2000년)가 그가 생전에 남긴 단 한 권의 작품이다.
투우사, 택시 운전사, 술집 주인 등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생활고에 시달렸고, 정식 문학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40년간 혼 - P126

자서 글을 썼다. 이 책 이전까지 그의 글은 모두 출판사로부터거절당했다. 첫 책이 출간되고 2년 후에 그는 완성된 영화를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나는 알코올과 노숙, 중노동과 글쓰기를함께하면서 69세에 첫 소설집을 낸 소설가가 감히 부럽다. 그의삶은 고달팠지만 그가 쓴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렸고 영원으로 남았다.
이 영화에는 명장면, 명대사가 넘치는데, 거의 메타포다. 이영화는 이스트우드가 쓴 인생과 고통에 관한 시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그가 왜 공화당원인지 진정 이해하게 되었다. 항상나 자신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 어떤 부위는 맞으면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인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다), 복싱에서 중요한 것은 자세라는 것・・・・・ - P127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해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사건,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오늘 만날 수 있어(요)?" 메시지를 보내거나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는 바라지 않는다. 그냥 상대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 P134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친구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 - P135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더러운 커튼이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무슨 일 있니?" "건강해라."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그만 주무세요."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상처도 두 배로 커질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 P137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아는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먼저 말하는 것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쓴다. - P141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중년들과 중년의 배우와 동일시한 나는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이 다 부드럽게 흘러갔다. 제주도가 배경이고 다양한 연령대가 나오지만 내게 이 작품의 주제는 ‘나이 듦‘이었기 때문이다. 노희경 작가, 이정은 배우, 엄정화배우의 ‘인간적 고민‘을 나는 알 것 같다. 연령은 계급, 젠더와함께 중요한 사회구성 요소로, 모든 분야에서 노소(老少)에 따른 ‘우선권‘을 둘러싼 정치경제학의 전쟁터다. 나이는 다른 사회 구조와 다르게 어려도, 어중간해도, 늙어도‘ 맥락에 따라 차별받는다. 그래서 모두가 피해자라고 싸운다.
- P145

세상에는 진실도 객관도 사실도 없다. 그것으로 작품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있을 뿐이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확신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염두에 두지 않는 것만이 위험하다. 나는 영화나 책을 집중해서보지만, 완전히 믿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노력하는 편이다.
본 것이 지식으로 자리 잡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삶은 기존의읽을 비워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 P148

토박이 제주 사람들은 주로 그들끼리 이런 농담을 한다고 한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 "우리 집 귤이 제일 맛있다!" 제주도(濟州島)는 섬 전체가 하나의 산(한라산)이다. 산 전체에 도심, 해변, 중산간(中山間), 정글도 있고 습지도있다. 제주는 하나의 섬이자 산이다. "우리 집에서 한라산이 가장 잘 보인다"라는 얘기는 섬의 일부에서 섬의 일부인 ‘꼭대기‘
가 가장 잘 보이는가 하는 문제다. 내부에서 어느 내부가 가장잘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앎이 내가 본 것과 안 본 것 사이에서 정해지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자신이 본 것만이 진실이라고 싸우기 쉽다.
전체도 부분도 없다. 앎의 범위를 아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인정하고, 내가 지금 어디에서 말하고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상이 앎이요, 삶이어야 한다. - P150

나는 내 나이에 비해 임종 경험이 많다. 그래서 내세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날 선 얼치기 유물론자지만, 인생이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고 싶지않을 때가 있다. 인생이 한 번이라는 사실은 너무 불공평하다.
이럴 때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윤여정 배우의 ‘말씀‘으로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 지인들은 "지금부터라도 그렇게(영화처럼) 살라"고 한다. 더 화가 난다. 나는 아직은퇴 자금이 없으며, 여행할 체력이 안 되고, 연애가 성립(?)된적이 없다. 내세에는 다른 지역에서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으로태어난다는 믿음 없이는, 현실을 버틸 수 없는 세상이다. - P156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이들.
조혼과 젠더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 내전 상황의 물 없는 마을, 굶고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 젊은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하는 이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상황부터 그렇다. 내가여성운동을 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92년 미군의 잔인한 폭력으로 숨진 윤금이 사건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0대 중반,
내 또래였다. 그와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었다. 충격과 슬픔이 나를 압도했다. 그저 나는 그와는 다른환경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뿐이다. - P157

‘제2의 성‘인 여성의 삶은 원래 시민인 남성보다 사회 변화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대화는 어쨌든 여성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 자본주의의 변화는 여성 개인의 노력보다 생년(生年)이 삶을 결정해 왔다. "시절을 잘만나서" 나는 내 어머니보다는 나의 의지로 살았고, 내 어머니는 외할머니보다는 오래 그리고 ‘배운 여성‘으로 사셨다. 개인의 노력보다 시대적 조건이 여성의 삶을 좌우했다. 아무리 행복의 의미를 재해석한다 해도 여성들의 삶이 이전 시대보다 ‘나은 상황임은 분명하다(물론 성차별이 나아졌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 P157

그러다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봤다. 극중 영옥(한지민)은 바다를 좋아한다. 거기서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바다 속에는 평생을 돌봐야 하는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영희(정은혜)가 없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그는언니를 홀로 부양해야 했다. 몸에 철근을 두른 듯한 부담감과그래서 바다에서는 혼자인 해방감 나는 아주 조금 이해한다.
그는 울먹이며 연인에게 말한다. "억울해. 왜 나한테 저런 언니가 있는지. 억울해. 왜 우리 부모님은 착하지도 않은 나한테 저런 애를 버려두고 가셨는지. 억울해.
나도 이렇게 억울한데, 저렇게 태어난 영희는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렇다. 내세를바라는 게 아니라 이러한 태도가 정의다.  - P158

당대는 ‘평등‘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혁명도,
개혁도, 민주주의도 없다. 나는 티모테 샬라메나 아미 해머(미국에서 손꼽히는 부자 집안 출신이다)가 아니다. 유물론자인 나의태도는 내세를 기도하기보다 현실의 작은 행복에 감사하며,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과 상부상조,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 남부유럽의 햇살은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보기로 했다.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