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열풍의 시대지만 쓴 글이 출간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내 글 역시 마찬가지다. 책으로 나올 필요도 의사도 없더라도 매일매일 쓰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언어는 현실보다 늦게당도한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시간차를 메우려는 예언자는 사기꾼이다.
현실을 드러내는 재현의 언어는 글쓴이의 노동으로서만 가능하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내가 나를 알지 못할까 봐 두렵고, 나를 몰라서 실패를 반복해왔다. 앞으로도 쉽게 나아지지는 않겠지만 내가 쓴 글이 나를 만드는 과정을 넘어 내가 내글로 재귀(歸)함으로써 새로운 내가 탄생하기를 희망한다.
언제나 내 몸 전부를 바치는 글을 쓰고 싶지만 최선을 다하지 못해 찝찝함과 죄책감이 든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진부한말인지만, 진심으로 나는 내 글이 부끄럽다. 늘 그렇듯 출판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성일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그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고인이 된 후, ˝당신 없이 누구랑 영화 이야길하지?˝라고 썼다. ‘당신‘이 없을 때 이 책이 ‘당신‘이기를 바란다. 큰 욕심이라 부끄럽지만, 감출 수 없다.


인류세를 영화로 건너며
슬픔의 힘을 믿으며
2022년 한여름
정희진

p35, 36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2020년)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있다. 이 책은 그 반대 방향에서 쓰였다. 모든 글쓰기는 대상(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아니다. 대상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드러내는 행위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여성‘이나 ‘동양‘은 실재하지않는다. 규범일 뿐이다. 여성은 남성이 쓴 것이고, 동양은 서양이 쓴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전자는 가부장제, 후자는 오리엔탈리즘이다. - P10

내가 만들어진 과정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쓰는행위 자체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내가 쓴 것(What I Have Written)〉(1995년)이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영화 제목이 정말 좋다. 제목만으로 여러 가지 글감이 된다. 비윤리, 무지, 권력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에서 출발한다. 글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이유는 쓰는 사람이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대상(작품)이 아니다.  - P11

글을 쓰는 주체인 나를 알기 위해 나를 대상으로 삼은(는)그들의 언어를 아는 것, 이것이 맥락적 지식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주체도, 대상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이 둘 사이를 지속적으로 왕복하는 성실성(integrity)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객관성을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관점은 부분적 시각(partial perspective)일 뿐이다. 이에 더해 ‘왔다 갔다(流)‘ 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가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삶이고 쾌락임을 받아들일 때 외로움도 덜하고 인생의 의미가 조금이라도 더 커진다. 이것이 지식의 본질인 맥락성, 상황이다. 언어가 아무 데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정 맥락 안에서만 의미가 있고 소통 가능하다. "거대 담론 말고 일상성"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 P12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 중 하나는 덧칠된 그림 이전의 작품을 상상하는 것이다. 덧칠은 최종 버전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만든 이의 몸에는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흔적은 무의식이 의식화된 형태나 불필요한 장면 따위로 드러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반전‘은 덧칠 이전의 그림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닐까. - P13

영화의 ‘보이는 밑그림들‘은 관객들의 개인적 사건이 된다.
개별적인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대체불가능한 나만의 버전일 수밖에 없다(야오이.장르처럼 이미 퀴어 예술가들은 이러한 작업을 해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그래서 맥락적이다. 어느 장면도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장면이아니라 그 장면 전후의 서사와 나의 이야기가 조우할 때 가장인상적인 장면이 탄생한다.
나는 언제나 나만의 부분적 시각이 독창적 글쓰기가 될 수있는 가능성을 모색한다. 부분적 시각은 당파성을 전제한다. 당파성은 글의 필수 요건이다. 아니, 당파성이 없는 글은 없다. 흔히 말하는 무당파도 당파니까. 주장이 없다면 글을 쓸 이유가없다. 하지만 그 주장은 선언될 것이 아니라 설명되어야 한다. - P14

시피물론 이 책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는지는 독자의 가치관과 ‘좋은 글‘에 대한 취향에 달려 있다. 과정이 곧 결과의 일부)다. 과정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 수단이 중요한가 목적이 중요한가라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글쓰기 과정이 ‘공개되는‘
글, 필자의 사고방식을 독자가 파악할 수 있도록 쓰인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의 판단 기준이 명확한 편이다. 글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글을 읽고 글쓴이의 성격, 인격심지어 그의 팔자, 글쓴이로서 롱런할지 아닐지까지 파악할 수있다면, 일단 무언가를 보여준 것이다. 글을 읽었는데 글쓴이에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글, 즉 글 제목 아래 어떤 이름을 붙여도 무관한 글은 생산자 표시가 없는 상품이다. 사기요, 불량품이다. 자기도취적인 글, 현학적인 글, 진부한 글은 좋은 글은아니지만, 일단 그런 글들은 읽고 작자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어쨌든 판단 가능한 영역에 들어오는 글이다. - P15

사회는 ‘우리‘의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밀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절실한 이야기, 당연한 정의, 상식적인 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군 위안부에 대한 다른 목소리도 논란이 된다. 똑같은 목소리, 부담스럽지 않은 이야기 말고는 위험하다. ‘다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회가 문제인 이유는 전체주의 차원의 이슈가 아니다. 이야기가 없는 사회에서는 돈과건강만 중요하다. 돈과 건강을 극소수가 독점한 시대에 이 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 지금 인류에게 절실한 것은 그야말로 나눔이다. 돈과 건강 외에 언어, 보살핌, 존중의 가치가 중요한 자원으로 인식되고 평범한 이들이 이런 것들을 ‘보유해야 한다. - P20

어떻게 살 것인가. 엣지(edge, 벼랑 끝에서 말해야 한다. 말장난 같지만, 그러면 조금은 ‘엣지 있게 들릴 것이다. 엣지는 말하는 장소, 글자 그대로 절박하게 확보한 부분적인 공간이다.
그곳엔 여러 사람이 설 수 없다. 벼랑 끝은 선택의 여지가많지 않기에 ‘가장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장소다. 독창성은 글의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이다. 독창성은벼랑 끝이라는 맥락, 부분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부분적 관점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배적인 객관성 개념에 나의 목소리를보내고 조율하고 틈새를 내는,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중요한실천이다. 지배 세력이 그들만의 가치를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선망한다면? 동일시한다면? 나를 억압하는이들을 내가 지지한다면? 당대의 한계 없는 발전주의가 그 위험한 스토리 중 하나다. 예전에는 역지사지가 어려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내 몸에서 타인을 생각할 공간은 좁아져만 간다. - P21

말하는 사람의 위치가 없는 곳은 없다. 장소 없음은 곧 말의의미 없음이다. 우리는 자기 위치를 말하지 않고 신이나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 말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이런 말하기가 없다면 권력은 작동하지 않는다. 흔히 듣는 "국민이 원한다" "이것이 대의다" "주님이 말씀하셨다" "자연의 이치다" "과학적 사 - P23

실" 따위는 실상 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른 의견일 뿐이다. 요즘은 "돈이 전부다" "유명해야 한다"라는 권위도 추가되었다. 자기 말에 특권을 부여하는 전형적인 말하기 방법이다.
이런 말하기 방식에 대한 저항이 예술이요, 사회 정의다.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저항에서 탄생한 사상이다. 이 사유들은 말하는 사람(주체)과 규정되는 대상(텍스트,
영화·………) 간의 관계에서, 주체의 일방성을 성찰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체의 말이 상대화되고 부분화될 때 대상도 여러 모습으로 달리 보일 것이다. 이렇게 부분적관점은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더 개방할 수 있고 더 다양하게말할 수 있다. 물론 이건 상대주의가 아니다. 상대주의와 반대다. 상대주의는 인식자의 위치, 부분에 관한 인식이 전혀 없다. 부분적 관점은 모두를 똑같이 ‘여럿 중의 하나‘라고 보는 탈정치가 아니다. 자기 입장의 사회성과 정치학을 분명히 하면서,
인식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실천이다. 인식 대상에 대해말하기 전에, 말하는 자신에 대한 사회적 신원(元), 위치, 체현(embodiment)을 밝혀야 한다. 다시 강조하면, 본디말하기,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이다. - P24

반복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특히 영화를 볼 때 특정부분에 깊게 ‘꽂힌다‘.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 ‘꽂힌‘ 부분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그 부분에 나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 ‘꽂힌‘ 부분에서 감독이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일까도 생각하지만, 그걸 감독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두어시간짜리 영화에서 모든것을 압축하는 어떤 장면 하나, 대사 한마디는 관객의 경험과기억의 선택에서 나온다. 그래서 나는 ‘킬링 타임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선택부터가 일종의 입장이다. 어떤 영화도 다음과같은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떻게 볼 것인가? 어디로부터 볼 것인가? 무엇이 나의 관찰력을 제한하는가?  - P27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인의 현지인 학살을 다룬 <기억의 전쟁>(2018년)에서 피해를 증언하는 베트남 여성은 ‘약간은 수치스럽고 뭔가 찝찝하고 머뭇거리고 불편한‘ 표정과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 단체들에서 증언의 대가로 돈을 받은 적은절대 없어…………. 선물 정도 받을 뿐이지." 이 장면에 꽂힌 나는한국의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해 백 매짜리 원고를 썼다. 한 장면,
이것이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다. 대개 부분적 진실이 ‘큰 이야기‘를 배경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내게 <기억의 전쟁>은 그 장면에서 ‘소임‘을 다했다. 역사와 일상,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보편성과 특수성·····… 이것들은 따로 있는것이 아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경험, 위치, 동일시한 부분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면 영화보다 더한 나의 영화가만들어질 것이다. - P30

<우리는 매일매일>(2019년),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은 흥미롭다. 마치 글쓰기 대회의 시제(題) 같다. 우리는 매일매일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하는가. 나는 매일매일 글을 쓴다, 약을 먹는다, 우엉차를 마신다,
영화를 본다, 물건을 찾는다, 잔다………. 써놓고 보니, 나는 상당히 단순하게 사는 사람인데도 매일매일 하는 일이 제법 많다. - P39

이번에도 강유가람 감독에게 내 글을 보내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만들게 된 계기와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묻고 답하는메일이 오갔다. 모든 내용이 좋았지만, 내가 생각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감독은 말한다. "요즘 페미니스트가 공부를 안 한다는 말은 1020세대뿐만 아니라, 저에게도(감독) 해당되는 말인거 같습니다. 저도 공부가 필요한데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를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 세대가 공부를 안 한다기보다는 여성은 여성의 역사를 배울 기회가 없기 때문에, 제도권 교육이든어디서든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P41

남자들의 지식은 전수되는데, 왜 여성은 처음부터 똑같은 질문을 반복할까. 나를 비롯해 여성도, 여성주의자도 젠더에 대해 알기 어렵다. 여성주의는 과정의 사유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사유이기 때문에 매 순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 누가 여성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현실이 계급 문제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듯, 젠더만으로는 설명할 수없다. "여성은 구조적 피해자"는 상식이지 논쟁거리(?)가 아니다. 젠더는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남녀 간 권력관계로 ‘보이는‘ 젠더는 여성들 간의 차이와 남성들 간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작동한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빼어난 인식론일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다른사유처럼 공부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 P43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사고방식은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빼어난 인식론일 수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다른사유처럼 공부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여성 - P43

(female)‘이 ‘여성(women)‘이 되는 과정 그리고 ‘우먼‘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과정 모두 엄청난 정치적 노정(路程)이다. 그 길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현실과 지식을 만나게 된다. 문제는 사상과 현실의 거리가 너무 멀고 동시에 너무 가까운 듯 보여서,
누구도 이정표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한국의 현실 정치에서 젠더에 관심 있는 사람도, 젠더가무엇인지 아는 이들도 없다고 본다. 여성운동단체 출신 의원도 마찬가지다. 표싸움일뿐이다. 2022년 윤석열 정권이 무슨심각한 가치관이 있어서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당선 후 여가부 장관을 비롯해 몇몇 여성 장관을 임명했다). ‘여성계‘를 포함해 한국 사회는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등 모든 분야에서 인식론으로서 젠더의 지위가 매우 낮다. 젠더가 문제가될 때는 정치인의 성범죄로 상대방을 공격할 명분이 생겼을 때뿐이다. 그들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무엇이 성차별인지 ‘여성 우대‘인지 분별력이 없다. 그냥 젠더에 무지해도 되는 권력을 가졌을 뿐이다. - P44

나는 당대 여성주의의 곤란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집단의 등장 때문이 아니라‘ 지적인 측면에서 독특한 재앙이긴 하다-여성주의 대중화에 대한여성주의적 해석이 빈곤한 데 있다고 본다. "사회적 모순으로서성차별은 없다"는 인식은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 특유의 발전주의 때문이다. 발전주의 세계관에서는그 어떤 사회적 약자도 사회 정의도 "나중에" 다.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언어는 현실을 가시화하지 못한다.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인식된다면, 이미 가부장제사회가 아니다. 역사상 그 어느 사회에서도 지배적 언어(인식)는 단 한 번도 약자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기반이었지만, 현대 페미니즘은 1949년에 출간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기준으로 해서 백 년이 안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는 30~40여년되었다. 그 시간도 법 제정과 젠더 주류화라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의 철학‘ 자유주의의 자장 안에서였다. - P45

공부가 부족하니 매일 발생하는 현안에 대처하지 못한다. ‘이준석‘ 같은 이들과 ‘덤앤더머‘ 경쟁(?)으로 소진하기에는 여성의 삶은 소중하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이미 오래전 공부를 적대시하고 스펙이 공부를 대신하는 사회가 되었다.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공교육 붕괴, ‘부모 찬스‘, 문해력 부재, 온라인글쓰기, 상업화된 출판 시장, 온라인 서점이라는 폐가식 도서관………. 여성주의자가 아니라도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이유는너무 많다.
비극적이게도 이러한 상황이 여성주의와 결합했다. 여성주의 관련 책은 전체 출판시장의 0.00001 퍼센트? 가늠하지 못할만큼 작다. 일단 인문사회과학 분야 자체가 취약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주의 책을 구입하는 이들은 40~5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도서별로 구입자의 남녀노소 분포도가 나오는데, 20대 남녀는 모두 여성학 책을 읽지 않는다. - P47

가부장제 사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여성의 언어를 부정하고 편협하다, 특수하다, 자의적이다 운운한다. 여성주의를체계적으로 가르치기는커녕,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공 도서관에서 여성학 책을 구입하는 사서를 고발한 남자 고등학생도 있다. 세금 낭비에다 남성학 책이 없으므로 남녀평등에 어긋난다는 이유였다. 나는 대학에서 융합 글쓰기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여성(학자)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말한 학생이 있었다. "선생님이 글쓰기를 가르치는 것은 괜찮지만, 여성주의를 강요하지는 마세요."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글쓰기는 어느 사상과도대립하지 않으며, 제 강의가 어떤 내용이든 수업 시간에 중요한내용을 강조할 수는 있어도 강요는 있을 수 없습니다." - P48

가부장제 사회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이 언어를 갖는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위치에서 말하는 것을 ‘질색한다. 여성의 언어가 남성의 기득권을 빼앗고 그들의 특권을 위협한다고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내 경험으로는 대개 못 알아듣는 경우다. 마치 미국인이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것처럼. 그러니 혐오발화나 횡설수설밖에는 할 말이 없고, 젠더를 주제로 한 논의는거의 불가능하다. - P48

여성에게 유일한 무기는 언어밖에 없다. 우리가 총칼로 싸우겠는가. ‘미러링‘이라는 이름의 욕설로 싸우겠는가.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위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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