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문을 나서며
wyiscie z kina
새하얀 화폭 위로 깜빡이며 명멸하는 꿈
달에서 떨어져나온 파편과도 같은 두 시간.
그리운 멜로디에 실린 옛사랑이 있고,
머나먼 방랑으로부터의 행복한 귀환이 있다.
동화가 끝난 세상에는 검푸른 멍과 희뿌연 안개.
숙련되지 않은 어설픈 표정과 배역들만 난무할 뿐.
군인은 레지스탕스의 비애를 노래하고,
소녀는 고달픈 삶의 애환을 연주한다.
나, 그대들에게 돌아가련다, 현실의 세계로,
어둡고, 다사다난한 운명의 소용돌이로문간에서 서성이는 외팔이 소년과
공허한 눈빛의 소녀가 있는 그곳으로
‘정희진‘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를 읽다가 갑자가 훅~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시가 읽고 싶어졌다. [극장 문을 나서며] 때문이었던가 보다. 극장? 사라져가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에 시 보다는 ‘극장‘에 꽂혔던.
시장에 가야하는데, 할 일이 산더미인데, 생각과 달리 몸뚱이는 [끝과 시작]을 펄럭거리고 앉아 있다. 이 짓도 나쁘지는 않네.
시는. . .
가까운, 어렵지 않은,
매일 매일의 일상이다.
요즘 내 생각과 같은 [나에게 던진 질문],
깊은 눈의 시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
나에게 던진 질문 Pytania zadawane sobie
미소 짓고, 손을 건네는 행위, 그 본질은 무엇일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홀로 고립되었다고 느낀 적은 없는지?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끼듯. 첫번째 심문에서 피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는 엄정한 법정에 끌려나온 듯. 과연 내가 타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책을 펼쳤을 때 활자나 삽화가 아닌 그 내용에 진정 공감하듯이. 과연 내가 사람들의 진심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럴듯하게 얼버무리면서 정작 답변은 회피하고, 손해라도 입을까 겁에 질려 솔직한 고백 대신 번지르르 농담이나 늘어놓는 주제에. 참다운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 냉혹한 세상을 탓하기만 할 뿐. 우정도 사랑처럼 함께 만들어야 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혹독한 역경 속에서 발맞춰 걷기를 단념한 이들도 있으련만. 벗이 저지른 과오 중에 나로 인한 잘못은 없는 걸까? 함께 탄식하고, 충고를 해주는 이들도 있으련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전에 얼마나 많은 눈물이 메말라버렸을까? 천년만년 번영을 기약하며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는 동안, 단 일 분이면 충분할 순간의 눈물을 지나쳐버리진 않았는지? 다른 이의 소중한 노력을 하찮게 여긴 적은 없었는지? 탁자 위에 놓인 유리컵 따위엔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법, 누군가의 부주의로 인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기 전까지는.
사람에게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 과연 생각처럼 단순하고 명확한 것이려나?
어떤 사람들은 시를좋아한다 Nicktórzy lubia poche
어떤 사람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이란 전부가 아닌 전체 중에 다수가 아니라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일부를 뜻함. 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교에 다니는 사람들과 시인 자신들을 제외하고 나면 아마 천명 가운데 두 명 정도에 불과할 듯.
좋아한다- ‘여기서 ‘좋아한다‘는 말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음. 치킨 수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럴듯한 칭찬의 말이나 푸른색을 유달리 선호하는 이들도 있으므로, 낡은 목도리에 애착을 갖기도 하고, 뭐든 제멋대로 하기를 즐기거나,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할 수도 있으므로,
시를 좋아한다는 것一 여기서 ‘시‘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불확실한 대답들은이미 나왔다.
몰라, 정말 모르겠다.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을 뿐.
끝과 시작 Konice poczatek
모든 전쟁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해야만 하리. 그럭저럭 정돈된 꼴을 갖추려면 뭐든 저절로 되는 법은 없으니.
시체로 가득 찬 수레가 지나갈 수 있도록 누군가는 길가의 잔해들을 한옆으로 밀어내야 하리.
누군가는 허우적대며 걸어가야 하리. 소파의 스프링과 깨진 유리 조각, 피 묻은 넝마 조각이 가득한 진흙과 잿더미를 헤치고.
누군가는 벽을 지탱할 대들보를 운반하고, 창에 유리를 끼우고, 경험에 문을 달아야 하리.
사진에 근사하게 나오려면 많은 세월이 요구되는 법, 모든 카메라는 이미 또 다른 전쟁터로 떠나버렸건만.
다리도 다시 놓고, 역도 새로 지어야 하리. 비록 닳아서 누더기가 될지언정 소매를 걷어붙이고,
빗자루를 손에 든 누군가가 과거를 회상하면,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누군가가 운 좋게도 멀쩡히 살아남은 머리를 열심히 끄덕인다. 어느 틈에 주변에는 그 얘기를 지루히 여길 이들이 하나둘씩 몰려들기 시작하고.
아직도 누군가는 가시덤불 아래를 파헤쳐서 해묵어 녹슨 논쟁거리를 끄집어내서는 쓰레기 더미로 가져간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서서히 이 자리를 양보해야만 하리.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그보다 더 알지 못하는결국엔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원인과 결과가 고루 덮인 이 풀밭 위에서 누군가는 자리 깔고 벌렁 드러누워 이삭을 입에 문 채 물끄러미 구름을 바라보아야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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