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작은 방 안에 울리는 꽃다발의 소리는 경이롭다. 꽃들은 나를 취하게 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도데이지 한 송이, 가시나무 한 그루, 머리를 민 수도승같은 모습으로 태양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웃고 웃고 또 웃는 조약돌 하나와 견줄 수 없다.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푸르름을, 
당신을 위해 여기 이 책 속에 담는다.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여름캠프‘라고 불리우는 즐거운 감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마치 수 세기 동안 그곳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불길한 노래를 불러대던 내 동료들과 함께 작은 부대에 속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강제 행군을 하던 중반짝이는 거품을 뱉어내던 분수가 나타났다. 나는 얼른 사자의 입 아래로 달려가 입을 벌리고 차가운 물의바다를 삼켰다. 물은 몸속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가 내몸을 황폐하게 하던 단념의 불을 꺼버렸다. 수십 년이지나도 그 차가운 물이 줬던 신비로운 위안을 기억한다. 사자상의 그 입을 책을 펼칠 때마다 찾아본다. - P93

그 배 위에서 보낸 세 번의 낮과 밤 동안, 내 심장이가슴에서 떨어져 나와 검은 두 눈에 비친 두려움의 심연속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은 얼굴이 되었다. 나와 별과 악마와 신과 그 모든 것들의 종말을 드러내는 얼굴 두려움 자신만은 제외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하고 먹었다. 다른 것을 생각했다. 그럼에도달콤하고 잔인한 두려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붉은내 피는 검게 변해 갔고 밤은 심장까지 차올랐다. 밤은나무가 울어대는 이 낡은 배에 실린 화물이었다. 나는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별들이 비처럼 쏟아지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 P95

‘믿음은 그 끝에 있었다. 아니, 그 끝이 아니라, 검은 덩어리의 안쪽에, 벌어진 어둠의 입안에, 노란 점의믿음이 있었다. 그랬다. 결국 어둠이라는 역경을 분명히 있을 난파라는 다음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는 두려움을 껴안아야만 했다. 두려움을 사랑하고 두려움을 건너야 했다. 다리를 잃고 심장을 잃어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쇳가루를 흩뿌리는 듯 변해버린 하늘과 더러운 금빛 먼지처럼 떨어지는 별을 봐야만 했다. 그 순간, 재난이 완벽하게 완성되던 그 순간에 평화롭고 자신에 찬 아름다운 목소리가, 배를 항구로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던 밝은 황금빛 목소리가 들려왔다.  - P96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조지프 콘래드의 태풍을 막다 읽었어. 읽는 데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네.
재밌었어? 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책이란 등대의 불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책은 황폐한 우리 머릿속 궁전에 불을 켜줄 뿐이지. 그렇지만 글은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건 확실해. 내가 사흘 밤낮을 들여서 알아낸 사실이야. - P97

부드럽게 반짝이는 금빛 풀밭에 머리를 파묻은 갈색 말이 삶에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받는 감동,
천진난만한 아이를 볼 때 마음에 이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갈기를 두른 천사와 황금빛에 대한 커다란 갈망, 그 광경이 내 마음에 같은 바람을 일으켰다. 내가보고 있던 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린 비로 무성하게 자란 풀을 뜯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에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별을 먹는천사, 무위의 시간을 보내는 수도승을 보았다. 그건 삶이 우리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 P102

금빛 눈이 눈꺼풀 아래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눈을 통해 바라본다.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새 말은 다시 말이 되고 꽃은 다시 꽃이된다. 금빛 눈은 광채를 잃거나 수영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물안경이 벗겨지듯이 떨어져나간다. 우리는 다시 원래의 눈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과연 평범할까? - P104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마신 술병보다 더 많은 수의책을 읽었다. 책과 멀어진 삶이란 단 하루도 생각할 수가 없다. 책이 가진 느럼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의 방식이 녹아있다. 나는 눈부신 고요함이 있는 하얀 백악질의 절벽에 조각된 책이라는 시원한 예배당에서 수많은 여름을 보냈다. 성화상 빛깔을 띤 책장에서 천국과지옥의 공간을 새로 칠한 시인의 책들을 꺼낸다. 그 중『새로운 삶』이란 책을 무작위로 펼쳐 두 아이의 옷에쌓인 먼지를 떨어내 주고는 빛을 향해 달려 나가도록놓아준다. - P113

한쪽은 관자놀이에서죽음의 벌들이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 같은 순간 다른한쪽은 감미로운 것들을 읽으며 자신들 앞에 놓인 아특히 펼쳐진 시간을 음미하고 있는, 나는 이 삶이라는것을 더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죄로 붉게 물든 두손으로 삶을 헤쳐나간다. 죽음의 홍수가 그 손을 하얗게 하리라. - P116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용감한 두천사, 메뉴인과 오이스트라흐"가 오래된 흑백 영화에서 바흐 협주곡을 연주한다.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오이스트라흐는어머니가 갓난아기의 숨결을 살피는 것보다 더 열렬하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 천상에 소속된턱시도를 입은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는 돌을 집어 멀리 던져 버리듯 세상을 들어 올린다. 그들의 하얀 손이까마귀처럼 새까만 소매에서 날아오른다. 메뉴인은 생각의 무게에 눌려 눈을 감고, 그의 귀족 같은 얼굴을 침묵의 주인이 있는 무대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들어 올히파이다. - P125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전쟁터 같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훼손된 영혼과 체념의 끔찍한 상처를 봤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침묵의 경종을들었다. 내가 본 것은 숭고하고, 지겹고, 끔찍했다. 닫힌 얼굴들. 부재하는 말들. 그곳에는 모두 열댓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식사가 카트에 실려 오면, 이들은 식탁에서 하루에 두 번 서로 마주한다. 그들이 서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 만남을 위해 길에 올랐다.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위 앞으로 장막이 드리운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 P135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더이상 화도 내지 않는 그들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 노란 야생 수선화보다도 더버려져 있다.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이 꽃들보다 훨씬더 많은 빛을 영원히 약속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바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성인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노란 수선화에게 말을 건다. 바람이 더는 말을 하지 않을 때도 꽃들은 계속 바람을 듣는다. 그런데 여기, 이 방 안에 바람은 어디 있는 걸까?
가여운 이들, 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 - P136

하는 별들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황폐할수록더욱 아름답다. 나는 비천한 이들에게서 금을 진창에던져진 얼굴에서 보석을 보았다. 우리는 모두 한 줌 부스러기로 끝난다. 하지만 이 부스러기는 금으로 되어있고 때가 되면 천사가 그것으로부터 다시 온전한 빵을 만들 것이다. - P137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아름다움이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수도사가 조각을 채색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얼굴은 백금 같은 가래침으로 얼룩져있었다. - P145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가진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것들을 들어 그들의 핏줄 같은 별을 반긴다. 나는 크뢰조의 알르바르 길의 얼룩진 보도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어린 소녀에게 낙엽의 장엄함과 외벽에 금을 긋고 돌아래에 이끼로 글씨를 새겨 넣은 시간의 풍부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멈춰있던 순간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 P146

신은 떠났다. 조금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이제는 정원 끝으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건축 용어에 나오는 아칸더스 잎이 악마와 성인을 구별하기위해 로마네스크 양식 석재에서만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자연에서, 정글같이 무성한 정원에서 그 잎을 발견한다. 공작새들이 꽃 주변을 돌아다닌다. 공작의 울음소리에는 장엄한 애도가 깃들어있다. 간신히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향한 울부짖음. 청명한 날에는 신의 형상까지 보인다. - P148

구관자놀이를 스치는 선선한 바람의 환희, 두 손안에고인 물의 비밀, 길에서 마주친 여우의 찬란함, 이것들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르지 않는다. 대부분은 목자나 어부, 포도 재배자들이 사는 인고의 세계에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끌어온 몇 마디 말이 전해질 뿐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시인들의 땅에 남겨진 발자취의 전부이다. 실제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직접마주 보고, 공허한 마음속에 잠든 별들을 깨우는 것이 - P157

주석자들은 이 방랑자의 말들을 닳아 낡을 때까지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들은 끊임없이 저항한다. 단순한 것은 실로 마르지 않는 법이다. 풀밭에 떨어진 배 위로 모여드는 말벌들처럼 그의 얼굴 주위로 모여든 신학자들이 전율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승고한, 비탄에 잠긴 얼굴이다. - P158

침묵하는 하느님의 대리석같이 차가운 얼굴을 향해 터질 이 외침으로 인해, 이 말을 내뱉은 자는 가까운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우리의 친구가 된다. 잘려버린 핏줄에서 피가 쏟아져 나가듯 믿음이 우리를 떠날 때, 우리를 죽이는 것들에게 계속해서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우리 자신이 된다.

어둠이 짙어져야만 별은 드러난다. - P159

암컷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어 안식처에 데려다 놓듯이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나비의 부서지기 쉬운 날개부터 죽은 이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에이르기까지, 우리가 탐구해야 할 동일한 비밀이 담겨있다. 새끼 고양이의 감춰진 두 눈이 이름 없는 계시로우리를 데리고 간다. 이 계시의 이름을 찾기 바라는 기대로 가장 순수한 시가 쓰이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이름의 표면을 만지기 위해 우리는 책 위에 손을 올린다. - P168

우리는 때때로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그 거대한 검은 파도 위에서 한걸음 나아가지만, 그러나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골길을 걷고, 책을 펼치고,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새끼 고양이는침대의 갈색 이불 위를 걸을 때면, 작은 빛의 자국을 남겨두곤 했었다. - P169

신이 인간에게 지상을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모두가 달려가는데 한 집시만이 오디나무 앞에서 검은 뒷빛 열매를 응시하며 서 있다. 마침내 그녀가 달려가기시작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다.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그녀가 바로 시인들의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라비아가 이 빛나는 느림보의 후손으로 오늘날 파리의 거리를 점령한 집시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 P173

한 철학자의 책을 읽다가 웃음이 거대한 파도처럼밀려왔다. 고요히 진동하는 은밀한 웃음이었다. 얼굴위로 번진 웃음은 피부의 떨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아래 심장은 불타올랐다. 내 가슴 안에서 격정이 일었다. 철학자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풀숲에서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화려한 도시의 열쇠처럼 금으로 만들어진 크고 아름다운, 그러나 동시에 거의 쓸모없는 열쇠들이었다.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열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고요하고도 커다란 웃음이 났던 것이다. - P183

나는 이 철학자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의 문장은숨통을 틔게 해주는 밝고 자비로운 평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환한 웃음이 그보다 더 강렬했다. 그 웃음은 저먼 별들 끝에서 누군가 던진 돌처럼 내게 왔다. 철학자의 책들은 고무줄로 얼굴에 고정해 놓은 마분지 가면과 같다. 그 가면 아래에서는 공기가 부족해 숨쉬기조차 힘이 든다. 이것 봐, 향기로 방을 가득 채운 꽃이 내게 말했다. - P184

다른 세상이 바로 이 웃음인데, 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고 있어? 아이처럼 숨어있던 신이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옆을 지나가면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 웃음은 음악 안에서,
침묵 안에서 들을 수 있지. 꽃봉오리가 벌어질 때에도,
흘러가는 구름 뒤에서도, 이가 빠진 누군가의 입속에서도 들을 수 있고 말이야. 웃음은 세상 곳곳에 있어.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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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눈물의 반짝임이담겨있는 푸르름이지요.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레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 P17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죠. 다만 한 편의 시처럼 반짝이는 빛을 걸쳤을뿐이었습니다. 비로소 당신에게 말하려 했던 것에 가까이 다가섰네요. 오늘 내가 본 사소한 것, 죽음의 모든문을 여는 것, 바로 결코 멈추지 않는 삶 말입니다. 삶은 결코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 기둥 사이를빠져 달아나는 새처럼, 삶은 우리 앞에서 달아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런것을 신경 쓰지 않죠. 오히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인자인 우리를 자신의 온화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 P19

연못은 하늘 아래 꽃을 피우고, 하늘은 연못을 마주하며 곱게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새는 예언하는 듯한날갯짓으로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어요. 잠시 동안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어리석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화창한 날‘, ‘푸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9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른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우리가 하는 말에는 더 이상 아무런의미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드러내는 겉모습은 우리를 눈멀게 했고, 우리를 불편하게하던 순수한 영혼의 얼굴을 우리 스스로 씻어내 버렸다. 갓난아기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던 신은 이제 우리에게서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집시와 길고양이, 접시꽃은 우리가 더는 알지 못하는 영원한 것에 대해 알고 있다. - P32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 술라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세탁실 빨랫줄에 널린 검은 침대 시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림들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무감각해진 채로 살아 엎드려 있는 거대한 짐승 같다. 하얗게 빛나는 빛이 짐승들의 옆구리를 비춘다. 그들의숨결은 무겁고 더디며 고요함에 젖어있다. 불멸의 검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짐승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홍수보다 훨씬 더 위압적인, 술라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짙은 정적에 휩싸여 몽펠리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 P38

밤과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와 끝을 알려주듯 관리인이 다가와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 몽펠리에의 플라타너스가 하얀 별이 지글거리는 은하수까지 내 머리를 들어 올린다. 누구도반박할 수 없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법처럼 하얗게 불탄 자국들. 나는 다시 스위스 시계 같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매일 밤 그러듯, 내일은 더 아름다운 일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 P40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것은 결코 그 순간이 아니다. 죽음,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은총과 우연에 의해 불시에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주 일찍 시작됐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충분하다. 아주 일찍, 그의 삶에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 P50

나는 내 방식대로 연주합니다. 차갑고도 정열적인방식이죠. 내킨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악보라는 북극으로, 음악이라는 어두운 소나무 밑으로 할 수 있다면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가는 곳으로, 내가 연주하는 곳으로 오직 순백의 음악만이 있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 P50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찍힌 음반만이 나올 뿐이다. 소나타 도입부처럼 생기있고 건조한 이름, 글렌 아다지오의 깊은 전율처럼 좀 - P53

더 둔한 소리의 성, 굴드. 소리의 북극여우이자 마멋인글렌 굴드, 그는 바흐를 연주한다. 연주하고 또 연주하며 바흐에만 매달린다. 사실 그는 어떤 곡이든 연주할수 있었고 그의 매력, 그가 연주하는 음표들의 끝에서나오는 젊은 왕자의 위엄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 P54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대리석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느낀다. 여러 달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충격에뒷걸음질 친다. 더는 세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그나마 덜 부조리한 것은 바로 꽃이다. 꽃은 모든 색들의 외침이다.
가장 작은 데이지꽃조차 자신의 말이 들려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한다. 꽃은 자신의 색으로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꽃에 중독되었다. 집안 곳곳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당신의 죽음으로나와 멀어진 세상은 어둠 속 검은 구슬처럼 느리게 돌아갔으나 그곳엔 화려한 꽃의 오만함과 단조로운 허무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외침이 있었다. 수도원의 수녀들은 도자기 병 안에 있는 장미 한다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 P69

결국 세상은 자기 자리를 전부 되찾는다. 아니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부재 속에서 꽃들이 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듣게 된 것이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창밖으로 개머루덩굴이 보인다. 색색의 숨결이 풀밭을 가로지른다.
꽃은 영원으로부터 내리는 첫 빗방울이다.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너는 이 수첩을 열어볼 테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하늘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 안에 머무는 감동적이고 야생적이며 침범할 수 없는 한밤중의 하늘을 이 푸른 페이지들 위에 담긴 별의 하얀 반짝임도 보게 될 것이다. 소금 결정이나 불꽃에서도 볼 수있는 하얀 반짝임을. 수많은 단어들이 네 두 눈의 아침에, 네 눈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단어들이 영혼,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정성스레개어 놓은 빨래. 검은 테두리를 폭풍우와 오로라의 머리글자로 수놓은 연인들의 잠자리를 위한 금빛 침대보 - P75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책을 쓰고 싶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한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못한다.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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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없다.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 너무 가난해 아무도 원치 않는 삶, 신 혹은 사물들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다. 그곳에는 무(無)가 차고 넘친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수많은 문들로 이루어진, 자체의 풍문들로 길을 잃은 삶과는 반대되는삶이다. 그런 삶들을 가지고는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런 삶에서는 말할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오로지 부재 속에서만 제대로 볼 수 있고, 결핍 속에서만 제대로 말할 수 있다. 구걸하는 이 여인의 순결한 얼굴을 보려면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겨볼 수밖에 없다.
  저녁 시간 차곡차곡 쌓이는 그 글들을 바라볼밖에. 어린아이의 잠 속에서 불어나는 엄청난 유산이다. p91

날 봐요. 날 좀 봐요. 당신은 생각한다. 말(馬)들도 그렇게 애원하지. 나무들도, 미친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들도 시간을 잠깐 동안의 시간을통과해 가는 모두가 그렇다. 사방에서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영광을 애타게 구하는 소리. 사방에 무기력한 망명 생활이, 타인의 시선이라는 진정한 거처에 대한 갈구가 존재한다.  - P64

그러다 어느 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를읽는다. 당신이 살았던 유년의 고장,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당신은 고향 땅을 산업화로 우울한풍광을 띄게 된 프랑스의 이 소도시를 한 번도 떠나본적이 없지만, 아주 짧은 여행조차 겁을 내지만, 당신에게 러시아는 평생토록 유년의 땅, 꿈의 땅이었다. 그 고요한 설경과 양털처럼 희고 부드러운 목소리에서 어김없이 당신의 유년기와 재회하곤 했었다. 엄청난 허기를 담고 있는 두꺼운 책, 삶을 빼닮은 그 이야기 속에는 무수한 얼굴 아래 무수한 촛불이 흔들리고 있다. 말과 몸짓, 편지. 말(馬)과 화재. 영혼의 숲속에 나지막이번지는 불길. - P75

‘독서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전혀 혹은 거의 쓸모가 없다. 사랑이 그렇고 놀이가 그런 것처럼. 그건 기도와도 같다. 책은 검은 잉크로 만들어진 묵주여서, 한 단어 한 단어가 손가락 사이에서 알알이 구른다. 그렇다떤 기도란 무얼까. 기도는 침묵이다. 자신에게서 물러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우리는 제대로 기도하는 법을 모르고 있는지도 우리 입술은 언제나 너무 많은 소음을 담고, 우리 가슴속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난다. 성당에서는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다. 촛불을 제외하고는.
초들은 피를 몽땅 쏟아낸다. 자신들의 심지를 남김없이 소모한다.  - P77

파스테르나크의 대작을 읽은 뒤 당신에게 남는 건무얼까. 한 얼굴이다. 사랑하는 여자와 무수한 겨울을떨어져 지내야 하는 한 남자의 얼굴. 어둠 속에 머무는 얼굴, 남자는 숲속 어느 외딴 나무집, 탁자 앞에 앉아 있다. 그는 편지를 쓴다. 끝이 나지 않는 긴긴 편지다. 종잇장들이 검은 잉크로 물든다. 그게 전부다. 이름들과 사건들은 잊힌다. 모든 것이 지워진다. 연못 같은책장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는다. 그래도 책을 읽는 동안 당신을 훨씬 흥분은 남는다. 사라지기까지 여운이너무 긴 기분 좋은 무력감이다. 사랑을 나눈 뒤나 산책을 마칠 무렵 빠져드는 그런 상태. 피로감이랄 수도 있지만 특별한 피로감, 휴식이 되는 피로감이다. 책 앞에서, 자연이나 사랑 앞에서, 당신은 스무 살이나 다름없다. 세상도 당신도 막 시작하려고 한다. 당신은 꼼짝하지 않는다. 기차가 하나씩 출발하는 모습을 본다.  - P78

그녀는 밤늦도록 아이를 보살피며 근심의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녀에게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마음을 쓴다. 유년기부터 몸에 밴 방식, 천성보다강한 제2의 천성이다. 온전한 상실인 사랑. 그것이 그녀가 사랑하는 방식이고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랑이다. 모든 것이 끝나고도 살아남는 사랑, 사랑이 지나고도 살아남는 사랑이다. 아이는 그녀의 에너지를 받으며 자란다. 첫걸음을 떼고 첫마디를 내뱉는다.  - P85

당신은 그녀에게 반하듯 그녀의 문체에 반한다. 둘은 같은 말이다. 흰 종이와 붉은 드레스 밑에서 같은 강물이 흐른다. 그녀는 전설의 거울 앞에 앉듯 언어 앞에앉는다. 어린 시절 그녀는 물웅덩이에 비친 하늘을 응시했었다. 지극히 평범한 한 줄기 빛에도 마음이 홀리곤 했었다. 그녀가 글쓰기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서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녀는 많은 책을, 소설을 읽는다. 책은 샘물 같다. 그녀는 그곳에 얼굴을 갖다 대고 식힌다. 독서와 글쓰기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책을 읽는 그녀는 그 책의 저자이다. 하지만작품 수준이 고르지 못한 저자도 있기 마련이어서 그너는 읽던 책에 싫증이 나기도 한다. 힘들고 버거운 꿈속을 헤매는 것 같은 책.  - P87

내가 책을 읽는 건 보기 위해서예요. 삶의 반짝이는 고통을, 현실에서보다 더 잘 보기 위해서예요. 위안을 받자고 책을 읽는 게 아닙니다. 난 위로받을 길 없는사람이니까.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니에요. 이해해야 할 건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책을 읽는 건 내 삶 속에서 괴로워하는 생명을 보기 위해섭니다. 그저 보려는 겁니다. - P88

수첩에 무언가를 적거나 거울 속에서 무언가를 읽고 있지 않을 때 그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녀는 그들에게 뜨겁고도 차가운 태도로 대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매혹한다. 그런 무지로매혹한다. 그녀는 누군가의 마음에 드는 것이 귀찮은것 같다. 당신에게도 그녀 자신에게도 지친 만사에 지친 모습이다. 존재하면서도 부재한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유년기를 향해 돌아서 있다. 스무 살 적에는 검고긴 머리의 여자였다. 어깨 위로 강물이 흐르고 유순함을 갑옷처럼 둘렀던 여자였다. 휴면 중인 노트 안에서그녀가 찾는 것이 아마도 그것이다. 예전의 얼굴, 열린이미지이다. 검은 잉크를 쓸어내리는 말들의 빛. 아마도 그것이거나 아니면 다른 것. 혹은 아무것도 없는지도 - P90

신문 읽기는 진지한행위이다. 진지한 모든 일이 그렇듯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성서는 다르다. 성서의 한 문장은무수알코올 한 방울, 천사들의 눈물 한 방울과 같다. 책을 펴고 책장 속 어딘가를 짚으면 손가락 밑에는 물고기나 양 한 마리, 야자수 한 그루가 있다. 책을 읽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삶으로부터 삶 자체로, 단순 현재에서 완료된 현재로 건너간다. - P99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 P108

작가는 일체의 명징함을 제 손에 움켜쥔 자이지만,
성인(聖人)은 제 손에 일체의 어둠을 움켜쥔 자이다. 작가는 빛으로 잉크를 만들지만, 성인은 불순함을 가지고 더없이 순정한 무언가를 만든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가 성인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건 분명한사실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목소리라고도 할 수 없다.
목소리는 그 둘 사이에서 방황한다. 땅과 하늘 사이, 책과 천사들 사이에 자리한, 우레 같은 검은 목소리다.  - P109

광인이란, 자신의 광기를 더 이상 주체하지못하고 단번에 이 광기의 물을 쏟아내는 정신이 말짱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파탄이 나고 만다. 언어의 고역이나 우스꽝스러운 노동 등, 오로지 자신을 근거로 삼는 일들을 단념해버린다. 세상 전부를 포기한다. 광인은 무대 뒤로 사라지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이 목소리는 아직 무대 위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렇게 목소리는 말을 한다. 당신의 지성과당신의 봄, 당신의 믿음이라는 게 대체 무언지. 당신의원칙, 당신의 보물창고, 당신의 객설이라는 게 무언지.
당신의 건강 이면엔 폐허가 널려 있다는 걸, 당신의 부부생활 이면에 얼마나 끔찍한 증오심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목소리가 말해준다.  - P111

‘우리 안엔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없다. 색깔도 형해도 없는 기다림이 있을 뿐.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아니다. 이 기다림은 공기와 공기가 섞이듯 우리 안에존재한다. 그 무엇과도 닮지 않은 지루함의 절정이라고나 할 수 있는 기다림. 이 기다림이 그곳에 항시 존재했던 건 아니다. 우리가 항시 무(無)였던 것도 그 누구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도 아니다. 유년기의 우리는 전부였고, 신(神)은 우리 영역의 미미한 일부에 불과했었다. 풀밭 속의 풀잎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 P119

우린 기다린다. 기다림이 스스로 굴할 때까지 기다리거나 잠을 자거나 죽는것이 매한가지일 때까지, 우린 기다린다. 사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막을 배경으로 처음엔 보이지 않고 그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나아가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사랑은자신을 향해 스스로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 P120

부재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부재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이 무(無)임을 자각한다. 임박한 죽음 앞에서 몸을 떠는 짐승의 막연한자각이다. - P123

당신이 내 고독의 원인은 아니다. 고독은 당신보다훨씬 앞서 내 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깨어나게 한 당신은, 그 고독을 가장 닮은 여자일 뿐.

사랑이 끝나는 순간 세 동방박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수와 침묵과 기쁨 그들이 푸른 대기 속을 천천히나아간다. 어둠의 왕관과 황금 눈물을 가지고서. 유년기에서 걸어 나온 이들이다. 그들은 영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천천히 날마다 조금씩 우수와 침묵과 기쁨. 언제나 같은 순서다. 침묵이 한복판에 중심에 있다.

침묵의 희고 작은 드레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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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우리가 책을 읽는 건 아니다. 삶이 깨어나는 시기, 두 눈이 처음 사물을 보기 시작하는 시기엔 책을 읽지 않는다. 입으로, 양손으로 삶을 집어삼키지만아직 잉크로 눈을 더럽히지는 않는다. 삶의 시원. 첫 수원(水源), 유년의 개울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겠다는 생각도, 어느 책의 페이지나 어느 문장의 문을뒤로하고 쾅 닫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아니, 처음엔 더 단순하다. 어쩌면 더 실성한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우리는 진정한 제약이라고는 없는 첫 대륙에속해 있다. 이 대륙은 바로 당신, 당신 자신이다.  - P11

끊김도 찢김도 없는 온전한 당신이다. 쉽사리 헤아려지는 무한한 공간. 그 안에 책은 없다. 책이들어설 자리, 독서라는 경이로운 애도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 P12

글을 읽는 첫 경험. 책의한 페이지를 해독하고 어렴풋한 형체들을 감지할 수있게 된 첫 경험. 그것은 행복을 넘어서는 정확히 말해기쁨이라고 할 만한 무엇이다. 기쁨과 공포라 할 만한무엇. 기쁨은 어김없이 공포를 수반하고 책들은 언제나 애도를 수반하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세상의 첫 막이 내리면 다른 무언가가 시작된다. 대개는 따분한 무언가다. 글을 읽게 되면서부터우리는 자신에게 무가치한 희생만을 요구하는 것들을사게 된다. 말하자면 교실에 앉을 자리 하나, 혹은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떠맡는 직책 하나. 그러고 나면 우리는 단념한다.  - P13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그러니까 언어의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그들은 황홀감에 취해 세상에서 물러나 이고독을 향해 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고독의 골은 깊어진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책이든 나쁜 책이든 신문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읽는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양식이 되어준다. 요컨대 한쪽에는 아무것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읽기가 전부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가 있다. 돈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경계는 돈의 경계보다 더 폐쇄적이다.  - P15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겐 결핍이 부족하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눈에 띄는 벽이자리하지만 이 벽은 유동적이고 군데군데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사이의 벽은 땅속 깊은 곳, 얼굴 밑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누가 죽은 사람이고 누가 산 사람일까? 답변이 불가능한 질문이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은 과묵한 무리를 형성한다.
이 사람들에겐 물건이 말을 대신한다.  - P16

그런데 다른 한 편에는 손이라고는 아예 없는 사람들, 황금도 잉크도 박탈당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이다. 오직 그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요컨대 타자를 지향하는 글이 아니라면 흥미로운 글일 수 없다. 글쓰기는 분열된세상과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며, 계급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 - P17

영혼 없이도 우리는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법석을 떨 필요도없다. 그건 너무나도 흔한 일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도 사물들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부재하지만 세상이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속여 넘길 수 있다. 짐승들을 제외하고, 나무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를 속일 수 있다. 그렇게 모두가 속아 넘어가지만, 그래도 금빛 가을 햇살만은 속지 않는다. 자작나무 껍질과 장미나무 속살을 한없이 부드럽게 감싸 안는 그 빛은 결코 속지 않는다. 우리를 피해 달아나는 그빛을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직접적인 삶에 어떻게 가 닿는다지? 단순한 삶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있을까? 프로방스 숲속에 번진 시뻘건 산불처럼 사랑이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풀이 다시 자랄 것이다.  - P25

죽음과 잇따른 재생에 관한 이야기. 그녀는 마치 쓰지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글을 쓴다. 문체에는 관심을두지 않는다. 그 대신 백지 위로 결단코 오지 않을 그것1에 한마디 말에 겁을 집어먹을 그것에 무엇보다 공을들인다. 요컨대 삶에, 발가벗겨진 삶에 가식 없는 단순명료한 삶,  - P27

오랫동안,오랫동안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랑이 갖춘 위엄이자, 사랑의 놀라운 특성이다. 소음과 부산함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 온갖 발작으로부터도 훌쩍 떨어져,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사랑은, 그리고 사랑의 가볍고 경쾌한 자각이자 더없이 겸허한 형상이며 각성한 얼굴인 시(詩)는 심오한 기다림이고 달콤한 기다림이다. 부드럽고도 오묘하게 반짝이는 희망이다. - P36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즉 아버지의 떠도는 그림자가 있고, 번잡한 날들 속에서 첫 시구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라신과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담갈색 밤이 있다. 사방에서 꿈은 짓밟히고, 자신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글쓰기는 불가능해진다. 불만에 찬 왕,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갈가리 찢긴유년기에 너무 밀착된 상태로는 글쓰기가 불가능하다. - P47

시작은 절름발이이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우아함이 깃든다. 이 둘 사이에서 정신은 필연적으로 성장하지만 학습의 성과나 지속성은 오락가락한다. 시작과 끝은 동시에 주어진다는 걸 우린 나중에야 알게 된다. 아이의서투름과 신의 경쾌함, 꽃과 열매는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걸 훨씬 뒤에야 알게 된다. 우아함이 우리의 서투름을 몰아내는 게 아니다. 우아함은 서투름을 완성한다.
두 개의 음이 떨리는 순간 음악은 이미 환한 빛을 발하며 그곳에 있다. 미약한 시작 속에 성취되어 있다. 그다음은 단순하다. 잇따르는 습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음악이 자신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느린 걸음으로 날마다 조금씩 더 가까이. 황금 말인 음악을 길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그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다.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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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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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죽음이다. 거침없는 표현과 노골적인 문장으로 시종일관 죽음을 노래했기때문이다. 그러나 산문집에서 몸으로 살아내고 버틴 치열한 삶을만났다. ‘그만 쓰자. 끝‘은 무엇 하나 쉽지 않았던, 전 생애를 뛰어넘는 의지가 엿보인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꿰뚫어 보는 시인의 시선은 실은 따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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