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여름캠프‘라고 불리우는 즐거운 감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마치 수 세기 동안 그곳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불길한 노래를 불러대던 내 동료들과 함께 작은 부대에 속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강제 행군을 하던 중반짝이는 거품을 뱉어내던 분수가 나타났다. 나는 얼른 사자의 입 아래로 달려가 입을 벌리고 차가운 물의바다를 삼켰다. 물은 몸속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가 내몸을 황폐하게 하던 단념의 불을 꺼버렸다. 수십 년이지나도 그 차가운 물이 줬던 신비로운 위안을 기억한다. 사자상의 그 입을 책을 펼칠 때마다 찾아본다. - P93
그 배 위에서 보낸 세 번의 낮과 밤 동안, 내 심장이가슴에서 떨어져 나와 검은 두 눈에 비친 두려움의 심연속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은 얼굴이 되었다. 나와 별과 악마와 신과 그 모든 것들의 종말을 드러내는 얼굴 두려움 자신만은 제외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하고 먹었다. 다른 것을 생각했다. 그럼에도달콤하고 잔인한 두려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붉은내 피는 검게 변해 갔고 밤은 심장까지 차올랐다. 밤은나무가 울어대는 이 낡은 배에 실린 화물이었다. 나는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별들이 비처럼 쏟아지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 P95
‘믿음은 그 끝에 있었다. 아니, 그 끝이 아니라, 검은 덩어리의 안쪽에, 벌어진 어둠의 입안에, 노란 점의믿음이 있었다. 그랬다. 결국 어둠이라는 역경을 분명히 있을 난파라는 다음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는 두려움을 껴안아야만 했다. 두려움을 사랑하고 두려움을 건너야 했다. 다리를 잃고 심장을 잃어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쇳가루를 흩뿌리는 듯 변해버린 하늘과 더러운 금빛 먼지처럼 떨어지는 별을 봐야만 했다. 그 순간, 재난이 완벽하게 완성되던 그 순간에 평화롭고 자신에 찬 아름다운 목소리가, 배를 항구로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던 밝은 황금빛 목소리가 들려왔다. - P96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조지프 콘래드의 태풍을 막다 읽었어. 읽는 데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네. 재밌었어? 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책이란 등대의 불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책은 황폐한 우리 머릿속 궁전에 불을 켜줄 뿐이지. 그렇지만 글은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건 확실해. 내가 사흘 밤낮을 들여서 알아낸 사실이야. - P97
부드럽게 반짝이는 금빛 풀밭에 머리를 파묻은 갈색 말이 삶에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받는 감동, 천진난만한 아이를 볼 때 마음에 이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갈기를 두른 천사와 황금빛에 대한 커다란 갈망, 그 광경이 내 마음에 같은 바람을 일으켰다. 내가보고 있던 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린 비로 무성하게 자란 풀을 뜯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에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별을 먹는천사, 무위의 시간을 보내는 수도승을 보았다. 그건 삶이 우리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 P102
금빛 눈이 눈꺼풀 아래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눈을 통해 바라본다.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새 말은 다시 말이 되고 꽃은 다시 꽃이된다. 금빛 눈은 광채를 잃거나 수영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물안경이 벗겨지듯이 떨어져나간다. 우리는 다시 원래의 눈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과연 평범할까? - P104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마신 술병보다 더 많은 수의책을 읽었다. 책과 멀어진 삶이란 단 하루도 생각할 수가 없다. 책이 가진 느럼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의 방식이 녹아있다. 나는 눈부신 고요함이 있는 하얀 백악질의 절벽에 조각된 책이라는 시원한 예배당에서 수많은 여름을 보냈다. 성화상 빛깔을 띤 책장에서 천국과지옥의 공간을 새로 칠한 시인의 책들을 꺼낸다. 그 중『새로운 삶』이란 책을 무작위로 펼쳐 두 아이의 옷에쌓인 먼지를 떨어내 주고는 빛을 향해 달려 나가도록놓아준다. - P113
한쪽은 관자놀이에서죽음의 벌들이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 같은 순간 다른한쪽은 감미로운 것들을 읽으며 자신들 앞에 놓인 아특히 펼쳐진 시간을 음미하고 있는, 나는 이 삶이라는것을 더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죄로 붉게 물든 두손으로 삶을 헤쳐나간다. 죽음의 홍수가 그 손을 하얗게 하리라. - P116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용감한 두천사, 메뉴인과 오이스트라흐"가 오래된 흑백 영화에서 바흐 협주곡을 연주한다.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오이스트라흐는어머니가 갓난아기의 숨결을 살피는 것보다 더 열렬하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 천상에 소속된턱시도를 입은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는 돌을 집어 멀리 던져 버리듯 세상을 들어 올린다. 그들의 하얀 손이까마귀처럼 새까만 소매에서 날아오른다. 메뉴인은 생각의 무게에 눌려 눈을 감고, 그의 귀족 같은 얼굴을 침묵의 주인이 있는 무대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들어 올히파이다. - P125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전쟁터 같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훼손된 영혼과 체념의 끔찍한 상처를 봤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침묵의 경종을들었다. 내가 본 것은 숭고하고, 지겹고, 끔찍했다. 닫힌 얼굴들. 부재하는 말들. 그곳에는 모두 열댓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식사가 카트에 실려 오면, 이들은 식탁에서 하루에 두 번 서로 마주한다. 그들이 서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 만남을 위해 길에 올랐다.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위 앞으로 장막이 드리운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 P135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더이상 화도 내지 않는 그들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 노란 야생 수선화보다도 더버려져 있다.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이 꽃들보다 훨씬더 많은 빛을 영원히 약속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바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성인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노란 수선화에게 말을 건다. 바람이 더는 말을 하지 않을 때도 꽃들은 계속 바람을 듣는다. 그런데 여기, 이 방 안에 바람은 어디 있는 걸까? 가여운 이들, 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 - P136
하는 별들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황폐할수록더욱 아름답다. 나는 비천한 이들에게서 금을 진창에던져진 얼굴에서 보석을 보았다. 우리는 모두 한 줌 부스러기로 끝난다. 하지만 이 부스러기는 금으로 되어있고 때가 되면 천사가 그것으로부터 다시 온전한 빵을 만들 것이다. - P137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아름다움이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수도사가 조각을 채색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얼굴은 백금 같은 가래침으로 얼룩져있었다. - P145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가진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것들을 들어 그들의 핏줄 같은 별을 반긴다. 나는 크뢰조의 알르바르 길의 얼룩진 보도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어린 소녀에게 낙엽의 장엄함과 외벽에 금을 긋고 돌아래에 이끼로 글씨를 새겨 넣은 시간의 풍부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멈춰있던 순간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 P146
신은 떠났다. 조금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이제는 정원 끝으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건축 용어에 나오는 아칸더스 잎이 악마와 성인을 구별하기위해 로마네스크 양식 석재에서만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자연에서, 정글같이 무성한 정원에서 그 잎을 발견한다. 공작새들이 꽃 주변을 돌아다닌다. 공작의 울음소리에는 장엄한 애도가 깃들어있다. 간신히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향한 울부짖음. 청명한 날에는 신의 형상까지 보인다. - P148
구관자놀이를 스치는 선선한 바람의 환희, 두 손안에고인 물의 비밀, 길에서 마주친 여우의 찬란함, 이것들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르지 않는다. 대부분은 목자나 어부, 포도 재배자들이 사는 인고의 세계에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끌어온 몇 마디 말이 전해질 뿐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시인들의 땅에 남겨진 발자취의 전부이다. 실제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직접마주 보고, 공허한 마음속에 잠든 별들을 깨우는 것이 - P157
주석자들은 이 방랑자의 말들을 닳아 낡을 때까지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들은 끊임없이 저항한다. 단순한 것은 실로 마르지 않는 법이다. 풀밭에 떨어진 배 위로 모여드는 말벌들처럼 그의 얼굴 주위로 모여든 신학자들이 전율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승고한, 비탄에 잠긴 얼굴이다. - P158
침묵하는 하느님의 대리석같이 차가운 얼굴을 향해 터질 이 외침으로 인해, 이 말을 내뱉은 자는 가까운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우리의 친구가 된다. 잘려버린 핏줄에서 피가 쏟아져 나가듯 믿음이 우리를 떠날 때, 우리를 죽이는 것들에게 계속해서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우리 자신이 된다.
어둠이 짙어져야만 별은 드러난다. - P159
암컷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어 안식처에 데려다 놓듯이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나비의 부서지기 쉬운 날개부터 죽은 이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에이르기까지, 우리가 탐구해야 할 동일한 비밀이 담겨있다. 새끼 고양이의 감춰진 두 눈이 이름 없는 계시로우리를 데리고 간다. 이 계시의 이름을 찾기 바라는 기대로 가장 순수한 시가 쓰이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이름의 표면을 만지기 위해 우리는 책 위에 손을 올린다. - P168
우리는 때때로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그 거대한 검은 파도 위에서 한걸음 나아가지만, 그러나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골길을 걷고, 책을 펼치고,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새끼 고양이는침대의 갈색 이불 위를 걸을 때면, 작은 빛의 자국을 남겨두곤 했었다. - P169
신이 인간에게 지상을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모두가 달려가는데 한 집시만이 오디나무 앞에서 검은 뒷빛 열매를 응시하며 서 있다. 마침내 그녀가 달려가기시작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다.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그녀가 바로 시인들의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라비아가 이 빛나는 느림보의 후손으로 오늘날 파리의 거리를 점령한 집시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 P173
한 철학자의 책을 읽다가 웃음이 거대한 파도처럼밀려왔다. 고요히 진동하는 은밀한 웃음이었다. 얼굴위로 번진 웃음은 피부의 떨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아래 심장은 불타올랐다. 내 가슴 안에서 격정이 일었다. 철학자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풀숲에서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화려한 도시의 열쇠처럼 금으로 만들어진 크고 아름다운, 그러나 동시에 거의 쓸모없는 열쇠들이었다.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열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고요하고도 커다란 웃음이 났던 것이다. - P183
나는 이 철학자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의 문장은숨통을 틔게 해주는 밝고 자비로운 평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환한 웃음이 그보다 더 강렬했다. 그 웃음은 저먼 별들 끝에서 누군가 던진 돌처럼 내게 왔다. 철학자의 책들은 고무줄로 얼굴에 고정해 놓은 마분지 가면과 같다. 그 가면 아래에서는 공기가 부족해 숨쉬기조차 힘이 든다. 이것 봐, 향기로 방을 가득 채운 꽃이 내게 말했다. - P184
다른 세상이 바로 이 웃음인데, 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고 있어? 아이처럼 숨어있던 신이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옆을 지나가면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 웃음은 음악 안에서, 침묵 안에서 들을 수 있지. 꽃봉오리가 벌어질 때에도, 흘러가는 구름 뒤에서도, 이가 빠진 누군가의 입속에서도 들을 수 있고 말이야. 웃음은 세상 곳곳에 있어.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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