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상 
2018년 웹진 비유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이중작가 초롱이 있다. 문지문학상, 2019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김멜라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 제 꿈 꾸세요』가 있다. 문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2021년, 2022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성혜령 
2021년 단편소설 「윤소정」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서수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당신의 4분33초 헬프 미 시스터, 중편소설 몸과 여자들이 있다. 황산벌청년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선임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있다.

함윤이 
2022년 단편소설 「되돌아오는 곰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호정 
2020년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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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시절 책에서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늘 옳은 말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 수준이 정부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일치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라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고 본다.
p68

다음1959년의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나라였다.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 끼 밥도 제때 먹지 못한다면 훌륭한 인생이나 품격 있는 삶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며, 도시에서도 그나마 조금 넉넉한 사람들이 기와집에 살았다. 양옥은 희귀했고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도없었다. 사람들은 숯과 나무를 때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방을 데웠다. 조선 후기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삼천리 금수강산‘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는 곳은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전기는 도시 일부 지역에만 들어왔으며 상수도와 하수도가 거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화장실은 거의 다 ‘푸세식‘이었다. 남자들이 똥통을 매단 나무막대를 어깨에 메고 변소를 푸러 다녔다.  - P37

1959년의 대한민국은 거대한 ‘난민촌‘ 또는 ‘구난공동체‘救難共同體였다.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지역에 수립되었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 38선 이북에 살았지만 북한 정권의 탄압과 핍박을 피해서,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가 좋아서 월남한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서 내려온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38선 이북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달랐다.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가 좋아서 스스로 북으로 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모든 인민이 원래 그 지역 거주자였다. 북한은 국가 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권력 아래 국민전체를 일사불란하게 조직한 ‘병영국가‘로 남아 있다. - P40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실시한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 표를 얻어 2위를 했고, 1956년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엔 보장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성취‘를 1호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직전 별세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대신해 이승만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 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유효표의 25퍼센트가 넘는 216만 표를 얻었다. - P42

조봉암 선생은 1954년 3월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글에서 군사적 무력통일과 더불어 선거방식에 의한 정치적 통일도 검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진영이 단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 P42

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서민들은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 P48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폭격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문서는 사실상 모두 효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한다. 남한의반북단체들은 북한의 체제와 권력자를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낸다.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P51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인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우리의 ‘난민촌 정서‘ 역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년 1·21사태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을 비롯해 정전협정 발효 이후 60여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굳건히 유지되는 독재체제와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 P51

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했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 P61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4·19의 외침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그원망과 분노에 화답함으로써 무려 25년 동안 독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1987년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김대중·노무현의 진보정권10년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현대사가 서로 다른 욕망의 전차가 부딪쳐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 P62

소비재 경공업으로 출발한 대한민국 경제가 금속,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을 거쳐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까지 세계 경제의 기술적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데는 지식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울러 우리는 역사적·문화적·인종적으로 매우 균질하며 중앙집권 정치체제에 익숙한 민족이다. 상이한 인종과 종교, 크게 다른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이슬람권과 달리 종교와 세속권력이 결합해 변화와 혁신을 봉쇄하는일도 없었다. 우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외환위기때 금모으기운동을 한 민족이다.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 P64

나는 두 살에 4·19를, 세살에 5·16을 보았다. 직접 본 건 물론 아니다. 4.19 때는 걸음마도 떼지 못했고, 5·16 때는 겨우 한두 마디 말을 하는 정도였으니 보았을 리가 없다. 만약 그 두 사건이 내 인생에개입하지 않았다면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4·19와 5.16은 나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그 둘이 부모는 같지만 외모와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승만대통령 시대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아버지는 대중의 욕망이었다. - P67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시절 책에서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늘 옳은 말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 수준이 정부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일치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라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고 본다. - P68

국회 본청 중앙 로텐더 홀을 지나 의원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1999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대통령이승만‘이 아니라 ‘국회의장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상을 세운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았으니 독재를 한 잘못은 잘못대로 비판하되 그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이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 없지만 가능성을 - P74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P75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 - P75

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품고 국가에 복종·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 P76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 16이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P94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4·19와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P99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 ㅡ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퍼센트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퍼센트 사람들은 늘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민생이 파탄에 빠지고 국민경제가 성장동력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 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면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살벌한 경쟁풍토, 재벌 대기업의 탐욕과 횡포, 심각한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과 자살률, 참혹한 환경파괴 등 한국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모두 박정희독재에서 시작되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본격화했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맞을까? 나는 둘 모두 옳고, 또 둘 다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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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 각자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역사 중에서도 현대사는 특별히 민감하다.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죽고 없더라도 그들의 행위로인해 억울하게 고통을 겪었거나 정당한 또는 부당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 있다. 우리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한민국의 역대대통령과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강한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왕처럼 느긋하게 대하지 못한다. - P9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신라의 행위가 민족적 배신이었다거나, 낙화암의 삼천궁녀 이야기는백제 의자왕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기 위해 신라의 권력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해서 드잡이를 하지는 않는다. 이미1,500년 세월이 흐른 사건이어서 무엇을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현재의 삶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한 지도자였다거나, 박정희대통령이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킨 덕분에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거나, 전두환 장군이 국가적 혼란을수습했기에 적화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거나, 남북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과 내통한 빨갱이였다거나,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우리나라를 환경선진국으로 발돋움시킨쾌거였다고 말한다면 술자리에서 격한 주먹다짐이 벌어질 수 있다. - P10

삶에서 안전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가 보고 겪고 참여했던 대한민국현대사를 썼다. 1959년부터 2014년까지 55년을 다루었으니, ‘현대사‘ 보다는 ‘현재사‘現在史 또는 ‘당대사가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있다. 나는 이 권리를 소신껏 행사했다. - P11

내가 한국현대사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빛나는승리와 영광의 기록이어서가 아니다. 그런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 있다. 우리의 현대사도 빛과어둠이 뒤섞여 있다. 그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爲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이상국가 또는 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외국에 견주어 우리의 현대사를 본다. 더 훌륭한 대상을 보고 배우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집착하면 우리 역사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장면만 주로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학적 역사인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공자, 예수, 석가모니처럼 훌륭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못하다고 해서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훌륭해야만 한다는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사의 밝고 자랑스러운 장면만을 보려고 한다. 자신을 긍정하고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다.  - P12

우리는 훌륭한 인간을 존경하며 훌륭한 역사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훌륭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훌륭함은 아무 오류가 없는완전무결함이나 지고지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역사도 거기에는 도달할 수없다. 우리는 다만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추하고 불합리하며 저열한 상태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더 아름답고 합리적이며 고결한 상태로 변화했다면, 그 과정을 기록한 역사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현대사 55년이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역사라고 생각한다. 2014년의 대한민국은 결코 완벽하고 훌륭한 사회가 아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1959년의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훌륭하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 점이 55년 전보다 훌륭한가? 무엇이 그 변화를 만들었는가? 어떤 면이 아직도 부끄럽고 추악하며 앞으로 우리는 어떤 변화를 더 이룰 수 있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P13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는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노무현의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 P26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잡고 있다. 이 현상은 2012년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분류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민주화세력에 속했지만 산업화세력의 품에서대통령직을 수행한 만큼 그쪽에 넣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자. 2014년 현재 국민들의 전직 대통령 선호도는 둘로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 40대 이하에서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합이 압도적으로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합이 훨씬 높다. 지역별·연령별 호감도 분포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박근혜·문재인 후보 지지도 분포와 거의 비슷하다.  - P26

나 자신은 부끄러움과 분노, 긍지와 설렘처럼 상충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대한민국은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다. 우리의 현대사가 영광과 승리의 역사라는 주장과 불의와 오욕의 역사라는 주장은 둘 다 옳다. 하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일진대 역사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드높이 들어야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 P28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P29

대한민국의 오늘과 55년 전을 비교할 때 느끼는 압도적 감정은
‘놀라움‘이다. 우리의 삶은 거의 모든 면에서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것은 양의 변화를 넘어선 질적 전환이었으며 기적에 가까운 변신이었다. 모든 것이 다 좋게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은 분명하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동학學, dynamics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건과 상태의 변화를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정학, statics을 활용할 수 있다. 1959년과2014년의 대한민국의 단면을 잘라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고 어떤 힘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해 그 변화를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측해볼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 흔히 쓰는 연구방법인 비교정학比較學, comparative statics을 역사 서술에 응용해보았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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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힘이 있을 때는 이러한 순환이 가능했다. 속주 역시식량이 빠듯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전쟁 기계‘ 로마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가 흔들리면서 속주는 로마에 식량이나세금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고, 무리한 세금 요구와 재정 악화의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게르만족이 밀려 들어오면서 로마는속절없이 무너졌다. 만약 로마가 포도와 밀의 황금 비율을 적절하게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로마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 P171

카토는 평민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공을 세워집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유명했으며, 특히 로마 귀족들의 사치와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다. 우리나라로치면 막걸리에 김치 안주를 즐기는 안빈낙도형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농업이 도덕적 가치를 놓고 볼 때 고리 대금이나 무역보다분명히 바람직하다"며 "농민은 유일하게 좋은 시민으로 높이평가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 P171

받았다.
중세 이탈리아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나그네가 선량해보이는 농민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농민은 화를내며 "왜 하필담장과 기둥마저 썩게 하는 천한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좋은포도주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지만 물은 못 드립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 요청해도 절대주지 않는 건 이런 이유다.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시키지 않는다면대신 탄산수나 생수라도 시켜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달라고 하는 것은 그 식당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옛날에는 와인의 가격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다. 지금의 독일맥주의 가격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듯하다. 지금까지 전해져오는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의 지출 기록을 보면, 수도원은 미사에 쓰고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 값보다 밀가루 값에 더 많은 돈을 썼다. - P173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와인의 맛뿐 아니라 이야기를 풍부하게만든다. 협동조합의 진짜 매력은 실제론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농민이 보유한 와이너리 면적은 평균 2헥타트로 프랑스(11헥타르)는물론 호주(25헥타르), 미국(27헥타르) 등보다 훨씬 작다. 이렇게 작은와이너리는 와인 맛에 대한 연구 개발은커녕, 독자적인 마케팅을시도하기도 어렵다. 규모가 작은 와이너리가 도태되기 쉬운 이유다.
미국, 영국 등에서 산업혁명 이후 현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왔던농촌의 현실이 사실 그렇다. 산업혁명 이후 농민들은 거대 자본은물론, 심지어는 양들에게까지 밀려나 토지를 잃어버리고 도시의하층민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서 지금도똑같이 진행 중이다. - P186

하지만 협동조합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농민에게 선물했다.
조합원이 된 농민은 단순히 포도나 와인을 거대 유통업자나 주류제조사에 넘기는 가난한 생산자가 아니라 조합의 결정에 1인 1표를행사하는 경영자다. 또 조합원은 해마다 작황과 상관없이 정해진가격으로 포도를 공급할 수 있어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농장을경영할 수 있다. 게다가 조합원의 생산물 판매가는 비조합원의판매가보다 평균 20퍼센트 가량 높다. 물론 손실이 날 경우에는조합원이 이를 부담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홀로 경영할 때보다는드물다. 이런 특혜 덕분에 소규모 포도밭에서 포도를 키우는 많은생산자가 조상 때부터 키워오던 고유의 품종을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밀려 들어오는 외국산 저가 와인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 P186

람브루스코의 색깔은 어떤 와인의 색보다 짙다. 거의 보랏빛에 가깝다. 그리고 잔잔하고 달디단 거품이 인다. 이 와인에는 프로슈토와 모르타넬라 한 점을 얹은 치아바타나 혹은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를 잔뜩 얹은 볼로네제 파스타가안성맞춤이다. 이런 맛있는 음식과 멋진 와인은 혼자 즐기기보다는여러 명이 함께 먹고 마셔야 제격이다.
볼로냐에서는 음식도 와인도 가격이 저렴해 도심 곳곳의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볼수 있다. 관광객인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 같기도 한 사람들은푸짐하고 맛있는 볼로냐식 마른안주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왁자지껄먹고 마신다. 나도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볼로냐 광장에서 그들처럼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람브루스코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람브루스코는 혼자서 마시는 와인이 아니라 볼로냐 사람들처럼어깨를 걸고 신나게 마셔야 하는 와인이다. - P189

나처럼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던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뭐든 조심스럽다. ‘아, 이게 될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검열하는 값싼알고리즘이 대학을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작동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마르크스나 레닌 혹은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을 가지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처벌될 수 있었다. 많은 선배가 집에 그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이유로 입건되었고 운이 나쁘면 재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런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그 생각을 추종하고 사회에 위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마당시의 정치인이나 공안 당국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양심의 자유에 배치되는 국가보안법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더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제는 패배한 과거가 되어버린 ‘공산주의‘를인류 보편에 입각해 생각해보려 해도, 아직까지 그 말을 들으면 몸이경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 P191

이 광장의 벽에는 늘 공산당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이매번 바뀌는데 내가 가 있을 때는 중국 인민복을 입은 공산당원이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옆으로는 대자보와구호가 붙어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를 보는 듯한 착각이들었다.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이 사회적 이슈로 시위를 하는 게 매우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볼로냐에 머물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볼로냐 대학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이슈로 자주 시위를 한다. 심지어도서관 등에서 점거 농성에 들어가서 학생들이 강의실을 옮기거나 시내의 다른 도서관으로 흩어지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 P194

그런데 이후에 머문 볼로냐에서는 책을 펼칠 공간을 찾으러 다닐필요가 없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볼로냐 도서관에서 대출증을바로 발급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갔을 때 나는 여권도 없고,
휴대폰 배터리도 나가서 신원을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친절한 직원은 내 이메일 주소만 받고 대출증을 발급해주었다. 하나더 놀란 것은 이 도서관의 대출 전산 시스템에 한글 서비스가 있었다.
"비바 볼로냐(볼로냐 만세)." 이탈리아의 공공 서비스는 종종 사람을속 터지게 만드는데, 볼로냐는 내 이런 울분을 토닥거려준 이탈리아유일의 도시였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토리노와 팔레르모의 도서관과는 전혀다른 개방성이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도서관의 직원은 대출을원하는 나에게 "여기는 이 도시에 세금을 내는 이탈리아인만 이용할수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토리노는 여권만 있으면 대출증을 만들수는 있지만 출입증 소지자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도시의도서관에 견줘 볼로냐의 도서관 시스템은 탁월했다. - P197

재미있게도 역사적으로 커피가 퍼진 곳에서는 기존의 관습을거부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유럽보다 앞서 커피를 적극적으로받아들인 곳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처음에는 이슬람에서도 커피를금지했다. 하지만 이후 이슬람에서는 술 대신 커피 정도는 받아들일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알코올을 카페인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이슬람의 와인‘으로 불리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 변화를가져왔다. 이슬람은 커피를 즐기면서 9세기에 이미 종교와 철학을분리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받아들여 신학과 철학의 진리가 각각의 영역임을 논증했다.
이슬람에서 철학의 독립은 사회과학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이는정치가 종교로부터의 독립하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런유연한 사고방식 덕분에 아랍에서는 수학, 과학, 의학 등 새로운 학문이 쏟아져 나왔다. - P202

이 시기에 커피는 영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커피는 그들에게 맥주나 진을 대신하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다. 커피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장을 영국에 선물했는데, 바로 커피를 마시는 커피하우스였다. 커피하우스는처음에는 옥스퍼드 등 대학가에 먼저 생겨났다. 그리고 커피의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 같은 대도시로도커피하우스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런던의 커피하우스에는해운업자, 무역업자, 금융가 같은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수나 과학자, 변호사, 정치가, 예술인 등 다양한 직업을가진 사람들이 출입했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늘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신분이나 재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계급장을 떼고 만나 서로 배우는 자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커피하우스를 커피값 1~2페니만 가지고도 세상을 배울 수 있는곳이라며, ‘페니 대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여성들은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커피하우스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을 내기도했다. - P205

볼로냐에는 권력자의 시선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커피와 대학이모두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 된다. 그런데 커피를마시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볼로냐는 로마나 나폴리, 교황령의 지배 아래에서 만족하며지내왔던 옆 동네 로마냐와 달리 생태적으로 기존의 질서에반대하는 반골의 기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라틴어로 자유를뜻하는 ‘리베르타스libertas‘를 부르짖어온 것이 볼로냐의 역사였다.
가까운 로마냐에서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선보인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나온 것과는 매우대조적이다.
볼로냐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의하나다. 문화적, 교육적 여건은 이탈리아 최고 수준이다. 볼로냐가 - P214

‘음악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 미식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이런부와 지적 토양에서 비롯되었다. 볼로냐 같은 도시가 황제와 교황의간섭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저항은볼로냐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볼로냐는 그 저항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1892년 이탈리아 사회당을 창당한 필리포투라티Filippo Turati, 1857~1932는 볼로냐 대학 출신이었다. 1895년총선에서 사회당 의원을 최초로 배출한 지역도 에밀리아와 그 인근지역이었다(당시 로마냐는 에밀리아와 다른 주였다).
볼로냐가 주도인 에밀리아가 ‘좌파의 요새‘라고 불리는 이유는세 가지다. 먼저 이탈리아 사회당이 19세기 말 선거를 통해 의회에최초로 진출한 것은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의 지지 때문이었다. - P215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1917년 혁명으로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볼로냐가 반파시즘 운동의 본산이었을 때부터 볼로냐는 공산당을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볼로냐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에밀리아로마냐를 비롯해토스카나, 마르케, 리구리아 4개의 주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주요정치적 무대로 분류되어 왔다. 이탈리아의 언론은 이 4개 주를지금도 ‘레드 벨트‘라고 부른다.
볼로냐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것은 볼로냐가 중세 때부터 왕이나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주민자치로 운영되던 자유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 P215

볼로냐 성당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다른 지역 성당처럼 비싼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내부에 금을 발라놓은 시칠리아의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궁의 팔라티나 성당 Cappella Palatina은 입장료가무료 20유로다(물론 금박 예수 모자이크 등 볼 만한 것은 많지만 감흥은크지 않았다). 심지어 피렌체의 두오모는 돈을 주고도 들어가기가어렵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끝도 없이 줄을 서야 하기때문이다. 휴가철인 7~8월에 피렌체에 가면 한국인 관광객 팀을하루에도 10여 팀은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만도 이렇게 많이 가는데세계 각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렌체를 찾아올까? "여름에피렌체에 가는 건 바보짓." 이탈리아 친구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또 볼로냐의 성당은 수시로 미사를 해서 항상 많은 사람이 성당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나도 볼로냐 두오모를 자주찾아 기도를 했다. 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이탈리아 친구와 갈 때 빼고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집전되는 미사를 지켜보기만 했다. - P233

성당보다 더 멋진 건 이 성당을 오르는 길이다. 이 성당은 길이3.7킬로미터의 회랑(이탈리아어로는 ‘Portico)으로 볼로냐시내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회랑이란 ‘기둥과 기둥사이로 지붕을 올린 인도나 복도‘를 말한다. 이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긴 회랑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볼로냐인들이 이 긴 회랑을 만든 것은 이 성당의 성화를보러오는 순례자들을 위해서였다. 순례자들이 햇빛을 피하거나 비에젖지 않고 성당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회랑은 볼로냐시민들이 돌과 나무 등 건축 자재를 날라 무려 120년 동안 지었다고한다. 부족한 예산은 부자의 기부를 받았다. - P243

하지만 볼로냐에서는 이런 일을17세기부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를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 아름다운 이타심이놀랍다. 왜 이탈리아인들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가 다른 지역사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친절하다고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부분이다. - P246

물론 언덕 위의 성당으로 가는 산중 회랑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볼로냐 도심에는 가지각색의 회랑이 있다. 여러 사람이 지나갈 만큼넓은 회랑도 있지만, 중심가에서 벗어나면 사람이 어깨를 마주치며지나갈 만큼 좁은 회랑도 있다. 볼로냐 중심가를 남북으로 가르는인디펜덴자 거리와 동서로 가르는 리촐리 거리의 회랑이 가장 넓다. 반대로 동쪽과 남쪽의 볼로냐 대학으로 가는 길의 회랑은 폭이 가장좁다.
나는 볼로냐 도심에서 두 곳의 회랑을 가장 좋아한다. 한 곳은아름답고, 다른 한 곳은 매우 붉다(산 루카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회랑은도심 밖의 회랑이다. 세 곳 모두 볼로냐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
볼로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랑은 마조레 광장에 있는 두 개의탑에서 산토 스테파노 성당Chiesa di Santo Stefano까지 동남쪽으로이어지는 회랑이다. 일단 이곳의 회랑은 다른 회랑에 견줘 두 배 가량높고 넓다. 그리고 회랑의 기둥이 아주 정교한 코린트식으로 되어있다. 길을 따라 이어진 회랑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삼각형 모양의잔디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 끝에 붉은 벽돌로 쌓은 산토 스테파노성당이 있다. - P249

 그들의 관대함은 이방인을 미워하고격리시켰던 그 당시 대부분의 도시와 교회와는 많이 달랐다.
16세기에 로마 교황청은 로마로 들어오는 유대인을 모아 게토에 격리하고 야간 통행을 금지했다. 이런 조치가 금세 사라지기는했지만 교회의 이런 전례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라는 말이있다. 역사나 신화에서 이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성이야기는 참 많다. 그러나 결국 그런 성은 신의 노여움을 사거나 자신보다 탐욕스러운 이웃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볼로냐는이방인을 위해 성문을 열고 길과 회랑을 만들어 도시를 연결하고, 그 회랑을 높은 산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빛의 교회를 세웠다. - P253

볼로냐가 내뿜는 활력의 중심은 의심할 여지없이 볼로냐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은 하버드나 옥스퍼드처럼 넓은 캠퍼스도없고, 기념비적인 건물도 없다. 볼로냐 대학은 왕이나 주교, 혹은선지적 교육자 어느 한 사람의 명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 학생들이모여서 만든 학생조합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대중의 열망이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볼로냐 대학은 고대 그리스와고대 중국의 많은 고등교육기관을 뒤로 하고 ‘모든 대학의 모교‘라는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그 열망대로 중세의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볼로냐 대학이 밝힌 빛 에너지는 법학과 의학에서 비롯되었다. 이빛은 서양인에게 중세의 어둠 속에서 산업혁명과 근대 문명을 일굴수 있는 길을 찾게 해주었다. - P262

이 시대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뿐 아니라 제노바, 피사, 피렌체, 밀라노와 같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볼로냐도 그런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상업과 무역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볼로냐, 피렌체, 제노바등에서 베네치아처럼 시민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공화정을운영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는 자신의자치를 지키고 황제와 교황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장치를 검토하였고, 그중 하나가 법이었다. 로마법은 이미 고대 로마시대에 "황제의 권위는 법에 의해 부여 받는다"고 규정했기때문이었다. - P269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는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철학이 신학에서 분리되는 데 시간이걸렸듯이, 아름다움도 종교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숫자로 생각했던피타고라스 Pythagoras, BC 582?~BC 497? 나, 이데아 외에는 다 가상의세계라고 말했던 플라톤Plato, BC 427?~BC 347? 의 지독한 그림자 탓일지도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커피를 마시며 철학을 종교와 구분했고,
근대가 되면서 철학에서 다시 미학을 떼어냈다. 미학자들이 내린결론은 인간 상반신과 하반신 길이의 비율이 1:1.618 가 되어야한다는 따위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거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정확하게 말하면 편견에 가깝다. 양귀비는석기 시대 유물인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통통했기 때문에 당현종의 눈길을 끌었다. 비슷하게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미의 기준은 지금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다. - P292

거기다 볼로냐 대학 출신이나 볼로냐 주교를 역임했던 사람이자주 교황에 올랐다. 볼로냐 주교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에맞서면서 자정 노력을 위한 반종교 개혁의 거점 도시로 볼로냐를활용했다. 그중의 하나가 볼로냐 여성 화가가 그리는 새로운스타일의 성화였다. 볼로냐에서 많은 여성 화가가 나올 수 있었던것은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들의후원으로 여성 미술학교가 생겨났고, 많은 여성이 화가로 활동할 수있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정치경제학적인 분석도 있다. 캐롤리나머피 Caroline P. Murphy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교황을 포함해 교계의후원을 받았던 볼로냐 여성의 남편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했고, 그성공에 따른 수익을 여성들이 관리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볼로냐여성들이 자신의 활동으로 넓힌 사회적 명성을 이용해 여러 가지 - P310

사업을 벌였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본인들이 관리했다는 것이다.
관점이 어떻든, 볼로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 어떤 지역에 사는여성의 지위보다 높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후원을 받았건혹은 교회에 맞섰건, 볼로냐는 일반적인 중세 사회와는 다른사회였다. 이는 볼로냐의 역사나 예술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전제다.
이렇듯 볼로냐를 뒷받침해준 것은 휴머니즘(인문주의)였다.
그리스에서 만들어 로마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중심의 사고는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다시 시작된곳은 볼로냐였다. 거기다 볼로냐의 인문주의는 새롭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는 없었던 여성 존중과 노예 해방을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볼로냐는 여성에게 인간이 가진 권리를인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1257년 세계 최초로 노예 해방 법안을
"만들어 이를 실현한 곳이기도 하다. 여성과 흑인에 대한 사회적인정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건너간미국인들도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문제였다. 그런데 볼로냐는 이를 13세기에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 P311

볼로냐가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한 이유는 사실 수수께끼다.
인류사를 봤을 때 이런 새로운 생각은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등의거대한 변화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쌓이거나, 모든 것을앗아갈 정도의 대재앙(페스트 혹은 세계대전) 뒤에나 나올 법한 것이다.
그런데 볼로냐는 그런 계기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새로운 생각을발전시켜왔다. 그런 점에서 볼로냐는 참 유별난 곳이다.
사실 볼로냐는 단순히 미녀의 도시가 아니다. 변화를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감함을 지니고 과거의유산을 발전시켜 온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다. - P311

하지만 내가 이탈리아에서 요리유학을 하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내가 기존의 레스토랑 산업에 뛰어들기에는 내 나이가 제법 많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자는시간을 빼고 하루 15시간 계속 주방에 서서 요리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턴을 하면서 나의 체중이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졌다. 내 목이 그렇게 길다는 것을 이탈리아에서 처음 알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요리는 너무도 즐거웠지만 쉰이라는 나이는 그 즐거움에 혹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나이 오십은 귀가순해진다는 이순이라더니 나는 비로소 운명의 속삭임을 수긍하기시작했다. 혹시 레스토랑을 연다며 가뜩이나 없는 살림을 거덜낼까봐 두려워하던 아내는 나의 이런 변화에 "철들었다"며 반겼다 - P315

무엇보다도 와인은 맛이 있었다. 바디감이 단단할수록 안주는역시 눅진해야 했다. 고기 자체에 향기가 있는 양고기나 야생 고기와탄닌이 강한 와인은 놀라운 조화를 선보였다. 치즈나 빵 조각을 놓고레드 와인을 음미하려고 잔을 열심히 돌리는 짓을 이탈리아에서는하지 않아도 되었다. 화이트 와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마시면맹탕인 피노 그리지오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먹으면 완전히 다른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한 잔 두 잔 기울이다와인에 빠졌다. 징용살이 같았던 인턴이 끝난 뒤, 나는 자유를만끽하며 여러 곳의 와이너리를 돌았다. 이 때 나의 막연했던 생각은더욱 가닥을 잡았다. 아직 어떻게 이탈리아 와인을 한국에서풀어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일주일에 2~3일만저녁에 문을 여는 서퍼supper 클럽이나 이탈리아 와인만을 소개하는 와인 클래스를 열어볼 생각도 해본다. 와인수입법인이나 소매상을 해보는 것도 고민 중이다. - P316

나는 한국에 와서도 스스로를 볼로네제라고 부를 정도로 볼로냐에푹 빠졌다. 체류 기간 내내 나에게 윙크를 해주었던 많은 볼로냐의멋진 아가씨들의 때문일 수도 있고, 입에 삼삼한 볼로네제 파스타와프로슈토 덕분일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이탈리아를 가는 지인들에게 볼로냐를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어떤 이들은 볼로냐를 다녀와 나에게고맙다고도 말했지만 어떤 이는 내 말과 달리 볼로냐에는 볼 게없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심지어 볼로네제 파스타가 미국식미트볼 파스타보다 맛이 없다는 이도 있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건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어쩌면 나의 볼로냐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볼로냐에 가봤더니 책에서 말한것과 달리 별로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도한다. - P317

나는 역사가 전진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유감스럽게도 그 전진을 감격스럽게 느껴본 적은 드물었다. 그런감정은 그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공허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유도시 볼로냐의 광장에 섰을 때 느껴지는 공기는 전혀달랐다. - P317

시민들이 손을 잡고 교황과 황제에 맞서 자유를 얻어냈던 이도시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 참 특별했다. 시민들이 왕을 쫓아내고자치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의 깃발에 ‘자유‘라는 단어를새겨넣었다. 또 학생들은 스스로 대학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들은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멋진 이름을 대학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공동체는 알프스 바깥의 이방인은 물론이고 여성들까지 받아들였다.
비슷한 시기 남녀유별을 하늘의 섭리인양 외쳤던 수많은 지역과달리 볼로냐는 분명 독보적인 도시였다.
작은 도시인 볼로냐가 어떻게 이런 성취를 이루었는지는나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볼로냐는 왕이나신이 아니라 사람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인간 한 명 한명이 위대한 소우주며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 P318

그렇지않았다면 왕이나 교황을 부정하며 그들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볼로냐 사람들은 그공동체에서 서로를 믿으며 서로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다. 가난한자나 여성이나 이방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도시, 대학,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협동조합까지볼로네제들이 어깨를 걸고 함께 만든 성취는 그 크기를 떠나서아름답다. 그리고 그 성취가 몽롱한 단어로 가득한 책들이 아니라와인과 살루미와 치즈와 파스타 같은 일상의 음식으로 느낄 수있다는 것이 좋았다. 앎과 행함이 나란히 누워있는 볼로냐식 한 접시요리는 나에게는 늘 영감을 준다. 반백의 나이에 요리유학을 떠나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볼로냐에서 새로운 길을보았고 볼로냐에서 다시 그 길을 시작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코로나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 P318

이탈리아와의 하늘길이 열리면 모교인 ICIF에 가서, 나의 와인 선생님인 에지오를비롯해 나의 스승이자 인턴 레스토랑의 셰프인 프랑코 그리고 나에게 볼로냐행을 권해주었던 제빵과정 동기인 부르노 등의 지인들을 만나 와인과 관련한 나의 구상을 물어볼 계획이다.
하지만 볼로냐를 소개한 이 책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건네야할지는 좀 난감하긴 하다. "너는 피에몬테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웠는데 볼로냐 책부터 쓰냐"라는 지청구는 피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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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는 마법 같은 음식이다. 이 세상에 치즈를 넣어서 맛없는 음식은없다. 심지어 우리는 라면이나 떡볶이, 김밥 같은 우리 음식에도치즈를 넣어먹는다. 치즈는 영양과 맛의 덩어리여서 우리 몸은치즈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밥과 빵이 농경 문화의 정수라면, 치즈는 유목 문화의 정수다.
치즈는 동물의 젖을 가열해 멀건 유청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양분인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을 굳힌 뒤 미생물에 의해 발효시켜서 먹는음식이다. 인간을 비롯해 포유류가 태어나서 얼마 동안 어머니의것으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는 점을 떠올려보면, 치즈가 가진영양가에 필적할 만한 음식은 없을 것 같다. - P131

이탈리아를 종단해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내 말에 수긍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많은 문필가들은 알프스와 아펜니노산맥 그리고아드리아해에 둘러싸인 파다노 평원 지대를 ‘벨파에제 Bel Pacse",
우리말로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했다. 단테의 《신곡》에 처음등장했던 이 말은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유럽의 상징은 높은 알프스나 푸른 지중해가 아니라 광활하게펼쳐진 평야다. 지금도 유럽연합은 밀 생산량 세계 1위다. 여기에세계 3위의 밀 생산국인 러시아까지 합친다면 유럽은 ‘밀의땅‘이다(밀 생산량 2위는 중국이다). 이탈리아에서 광활한 평원의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파다노 평원뿐이다.
중부인 로마를 지나 이탈리아 남부로 가면 이탈리아 반도의등줄기를 형성하는 아펜니노산맥 탓에 이런 대평원은 만나기가 힘들다. - P134

재미있는 점은 이 넉넉한 대평원의 남과 북에서 각각 비슷한치즈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북쪽의 그라노 파다노grano padano와 남쪽의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다. 공정에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만드는법도, 생긴 것도, 맛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포강 남쪽에서생산되는 파르미지아노가 좀 더 가격이 비싸고, 이탈리아 내에서는좀 더 많이 팔린다. 이 치즈는 프로슈토처럼 이탈리아를 상징하는음식 중 하나다. 와인을 제외한 이탈리아 농산품 가운데 가장 많이수출하는 것이 치즈다. 2019년 기준으로 치즈가 농산물 수출에서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4퍼센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수출하는것이 그라노 파다노다(파르미지아노는 좀 더 고가이기 때문에 수출량은2위지만 이탈리아 내수 판매량은 1위다. 두 치즈의 수출량 차이는 미미하다).
재미있게도 이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가음식에서라면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 프랑스다. 치즈에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도 이탈리아 치즈를 인정한다는의미가 아닐까 싶다. - P135

치즈를 만드는 것도, 치즈를 점검하는 것도, 심지어 치즈를잘라내 파는 것도 모두 수작업이었다. 이 경성 치즈를 처음 만들기시작한 곳은 10세기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수도사들은 양젖으로 만드는 페코리노 치즈의 제조법을 우유에적용했고, 그렇게 탄생한 이 치즈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치즈가 되었다.
지금도 이 치즈를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은 1,000년 전수도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고집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수작업으로 일관하다가 마지막 과정에서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하는반전을 보여준다. 이 치즈에는 과거의 전통과 미래의 기술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슬로푸드라는 지속가능한 테마까지 입혀져있어 매력을 더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멋진 명분이자 지갑을 열게하는 귀신같은 마케팅이다. - P143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그 다음이 미국이다. 한번은 미국 여성 두 명이나보다 앞서 이 가게에서 치즈를 사갔다. 이곳에서는 치즈를덩어리째가 아니라 쪼개 팔아서, 10유로 정도면 굉장히 푸짐하게 살수 있다. 다만 치즈를 살 때는 몇 년 숙성 제품을 달라고 꼭 말해야한다. 숙성 정도에 따라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파스타에 뿌려먹는 것은 부드러운 1년산을, 샐러드 등 치즈맛을 입히는 요리에는 2년산을, 와인 안주로는 3년산 치즈를 쓰는것이 좋다. 심지어 5년 이상 숙성된 것도 판다. 치즈는 숙성 기간이길수록 수분이 빠지고 아미노산이 응축된다. 이런 성분들이미생물에 의해 발효되면서 다채로운 풍미가 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구분하지 못하면 볼로냐에서는 촌놈 취급을 받는다. 아니이탈리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촌놈이 되고 만다. - P151

① 우리는 소에게 건초와 풀만 먹인다.
② 우리는 우유에 어떤 비자연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오직 우유만을 사용한다.
③ 우리는 최소 12개월을 숙성한다(참고로 그라노 파다노는 최소9개월을 숙성해 출하한다)."
그들이 이렇게 멋진 고집을 부리는 근거는 상당히 과학적이다.
옥수수나 사료가 아니라 풀로 소를 키워야 조상들이 먹던 치즈와똑같은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자라는 같은 풀을먹어야 우유에 동일한 미생물이 생긴다는 게 그들의 근거다. 그들은자기 고장에서 생산하는 치즈 맛의 기원이 토양에서 자라는미생물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유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저온살균해 응고시킨 뒤, 형태를 만들어 오랫동안 숙성하는 것이다. - P156

이런 고집 덕분인지 이 지역 파르미지아노의 금전적 가치는굉장히 높은 편이다. 이 치즈는 40킬로그램 한 통(숙성 과정에서수분이 빠져나가고 아미노산이 응축되어 무게가 줄어든다)에 우리 돈으로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와 비슷한 가격이다.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도 엉망이고, 실업률도PIGS(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는나라를 말한다)와 함께 유럽 최고이고, 철도나 버스가 툭하면 다니지않아도 늘 웃음을 머금는 이유를 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여기는이탈리아야Siamo in Titalia." 이들이 왜 짜증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렇게외치며 짐짓 여유를 부리는지 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은 - P156

하늘, 중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예스러운 거리와 집들, 그리고맛있는 음식들. 이 모든 것에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여유가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너희가 잘살면 얼마나 잘살아? 우리도 예전에잘살았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허세 아닌 허세가 이탈리아에서지내다 보면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때 그들의 부유했던 영광은 파르미지아노 같은 그들의 먹거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탈리아 치즈 맛에 겨우 감을 잡았을 때, 쉰이라는 나이에 음식을 공부하겠다고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때려치우고 20대젊은이들 틈에서 요리를 배운 나의 결정이 아주 잘못된 것은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치즈 덕에 나는 한발 더 나아갈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에서이탈리아의 치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우리의 식재료, 간장과 된장그리고 두부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157

우리나라의 간장, 된장, 두부의 종류와 맛은 서양의치즈만큼이나 오랜 역사와 다채로움을 지녔다. 된장만 놓고 보아도
‘옻된장, 겨된장, 담북장, 청국장‘ 등 종류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방방곡곡 색다른 지역된장의 제조법과 맛에 대한 표준화와세분화는 이탈리아의 기준에서 보면 많이 부족하다. 각 지방의된장을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만드는 노력도 부족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캔에 든 미국산 파르메산 치즈를 내미는 레스토랑을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파랑새는 집 안에 있다." 이탈리아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맛의 파랑새‘는 반백이 넘은 나를 또 다른 길로 안내할지도 모른다. - P157

이미 앞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심각한 볼로냐빠다. 한국에돌아와서도 나는 나를 서슴없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이라는 뜻)라고말하곤 한다. 내가 졸업한 ICIF는 피에몬테주 아스티에 있었는데, 정작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볼로냐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볼로냐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있었다. 바로 볼로냐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 람브루스코 Lambrusco다.
이름은 전에도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이 와인을 마셔본 것은볼로냐에 와서였다. 그런데 볼로냐에 있을 때 나는 이 와인을 세 번쯤마셔보고 다시는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에밀리아의 람브루스코대신 옆 동네인 로마냐의 산지오베제 Sangiovese를 즐겨 마셨다.
로마냐의 산지오베제는 내가 좋아하는 베리 맛이 풍부하고, 탄닌이약간 있어 이탈리아 요리와 잘 맞았다. 거기에 토스카나의산지오베제에 견줘 값도 착했다. - P159

그렇게 내가 마셨던 이탈리아 와인을 정리하면서 볼로냐에서 나를당황하게 했던 람브루스코에 대해서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나는 비로소 이 와인의 저력을 알게 되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오히려 그 와인이 지나온 역사의 무게에서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에몬테의 네비올로가 혀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로쏘가 마음으로 마시는 와인이라면 람브루스코는 머리로 마셔야 하는 와인이었다.
포도의 원산지는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다. 포도와 포도주는중동을 거쳐 페니키아인 혹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유럽으로전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 포도주가 처음 들어온지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던 이탈리아 남부나 그리스와 중동과활발히 교역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이 살던 이탈리아 서쪽 지역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나 칼라브리아Calabria 등에 그리스란 뜻의이탈리아어인 ‘그레코Greeo‘가 붙은 포도 품종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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