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들이 일하는 방식도 언론인과 다르지 않다. 역사가 각자나름의 개성과 취향이 있고 서로 다른 욕망과 감정에 끌리며 저마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사실 가운데 자신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한다. 사실의 선택과 선택한 사실의 해석, 역사 서술의 핵심인 두 가지가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를 둘러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역사 중에서도 현대사는 특별히 민감하다.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죽고 없더라도 그들의 행위로인해 억울하게 고통을 겪었거나 정당한 또는 부당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살아 있다. 우리는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한민국의 역대대통령과 그들이 한 행위에 대해 강한 호불호의 감정을 느낀다. 그들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왕처럼 느긋하게 대하지 못한다. - P9
현대사 논쟁은 고대사나 중세사 논쟁과 달리 격렬한 감정의 표출과 정치적 대립을 동반한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고구려를 멸망시킨신라의 행위가 민족적 배신이었다거나, 낙화암의 삼천궁녀 이야기는백제 의자왕을 도덕적으로 매도하기 위해 신라의 권력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누군가 주장한다고 해서 드잡이를 하지는 않는다. 이미1,500년 세월이 흐른 사건이어서 무엇을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 현재의 삶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한 위대한 지도자였다거나, 박정희대통령이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킨 덕분에 우리가 오늘날 이만큼의 민주주의를 누리게 되었다거나, 전두환 장군이 국가적 혼란을수습했기에 적화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거나, 남북정상회담을 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북한과 내통한 빨갱이였다거나,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우리나라를 환경선진국으로 발돋움시킨쾌거였다고 말한다면 술자리에서 격한 주먹다짐이 벌어질 수 있다. - P10
삶에서 안전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감당할 만한 가치가 있는위험을 감수하는 인생도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마음으로 내가 보고 겪고 참여했던 대한민국현대사를 썼다. 1959년부터 2014년까지 55년을 다루었으니, ‘현대사‘ 보다는 ‘현재사‘現在史 또는 ‘당대사가 더 적합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냉정한 관찰자가 아니라 번민하는 당사자로서 우리 세대가 살았던 역사를 돌아보았다. 없는 것을 지어내거나 사실을 왜곡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들을 선택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로 묶어 해석할 권리는 만인에게 주어져있다. 나는 이 권리를 소신껏 행사했다. - P11
내가 한국현대사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오로지 빛나는승리와 영광의 기록이어서가 아니다. 그런 역사는 어디에도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모든 역사에는 명암이 있다. 우리의 현대사도 빛과어둠이 뒤섞여 있다. 그 역사를 정직하게 대면하려면 당위爲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훌륭한 이상국가 또는 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외국에 견주어 우리의 현대사를 본다. 더 훌륭한 대상을 보고 배우려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남과 비교하는 데 너무 집착하면 우리 역사의 어둡고 수치스러운 장면만 주로 보이기 때문에 자칫 ‘자학적 역사인식‘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공자, 예수, 석가모니처럼 훌륭한 인간이 되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보다 못하다고 해서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닐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가 반드시 훌륭해야만 한다는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현대사의 밝고 자랑스러운 장면만을 보려고 한다. 자신을 긍정하고 자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다. - P12
우리는 훌륭한 인간을 존경하며 훌륭한 역사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데 훌륭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훌륭함은 아무 오류가 없는완전무결함이나 지고지선의 경지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이 만드는 역사도 거기에는 도달할 수없다. 우리는 다만 그런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어떤 사회가 추하고 불합리하며 저열한 상태에서 완전하지는 않지만더 아름답고 합리적이며 고결한 상태로 변화했다면, 그 과정을 기록한 역사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한민국현대사 55년이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역사라고 생각한다. 2014년의 대한민국은 결코 완벽하고 훌륭한 사회가 아니다. 수치심과 분노, 슬픔과 아픔을 느끼게 하는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1959년의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훌륭하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 점이 55년 전보다 훌륭한가? 무엇이 그 변화를 만들었는가? 어떤 면이 아직도 부끄럽고 추악하며 앞으로 우리는 어떤 변화를 더 이룰 수 있을까?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 P13
경제권력과 언론권력 등 사회의 다른 모든 권력은 언제나 산업화세력의 수중에 있었다. 민주화세력을 지지하는 시민들은그 10년에 대해 깊은 불만과 짙은 그리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한국현대사는 이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때로 피가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가까운 미래에 종결될 가능성도 없다. 대중이 둘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과 그들이 대표하는 두 시대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과연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는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시대와 김대중·노무현의시대를 거쳐 여기까지 왔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해야 한다. 이것이 온전한 역사인식과 현실인식일 수는 없다. - P26
색깔과 모양이 크게 다른 두 시대는 국민들의 내면에 이미 자리를잡고 있다. 이 현상은 2012년 대선뿐만 아니라 과거 대통령들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을 산업화세력으로 분류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원래 민주화세력에 속했지만 산업화세력의 품에서대통령직을 수행한 만큼 그쪽에 넣어야 한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민주화세력으로 분류하자. 2014년 현재 국민들의 전직 대통령 선호도는 둘로 팽팽하게 나뉘어 있다. * 40대 이하에서는 노무현과 김대중의 합이 압도적으로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박정희와 박근혜의 합이 훨씬 높다. 지역별·연령별 호감도 분포는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박근혜·문재인 후보 지지도 분포와 거의 비슷하다. - P26
나 자신은 부끄러움과 분노, 긍지와 설렘처럼 상충하는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대한민국은 ‘흉하면서 아름다운 나라‘다. 우리의 현대사가 영광과 승리의 역사라는 주장과 불의와 오욕의 역사라는 주장은 둘 다 옳다. 하지만 절반만 옳을 뿐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지 않는 역사는 없다. 인간 자체가 둘 모두를 가진 존재일진대 역사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드높이 들어야 할 빛이 있고 그 빛으로 인해 차츰 사라져갈 어둠이 있기에, 민족의 역사도 우리들의 인생도 의미를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주관적인 기록이다. 누가 쓴 어떤 역사도과거를 원래 그러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현재‘는 가상적인개념일 뿐이다. 현재의 모든 사실은 발생과 동시에 과거가 된다. 과거는 거대한 임시수용소와 같다. 흐르는 시간에 실려와 퇴적된 모든사실이 그곳에서 망각과 소멸의 운명을 기다린다. - P28
사실 자체에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그래서 같은 시대에 대해 100명의 역사가는 100가지의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 있다. 하나의 시대에 대해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역사를 쓸 수도 있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객관적인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믿는 것은순진한 착각일 뿐이다. 사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 역사가가 허락할 때만 말을 한다. 역사가는 제멋대로 사실을 만들거나 바꿀 수 없지만 사실의 노예인 것도 아니다. 사실과 역사가는 평등한 관계에서서로를 필요로 한다. 자기의 사실을 가지지 않은 역사가는 뿌리 없는풀과 같고 자기의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죽은 것이다.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들의 지속적 상호작용이다.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학위를 받은 전문 역사연구자가 쓴 민족사에서부터 평범한 시민이 쓴소박한 개인사까지 다 마찬가지다. 역사는 어떤 사실을 선택해서 어떤 관계를 맺어주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P29
대한민국의 오늘과 55년 전을 비교할 때 느끼는 압도적 감정은 ‘놀라움‘이다. 우리의 삶은 거의 모든 면에서 확연하게 달라졌다. 그것은 양의 변화를 넘어선 질적 전환이었으며 기적에 가까운 변신이었다. 모든 것이 다 좋게 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은 분명하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동학學, dynamics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사건과 상태의 변화를 추적해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정학, statics을 활용할 수 있다. 1959년과2014년의 대한민국의 단면을 잘라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고 어떤 힘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해 그 변화를 만들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 일어날 변화를 예측해볼 수도 있다. 경제학에서 흔히 쓰는 연구방법인 비교정학比較學, comparative statics을 역사 서술에 응용해보았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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