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힘이 있을 때는 이러한 순환이 가능했다. 속주 역시식량이 빠듯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전쟁 기계‘ 로마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가 흔들리면서 속주는 로마에 식량이나세금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고, 무리한 세금 요구와 재정 악화의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게르만족이 밀려 들어오면서 로마는속절없이 무너졌다. 만약 로마가 포도와 밀의 황금 비율을 적절하게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로마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 P171

카토는 평민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공을 세워집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유명했으며, 특히 로마 귀족들의 사치와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다. 우리나라로치면 막걸리에 김치 안주를 즐기는 안빈낙도형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농업이 도덕적 가치를 놓고 볼 때 고리 대금이나 무역보다분명히 바람직하다"며 "농민은 유일하게 좋은 시민으로 높이평가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 P171

받았다.
중세 이탈리아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나그네가 선량해보이는 농민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농민은 화를내며 "왜 하필담장과 기둥마저 썩게 하는 천한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좋은포도주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지만 물은 못 드립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 요청해도 절대주지 않는 건 이런 이유다.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시키지 않는다면대신 탄산수나 생수라도 시켜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달라고 하는 것은 그 식당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옛날에는 와인의 가격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다. 지금의 독일맥주의 가격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듯하다. 지금까지 전해져오는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의 지출 기록을 보면, 수도원은 미사에 쓰고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 값보다 밀가루 값에 더 많은 돈을 썼다. - P173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와인의 맛뿐 아니라 이야기를 풍부하게만든다. 협동조합의 진짜 매력은 실제론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농민이 보유한 와이너리 면적은 평균 2헥타트로 프랑스(11헥타르)는물론 호주(25헥타르), 미국(27헥타르) 등보다 훨씬 작다. 이렇게 작은와이너리는 와인 맛에 대한 연구 개발은커녕, 독자적인 마케팅을시도하기도 어렵다. 규모가 작은 와이너리가 도태되기 쉬운 이유다.
미국, 영국 등에서 산업혁명 이후 현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왔던농촌의 현실이 사실 그렇다. 산업혁명 이후 농민들은 거대 자본은물론, 심지어는 양들에게까지 밀려나 토지를 잃어버리고 도시의하층민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서 지금도똑같이 진행 중이다. - P186

하지만 협동조합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농민에게 선물했다.
조합원이 된 농민은 단순히 포도나 와인을 거대 유통업자나 주류제조사에 넘기는 가난한 생산자가 아니라 조합의 결정에 1인 1표를행사하는 경영자다. 또 조합원은 해마다 작황과 상관없이 정해진가격으로 포도를 공급할 수 있어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농장을경영할 수 있다. 게다가 조합원의 생산물 판매가는 비조합원의판매가보다 평균 20퍼센트 가량 높다. 물론 손실이 날 경우에는조합원이 이를 부담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홀로 경영할 때보다는드물다. 이런 특혜 덕분에 소규모 포도밭에서 포도를 키우는 많은생산자가 조상 때부터 키워오던 고유의 품종을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밀려 들어오는 외국산 저가 와인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 P186

람브루스코의 색깔은 어떤 와인의 색보다 짙다. 거의 보랏빛에 가깝다. 그리고 잔잔하고 달디단 거품이 인다. 이 와인에는 프로슈토와 모르타넬라 한 점을 얹은 치아바타나 혹은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를 잔뜩 얹은 볼로네제 파스타가안성맞춤이다. 이런 맛있는 음식과 멋진 와인은 혼자 즐기기보다는여러 명이 함께 먹고 마셔야 제격이다.
볼로냐에서는 음식도 와인도 가격이 저렴해 도심 곳곳의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볼수 있다. 관광객인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 같기도 한 사람들은푸짐하고 맛있는 볼로냐식 마른안주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왁자지껄먹고 마신다. 나도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볼로냐 광장에서 그들처럼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람브루스코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람브루스코는 혼자서 마시는 와인이 아니라 볼로냐 사람들처럼어깨를 걸고 신나게 마셔야 하는 와인이다. - P189

나처럼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던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뭐든 조심스럽다. ‘아, 이게 될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검열하는 값싼알고리즘이 대학을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작동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마르크스나 레닌 혹은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을 가지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처벌될 수 있었다. 많은 선배가 집에 그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이유로 입건되었고 운이 나쁘면 재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런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그 생각을 추종하고 사회에 위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마당시의 정치인이나 공안 당국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양심의 자유에 배치되는 국가보안법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더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제는 패배한 과거가 되어버린 ‘공산주의‘를인류 보편에 입각해 생각해보려 해도, 아직까지 그 말을 들으면 몸이경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 P191

이 광장의 벽에는 늘 공산당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이매번 바뀌는데 내가 가 있을 때는 중국 인민복을 입은 공산당원이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옆으로는 대자보와구호가 붙어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를 보는 듯한 착각이들었다.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이 사회적 이슈로 시위를 하는 게 매우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볼로냐에 머물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볼로냐 대학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이슈로 자주 시위를 한다. 심지어도서관 등에서 점거 농성에 들어가서 학생들이 강의실을 옮기거나 시내의 다른 도서관으로 흩어지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 P194

그런데 이후에 머문 볼로냐에서는 책을 펼칠 공간을 찾으러 다닐필요가 없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볼로냐 도서관에서 대출증을바로 발급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갔을 때 나는 여권도 없고,
휴대폰 배터리도 나가서 신원을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친절한 직원은 내 이메일 주소만 받고 대출증을 발급해주었다. 하나더 놀란 것은 이 도서관의 대출 전산 시스템에 한글 서비스가 있었다.
"비바 볼로냐(볼로냐 만세)." 이탈리아의 공공 서비스는 종종 사람을속 터지게 만드는데, 볼로냐는 내 이런 울분을 토닥거려준 이탈리아유일의 도시였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토리노와 팔레르모의 도서관과는 전혀다른 개방성이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도서관의 직원은 대출을원하는 나에게 "여기는 이 도시에 세금을 내는 이탈리아인만 이용할수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토리노는 여권만 있으면 대출증을 만들수는 있지만 출입증 소지자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도시의도서관에 견줘 볼로냐의 도서관 시스템은 탁월했다. - P197

재미있게도 역사적으로 커피가 퍼진 곳에서는 기존의 관습을거부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유럽보다 앞서 커피를 적극적으로받아들인 곳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처음에는 이슬람에서도 커피를금지했다. 하지만 이후 이슬람에서는 술 대신 커피 정도는 받아들일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알코올을 카페인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이슬람의 와인‘으로 불리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 변화를가져왔다. 이슬람은 커피를 즐기면서 9세기에 이미 종교와 철학을분리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받아들여 신학과 철학의 진리가 각각의 영역임을 논증했다.
이슬람에서 철학의 독립은 사회과학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이는정치가 종교로부터의 독립하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런유연한 사고방식 덕분에 아랍에서는 수학, 과학, 의학 등 새로운 학문이 쏟아져 나왔다. - P202

이 시기에 커피는 영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커피는 그들에게 맥주나 진을 대신하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다. 커피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장을 영국에 선물했는데, 바로 커피를 마시는 커피하우스였다. 커피하우스는처음에는 옥스퍼드 등 대학가에 먼저 생겨났다. 그리고 커피의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 같은 대도시로도커피하우스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런던의 커피하우스에는해운업자, 무역업자, 금융가 같은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수나 과학자, 변호사, 정치가, 예술인 등 다양한 직업을가진 사람들이 출입했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늘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신분이나 재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계급장을 떼고 만나 서로 배우는 자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커피하우스를 커피값 1~2페니만 가지고도 세상을 배울 수 있는곳이라며, ‘페니 대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여성들은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커피하우스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을 내기도했다. - P205

볼로냐에는 권력자의 시선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커피와 대학이모두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 된다. 그런데 커피를마시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볼로냐는 로마나 나폴리, 교황령의 지배 아래에서 만족하며지내왔던 옆 동네 로마냐와 달리 생태적으로 기존의 질서에반대하는 반골의 기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라틴어로 자유를뜻하는 ‘리베르타스libertas‘를 부르짖어온 것이 볼로냐의 역사였다.
가까운 로마냐에서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선보인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나온 것과는 매우대조적이다.
볼로냐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의하나다. 문화적, 교육적 여건은 이탈리아 최고 수준이다. 볼로냐가 - P214

‘음악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 미식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이런부와 지적 토양에서 비롯되었다. 볼로냐 같은 도시가 황제와 교황의간섭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저항은볼로냐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볼로냐는 그 저항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1892년 이탈리아 사회당을 창당한 필리포투라티Filippo Turati, 1857~1932는 볼로냐 대학 출신이었다. 1895년총선에서 사회당 의원을 최초로 배출한 지역도 에밀리아와 그 인근지역이었다(당시 로마냐는 에밀리아와 다른 주였다).
볼로냐가 주도인 에밀리아가 ‘좌파의 요새‘라고 불리는 이유는세 가지다. 먼저 이탈리아 사회당이 19세기 말 선거를 통해 의회에최초로 진출한 것은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의 지지 때문이었다. - P215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1917년 혁명으로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볼로냐가 반파시즘 운동의 본산이었을 때부터 볼로냐는 공산당을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볼로냐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에밀리아로마냐를 비롯해토스카나, 마르케, 리구리아 4개의 주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주요정치적 무대로 분류되어 왔다. 이탈리아의 언론은 이 4개 주를지금도 ‘레드 벨트‘라고 부른다.
볼로냐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것은 볼로냐가 중세 때부터 왕이나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주민자치로 운영되던 자유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 P215

볼로냐 성당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다른 지역 성당처럼 비싼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내부에 금을 발라놓은 시칠리아의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궁의 팔라티나 성당 Cappella Palatina은 입장료가무료 20유로다(물론 금박 예수 모자이크 등 볼 만한 것은 많지만 감흥은크지 않았다). 심지어 피렌체의 두오모는 돈을 주고도 들어가기가어렵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끝도 없이 줄을 서야 하기때문이다. 휴가철인 7~8월에 피렌체에 가면 한국인 관광객 팀을하루에도 10여 팀은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만도 이렇게 많이 가는데세계 각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렌체를 찾아올까? "여름에피렌체에 가는 건 바보짓." 이탈리아 친구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또 볼로냐의 성당은 수시로 미사를 해서 항상 많은 사람이 성당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나도 볼로냐 두오모를 자주찾아 기도를 했다. 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이탈리아 친구와 갈 때 빼고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집전되는 미사를 지켜보기만 했다. - P233

성당보다 더 멋진 건 이 성당을 오르는 길이다. 이 성당은 길이3.7킬로미터의 회랑(이탈리아어로는 ‘Portico)으로 볼로냐시내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회랑이란 ‘기둥과 기둥사이로 지붕을 올린 인도나 복도‘를 말한다. 이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긴 회랑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볼로냐인들이 이 긴 회랑을 만든 것은 이 성당의 성화를보러오는 순례자들을 위해서였다. 순례자들이 햇빛을 피하거나 비에젖지 않고 성당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회랑은 볼로냐시민들이 돌과 나무 등 건축 자재를 날라 무려 120년 동안 지었다고한다. 부족한 예산은 부자의 기부를 받았다. - P243

하지만 볼로냐에서는 이런 일을17세기부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를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 아름다운 이타심이놀랍다. 왜 이탈리아인들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가 다른 지역사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친절하다고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부분이다. - P246

물론 언덕 위의 성당으로 가는 산중 회랑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볼로냐 도심에는 가지각색의 회랑이 있다. 여러 사람이 지나갈 만큼넓은 회랑도 있지만, 중심가에서 벗어나면 사람이 어깨를 마주치며지나갈 만큼 좁은 회랑도 있다. 볼로냐 중심가를 남북으로 가르는인디펜덴자 거리와 동서로 가르는 리촐리 거리의 회랑이 가장 넓다. 반대로 동쪽과 남쪽의 볼로냐 대학으로 가는 길의 회랑은 폭이 가장좁다.
나는 볼로냐 도심에서 두 곳의 회랑을 가장 좋아한다. 한 곳은아름답고, 다른 한 곳은 매우 붉다(산 루카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회랑은도심 밖의 회랑이다. 세 곳 모두 볼로냐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
볼로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랑은 마조레 광장에 있는 두 개의탑에서 산토 스테파노 성당Chiesa di Santo Stefano까지 동남쪽으로이어지는 회랑이다. 일단 이곳의 회랑은 다른 회랑에 견줘 두 배 가량높고 넓다. 그리고 회랑의 기둥이 아주 정교한 코린트식으로 되어있다. 길을 따라 이어진 회랑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삼각형 모양의잔디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 끝에 붉은 벽돌로 쌓은 산토 스테파노성당이 있다. - P249

 그들의 관대함은 이방인을 미워하고격리시켰던 그 당시 대부분의 도시와 교회와는 많이 달랐다.
16세기에 로마 교황청은 로마로 들어오는 유대인을 모아 게토에 격리하고 야간 통행을 금지했다. 이런 조치가 금세 사라지기는했지만 교회의 이런 전례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라는 말이있다. 역사나 신화에서 이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성이야기는 참 많다. 그러나 결국 그런 성은 신의 노여움을 사거나 자신보다 탐욕스러운 이웃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볼로냐는이방인을 위해 성문을 열고 길과 회랑을 만들어 도시를 연결하고, 그 회랑을 높은 산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빛의 교회를 세웠다. - P253

볼로냐가 내뿜는 활력의 중심은 의심할 여지없이 볼로냐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은 하버드나 옥스퍼드처럼 넓은 캠퍼스도없고, 기념비적인 건물도 없다. 볼로냐 대학은 왕이나 주교, 혹은선지적 교육자 어느 한 사람의 명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 학생들이모여서 만든 학생조합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대중의 열망이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볼로냐 대학은 고대 그리스와고대 중국의 많은 고등교육기관을 뒤로 하고 ‘모든 대학의 모교‘라는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그 열망대로 중세의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볼로냐 대학이 밝힌 빛 에너지는 법학과 의학에서 비롯되었다. 이빛은 서양인에게 중세의 어둠 속에서 산업혁명과 근대 문명을 일굴수 있는 길을 찾게 해주었다. - P262

이 시대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뿐 아니라 제노바, 피사, 피렌체, 밀라노와 같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볼로냐도 그런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상업과 무역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볼로냐, 피렌체, 제노바등에서 베네치아처럼 시민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공화정을운영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는 자신의자치를 지키고 황제와 교황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장치를 검토하였고, 그중 하나가 법이었다. 로마법은 이미 고대 로마시대에 "황제의 권위는 법에 의해 부여 받는다"고 규정했기때문이었다. - P269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는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철학이 신학에서 분리되는 데 시간이걸렸듯이, 아름다움도 종교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숫자로 생각했던피타고라스 Pythagoras, BC 582?~BC 497? 나, 이데아 외에는 다 가상의세계라고 말했던 플라톤Plato, BC 427?~BC 347? 의 지독한 그림자 탓일지도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커피를 마시며 철학을 종교와 구분했고,
근대가 되면서 철학에서 다시 미학을 떼어냈다. 미학자들이 내린결론은 인간 상반신과 하반신 길이의 비율이 1:1.618 가 되어야한다는 따위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거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정확하게 말하면 편견에 가깝다. 양귀비는석기 시대 유물인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통통했기 때문에 당현종의 눈길을 끌었다. 비슷하게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미의 기준은 지금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다. - P292

거기다 볼로냐 대학 출신이나 볼로냐 주교를 역임했던 사람이자주 교황에 올랐다. 볼로냐 주교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에맞서면서 자정 노력을 위한 반종교 개혁의 거점 도시로 볼로냐를활용했다. 그중의 하나가 볼로냐 여성 화가가 그리는 새로운스타일의 성화였다. 볼로냐에서 많은 여성 화가가 나올 수 있었던것은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들의후원으로 여성 미술학교가 생겨났고, 많은 여성이 화가로 활동할 수있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정치경제학적인 분석도 있다. 캐롤리나머피 Caroline P. Murphy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교황을 포함해 교계의후원을 받았던 볼로냐 여성의 남편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했고, 그성공에 따른 수익을 여성들이 관리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볼로냐여성들이 자신의 활동으로 넓힌 사회적 명성을 이용해 여러 가지 - P310

사업을 벌였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본인들이 관리했다는 것이다.
관점이 어떻든, 볼로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 어떤 지역에 사는여성의 지위보다 높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후원을 받았건혹은 교회에 맞섰건, 볼로냐는 일반적인 중세 사회와는 다른사회였다. 이는 볼로냐의 역사나 예술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전제다.
이렇듯 볼로냐를 뒷받침해준 것은 휴머니즘(인문주의)였다.
그리스에서 만들어 로마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중심의 사고는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다시 시작된곳은 볼로냐였다. 거기다 볼로냐의 인문주의는 새롭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는 없었던 여성 존중과 노예 해방을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볼로냐는 여성에게 인간이 가진 권리를인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1257년 세계 최초로 노예 해방 법안을
"만들어 이를 실현한 곳이기도 하다. 여성과 흑인에 대한 사회적인정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건너간미국인들도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문제였다. 그런데 볼로냐는 이를 13세기에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 P311

볼로냐가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한 이유는 사실 수수께끼다.
인류사를 봤을 때 이런 새로운 생각은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등의거대한 변화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쌓이거나, 모든 것을앗아갈 정도의 대재앙(페스트 혹은 세계대전) 뒤에나 나올 법한 것이다.
그런데 볼로냐는 그런 계기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새로운 생각을발전시켜왔다. 그런 점에서 볼로냐는 참 유별난 곳이다.
사실 볼로냐는 단순히 미녀의 도시가 아니다. 변화를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감함을 지니고 과거의유산을 발전시켜 온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다. - P311

하지만 내가 이탈리아에서 요리유학을 하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내가 기존의 레스토랑 산업에 뛰어들기에는 내 나이가 제법 많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자는시간을 빼고 하루 15시간 계속 주방에 서서 요리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턴을 하면서 나의 체중이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졌다. 내 목이 그렇게 길다는 것을 이탈리아에서 처음 알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요리는 너무도 즐거웠지만 쉰이라는 나이는 그 즐거움에 혹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나이 오십은 귀가순해진다는 이순이라더니 나는 비로소 운명의 속삭임을 수긍하기시작했다. 혹시 레스토랑을 연다며 가뜩이나 없는 살림을 거덜낼까봐 두려워하던 아내는 나의 이런 변화에 "철들었다"며 반겼다 - P315

무엇보다도 와인은 맛이 있었다. 바디감이 단단할수록 안주는역시 눅진해야 했다. 고기 자체에 향기가 있는 양고기나 야생 고기와탄닌이 강한 와인은 놀라운 조화를 선보였다. 치즈나 빵 조각을 놓고레드 와인을 음미하려고 잔을 열심히 돌리는 짓을 이탈리아에서는하지 않아도 되었다. 화이트 와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마시면맹탕인 피노 그리지오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먹으면 완전히 다른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한 잔 두 잔 기울이다와인에 빠졌다. 징용살이 같았던 인턴이 끝난 뒤, 나는 자유를만끽하며 여러 곳의 와이너리를 돌았다. 이 때 나의 막연했던 생각은더욱 가닥을 잡았다. 아직 어떻게 이탈리아 와인을 한국에서풀어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일주일에 2~3일만저녁에 문을 여는 서퍼supper 클럽이나 이탈리아 와인만을 소개하는 와인 클래스를 열어볼 생각도 해본다. 와인수입법인이나 소매상을 해보는 것도 고민 중이다. - P316

나는 한국에 와서도 스스로를 볼로네제라고 부를 정도로 볼로냐에푹 빠졌다. 체류 기간 내내 나에게 윙크를 해주었던 많은 볼로냐의멋진 아가씨들의 때문일 수도 있고, 입에 삼삼한 볼로네제 파스타와프로슈토 덕분일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이탈리아를 가는 지인들에게 볼로냐를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어떤 이들은 볼로냐를 다녀와 나에게고맙다고도 말했지만 어떤 이는 내 말과 달리 볼로냐에는 볼 게없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심지어 볼로네제 파스타가 미국식미트볼 파스타보다 맛이 없다는 이도 있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건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어쩌면 나의 볼로냐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볼로냐에 가봤더니 책에서 말한것과 달리 별로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도한다. - P317

나는 역사가 전진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유감스럽게도 그 전진을 감격스럽게 느껴본 적은 드물었다. 그런감정은 그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공허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유도시 볼로냐의 광장에 섰을 때 느껴지는 공기는 전혀달랐다. - P317

시민들이 손을 잡고 교황과 황제에 맞서 자유를 얻어냈던 이도시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 참 특별했다. 시민들이 왕을 쫓아내고자치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의 깃발에 ‘자유‘라는 단어를새겨넣었다. 또 학생들은 스스로 대학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들은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멋진 이름을 대학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공동체는 알프스 바깥의 이방인은 물론이고 여성들까지 받아들였다.
비슷한 시기 남녀유별을 하늘의 섭리인양 외쳤던 수많은 지역과달리 볼로냐는 분명 독보적인 도시였다.
작은 도시인 볼로냐가 어떻게 이런 성취를 이루었는지는나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볼로냐는 왕이나신이 아니라 사람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인간 한 명 한명이 위대한 소우주며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 P318

그렇지않았다면 왕이나 교황을 부정하며 그들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볼로냐 사람들은 그공동체에서 서로를 믿으며 서로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다. 가난한자나 여성이나 이방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도시, 대학,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협동조합까지볼로네제들이 어깨를 걸고 함께 만든 성취는 그 크기를 떠나서아름답다. 그리고 그 성취가 몽롱한 단어로 가득한 책들이 아니라와인과 살루미와 치즈와 파스타 같은 일상의 음식으로 느낄 수있다는 것이 좋았다. 앎과 행함이 나란히 누워있는 볼로냐식 한 접시요리는 나에게는 늘 영감을 준다. 반백의 나이에 요리유학을 떠나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볼로냐에서 새로운 길을보았고 볼로냐에서 다시 그 길을 시작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코로나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 P318

이탈리아와의 하늘길이 열리면 모교인 ICIF에 가서, 나의 와인 선생님인 에지오를비롯해 나의 스승이자 인턴 레스토랑의 셰프인 프랑코 그리고 나에게 볼로냐행을 권해주었던 제빵과정 동기인 부르노 등의 지인들을 만나 와인과 관련한 나의 구상을 물어볼 계획이다.
하지만 볼로냐를 소개한 이 책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건네야할지는 좀 난감하긴 하다. "너는 피에몬테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웠는데 볼로냐 책부터 쓰냐"라는 지청구는 피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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