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1959년의 대한민국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나라였다.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인생을 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세 끼 밥도 제때 먹지 못한다면 훌륭한 인생이나 품격 있는 삶은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주택은 대부분 초가집이었으며, 도시에서도 그나마 조금 넉넉한 사람들이 기와집에 살았다. 양옥은 희귀했고 아파트는 전국 어디에도없었다. 사람들은 숯과 나무를 때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방을 데웠다. 조선 후기부터 망가지기 시작한 ‘삼천리 금수강산‘은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쉽게 닿는 곳은 나무 한그루 없는 민둥산이었다. 전기는 도시 일부 지역에만 들어왔으며 상수도와 하수도가 거의 없었다. 도시와 농촌을 가릴 것 없이 화장실은 거의 다 ‘푸세식‘이었다. 남자들이 똥통을 매단 나무막대를 어깨에 메고 변소를 푸러 다녔다. - P37
1959년의 대한민국은 거대한 ‘난민촌‘ 또는 ‘구난공동체‘救難共同體였다. 대한민국은 38선 이남지역에 수립되었지만 국민은 그렇지 않았다. 원래 38선 이북에 살았지만 북한 정권의 탄압과 핍박을 피해서, 공산주의가 싫어서, 자유가 좋아서 월남한 사람들도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미군의 폭격이 무서워서 내려온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38선 이북에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달랐다.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가 좋아서 스스로 북으로 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모든 인민이 원래 그 지역 거주자였다. 북한은 국가 수립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하나의 이념과 하나의 권력 아래 국민전체를 일사불란하게 조직한 ‘병영국가‘로 남아 있다. - P40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청년 시절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 반일투쟁과 노동운동을 벌였던 죽산 조봉암은 해방 후 조선공산당과 결별했다. 정치에 투신해 국회의 헌법기초위원으로서 제헌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의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처음으로 직선제를 실시한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 표를 얻어 2위를 했고, 1956년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유엔 보장하 민주방식에 의한 평화통일성취‘를 1호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 직전 별세한 민주당 신익희 후보를 대신해 이승만 후보와 맞대결을 벌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 투개표에도 불구하고 유효표의 25퍼센트가 넘는 216만 표를 얻었다. - P42
조봉암 선생은 1954년 3월에 발표한 「우리의 당면과업이라는 글에서 군사적 무력통일과 더불어 선거방식에 의한 정치적 통일도 검토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공산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진영이 단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지 않고는 권력의 불의에 대항하거나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행사할 수 없는 나라였다. 제헌헌법은 민주공화국을선포했지만 대한민국에는 민주주의가 없었다. - P42
그러나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은 결코 아니다.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산업화시대에 생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심각해져 대한민국은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수렁에 빠졌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내부의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중산층이 얇아졌다. 서민들은 한번 빈곤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 정리해고를 허용하고 사내하청과 파견 등 비정규직 제도를 합법화한 탓에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으며 괜찮은 직장을 가진 사람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쟁이 심화되었고 부모의 학력과 소득수준이 자녀에게 상속되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 P48
그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은 분쟁지역으로 남아있다. 이명박 정부 때 금강산과 개성관광이 중단되었다. 천안함 사건이 있었고 북한이 해안포로 연평도를 폭격했다. 전임 대통령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합의한 문서는 사실상 모두 효력을 잃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개성공단마저 잠시 문을 닫기도 했다.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 회담은 2008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종종 험한 말로 대한민국을 비난하고 위협한다. 남한의반북단체들은 북한의 체제와 권력자를 비난하는 전단을 날려 보낸다. 북한이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하게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 P51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인 병영국가로 남아 있는 한우리의 ‘난민촌 정서‘ 역시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쟁을 몸소 겪은 고령층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대통령을 죽이려고 했던 1968년 1·21사태와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을 비롯해 정전협정 발효 이후 60여년 동안 북한이 저지른 적대적 군사행동의 상처와 기억이 있다. 북한 동포들이 굶고 병들어 죽어간다는뉴스를 볼 때 느끼는 안타까움이 있다. 굳건히 유지되는 독재체제와3대 권력세습에 대한 혐오감도 있다. 어찌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 P51
대한민국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는 신천지였다. 하지만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했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 P61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던 4·19의 외침에는 자유에 대한 갈망과 아울러 삶의 기본적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게 만든 이승만 정부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실려 있었다. 군사정부는 그원망과 분노에 화답함으로써 무려 25년 동안 독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유, 인권, 정의, 존엄,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80년 봄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그 욕망은1987년 6월 화산처럼 터져 나왔고 결국 김대중·노무현의 진보정권10년을 만들었다. 2007년과 2012년 대통령 선거는 우리 현대사가 서로 다른 욕망의 전차가 부딪쳐 만든 것임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 P62
소비재 경공업으로 출발한 대한민국 경제가 금속,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전통적 중화학공업을 거쳐 전자, 정보통신 등 첨단산업까지 세계 경제의 기술적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데는 지식을 중시하는 문화적 전통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아울러 우리는 역사적·문화적·인종적으로 매우 균질하며 중앙집권 정치체제에 익숙한 민족이다. 상이한 인종과 종교, 크게 다른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이슬람권과 달리 종교와 세속권력이 결합해 변화와 혁신을 봉쇄하는일도 없었다. 우리는 일제침략기에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외환위기때 금모으기운동을 한 민족이다. 공동의 사회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자원을 동원하고 의지를 묶어내는 집단적 능력은 경제통계에 잡히지않는 사회적 자원이다. 이렇게 보면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 P64
나는 두 살에 4·19를, 세살에 5·16을 보았다. 직접 본 건 물론 아니다. 4.19 때는 걸음마도 떼지 못했고, 5·16 때는 겨우 한두 마디 말을 하는 정도였으니 보았을 리가 없다. 만약 그 두 사건이 내 인생에개입하지 않았다면 나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4·19와 5.16은 나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그 둘이 부모는 같지만 외모와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승만대통령 시대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아버지는 대중의 욕망이었다. - P67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대학생시절 책에서 처음 이 문장을 보았을 때는 늘 옳은 말인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라면 당연히 국민 수준이 정부 수준을 결정할 것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와 국민의 수준이일치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은 훨씬 더 훌륭한 정부를 가질 자격이 있다.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하기만 하면 우리도 미국이나 서유럽처럼 수준 높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부와 경험이 아직 부족한 청년의 순진한 낙관론이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는 전두환 정부조차도 모두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 정부였다고 생각한다. 그때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민주주의를 손에 넣을만한 의지와 능력이 없었다. 대통령을 선출하기 시작한 1987년 이후 여섯 명의 대통령과 그들이 이끈 정부가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라는 것은 다툴 여지조차 없다고 본다. - P68
국회 본청 중앙 로텐더 홀을 지나 의원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 1999년 한나라당 의원들이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다. ‘대통령이승만‘이 아니라 ‘국회의장 이승만‘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상을 세운 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함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았으니 독재를 한 잘못은 잘못대로 비판하되 그 업적은 업적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이필요 없다고 하지만, 때로 가정은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 없지만 가능성을 - P74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P75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면 이런 주장도 그나마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민주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은 너무 많이 했다. 국가의 정통성은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라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으며 남북 모두 유엔회원국이 된 후에는 그런 의미조차 잃었다. 국가의 정통성은 특정한이념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빛나는 이념을 내세운다고 해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인정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국가의 정통성은 내부에서 형성된다. 내세우는 이념이 무엇이든 국민이, 민중이, 인민이, 또는 대중이 그 나라의 국민임을 기꺼이 받아들일때, 국가의 결정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복종할 때, 외부의 침략과내부의 무질서에 대항해 공동체를 지키려고 헌신하려는 태도를 보일때, 그 국가는 정통성 있는 국가가 되며 자연스럽게 국제사회의 인정 - P75
을 받는다.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일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조국 광복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야 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품고 국가에 복종·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 P76
그런데 혁명인지 쿠데타인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쿠데타는 혁명과 달리 민중의 동의와 지지와 참여가 없이폭력으로 국가질서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하는 행위다. 군대를 동원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 군사쿠데타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개념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경제발전을 이루었으니 ‘결과적으로‘ 5·16은 잘된 일이었고, 잘된 일에는 군사정변이나쿠데타보다 혁명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운영을 잘해서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해도 5. 16이군사쿠데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P94
박정희 대통령은 폭력으로 권력을 탈취했지만 폭력으로만 통치하지는 않았다. 자발적으로 추종하거나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18년의집권기간에 박정희 정부는 농업 중심의 전통사회를 중화학공업을 보유한산업사회로 만들었다. 고속도로와 항만, 비행장을 비롯한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했고 헐벗은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었다. 전국에 상하수도와 전기를 보급했고 기생충과 전염병을 퇴치했다. 나는 이런것이 ‘커다란 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결코 고결한 인간은 아니었으나 독재자로서는 크게 성공한 것이다. 4·19와 5·16 둘 모두 일정한 성공을 이루었다. 4·19는 실패한것처럼 보였지만 5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점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만, 10년으로 끝나버린 진보세력의 집권과 심각하게 흔들리는 오늘의 민주주의는 4.19의 승리가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16도 성공했다. 박정희 장군은 18년 동안이나 권력을 누렸으며 그 후예인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12년 더 집권했다. 서거33년이 지난 시점에 딸이 국민의 선택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며, 이유가 무엇이든 그는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세계사에서 이만큼 성공한 군사쿠데타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좋아하는 시민들이 진정으로 좋아하는대상은 사실 그의 인격과 행위가 아니라 그 시대를 통과하면서 시민들 자신이 쏟았던 열정과 이루었던 성취, 자기 자신의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 P99
사고하는 역사가는 엄밀하게 말하면 과거의 문제를 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긴급하게 해결을 요하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우리의 역사를 회피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해야만 하는 긴장관계를 견뎌 내야만 한다.
• ㅡ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퍼센트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퍼센트 사람들은 늘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민생이 파탄에 빠지고 국민경제가 성장동력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 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면 골고루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살벌한 경쟁풍토, 재벌 대기업의 탐욕과 횡포, 심각한 고용불안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 최고 수준의 노동시간과 자살률, 참혹한 환경파괴 등 한국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모두 박정희독재에서 시작되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본격화했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맞을까? 나는 둘 모두 옳고, 또 둘 다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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