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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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문학동네(2003)]

 

   몇 년 동안 책꽂이를 장식하고 있는 배수아의 책, 세 권중의 하나다. 어느 해인가 이제 배수아를 읽어야지 하고 들여놓고 팽개쳐두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어진 책꽂이 파먹기의 일환으로 올해의 시작에서 과감하게 뽑았다. 책은 단단하고 반짝이고 손에 잡히는 사이즈여서 제본이나 판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까지 산문집이리라 생각했던 책은 소설이었다. 표지에도 분명히 '배수아 장편 소설'이라 적혀있는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제목만 읽고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읽은 지 몇 분 만에 소설인 거야, 에세이 같은데 했다. 산문이든 소설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안 읽혔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에서부터 읽는 스텝은 꼬였다. 얼굴 없는 기사단장이 목소리만으로 음악을 표현하고 있는 듯 글이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귀에 꽂혔다. 단어들이 붕붕 날아서 제멋대로 귀에 들어오는 바람에 한참만에 낱말은 문장이 되어 뇌에 전달되었다. 50페이지쯤에서 읽기를 멈추고 싶었다. 포기할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함이 이겼다.

 

 

   "그곳은 병원에서도 중환자들이 오는 곳이었어. 아니, 중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더 이상은 치료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사람들 말이야. 병이 위독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질병이나 그것을 위한 치료 과정을 감당할 수 없게 쇠약하기 때문이지. 혹은 별로 그럴 필요가 없거나 말이야. 그러면 그대로 끝이야. 그냥 침대에 누워서,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거라구.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무도 없어. 거기서 난 매일 아침 수십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진 아랫도리를 씻어내줘야 했다구. 상상할 수 있어? 그런 기분 말이야. 단지 기분뿐이 아니고 그 아랫도리 모양하고 냄새란 정말 실제적이지. 게다가 그걸 봐야 한다구. 그냥 샤워기로 대충 씻어내는 것이 아니고 손을 이용해서, 왜 화장실 변기 솔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 깨끗하게 씻어내도록 교육받은 거야. 난 지금도 모르겠어. 나이 든 여자들의 성기가 왜 그렇게 큰지 말이야. 탄력은 하나도 없게 말라붙어서 쭈글쭈글 한데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게 커다란 거야. 거짓말 보태지 않고, 거인의 덧신처럼 시커멓고 크다구. 남자는 거의 없어. 대부분 여자들이야. 아마 여자들 평균수명이 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운이 없게도 죽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르지? 뭐,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니, 누군들 괴롭지 않겠어? 그러나 물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 말고 그들이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그러니 누군가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와줘야 해. 그러나 일단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끽, 간단하게 끝나는 거야. 약 먹은 벌레보다 더 쉬워.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사회봉사 요원들이 뛰어들어가서 농담을 하면서, 그 구역질 나는 자리를 치우고 나면 다시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는 거야.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역시 젊은이에게는 역겨운 일이었어, 우웩."[p67.68]

   주인공 화자가 잠시 머물고 있는 집 주인 요아힘은 사회봉사 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신할 때 양로원에 소속된 노인 병동의 경험을 저렇게 풀어놓고 있다. 헉~! 우웩이다.

   "너 혹시 그 책을 알고 있니? 엄청나게 길고, 지루하기는 라틴어보다 더한데 분명히 다 읽은 다음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그런 내용이지. 그런 작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교묘한 속임수를 써가지고서는 돈을 벌어들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분명히 같은 독일어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까맣게 잊어버리게 한다든지 의미가 모호한 말들만 사용하는 그런 책을 쓸 필요도 없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해. 왜 엔지니어가 되려는데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작가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려는 속셈이 아닐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전혀 없잖아." [p66]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요하임은 이렇게 평했으니 그가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는 짐작했어도 스무 살이 갓 넘은 청년의 시선으로 만나는 나이 든 사람, 아니 의사도 포기한 늙은 여자 사람을 객관화시킨 신랄하고 역겨운 표현들은 적나라해서 섬뜩하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고 요아힘을 평하는 M의 의견을 참고해도 우리 주변의 무수한 요아힘들 생각에 두렵다. 늙은 사람뿐만 아니라, 화풀이 대상으로 학대받는 아이들, 사람은 아니고 여자로만 취급받는 여자 사람들, 이 혹독한 추위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몸을 접고 눕히는 많은 이주민 노동자들과 출근은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불시에 저런 말들로 공격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숨어서 관찰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있다. 사고력의 단순성과 협소한 지평, 왜곡되고 편향된 인식의 틀에 갇힌 세계관을 진리처럼 설파하는. 도처에 공포가 포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도를 쭉쭉 나간다. 역시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이 책 속에서 차례로 나타났다가 보이지 않게 창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문장들은 아름다우나 간단하지가 않았고 나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단어들도 빈번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부속 절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문맥 안에서 추측하기 위해서,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몇 번이고 읽어야 했다. 그렇게 집중하면서 점점 책 속에, 정확히 말하면 그 문장들 속으로 빠져들어갈수록 나는 더듬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기도 했다."[p81]

   [책 읽어주는 사람]을 읽는 장면이다. 아직 독일어에 서투른 주인공에게 요아힘은 독일어 선생으로 M을 소개해 준다. M은 요아힘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에 미친 언어학자다. 독일어 선생인 M은 예상과는 다르게 첫 만남부터 책을 아무 곳이나 읽어보라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독일어 책을 만나서 더듬더듬 읽어도 개의치 않고 계속 읽을 것을 요구하는 선생 앞에서 당황했던 책 읽기를 혼자 읽으면서 이해하고 납득하는 부분은 어쩐지 알 듯도 했다. [책 읽어주는 사람]이 내가 영화로 본 [더 리더]와 동일한 책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려고 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의 절대 보편적인 개념, 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자국어로 다르게 불리는 정수의 개념,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국적이 없으며, 나라를 만들지 않고 핵심에 가까운 만큼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지극히 포괄적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며 그리하여 방대한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에 간단하게 몇 가지로 만족하므로 표면적으로는 미개해 보일 수 있으므로 M은 그것을 '야만인의 언어'라고 불렀다.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자국어의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는 일이며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사고(소통이 아니라)의 명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87]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사고를 확장시키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책 속 화자가 작문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거고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책을 펴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언어를 매개체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천천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 M의 가슴 위에 고개를 대고 비가 내리는 들판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던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내는 마른 풀들, 키 작은 덤불들, 지평선으로 보이는 보랏빛 숲의 그림자, 짐승의 발자국들, 가지를 베어내고 남은 자리들, 추위 때문에 금방 푸르게 변한 맨발들, M의 젖은 눈썹, 해독할 수 없는 지도,"[P113]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로 시작하는 저 긴 문장은 다음 문장들을 시적 언어로 치환하는 역할을 한다. 조금 지루하다 싶은 호흡이 긴 문장을 쓰는 일도 놀라운데 다음 문장들의 시적 감각이라니 그저 감탄한다.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 것은 들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래 같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지만 이별의 예감에 행복하기보다는 초조한 사랑에 빠진 이들의 박자로 부르는 노래가 들려온다. 초조와 조급함은 파멸을 부른다.

 

 

   "음악회가 끝난 후, 슈베르트 애호가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 프란츠 슈베르트가 다른 예술가들의 삶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봐도 짧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평생 동안 가난했으며 무명이었고 무엇보다도 키가 작고 뚱뚱했다.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단지 미남이 아니라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우수꽝스럽게 보이기조차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 음악가 답지 않게 손가락은 '짧고 굵었'으며 심한 근시인데다 과음 때문에 원래 뚱뚱했던 몸은 점점 더 볼품 없어져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전혀 여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가 성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가곡 <겨울 나그네>가 최초로 불려졌을 때조차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평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그 작품을 다른 어느 것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도 좋아하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무시당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단 한 명의 후원자도 갖지 못했고, 혹은 원하지도 않았다고 하며 죽고 난 뒤 남긴 것은 초라하고 낡은 옷가지와 이불이 전부인 그런 인생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타고난 독학자였고 감성적이었으며 억제하는 낭만주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수줍고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근시인, 음악적인 격정에 사무칠 때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떨면서 키득거리거나 시력이 나빠 자신 없게 움츠러들기나 하는 가난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하는 휠덜린의 말처럼, 우리가 들은 그의 음악은 그의 전부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나의 전부이고 온 영혼으로 말하는 쾌락이고 창세기와 묵시록,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다.'

   슈베르트 애호가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팔 년 전 어느 날 이후 그는 사랑하는 것, 그 마음의 행위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시간의 풍경 위에 그대로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노란 비단 의상을 입은 니진스키가 별들이 되었으며 하늘에서 빛나는 그 별빛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빛을 따라서 그 자신도 마침내 아무도 찾을 수없는 머나먼 우주의 먼지 속으로 흘러가버렸다고."[p128~130]

   여러 음악가들이 나오고 더불어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차용하지만 슈베르트,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의 어떤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가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아힘의 늙은이를 향한 능욕에 가까운 말들이 더욱 참혹한 것은 그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 때문이다. 음악을 모르고 슈베르트도 모르지만 어떤 음악이든 듣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는 라디오 키드이기도 하다, 나는.

 

   "실제로 음악이 생생하게 연주되는 연주회장에 가는 것은 두근거리고 신비하며 특별하고도 뛰어난 경험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불안과 가슴이 조여드는 초조함과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망설이게 되는 팽팽히 당겨지는 신경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모든 연주회는 예외 없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큰 극장에서 열리는 유명하고 이름 있는 연주자의 그것과 무명이고 아직 확증 받지 못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의 것이다. 음악의 극치감을 만나는 기회는 전자의 경우에 더욱 확실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 더욱 큰 인파의 속성과 부딪힌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인내심 없이 줄기차게 부스럭대는 소리, 조심성 없는 단체 관람객, 대개 한 번 정도는 울리는 전화벨 소리, 조바심치는 몸짓들, 만원인 카페테리아, 예매의 어려움, 연주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머물다가 이윽고 건반을 떠난 다음에도 마치 마법처럼 오래 계속되는 그 진동과 여운 속에서 숨을 멈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언제 그 화려하고도 고독한 극치감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소음으로 방해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그 두려움 때문이다. 게다가 소리에 대한 신경질적인 예민함은 스스로 증폭되면서, 관중들의 소음뿐 아니라 극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서 듣는 소리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비교하게 되고, 무엇이 더 좋은지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알지도 못한 채 극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게 되며 객석의 위치는 이런 각도의 위치가 좋은지 아니면 다른 각도를 시도해보아야 하는지 초조해지기도 하고 피아노나 음향장치, 진동, 연주자를 판정하게 되는 태도, 이런저런 헐뜯음, 시시콜콜한 비교, 어느 연주자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의 연주보다 좋았다든지 그렇지 못했다든지 혹은 이런 점에서는 이 연주자가 뛰어나다고 보여지나 다른 점에서는 저 연주자가 더 우수하다든지 하는 취향에 관련된 적의 섞인 악담이나 단지 비평자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한 수많은 비판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속물적인 오만함에 가득 찬 음향학이나 구조학에 관한 평가들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상은 음악을 가장 잘 듣기 위해서였을 이런 모든 노력들이 아마추어의 마음을 가진 소심하고 은밀하게 사랑하는 구애자들이 역설적으로 연주회장으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게 만들게 된다. 물론 운이 좋아 순수하게 비밀스러운 희열만을 간작한 채 연주회장을 빠져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성이 드높은 연주가일수록, 매스미디어의 애호를 받는 연주가일수록, 수식어가 많은 연주가일수록, 수상 경력이 화려한 연주가일수록, 연주 자체의 평가와 큰 상관없는 외적 요인들로 인한 불쾌감을 가질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가진 연주자들,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주자들을 만나는 것은 기쁨 중의 기쁨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나는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잘 모르고 있던, 잘 알지 못하여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가들과 연주회장에서 불현듯 재회하기도 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거북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연주회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큰 감흥 없이 들었던 리스트와 쇼팽을 새롭게 만났던 눈부신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벨라 바르토크와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소박한 연주회에는 또 다른 소박한 기쁨이 있다. 거대한 인파를 움직이는 장력에 의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산책으로 느끼면서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연주가 고급 귀를 가진 사람들을 언제나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가를 새로운 방법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도 낮다. 그러나 깊은 가을 저녁에 교회의 바흐 음악회, 극장의 소강당에서 열리는 첼로 독주회, 피아노 오중주, 컴퓨터와 두 대의 바이올린에 의한 지극히 실험적이며 완벽하게 선율을 배제한 음악학교 졸업생의 작품, 열망하고 있는 젊은 연주가들,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극장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멋지게 연주했던 현악 사중주단을 만나는 우연한 즐거움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것은 낙엽을 밟으며 하는 저녁 산책과 마찬가지로 너그럽고 여유 있으며 이름과 날카로운 독설에서 해방되어 있으며 자신과 세계를 돌아보고 정신의 어두운 곳에 도사린 비평가의 까다로움과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p160~163]

   이 부분은 온전히 에세이로 읽혔다. 연주회장을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을 함께 하는 듯 생생한 증언들이다. 책을 빠르게 읽는 편인 나는 이런 식으로 끄적거리고 옮겨 적으면서 몇 가지 달라진 점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중 하나는 전보다 확실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옮길 구절이 있는지 살피게 되고 이렇게 옮겨 적으면서(독수리로 까닥까닥 일일이 타이핑을 하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해로 읽히기도 하고 행간 사이의 내용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책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나 재미없을 때의 경우를 제외하곤 책 뒤편의 해설을 대충 넘겼는데 지금은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쓸까를 궁리하면서 책의 표지 디자인과 작업자의 이름까지 살펴본다. 결국 전에는 작가 한 사람의 작업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이 책 한 권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나무의 목숨이 지나온 여정까지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옮겨 적은 이 부분도 그렇다. 어느새 연주회장 안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는 스스로의 약속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켜가고 싶은 좋은 영향력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비로소 독서를 시작한 듯 새롭다. 이런 작업이 아니었다면 내게 이 책의 비중이 이렇지 않았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이미 나와 M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마치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그곳은 망각을 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을 잊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오후의 긴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허망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상실감을 동시에 갖는다. 불이 켜지지 않은 빈 방과 창가에 존재하는 부드럽고 먼 저녁 빛, 딱딱한 나무의자와 책상, 아무도 없는 방, 나는 책상으로 다가간다. 잠에서 깨어나 이미 잊었으나, 그토록 자신을 고백하는 꿈들은 아직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하늘에는 불타는 석양, 그리고 지상의 어둠, 그것의 시간이다. 그때 사물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 하늘의 마지막 빛에 의지해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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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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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은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장 담그기

 

  짚으로 묶어 띄운

  메주 씻어 채반에 널었다

  주둥이 큼지막한 독을 골라

  찌끼 우려내어 닦아두고는

  빨간 함지에 감천 약수를 붓고

  천일염 한 됫박씩 되어 녹였다

  달걀이 엽전 크기만큼 떠올라서

  널찍한 덮개 닫아 먼지 막았다

  병술년 음력 정월 스무닷새

  말날(午日) 아침에 장 담근다

  꽃망울 툭 불거진 매화나무집

  장독대에 독을 걸고 메주 안친다

  무명천에 거른 맑은 소금물

  독 어귀까지 남실남실 채운다 둥실

  떠오른 메주에 소금 한줌 더 얹히고

  참숯 두 개 고추 대추 여섯씩 띄운다

  장독대 식구가 셋이나 늘어

  왼새끼 꼬아 금줄을 친다

  장 담그는 공부 가르쳐주는

  쥔집 할매의 잔소리가 여기서야 그친다

 

 

 

  싸전다리

  쌀 됫박이나 팔러 싸전에 왔다가 쌀은 못 팔고 그냥저냥 깨나 팔러 가는 게 한세상 건너는 법이라고, 오가는 이 없는 싸전다리 아래로 쌀뜨물같이 허연 달빛만 하냥 흐른다

  야 이놈아, 뭣이 그리 허망터냐?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봄, 가지를 꺾다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 중에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백석이 작품에서 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위치한 것으로 간주되는 향토성과 지방언어를 완강하게 고수한 것은 복고주의나 지방주의로 전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적 근대의 침식작용에 대한 면밀하게 계산된 저항이고 자기방어였다. 그렇다면 이제 박성우에게 토속주의와 전원문학은 어떻게 적극적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가.

  지난 40년 동안 한국 농촌이 가차없는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져왔음은 바로 박성우 시인의 가족사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농촌은 산업자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어, 농업 자체가 자본의 하위산업으로 편입되어 있다. 때때로 농촌은 평택 대추리가 비극적으로 입증하듯이 새로운 탄압과 추방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대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누구나 자본과 외세에 관하여 직접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같은 불행 속에서도 사람은 음식을 먹고 사랑을 나누며 일상생활을 이어가게 마련인데, 그 모든 것으로부터 문학은 태어날 수 있다. 다만 진정한 문학에는 시대의 고통을 느끼는 자의 벅찬 숨결이 불가결하게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인 박성우가 그려낸 이 가없는 순정과 아름다움은 뒤집어보면 안주(安住)와 자족(自足)에 머물고 있다는 뜻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해설 [슬픔은 영혼을 정화한다 -- 문학평론가 염무웅] 중에서

 

 

  시인의 말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일터 내주고 밥벌이를 하게 해준 손길과

  한옥마을 단풍나무집 별채를 내준 손길과

  맘과 몸과 시가 쇠해졌을 때 다독여주는 손길들이 없었더라면

  시가 나를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세상과 고마운 마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요한 늦밤을 맞는 일 외에는 없다는 걸 고백한다.

                 2007년 3월

                       박성우

 

 

  시인의 말을 읽으며 생각한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있는 거고 고마운 사람 곁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음을. 박성우 시인과 함께 있는 동안 자주 눈이 내린다. 지난주 폭설에는 '빙판길'과 '쓸쓸한 접촉'이었는데 오늘은 예정대로 '물의 베개'외 네 편이다. 사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가뜬한 잠]에는 거의 모든 시편들이 좋다. 시집을 선물할 때 많이 선택되어서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으면 구입한 목록으로 뜨르르 올라온다. 특히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라는 마른 고추만 보아도 떠오른다. 그리고 시인의 고무신이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대학로 행사에서 멀리서나마 시인의 낭송시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연단을 내려가는 흰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시였는지도 잊었고 얼굴도 기억이 없는데 흰 고무신의 이미지만 둥둥 남아있다. 시집 날개의 사진을 보아도 그의 곁에 고마운 사람이 왜 많은지 알겠고, 시를 읽으면 더욱 알게 된다. 어떤 것이 진정성인지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은 시어들이 촘촘한 거미줄로 나를 옭아매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폭폭 나리는 눈, 속도 없이 좋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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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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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새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들을 뒤돌아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도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 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먼 모가지라는디

 

 

 

친전

    아버지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

 

병에 걸린 오골계의 맥풀린 똥구녕 같은

보름달이 떴어요

회백색 분비물이 제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오늘이 성탄전야라는 거

 

탄일종이 울리고 있어요

 

끝으로, 제 남은 생의 모든 성탄절을 동봉하네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시집[거미(창비2002)] 중에서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직접적인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시편들은 대체로 아프다. 그 이유는 물론 크게 보면 우리 삶 자체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시인들의 내면에서 아픔이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생생하게 들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 어찌 아픔의 정서만이 들끓고 있겠는가. 거기에는 아픔만이 아니라 외로움이나 슬픔, 분노, 고뇌 들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들끓는 이런 감정들을, 좋은 의미에서 제어하지 않는다. 제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칠지만 생생한 감각으로 재현된다. 그중에서도 아픔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실감 나게 환기시켜주는 감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박성우의 시편들은 대부분 아픔을 그리면서도 그 아픔을 표나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여 묵묵히 견디는 자세를 보여줄 뿐이다. 좋게 말해서 의젓하고, 어찌 보면 애늙은이 같은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낯설기조차 하다. 그는 벌써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예 유희나 혹은 초월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쉽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자이면서도 또한 그것을 견디는 자이기 때문이다.

      해설 [세상의 상처에는 옹이가 있다 --- 강연호 시인] 중에서

 

 

   시인의 말

 

  쓸쓸하고 지루한 날들이었지만

  고만고만하게 견딜 만했다

  애벌레의 상태로 첫 시집을 묶는다.

  이제 내 손을 떠나는 시들이므로

  나비가 되든 나방이 되든 어쩔 수 없으리.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나에게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02년 8월

           석상마을에서 박성우

 

 

   중대재해법에 관한 뉴스를 챙겨 보던 며칠, [거미]를 읽고 싶었다. 중대재해법과 거미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지만 뇌의 회로는 가끔 그렇게 작동 된다. 그렇게 잡은 [박성우] 시인에게 며칠을 갇혀지냈다.

  우선 먼저 거미를 보낸다. [거미]는 시인이 2000년에 신춘문예 당선 시인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거미줄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앳되고 맑은 표정에 슬그머니 웃어본다. 젊은 시인이 중년이 되고 여전히 가난한 가장으로 고군분투하는 시편들을 만나고 난 다음이어서일까, 새 시집이 묶여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기대해본다. 시를 써서 밥 먹고살기는 영 그른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 속에 가득 담긴 가난함에는 구질구질함이 없다. 가난이야 지긋지긋한 환멸이지만 오래 된 일기를 다시 읽은 것처럼 아릿하다. 가난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애틋한 과거를 만난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지만.

  이걸 쓰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리처드 막스의 One More Time 내가 해야 할 일도/ 내가 가야 할 곳도 없어요/ 내 삶 속엔 나를 제외하고…… 애절하다. 이미 지나간 것들에 '한번만 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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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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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역사의 쓸모

              최태성 지음 [다산초당(2019)]

 

  

   『이름 없는 의병들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있었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참 많아요. 하지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진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그 아무개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어요. 이 드라마의 메인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위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역사에서 아무개들의 역사는 놓치기 쉬워요.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의병을 볼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나도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 위치에 있을 수도 있겠구나.' 솔직히 광개토대왕, 이순신, 김구 같은 위인에게 나를 빗대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그 주변 인물,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름은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일생을 볼 때면 가슴이 더 찡합니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이 시대의 아무개일 테니까요.[p37. 38]』

 

  <미스터 션샤인>을 좋아했다. 일 끝나는 시간이 불규칙해 제대로 보지 못해서 주말마다 마치는 시간이 되면 공연히 조바심을 치게 만든 드라마였다. 기회가 닿으면 띄엄띄엄 보는 감질나는 시청 후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휴일 이틀인가를 몰아서 꼼짝도 안 하고 16부작을 몽땅 보았다. 벌써 오래 전인데도 ost를 가끔 들으며 그 장면들을 떠올린다. 주조연 배우 각각의 연기도 좋았고 특히 누구랄 것 없이 그들의 대사가 좋았다. 그 시대적 상황과 캐릭터에 걸맞은 대사는 작가 '김은숙'의 걸출함 때문이었겠지만 발음이나 전달력은 말 그대로 쉽게 심금을 울렸다. 늘 세상의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적지만 그것은 포장지로 곱게 싼 이미지이고 실체는 여기에 등장하는 모두들보다 더 허접하고 구질구질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여자배구부에 차출되었다. 새로운 규칙과 코트 안에서 공을 받으며 뛰는 시간들은 좋았다. 그런데 이유 없는, 아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려맞기는 억울하고 아팠다. 무조건 팬다, 그래야만 권위가 선다. 이게 그 당시의 교육 방식이었는지 무조건 패는 선생들이 많았다. 선생은 선생님이니까 포기하고 습관처럼 맞을 수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선배들의 탱자나무 몽둥이는 진저리가 났다.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배구를 그만두었다. (지금도 스포츠계의 폭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만난다. 시골 변방의 신생 배구부에도 저랬으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들은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5학년 때 담임은 '고전읽기부'로 나를 보냈다. 방과 후에 학교 대표 선수로 차출된 친구 몇이 남아서 김유신 장군' (그 유신의 시대에 걸맞은 위인이라 필독서였을 것이다) 과 '우리 겨레의 발자취'를 달달 외우다시피 읽고 선생님의 부연 설명을 듣는 과정이었다. 다음 학기에 군에서 열리는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시험 결과가 어땠는지를 잊은 걸 보면 뻔한 결과였을 것이다. 학교 파하면 바로 집에 와서 밭에 돌을 골라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엄마한테 맞춤한 핑곗거리로 집에 늦게 들어갈 구실이 생겼다. 그놈의 밭의 돌들은 밭 가운데 산을 만들도록 골라도 끝도 없이 나왔다. 논은 또 어떤가, 모를 심을라치면 돌에 손가락이 박혀서 모두 품앗이를 피하던 논을 몇 년 만에 작은 돌 하나도 없게 만들었다. 돌을 골라내는 일은 평생 땅에서 허리 펼 날 없었으나 한 뙈기의 땅도 갖지 못한 엄마의 억척과 한이 만들어 낸 결과다. 다음 목표는 밭이어서 엄마는 아침마다 학교 파하면 바로 들어오라고 노래를 하신 것이다. 끝내 돌밭은 옥토로 바꾸지 못하고 주인들에게 돌려줘야 했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모르고 어스름 무렵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덕분에 역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국사 시험을 잘 보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자신감은 잘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 엄마한테는 못된 딸이었는데 '매'가 '역사'로 이끈 것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생각과 그 생각을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안다. 저 시절에 살았더라면 나는 맞는 게 두렵고 싫어서 아무 짓도 못했을 거라는걸. 설사 그런 일에 참여했더라도 몇 대 두들겨 맞으면 전부 불고 말았을 거라고 가끔 후배한테 지나는 말로 그런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무개다.

  누구나 아픔에 초연할 수 없을 것인데,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목숨은 소중할 것인데, 고문 장면을 보는 것은 보는 것으로도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괴로움이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아무개들이 온갖 고문들과 역경을 헤쳤을 게 뻔한데도 저 한 줄의 문장으로 남았다. 거기에 담긴 커다란 울림이, 드라마 한 편이 주었던 온갖 희로애락의 위안이 책 속에 적혀있었다. 단박에 처음 알게 된 큰별쌤의 '역사의 쓸모'가 좋아졌다. 물론 처음에는 역사를 '쓸모'로 칭한 제목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갖고 있는 보리 국어사전에는 '쓸모'는 '쓸만한 데'라고 나와있다.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역사의 실용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역사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에게 역사를 학문적인 관점으로 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역사의 '쓸모' 보다 역사의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p8]』라고 부연 설명을 해두었기에 '역사'를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통찰'을 위한 쓸모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책 속 1장의 제목이기도 한데 저 제목이 좋았다. 별 거 아닌 것이 아닌 별 것들에 담긴 감동과 기쁨을 알기에 그 제목을 사용하기로 한다.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았고, 처음 읽는 내용도 있었지만 한 명 한 명 그들의 행보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저자가 존경하는 두 인물은 이육사 선생과 이순신 장군, 『이육사는 시인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감옥에 갇힌 열혈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삼았죠. 무장 독립 단체인 의열단의 단원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바친 분입니다.[p9]』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오히려'입니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어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순신은 누구나 싸움을 포기했을 상황에서 '오히려' 해볼 만하다며 의지를 다졌습니다[p10]』를 통해 '오히려'의 위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신라 문무왕 때, 쇠뇌를 만드는 장인 구진천과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육입니다. '대동법의 아버지'[p181] 』의 전 생애를 건 일화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했다. 또한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는 좋았다. 책 한 권을 통틀어 가장 큰 울림을 준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이겠다. 명심해야 한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을사오적 모두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은 그 시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었는데,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어요.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을사늑약에 찬성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법관 중에도 그들과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박상진입니다. 우리나라는 2차 갑오개혁 때 재판소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법관들도 양성했는데 박상진도 법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부와 권력을 모두 지닌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지요. 1910년에는 판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평양 법원으로 발령까지 받았는데, 사표를 던집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했거든요. …(중략 ) 일본 입장에서는 죄인이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영웅인 사람들입니다. 판사가 되면 이런 사람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거예요. 박상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 내가 앉을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판사의 맞은편, 바로 피고인석이라고 말이지요.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지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p208]』

  무수한 뉴스의 인물들 속에서 누가 명사를 지향하는지는 알겠는데 동사를 꿈꾸는 이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 혼돈의 무질서가 계속되는 정치권인가. '동사의 꿈'을 가진 그 누구를 지도자로 만나고 싶다.

 

  『역사는 흔한 오해와 달리 고리타분하거나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시대의 맥을 짚는 데 가장 유용한 무기이자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죠.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는 늘 불안해합니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나' 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p292]』

  책은 이와 같이 맺는다. 역사를 통해 사람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다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폼 잡지 않아서, 무겁지 않아서 쉽게 권할 수 있는 역사를 향한 도움닫기용 책을 갖게 되어 기쁘다. 큰별쌤 (어쩌다 저런 어마 무시한 닉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니 그저 이름이다. 클 太, 별 星, 큰 별. 한동안 내가 갖고 있던 닉이 이름이었던 것처럼.)은 우리에게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옛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품위 있는 선택에 역사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만을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아요. 역사적 사고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에게 역사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본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말, 의견이 누군가의 나쁜 선택에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p60]』

 

   『그런데 만약 일제 강점기에 외울 게 없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고작 몇 개의 단체와 몇몇 사람의 이름만 존재한다면 말이죠. 그런 역사는 비겁의 역사입니다.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굴욕의 역사인 것이죠. 외우기 힘들 만큼 수많은 단체와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기에 우리 근현대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독립투쟁 단체들의 이동 경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움직였습니다. 낮에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다녔을 거예요. 평지로 편하게 다녔을까요? 아닐 겁니다. 역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험한 산을 행군했을 겁니다. 만주가 얼마나 추운 곳입니까? 그 추운 땅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다닌 그 길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화살표를 그냥 화살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들의 발자국을 봐야 합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건 그들의 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꿈이에요. 다음 세대에게는 식민지 조국을 남겨주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품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회영은 1932년 예순여섯의 나이에 상하이에서 붙잡혔습니다. 일흔이 다 된 적지 않은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전 생애를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분입니다.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p221.222]』

  춥다. 며칠째 폭설과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롱패딩 코트에 미끄러지지 않을 신발로 중무장을 하고 거리를 종종 걷는데도 길은 조심스럽다. 이 칼바람 속의 만주 벌판의 독립군을 생각해 본다. 조선희의 장편 소설 <세 여자>에도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무장 투쟁한 불굴의 조선의용군이 나온다. 역사를 걸어 나온 사람들은 거대한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남의 나라에서 굶주림과 체포의 위험을 뚫고 저 엄청난 한파와 불투명한 오늘을 걷고 걸어서 여기로 오고 있구나.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고 해요. 양반다리를 하면 복숭아뼈가 눌리잖아요. 책상 앞에서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밤낮으로 글만 쓴 겁니다. 나중에는 복숭아뼈가 너무 아프니까 일어서서 선반 위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하며 글을 썼대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약용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치 기록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글을 썼으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답변이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어요.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책을 쓰는 와중에도 정약용은 두 아들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썼습니다. 귀양살이 중이니 자식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편지로 자녀를 교육하고 애정을 전했지요. 공부의 중요성부터 사대부 예법, 일상의 지혜 등 세세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를 사귈 때나 시를 쓸 때, 벼슬살이를 할 때, 심지어 술을 마실 때의 법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둘째 형인 정약전과의 일을 추억하거나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어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폐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편지도 있습니다.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집안을 폐족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ㄹ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끼리 무리를 짓지 말 것, 과일과 채소를 키우고 뽕나무를 심어 가난에서 벗어날 것,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벼슬하는 사람처럼 나라와 세상을 위해 살 것……. 그중에서도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정약용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p74.75]』

 

   『최초의 기술이나 최고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향력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아이폰, 한글의 공통점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대중의 욕구를 발견해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처럼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는 행위는 결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수밖에 없어요. 아이폰 또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기술로 후대에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입니다.

  한글은 민본의 글에서 민주의 글로 바뀌었습니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광화문에 정말 많은 사람이 촛불처럼 밝은 희망을 들고 모였습니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들고 있는 팻말에는 모두 한글이 쓰여 있었어요. 세종대왕이 만약 그 장면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한글 덕분에 한결 쉽고 자유롭게 내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p116.117]』

 

   『저는 가끔 항복을 앞둔 원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이었어요. '이제 고려는 끝났구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면 정말 고려는 끝났을지도 몰라요. 몽골제국에 편입되어 마치 섬과 같은 끄트머리 변방 땅으로 남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원종은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얻어야 할 것을 빠르게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패를 이용해 그처럼 대담한 제안을 던졌지요. 그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고려는 계속해서 자치 국가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원종의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협상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거래를 할 때, 업무를 정할 때, 연봉을 높일 때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협상을 합니다. 심지어 연애를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도 협상이 필요해요. 협상이란 상대방도 만족시키고 나도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입니다. 내 것만 생각해서도, 상대의 것만 생각해서도 안 되죠.

  어떤 종류의 협상 테이블이든 그 앞에 나서기 전에 서희와 원종의 외교술을 떠올려봤으면 좋겠습니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기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p132.133]』

 

   『정도전의 사상은 굉장히 급진적이었습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해서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노비들도 해방시키자고 주장했어요. 기득권 계층의 반발로 그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시대를 앞서 있었어요. 정도전은 왕과 귀족만이 사람 취급을 받던 시대에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왕 한 사람이 나라를 좌우하는 전제 왕권을 경계하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하기도 했지요. 왕은 있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유능한 재상에게 맡기자는 거예요. 왕은 실력으로 뽑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대단히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배당하고 유랑하면서 만난 비뚤어진 세상에 문제의식을 느낀 정도전은 그런 세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고민했어요. 길고 막막한 인생의 터널에서 주저앉는 대신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고려 망해라!' 하면서 괴로워하고 술이나 퍼마셨다면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잊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도전에게 고려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사회도 행복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부조리와 불합리를 목도합니다. 이럴 때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졸업한 학교가 별로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도전처럼 시대와의 불화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거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인식과 비판의 불을 항상 환하게 밝혀놓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쉽게 좌절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대신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일 겁니다. 어쩌면 '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고요. [p177~179]』

 

   『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장보고처럼 산다고 해도 장보고만큼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장보고의 성공 신화보다 그가 본 삶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어요. 노비에게서 태어나면 노비로 살고 육두품이면 끝까지 육두품인 거예요. 그런데 장보고는 달랐어요. 어려서는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고자 바다를 건넜고, 나이가 들어서는 단단한 신분제 사회의 벽을 두드렸어요.

  장보고는 자신의 굴레를 탈피하길 원했던 겁니다. 비록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에 이름을 남길 만큼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죠. 저는 장보고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장보고는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단점을 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대 무기가 활쏘기라고 생각했고, 이를 내세워 한계를 돌파하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삶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대한 말 같지만 사실은 몹시 연약한 말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과 비교하면 상처 입기 쉽거든요.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는 없네'라는 시각으로 보면 삶은 쉽게 초라해지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그래서 비교는 오로지 나 자신과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낫기를, 또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거죠.

  우리 모두의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누군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누군가는 기꺼이 그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삶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계기로든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꼭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나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가능성을 불신하지 말라고. 그러니 우리 쫄지 맙시다. 이미 엉망이라면 바다에 발 한 번 담근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한 걸음 내딛어보자고요. [p201.202]』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낸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부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그 궤적은 같아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던 사람들이거든요.

  저는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이 부족하고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없으면 진정한 인싸가 되지 못합니다. 손에 쥔 것이 없어지면 전부 사라질 인기고 인영인 것이죠.

  오랜 시간 동안 존경받아 온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긍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나 만나지 않잖아요. 역사가 증명한 사람들을 만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그들이 굉장히 단단한 중심을 갖고 삶을 살아 냈다는 걸 느낄 겁니다.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죠.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보낸 시감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자아정체성이 확립되면 다른 사람으로 인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존재를 긍정하고 내가 하는 일에 자긍심이 생겨요. 그렇게 생겨난 자긍심은 물질을 바탕으로 생겨난 자긍심과 달리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처받지 않을 힘이자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p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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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빙판길

                       박성우

   한 여자가 빙판에 미끄러져

   뒤로 떨어졌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다

   얼음 위에서 버둥거리던 발은

   신발을 치켜들어 허공에

   가위걸음을 떼었을 것이고

   땅을 짚으려던 팔은 채 내려가기도 전에

   겨울하늘을 들어올리며 떨어졌을 것이다

   땅바닥에 바싹 붙어 있었을 미끈미끈한 빙판길은

   일자로 떨어지는 등허리를 우지직 받았을 것이다

   우지직, 금이 갔을 등허리뼈 사이로는

   차가운 공기가 집요하게 파고들었을 것이다

   정신을 놓친 머리는 얼음에 머리를 식히며

   가장 편안한 상태로 한참이나 쉬고 있었을 것이다

   찰나의 순간, 질끈 놀란 눈을 가려주었을 눈꺼풀은

   놀란 눈동자를 깜박깜박 닦아보았을 것이다

   소름끼치는 몸을 일으켜야겠다고

   가까스로 들어온 생각이 생각했을 때

   몸은 어거지를 피우며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소리를 질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을 입은

   떨리는 입술을 벌려보았을 것이다

   아앗 하고 소리질러야 할 입 대신

   쿵 하고 소리를 질렀을 뒷머리,

   새소망병원 413호 침대 위에 뉘이고 있다

   일 안하면 안달날 수밖에 없는 늙은 여자

   금가고 벌어진 등허리뼈를 일으키려고

   칠순에 닿은 어머니가 까친 손을 내미신다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 중에서

   쓸쓸한 접촉

     일 갔다가 편도 일차선 도로에서 사고가 났다 상대편 트럭 네 바퀴 모두 중앙선을 넘어와 내 차를 치고는 다시 중앙선을 넘어갔다 번뜩했다

     경찰차가 줄줄이 왔다 상대편 트럭 운전수는 내가 트럭을 치고는 다시 중앙선을 넘어갔다고 우겨댔다 아까부터 보고있던 옆자리 노스님이 운전수 얼굴에 침을 뱉으며 한마디 하신다 야 씨발 개새끼야

    상대편 보험회사에서 입원비도 내주고 차도 고쳐주고는 기십만원을 통장에 넣어주었다 마침, 뒷목과 어깨와 엉치뼈는 결린 안부를 전해오고 월급은 석 달째 깜깜무소식인 터이다 몸 푼 아내와 같이 맡겼던 갓난아이 찾으러 처갓집에 가야 할 터이다

     장모님 이거 안 받으시면 딸도 외손주딸도 안 데려가요, 암것도 알 리 없는 아내와 세이레 된 어린 것을 받아안고 처갓집 나선다 셋이서 살 비비면서 집으로 간다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2011) 중에서

     박성우시인을 읽고 있었다. 함께 있는 라디오가 온통 눈 소식이다. 제시간이면 당연하게 나올 목소리가 바뀌었다. 신년 휴가인가 생각할 찰나, 도로에 묶여서 꼼짝 못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함박눈은 펑펑 내리고 한파경보가 내렸다. 지금 길에 있을 이들 생각에 걱정들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모두, 무탈했으면. 속 없이 눈 오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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