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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에세이스트의 책상
배수아 [문학동네(2003)]
몇 년 동안 책꽂이를 장식하고 있는 배수아의 책, 세 권중의 하나다. 어느 해인가 이제 배수아를 읽어야지 하고 들여놓고 팽개쳐두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어진 책꽂이 파먹기의 일환으로 올해의 시작에서 과감하게 뽑았다. 책은 단단하고 반짝이고 손에 잡히는 사이즈여서 제본이나 판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까지 산문집이리라 생각했던 책은 소설이었다. 표지에도 분명히 '배수아 장편 소설'이라 적혀있는데 '에세이스트의 책상'이라는 제목만 읽고 그리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읽은 지 몇 분 만에 소설인 거야, 에세이 같은데 했다. 산문이든 소설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안 읽혔다. '더 많은 음악,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에서부터 읽는 스텝은 꼬였다. 얼굴 없는 기사단장이 목소리만으로 음악을 표현하고 있는 듯 글이 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귀에 꽂혔다. 단어들이 붕붕 날아서 제멋대로 귀에 들어오는 바람에 한참만에 낱말은 문장이 되어 뇌에 전달되었다. 50페이지쯤에서 읽기를 멈추고 싶었다. 포기할까?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실함이 이겼다.
"그곳은 병원에서도 중환자들이 오는 곳이었어. 아니, 중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더 이상은 치료해봤자 소용없다고 판단한 사람들 말이야. 병이 위독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질병이나 그것을 위한 치료 과정을 감당할 수 없게 쇠약하기 때문이지. 혹은 별로 그럴 필요가 없거나 말이야. 그러면 그대로 끝이야. 그냥 침대에 누워서,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 거라구.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아무도 없어. 거기서 난 매일 아침 수십 명의 나이 든 여자들의 배설물로 더럽혀진 아랫도리를 씻어내줘야 했다구. 상상할 수 있어? 그런 기분 말이야. 단지 기분뿐이 아니고 그 아랫도리 모양하고 냄새란 정말 실제적이지. 게다가 그걸 봐야 한다구. 그냥 샤워기로 대충 씻어내는 것이 아니고 손을 이용해서, 왜 화장실 변기 솔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지 모르겠어. 깨끗하게 씻어내도록 교육받은 거야. 난 지금도 모르겠어. 나이 든 여자들의 성기가 왜 그렇게 큰지 말이야. 탄력은 하나도 없게 말라붙어서 쭈글쭈글 한데 씻어도 씻어도 끝이 없게 커다란 거야. 거짓말 보태지 않고, 거인의 덧신처럼 시커멓고 크다구. 남자는 거의 없어. 대부분 여자들이야. 아마 여자들 평균수명이 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운이 없게도 죽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모르지? 뭐, 육체적인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아가야 하니, 누군들 괴롭지 않겠어? 그러나 물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 말고 그들이 달리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그러니 누군가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반드시 도와줘야 해. 그러나 일단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끽, 간단하게 끝나는 거야. 약 먹은 벌레보다 더 쉬워.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사회봉사 요원들이 뛰어들어가서 농담을 하면서, 그 구역질 나는 자리를 치우고 나면 다시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는 거야.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은 그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역시 젊은이에게는 역겨운 일이었어, 우웩."[p67.68]
주인공 화자가 잠시 머물고 있는 집 주인 요아힘은 사회봉사 요원으로 군 복무를 대신할 때 양로원에 소속된 노인 병동의 경험을 저렇게 풀어놓고 있다. 헉~! 우웩이다.
"너 혹시 그 책을 알고 있니? 엄청나게 길고, 지루하기는 라틴어보다 더한데 분명히 다 읽은 다음에도 무슨 말인지 전혀 생각나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는 그런 내용이지. 그런 작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따로 있는 것이 분명해. 교묘한 속임수를 써가지고서는 돈을 벌어들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분명히 같은 독일어인데 이렇게 순식간에 까맣게 잊어버리게 한다든지 의미가 모호한 말들만 사용하는 그런 책을 쓸 필요도 없을 거야. 뭐가 뭔지 모르게 하려는 수작이 분명해. 왜 엔지니어가 되려는데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일단 작가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려는 속셈이 아닐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전혀 없잖아." [p66]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요하임은 이렇게 평했으니 그가 어떤 감수성을 가졌는지는 짐작했어도 스무 살이 갓 넘은 청년의 시선으로 만나는 나이 든 사람, 아니 의사도 포기한 늙은 여자 사람을 객관화시킨 신랄하고 역겨운 표현들은 적나라해서 섬뜩하다. "진지한 시선이 결여된 정신은 부패하는 고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고 요아힘을 평하는 M의 의견을 참고해도 우리 주변의 무수한 요아힘들 생각에 두렵다. 늙은 사람뿐만 아니라, 화풀이 대상으로 학대받는 아이들, 사람은 아니고 여자로만 취급받는 여자 사람들, 이 혹독한 추위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몸을 접고 눕히는 많은 이주민 노동자들과 출근은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많은 이들은 불시에 저런 말들로 공격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숨어서 관찰하는 요아힘을 만나고 있다. 사고력의 단순성과 협소한 지평, 왜곡되고 편향된 인식의 틀에 갇힌 세계관을 진리처럼 설파하는. 도처에 공포가 포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여기서부터 진도를 쭉쭉 나간다. 역시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이 책 속에서 차례로 나타났다가 보이지 않게 창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문장들은 아름다우나 간단하지가 않았고 나로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단어들도 빈번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여러 개의 부속 절을 포함하고 있는 문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르는 단어들을 문맥 안에서 추측하기 위해서, 나는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몇 번이고 읽어야 했다. 그렇게 집중하면서 점점 책 속에, 정확히 말하면 그 문장들 속으로 빠져들어갈수록 나는 더듬거리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도 소리를 내어 읽기도 했다. 나는 내가 읽으면서도 동시에 듣고 싶기도 했다."[p81]
[책 읽어주는 사람]을 읽는 장면이다. 아직 독일어에 서투른 주인공에게 요아힘은 독일어 선생으로 M을 소개해 준다. M은 요아힘의 설명에 따르면 음악에 미친 언어학자다. 독일어 선생인 M은 예상과는 다르게 첫 만남부터 책을 아무 곳이나 읽어보라는 것으로 수업을 시작한다. 처음으로 독일어 책을 만나서 더듬더듬 읽어도 개의치 않고 계속 읽을 것을 요구하는 선생 앞에서 당황했던 책 읽기를 혼자 읽으면서 이해하고 납득하는 부분은 어쩐지 알 듯도 했다. [책 읽어주는 사람]이 내가 영화로 본 [더 리더]와 동일한 책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었다.
"M이 나에게 가르쳐주려고 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의 절대 보편적인 개념, 이 세상의 수없이 많은 자국어로 다르게 불리는 정수의 개념, 그런 것이었다. 그것은 국적이 없으며, 나라를 만들지 않고 핵심에 가까운 만큼 분화되어 있지 않고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가 지극히 포괄적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며 그리하여 방대한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에 간단하게 몇 가지로 만족하므로 표면적으로는 미개해 보일 수 있으므로 M은 그것을 '야만인의 언어'라고 불렀다.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결국은 자국어의 경계를 넘어서서 사고하는 일이며 (외국어를 배운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성장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것은 단지 언어만이 사고(소통이 아니라)의 명확한 도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87]
언어를 알게 된다는 것은 그렇게나 사고를 확장시키고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책 속 화자가 작문을 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것이었을 거고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책을 펴낸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언어를 매개체로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 그 정의는 항상 애매모호함 속에 갇혀 있고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무책임하고 뻔뻔스러우며 변명을 좋아하고 천천히 사라진 다음에도 끈질기게 발언의 기회를 노리면서 모양새를 망가뜨리고 히죽거리고 킬킬거리고 새끼 밴 암컷보다 더 배타적이며 게다가 장황한 목소리가 부끄럽게도 한창때의 장미꽃보다 더 빠르게 잊혀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고 지나간 다음에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 M의 가슴 위에 고개를 대고 비가 내리는 들판 저 너머로부터 들려오던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다. 소리를 내는 마른 풀들, 키 작은 덤불들, 지평선으로 보이는 보랏빛 숲의 그림자, 짐승의 발자국들, 가지를 베어내고 남은 자리들, 추위 때문에 금방 푸르게 변한 맨발들, M의 젖은 눈썹, 해독할 수 없는 지도,"[P113]
'사랑은 쉽게 부정되고'로 시작하는 저 긴 문장은 다음 문장들을 시적 언어로 치환하는 역할을 한다. 조금 지루하다 싶은 호흡이 긴 문장을 쓰는 일도 놀라운데 다음 문장들의 시적 감각이라니 그저 감탄한다. '차갑고도 차가운 비의 발소리를 듣는' 것은 들판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래 같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했지만 이별의 예감에 행복하기보다는 초조한 사랑에 빠진 이들의 박자로 부르는 노래가 들려온다. 초조와 조급함은 파멸을 부른다.
"음악회가 끝난 후, 슈베르트 애호가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 프란츠 슈베르트가 다른 예술가들의 삶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봐도 짧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평생 동안 가난했으며 무명이었고 무엇보다도 키가 작고 뚱뚱했다. 남아 있는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단지 미남이 아니라는 것뿐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둔하고 우수꽝스럽게 보이기조차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아노를 연주한 음악가 답지 않게 손가락은 '짧고 굵었'으며 심한 근시인데다 과음 때문에 원래 뚱뚱했던 몸은 점점 더 볼품 없어져갔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전혀 여자들의 마음을 끌지 못했다. 그가 성병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었다는 기록도 있다. 가곡 <겨울 나그네>가 최초로 불려졌을 때조차도 별 볼일 없는 것으로 평을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그 작품을 다른 어느 것보다도 사랑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들도 좋아하게 될 거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무시당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고 단 한 명의 후원자도 갖지 못했고, 혹은 원하지도 않았다고 하며 죽고 난 뒤 남긴 것은 초라하고 낡은 옷가지와 이불이 전부인 그런 인생을 가질 수 있었을 뿐이다. 그는 타고난 독학자였고 감성적이었으며 억제하는 낭만주의자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수줍고 뚱뚱하고 키가 작으며 근시인, 음악적인 격정에 사무칠 때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는 사람처럼 떨면서 키득거리거나 시력이 나빠 자신 없게 움츠러들기나 하는 가난한 젊은이를 만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우리가 추구하는 것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하는 휠덜린의 말처럼, 우리가 들은 그의 음악은 그의 전부이며, 그것을 사랑하는 나의 전부이고 온 영혼으로 말하는 쾌락이고 창세기와 묵시록,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이다.'
슈베르트 애호가는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말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진정으로 발견하게 된 팔 년 전 어느 날 이후 그는 사랑하는 것, 그 마음의 행위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시간의 풍경 위에 그대로 허공에서 멈추어버린 노란 비단 의상을 입은 니진스키가 별들이 되었으며 하늘에서 빛나는 그 별빛들을 처음으로 만났을 때 그 빛을 따라서 그 자신도 마침내 아무도 찾을 수없는 머나먼 우주의 먼지 속으로 흘러가버렸다고."[p128~130]
여러 음악가들이 나오고 더불어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을 텍스트로 차용하지만 슈베르트, 이 부분이 인상 깊었다. 어떤 이야기든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생의 어떤 시절을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가 나에겐 무엇보다 중요하다. 요아힘의 늙은이를 향한 능욕에 가까운 말들이 더욱 참혹한 것은 그들의 삶 전체를 부정하는 말 때문이다. 음악을 모르고 슈베르트도 모르지만 어떤 음악이든 듣는 것으로 하루를 채우는 라디오 키드이기도 하다, 나는.
"실제로 음악이 생생하게 연주되는 연주회장에 가는 것은 두근거리고 신비하며 특별하고도 뛰어난 경험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불안과 가슴이 조여드는 초조함과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을 망설이게 되는 팽팽히 당겨지는 신경증을 동반하기도 한다. 모든 연주회는 예외 없이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큰 극장에서 열리는 유명하고 이름 있는 연주자의 그것과 무명이고 아직 확증 받지 못한 실력을 갖춘 연주자의 것이다. 음악의 극치감을 만나는 기회는 전자의 경우에 더욱 확실하지만, 그것은 유감스럽게 더욱 큰 인파의 속성과 부딪힌다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기침, 인내심 없이 줄기차게 부스럭대는 소리, 조심성 없는 단체 관람객, 대개 한 번 정도는 울리는 전화벨 소리, 조바심치는 몸짓들, 만원인 카페테리아, 예매의 어려움, 연주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에서 머물다가 이윽고 건반을 떠난 다음에도 마치 마법처럼 오래 계속되는 그 진동과 여운 속에서 숨을 멈추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언제 그 화려하고도 고독한 극치감이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소음으로 방해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는 것, 그 두려움 때문이다. 게다가 소리에 대한 신경질적인 예민함은 스스로 증폭되면서, 관중들의 소음뿐 아니라 극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서 듣는 소리와 그렇지 못한 경우를 비교하게 되고, 무엇이 더 좋은지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알지도 못한 채 극장의 구조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게 되며 객석의 위치는 이런 각도의 위치가 좋은지 아니면 다른 각도를 시도해보아야 하는지 초조해지기도 하고 피아노나 음향장치, 진동, 연주자를 판정하게 되는 태도, 이런저런 헐뜯음, 시시콜콜한 비교, 어느 연주자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의 연주보다 좋았다든지 그렇지 못했다든지 혹은 이런 점에서는 이 연주자가 뛰어나다고 보여지나 다른 점에서는 저 연주자가 더 우수하다든지 하는 취향에 관련된 적의 섞인 악담이나 단지 비평자 스스로를 과시하기 위한 수많은 비판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속물적인 오만함에 가득 찬 음향학이나 구조학에 관한 평가들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실상은 음악을 가장 잘 듣기 위해서였을 이런 모든 노력들이 아마추어의 마음을 가진 소심하고 은밀하게 사랑하는 구애자들이 역설적으로 연주회장으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주저하게 만들게 된다. 물론 운이 좋아 순수하게 비밀스러운 희열만을 간작한 채 연주회장을 빠져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명성이 드높은 연주가일수록, 매스미디어의 애호를 받는 연주가일수록, 수식어가 많은 연주가일수록, 수상 경력이 화려한 연주가일수록, 연주 자체의 평가와 큰 상관없는 외적 요인들로 인한 불쾌감을 가질 확률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이름에 책임을 가진 연주자들,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연주자들을 만나는 것은 기쁨 중의 기쁨이다. 또한 그런 식으로 나는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잘 모르고 있던, 잘 알지 못하여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가들과 연주회장에서 불현듯 재회하기도 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거북함에도 불구하고 직접 연주회장을 찾는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어린 시절부터 큰 감흥 없이 들었던 리스트와 쇼팽을 새롭게 만났던 눈부신 경험을 가지고 있다. 벨라 바르토크와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도 마찬가지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소박한 연주회에는 또 다른 소박한 기쁨이 있다. 거대한 인파를 움직이는 장력에 의하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산책으로 느끼면서 연주회장을 찾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만나는 연주가 고급 귀를 가진 사람들을 언제나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가를 새로운 방법으로 만나게 될 가능성도 낮다. 그러나 깊은 가을 저녁에 교회의 바흐 음악회, 극장의 소강당에서 열리는 첼로 독주회, 피아노 오중주, 컴퓨터와 두 대의 바이올린에 의한 지극히 실험적이며 완벽하게 선율을 배제한 음악학교 졸업생의 작품, 열망하고 있는 젊은 연주가들,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 극장에서 쇼스타코비치를 멋지게 연주했던 현악 사중주단을 만나는 우연한 즐거움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것은 낙엽을 밟으며 하는 저녁 산책과 마찬가지로 너그럽고 여유 있으며 이름과 날카로운 독설에서 해방되어 있으며 자신과 세계를 돌아보고 정신의 어두운 곳에 도사린 비평가의 까다로움과 불안을 잊게 해주었다."[p160~163]
이 부분은 온전히 에세이로 읽혔다. 연주회장을 찾아가는 머나먼 여정을 함께 하는 듯 생생한 증언들이다. 책을 빠르게 읽는 편인 나는 이런 식으로 끄적거리고 옮겨 적으면서 몇 가지 달라진 점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중 하나는 전보다 확실하게 천천히 읽으면서 옮길 구절이 있는지 살피게 되고 이렇게 옮겨 적으면서(독수리로 까닥까닥 일일이 타이핑을 하면서)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이해로 읽히기도 하고 행간 사이의 내용을 새로이 알게 되기도 한다. 두 번째로는 책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거나 재미없을 때의 경우를 제외하곤 책 뒤편의 해설을 대충 넘겼는데 지금은 꼼꼼하게 읽는다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쓸까를 궁리하면서 책의 표지 디자인과 작업자의 이름까지 살펴본다. 결국 전에는 작가 한 사람의 작업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이 책 한 권에 담긴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나무의 목숨이 지나온 여정까지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옮겨 적은 이 부분도 그렇다. 어느새 연주회장 안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는 스스로의 약속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켜가고 싶은 좋은 영향력이다. 한 문장 한 문장 집중해서 아름답고도 낯선 문장들을 만나는 일이 이제 비로소 독서를 시작한 듯 새롭다. 이런 작업이 아니었다면 내게 이 책의 비중이 이렇지 않았을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내가 M에게 무엇인가 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내 책상은 그것이 어디에 있든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되었다. 동시에 나는 이미 나와 M 사이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글을 쓰고 있을 때는 마치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에, 그곳은 망각을 망각함으로써 위안을 얻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슬픔을 잊기 위해서, 더 이상 슬프지 않다는 그 사실을 잊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오후의 긴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처럼 허망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상실감을 동시에 갖는다. 불이 켜지지 않은 빈 방과 창가에 존재하는 부드럽고 먼 저녁 빛, 딱딱한 나무의자와 책상, 아무도 없는 방, 나는 책상으로 다가간다. 잠에서 깨어나 이미 잊었으나, 그토록 자신을 고백하는 꿈들은 아직 나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하늘에는 불타는 석양, 그리고 지상의 어둠, 그것의 시간이다. 그때 사물은 각자의 목소리를 가지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녁 하늘의 마지막 빛에 의지해서 나는 쓰기 시작한다."[P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