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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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역사의 쓸모

              최태성 지음 [다산초당(2019)]

 

  

   『이름 없는 의병들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도 있었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참 많아요. 하지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던진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그 아무개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였어요. 이 드라마의 메인 포스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위인 중심으로 돌아가는 역사에서 아무개들의 역사는 놓치기 쉬워요.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하는 의병을 볼 때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나도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저 위치에 있을 수도 있겠구나.' 솔직히 광개토대왕, 이순신, 김구 같은 위인에게 나를 빗대기는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그 주변 인물, 열심히 살아가지만 이름은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일생을 볼 때면 가슴이 더 찡합니다.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감동이 물밀듯 밀려온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이 시대의 아무개일 테니까요.[p37. 38]』

 

  <미스터 션샤인>을 좋아했다. 일 끝나는 시간이 불규칙해 제대로 보지 못해서 주말마다 마치는 시간이 되면 공연히 조바심을 치게 만든 드라마였다. 기회가 닿으면 띄엄띄엄 보는 감질나는 시청 후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휴일 이틀인가를 몰아서 꼼짝도 안 하고 16부작을 몽땅 보았다. 벌써 오래 전인데도 ost를 가끔 들으며 그 장면들을 떠올린다. 주조연 배우 각각의 연기도 좋았고 특히 누구랄 것 없이 그들의 대사가 좋았다. 그 시대적 상황과 캐릭터에 걸맞은 대사는 작가 '김은숙'의 걸출함 때문이었겠지만 발음이나 전달력은 말 그대로 쉽게 심금을 울렸다. 늘 세상의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산다고 적지만 그것은 포장지로 곱게 싼 이미지이고 실체는 여기에 등장하는 모두들보다 더 허접하고 구질구질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학교 여자배구부에 차출되었다. 새로운 규칙과 코트 안에서 공을 받으며 뛰는 시간들은 좋았다. 그런데 이유 없는, 아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려맞기는 억울하고 아팠다. 무조건 팬다, 그래야만 권위가 선다. 이게 그 당시의 교육 방식이었는지 무조건 패는 선생들이 많았다. 선생은 선생님이니까 포기하고 습관처럼 맞을 수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선배들의 탱자나무 몽둥이는 진저리가 났다. 한 학기를 채우지 못하고 배구를 그만두었다. (지금도 스포츠계의 폭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만난다. 시골 변방의 신생 배구부에도 저랬으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학교들은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5학년 때 담임은 '고전읽기부'로 나를 보냈다. 방과 후에 학교 대표 선수로 차출된 친구 몇이 남아서 김유신 장군' (그 유신의 시대에 걸맞은 위인이라 필독서였을 것이다) 과 '우리 겨레의 발자취'를 달달 외우다시피 읽고 선생님의 부연 설명을 듣는 과정이었다. 다음 학기에 군에서 열리는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시험 결과가 어땠는지를 잊은 걸 보면 뻔한 결과였을 것이다. 학교 파하면 바로 집에 와서 밭에 돌을 골라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엄마한테 맞춤한 핑곗거리로 집에 늦게 들어갈 구실이 생겼다. 그놈의 밭의 돌들은 밭 가운데 산을 만들도록 골라도 끝도 없이 나왔다. 논은 또 어떤가, 모를 심을라치면 돌에 손가락이 박혀서 모두 품앗이를 피하던 논을 몇 년 만에 작은 돌 하나도 없게 만들었다. 돌을 골라내는 일은 평생 땅에서 허리 펼 날 없었으나 한 뙈기의 땅도 갖지 못한 엄마의 억척과 한이 만들어 낸 결과다. 다음 목표는 밭이어서 엄마는 아침마다 학교 파하면 바로 들어오라고 노래를 하신 것이다. 끝내 돌밭은 옥토로 바꾸지 못하고 주인들에게 돌려줘야 했지만 그 시절엔 그것도 모르고 어스름 무렵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책을 읽었고 덕분에 역사를 좋아하게 되었다. 국사 시험을 잘 보게 된 탓인지도 모른다. 자신감은 잘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 엄마한테는 못된 딸이었는데 '매'가 '역사'로 이끈 것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생각과 그 생각을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안다. 저 시절에 살았더라면 나는 맞는 게 두렵고 싫어서 아무 짓도 못했을 거라는걸. 설사 그런 일에 참여했더라도 몇 대 두들겨 맞으면 전부 불고 말았을 거라고 가끔 후배한테 지나는 말로 그런다. 나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아무개다.

  누구나 아픔에 초연할 수 없을 것인데, 누구에게나 하나뿐인 목숨은 소중할 것인데, 고문 장면을 보는 것은 보는 것으로도 고통을 기억하게 하는 괴로움이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아무개들이 온갖 고문들과 역경을 헤쳤을 게 뻔한데도 저 한 줄의 문장으로 남았다. 거기에 담긴 커다란 울림이, 드라마 한 편이 주었던 온갖 희로애락의 위안이 책 속에 적혀있었다. 단박에 처음 알게 된 큰별쌤의 '역사의 쓸모'가 좋아졌다. 물론 처음에는 역사를 '쓸모'로 칭한 제목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갖고 있는 보리 국어사전에는 '쓸모'는 '쓸만한 데'라고 나와있다.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지 『역사의 실용적인 측면만 강조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합니다만 역사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은 일반인에게 역사를 학문적인 관점으로 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역사의 '쓸모' 보다 역사의 '실체'를 강조하는 접근은 역사로부터 대중을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p8]』라고 부연 설명을 해두었기에 '역사'를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통찰'을 위한 쓸모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책 속 1장의 제목이기도 한데 저 제목이 좋았다. 별 거 아닌 것이 아닌 별 것들에 담긴 감동과 기쁨을 알기에 그 제목을 사용하기로 한다.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도 많았고, 처음 읽는 내용도 있었지만 한 명 한 명 그들의 행보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저자가 존경하는 두 인물은 이육사 선생과 이순신 장군, 『이육사는 시인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무려 17번이나 감옥에 갇힌 열혈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수인번호 264를 필명으로 삼았죠. 무장 독립 단체인 의열단의 단원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자신의 청춘을 온전히 바친 분입니다.[p9]』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오히려'입니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어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순신은 누구나 싸움을 포기했을 상황에서 '오히려' 해볼 만하다며 의지를 다졌습니다[p10]』를 통해 '오히려'의 위력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신라 문무왕 때, 쇠뇌를 만드는 장인 구진천과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김육입니다. '대동법의 아버지'[p181] 』의 전 생애를 건 일화는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삶을 던져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했다. 또한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는 좋았다. 책 한 권을 통틀어 가장 큰 울림을 준 문장을 꼽으라면 바로 이 문장이겠다. 명심해야 한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을사오적 모두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은 그 시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들이었는데,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섰어요. 어떻게 될지 뻔히 알았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을사늑약에 찬성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역사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법관 중에도 그들과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독립운동가 박상진입니다. 우리나라는 2차 갑오개혁 때 재판소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법관들도 양성했는데 박상진도 법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습니다. 머리가 좋았을 뿐만 아니라 부와 권력을 모두 지닌 이름난 가문 출신이었지요. 1910년에는 판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평양 법원으로 발령까지 받았는데, 사표를 던집니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했거든요. …(중략 ) 일본 입장에서는 죄인이지만, 조선 사람에게는 영웅인 사람들입니다. 판사가 되면 이런 사람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거예요. 박상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심합니다. 이제 내가 앉을 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판사의 맞은편, 바로 피고인석이라고 말이지요.

  박상진이 판사를 꿈꾼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거예요. 판사라는 꿈을 드디어 이룬 셈인데 그걸 내던지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하지만 박상진의 꿈은 판사가 아니었어요.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이게 그의 꿈이었지요.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p208]』

  무수한 뉴스의 인물들 속에서 누가 명사를 지향하는지는 알겠는데 동사를 꿈꾸는 이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 혼돈의 무질서가 계속되는 정치권인가. '동사의 꿈'을 가진 그 누구를 지도자로 만나고 싶다.

 

  『역사는 흔한 오해와 달리 고리타분하거나 미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시대의 맥을 짚는 데 가장 유용한 무기이자 세상의 희망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죠.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우리는 늘 불안해합니다.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역사를 공부한 사람은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가 나아졌듯이 미래는 더 밝을 거라고, '나' 보다 '우리'의 힘을 믿으며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역사를 통해 혼란 속에서도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건 역사지만 결국은 사람을, 인생을 공부하는 것이라고.[p292]』

  책은 이와 같이 맺는다. 역사를 통해 사람을 알아가는 게 재미있다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폼 잡지 않아서, 무겁지 않아서 쉽게 권할 수 있는 역사를 향한 도움닫기용 책을 갖게 되어 기쁘다. 큰별쌤 (어쩌다 저런 어마 무시한 닉을 가졌을까 생각해 보니 그저 이름이다. 클 太, 별 星, 큰 별. 한동안 내가 갖고 있던 닉이 이름이었던 것처럼.)은 우리에게 현재를 살고 있는 많은 옛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품위 있는 선택에 역사적 사고가 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많은 사람이 현재만을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부정을 저질러서라도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서까지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근시안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건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아요. 역사적 사고란 역사 속에서 나의 선택이 어떻게 해석될지 가늠해보고,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해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에게 역사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본인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각이나 말, 의견이 누군가의 나쁜 선택에 힘을 실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p60]』

 

   『그런데 만약 일제 강점기에 외울 게 없다면 그 역사는 어떤 역사입니까? 고작 몇 개의 단체와 몇몇 사람의 이름만 존재한다면 말이죠. 그런 역사는 비겁의 역사입니다.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굴욕의 역사인 것이죠. 외우기 힘들 만큼 수많은 단체와 수많은 독립투사가 있기에 우리 근현대사는 살아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독립투쟁 단체들의 이동 경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한번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그들은 수천 킬로미터를 움직였습니다. 낮에 다녔을까요? 아닙니다.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서 밤에 다녔을 거예요. 평지로 편하게 다녔을까요? 아닐 겁니다. 역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험한 산을 행군했을 겁니다. 만주가 얼마나 추운 곳입니까? 그 추운 땅에서 칼바람을 맞으면서 다닌 그 길이 화살표로 그려져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 화살표를 그냥 화살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그들의 발자국을 봐야 합니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건 그들의 꿈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꿈이에요. 다음 세대에게는 식민지 조국을 남겨주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품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회영은 1932년 예순여섯의 나이에 상하이에서 붙잡혔습니다. 일흔이 다 된 적지 않은 나이에 모진 고문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지요. 마지막 순간까지 쉬지 않고 전 생애를 바쳐서 독립운동을 한 분입니다. 목적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사명과 의무를 다하다가 죽는 것이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p221.222]』

  춥다. 며칠째 폭설과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롱패딩 코트에 미끄러지지 않을 신발로 중무장을 하고 거리를 종종 걷는데도 길은 조심스럽다. 이 칼바람 속의 만주 벌판의 독립군을 생각해 본다. 조선희의 장편 소설 <세 여자>에도 이회영 선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무장 투쟁한 불굴의 조선의용군이 나온다. 역사를 걸어 나온 사람들은 거대한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 남의 나라에서 굶주림과 체포의 위험을 뚫고 저 엄청난 한파와 불투명한 오늘을 걷고 걸어서 여기로 오고 있구나.

 

  『기록에 따르면 정약용은 복숭아뼈에 세 번 구멍이 났다고 해요. 양반다리를 하면 복숭아뼈가 눌리잖아요. 책상 앞에서 그 자세로 움직이지도 않고 밤낮으로 글만 쓴 겁니다. 나중에는 복숭아뼈가 너무 아프니까 일어서서 선반 위에 책을 올려두고 공부하며 글을 썼대요.

  대체 왜 그랬을까요? 정약용이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궁금했습니다. 마치 기록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글을 썼으니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약용의 답변이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어요.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책을 쓰는 와중에도 정약용은 두 아들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썼습니다. 귀양살이 중이니 자식과 함께 생활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편지로 자녀를 교육하고 애정을 전했지요. 공부의 중요성부터 사대부 예법, 일상의 지혜 등 세세한 내용이 담겨있어요. 독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친구를 사귈 때나 시를 쓸 때, 벼슬살이를 할 때, 심지어 술을 마실 때의 법도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둘째 형인 정약전과의 일을 추억하거나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어 미안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중에는 폐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편지도 있습니다. 조상이 큰 죄를 지어서 그 자손들이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집안을 폐족이라고 해요.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가문이 몰락한 상황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금방ㄹ 나아질 거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관직에 나갈 수 없는 폐족일지라도 선비의 기상을 유지하는 길을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폐족끼리 무리를 짓지 말 것, 과일과 채소를 키우고 뽕나무를 심어 가난에서 벗어날 것, 벼슬을 하지 못하더라도 벼슬하는 사람처럼 나라와 세상을 위해 살 것……. 그중에서도 핵심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해도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요. "폐족에서 벗어나 청족이 되려면 오직 독서 한 가지 일뿐이다"라고 했지요. 청족은 대대로 절개와 의리를 숭상해온 집안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한 정약용 자신이 계속해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도 밝히고 있습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의 생각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자신을 죄인 정약용으로 기억할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겠다는 것입니다.

  출세의 길이 막혔다고, 죄인이 되었다고, 폐족이 되었다고 자포자기하여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정약용은 형조에 기록된 몇 줄짜리 글로 평가받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글을 남겨 후세의 평가를 받으려 했습니다.[p74.75]』

 

   『최초의 기술이나 최고의 기술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향력입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아이폰, 한글의 공통점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대중의 욕구를 발견해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보다 쉽게 소통할 수 있게 해주었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처럼 인간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는 행위는 결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수밖에 없어요. 아이폰 또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 기술로 후대에도 오랫동안 회자될 것입니다.

  한글은 민본의 글에서 민주의 글로 바뀌었습니다.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광화문에 정말 많은 사람이 촛불처럼 밝은 희망을 들고 모였습니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 들고 있는 팻말에는 모두 한글이 쓰여 있었어요. 세종대왕이 만약 그 장면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셨을 겁니다. 한글 덕분에 한결 쉽고 자유롭게 내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으면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조나 창의력을 말하면 사람들은 자꾸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고 해요.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도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열광하지 않으면 널리 쓰이지 않습니다. 저는 소수를 위한, 소수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술은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자유의 확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어요. 폭발력을 지닌 창조적 발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정한 창조인가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바탕으로 한 창조만이 오랜 시간 생명력을 가지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세상을 바꿔나갈 테니까요.[p116.117]』

 

   『저는 가끔 항복을 앞둔 원종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위기의 연속이었어요. '이제 고려는 끝났구나'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면 정말 고려는 끝났을지도 몰라요. 몽골제국에 편입되어 마치 섬과 같은 끄트머리 변방 땅으로 남았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원종은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지 하고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 얻어야 할 것을 빠르게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패를 이용해 그처럼 대담한 제안을 던졌지요. 그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에 고려는 계속해서 자치 국가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분명 원종의 외교적 성과였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협상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거래를 할 때, 업무를 정할 때, 연봉을 높일 때 등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협상을 합니다. 심지어 연애를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도 협상이 필요해요. 협상이란 상대방도 만족시키고 나도 만족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입니다. 내 것만 생각해서도, 상대의 것만 생각해서도 안 되죠.

  어떤 종류의 협상 테이블이든 그 앞에 나서기 전에 서희와 원종의 외교술을 떠올려봤으면 좋겠습니다. 배짱을 가지고 섬세하게 상대를 관찰하면서 본인의 패를 놓지 않는다면 결국 원하는 것을 얻게 되기라고 역사는 말하고 있습니다. [p132.133]』

 

   『정도전의 사상은 굉장히 급진적이었습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해서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노비들도 해방시키자고 주장했어요. 기득권 계층의 반발로 그 뜻을 다 이루지는 못했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시대를 앞서 있었어요. 정도전은 왕과 귀족만이 사람 취급을 받던 시대에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왕 한 사람이 나라를 좌우하는 전제 왕권을 경계하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하기도 했지요. 왕은 있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유능한 재상에게 맡기자는 거예요. 왕은 실력으로 뽑히는 게 아니니까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대단히 급진적이고 선진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가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배당하고 유랑하면서 만난 비뚤어진 세상에 문제의식을 느낀 정도전은 그런 세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고민했어요. 길고 막막한 인생의 터널에서 주저앉는 대신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고려 망해라!' 하면서 괴로워하고 술이나 퍼마셨다면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역사에서 잊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정도전에게 고려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사회도 행복하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부조리와 불합리를 목도합니다. 이럴 때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내가 졸업한 학교가 별로라', '우리 집이 가난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정도전처럼 시대와의 불화로 나락에 떨어졌을 때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 거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사회와 자신에 대한 인식과 비판의 불을 항상 환하게 밝혀놓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쉽게 좌절하거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는 대신 지금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눈에 보일 겁니다. 어쩌면 '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어려움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고요. [p177~179]』

 

   『한 사람의 성공 스토리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사고와 행동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장보고처럼 산다고 해도 장보고만큼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장보고의 성공 신화보다 그가 본 삶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어요. 노비에게서 태어나면 노비로 살고 육두품이면 끝까지 육두품인 거예요. 그런데 장보고는 달랐어요. 어려서는 타고난 한계를 뛰어넘고자 바다를 건넜고, 나이가 들어서는 단단한 신분제 사회의 벽을 두드렸어요.

  장보고는 자신의 굴레를 탈피하길 원했던 겁니다. 비록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시도를 했기 때문에 한중일 삼국에 이름을 남길 만큼 큰 인물이 될 수 있었죠. 저는 장보고가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장보고는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단점을 메꾸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최대 무기가 활쏘기라고 생각했고, 이를 내세워 한계를 돌파하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삶의 가능성이라고 하면 굉장히 거대한 말 같지만 사실은 몹시 연약한 말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의 가능성과 비교하면 상처 입기 쉽거든요.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는 없네'라는 시각으로 보면 삶은 쉽게 초라해지고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그래서 비교는 오로지 나 자신과만 해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낫기를, 또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거죠.

  우리 모두의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누군가는 그저 바라만 보고 누군가는 기꺼이 그 바다를 건널 것입니다. 삶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계기로든 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꼭 말하고 싶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 나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가능성을 불신하지 말라고. 그러니 우리 쫄지 맙시다. 이미 엉망이라면 바다에 발 한 번 담근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한 걸음 내딛어보자고요. [p201.202]』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살아낸 인물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부적으로는 다를지 몰라도 그 궤적은 같아요. 자기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 나갔던 사람들이거든요.

  저는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이런 분위기가 남아 있다고 생각해요.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다고 해서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어요. 아무리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이 부족하고 그 사람만의 무언가가 없으면 진정한 인싸가 되지 못합니다. 손에 쥔 것이 없어지면 전부 사라질 인기고 인영인 것이죠.

  오랜 시간 동안 존경받아 온 역사 속 인물들을 만나다 보면 자긍심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나 만나지 않잖아요. 역사가 증명한 사람들을 만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가다 보면 그들이 굉장히 단단한 중심을 갖고 삶을 살아 냈다는 걸 느낄 겁니다.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고 떳떳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죠.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보낸 시감을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입니다. 그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 앞에 놓인 시간을 어떻게 쓸지 생각하게 되니까요.

  자아정체성이 확립되면 다른 사람으로 인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내 존재를 긍정하고 내가 하는 일에 자긍심이 생겨요. 그렇게 생겨난 자긍심은 물질을 바탕으로 생겨난 자긍심과 달리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처받지 않을 힘이자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p24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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