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의 베개

                          박성우

 

   오지 않은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장 담그기

 

  짚으로 묶어 띄운

  메주 씻어 채반에 널었다

  주둥이 큼지막한 독을 골라

  찌끼 우려내어 닦아두고는

  빨간 함지에 감천 약수를 붓고

  천일염 한 됫박씩 되어 녹였다

  달걀이 엽전 크기만큼 떠올라서

  널찍한 덮개 닫아 먼지 막았다

  병술년 음력 정월 스무닷새

  말날(午日) 아침에 장 담근다

  꽃망울 툭 불거진 매화나무집

  장독대에 독을 걸고 메주 안친다

  무명천에 거른 맑은 소금물

  독 어귀까지 남실남실 채운다 둥실

  떠오른 메주에 소금 한줌 더 얹히고

  참숯 두 개 고추 대추 여섯씩 띄운다

  장독대 식구가 셋이나 늘어

  왼새끼 꼬아 금줄을 친다

  장 담그는 공부 가르쳐주는

  쥔집 할매의 잔소리가 여기서야 그친다

 

 

 

  싸전다리

  쌀 됫박이나 팔러 싸전에 왔다가 쌀은 못 팔고 그냥저냥 깨나 팔러 가는 게 한세상 건너는 법이라고, 오가는 이 없는 싸전다리 아래로 쌀뜨물같이 허연 달빛만 하냥 흐른다

  야 이놈아, 뭣이 그리 허망터냐?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봄, 가지를 꺾다

 

 

  상처가 뿌리를 내린다

  화단에 꺾꽂이를 한다

  눈시울 적시는 아픔

  이 악물고 견뎌내야

  넉넉하게 세상 바라보는

  수천개의 눈을 뜰 수 있다

  봄이 나를 꺾꽂이한다

  그런 이유로 올봄엔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여도 내가

  햇살을 간지러워하는 건

  상처가 아물어가기 때문일까

  막무가내로 꺾이는 상처,

  없는 사람은 꽃눈을 가질 수 없다

  상처가 꽃을 피운다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 중에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백석이 작품에서 모더니즘의 대척점에 위치한 것으로 간주되는 향토성과 지방언어를 완강하게 고수한 것은 복고주의나 지방주의로 전향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적 근대의 침식작용에 대한 면밀하게 계산된 저항이고 자기방어였다. 그렇다면 이제 박성우에게 토속주의와 전원문학은 어떻게 적극적으로 의미화될 수 있는가.

  지난 40년 동안 한국 농촌이 가차없는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져왔음은 바로 박성우 시인의 가족사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농촌은 산업자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어, 농업 자체가 자본의 하위산업으로 편입되어 있다. 때때로 농촌은 평택 대추리가 비극적으로 입증하듯이 새로운 탄압과 추방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대의 시인과 소설가들이 누구나 자본과 외세에 관하여 직접 언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과 같은 불행 속에서도 사람은 음식을 먹고 사랑을 나누며 일상생활을 이어가게 마련인데, 그 모든 것으로부터 문학은 태어날 수 있다. 다만 진정한 문학에는 시대의 고통을 느끼는 자의 벅찬 숨결이 불가결하게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시인 박성우가 그려낸 이 가없는 순정과 아름다움은 뒤집어보면 안주(安住)와 자족(自足)에 머물고 있다는 뜻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해설 [슬픔은 영혼을 정화한다 -- 문학평론가 염무웅] 중에서

 

 

  시인의 말

  고맙고 고마울 따름이다.

  일터 내주고 밥벌이를 하게 해준 손길과

  한옥마을 단풍나무집 별채를 내준 손길과

  맘과 몸과 시가 쇠해졌을 때 다독여주는 손길들이 없었더라면

  시가 나를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세상과 고마운 마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요한 늦밤을 맞는 일 외에는 없다는 걸 고백한다.

                 2007년 3월

                       박성우

 

 

  시인의 말을 읽으며 생각한다. 좋은 사람 곁에 좋은 사람이 있는 거고 고마운 사람 곁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음을. 박성우 시인과 함께 있는 동안 자주 눈이 내린다. 지난주 폭설에는 '빙판길'과 '쓸쓸한 접촉'이었는데 오늘은 예정대로 '물의 베개'외 네 편이다. 사실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가뜬한 잠]에는 거의 모든 시편들이 좋다. 시집을 선물할 때 많이 선택되어서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으면 구입한 목록으로 뜨르르 올라온다. 특히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라는 마른 고추만 보아도 떠오른다. 그리고 시인의 고무신이 어김없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 대학로 행사에서 멀리서나마 시인의 낭송시를 들을 수 있었는데 연단을 내려가는 흰 고무신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시였는지도 잊었고 얼굴도 기억이 없는데 흰 고무신의 이미지만 둥둥 남아있다. 시집 날개의 사진을 보아도 그의 곁에 고마운 사람이 왜 많은지 알겠고, 시를 읽으면 더욱 알게 된다. 어떤 것이 진정성인지 그냥 알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은 시어들이 촘촘한 거미줄로 나를 옭아매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폭폭 나리는 눈, 속도 없이 좋기는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