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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ㅣ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평점 :
거미
박성우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새
공중에 발자국을 찍으며 나는 새가 있다
제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기 위해
지나온 흔적들을 뒤돌아보며 나는 새가 있다
그 새는 하늘에 발자국이 찍혀지지 않을 땐
부리로 깃털을 하나씩 뽑아 던지며 난다
마지막 솜털까지 뽑아낸 뒤엔
사람의 눈으로 추락하여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내가 그 새의 장례식을 치른다
저 하늘의 새털구름,
그 새의 흔적이다
찜통
내가 조교로 있는 대학의 청소부인 어머니는
청소를 하시다가 사고로
오른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셨다
넘실대는 요강 들고 옆집 할머니 오신다
화기 뺄 땐 오줌을 끓여
사나흘 푹 담그는 것이 제일이란다
이틀 전에 깁스를 푸신 어머니,
할머니께 보리차 한통 내미신다
호박넝쿨 밑으로 절뚝절뚝 걸어가신다
요강이 없는 어머니
주름치마 걷어올리고 양은 찜통에 오줌 누신다
찜통목 짚고 있는 양팔을 배려하기라도 하듯
한숨 같은 오줌발이 금시 그친다
야외용 가스렌지로 오줌을 끓인다
찜통에서 나온 훈기가 말복 더위와 엉킨다
마당 가득 고인 지린내
집밖으로 나가면 욕먹으므로
바람은 애써 불지 않는다
오줌이 미지근해지기를 기다린 어머니
발을 찜통에 담그신다 지린내가 싫은 별들
저만치 비켜 뜬다
찜통더위는 언제쯤이나 꺾일런지
찜통에 오줌 싸는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홀어머니
소일거리 삼아 물을 들이키신다
막둥아, 맥주 한 잔 헐텨?
다음주까정 핵교 청소일 못 나가먼 모가지라는디
친전
아버지께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인공호흡기를 뽑는 일에 동의했어요
병에 걸린 오골계의 맥풀린 똥구녕 같은
보름달이 떴어요
회백색 분비물이 제 얼굴로 쏟아지고 있어요
아버지 그거 아세요 오늘이 성탄전야라는 거
탄일종이 울리고 있어요
끝으로, 제 남은 생의 모든 성탄절을 동봉하네요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시집[거미(창비2002)] 중에서
젊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직접적인 현실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시편들은 대체로 아프다. 그 이유는 물론 크게 보면 우리 삶 자체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는 시인들의 내면에서 아픔이 깊이 가라앉아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생생하게 들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내면에 어찌 아픔의 정서만이 들끓고 있겠는가. 거기에는 아픔만이 아니라 외로움이나 슬픔, 분노, 고뇌 들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을 것이다. 젊은 시인들은 그들의 내면에 들끓는 이런 감정들을, 좋은 의미에서 제어하지 않는다. 제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거칠지만 생생한 감각으로 재현된다. 그중에서도 아픔은 살아있다는 것을 가장 실감 나게 환기시켜주는 감각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박성우의 시편들은 대부분 아픔을 그리면서도 그 아픔을 표나게 내세우지 않는다. 그것을 내면 깊숙이 받아들여 묵묵히 견디는 자세를 보여줄 뿐이다. 좋게 말해서 의젓하고, 어찌 보면 애늙은이 같은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낯설기조차 하다. 그는 벌써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예 유희나 혹은 초월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쉽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의 지리멸렬함을 다 알아버린 자이면서도 또한 그것을 견디는 자이기 때문이다.
해설 [세상의 상처에는 옹이가 있다 --- 강연호 시인] 중에서
시인의 말
쓸쓸하고 지루한 날들이었지만
고만고만하게 견딜 만했다
애벌레의 상태로 첫 시집을 묶는다.
이제 내 손을 떠나는 시들이므로
나비가 되든 나방이 되든 어쩔 수 없으리.
흙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여전히 나에게 몸으로 책을 읽히시는 어머니께
이 시집을 바친다.
2002년 8월
석상마을에서 박성우
중대재해법에 관한 뉴스를 챙겨 보던 며칠, [거미]를 읽고 싶었다. 중대재해법과 거미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지만 뇌의 회로는 가끔 그렇게 작동 된다. 그렇게 잡은 [박성우] 시인에게 며칠을 갇혀지냈다.
우선 먼저 거미를 보낸다. [거미]는 시인이 2000년에 신춘문예 당선 시인데 이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거미줄에 갇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시집에 실린 시인의 앳되고 맑은 표정에 슬그머니 웃어본다. 젊은 시인이 중년이 되고 여전히 가난한 가장으로 고군분투하는 시편들을 만나고 난 다음이어서일까, 새 시집이 묶여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기대해본다. 시를 써서 밥 먹고살기는 영 그른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 속에 가득 담긴 가난함에는 구질구질함이 없다. 가난이야 지긋지긋한 환멸이지만 오래 된 일기를 다시 읽은 것처럼 아릿하다. 가난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애틋한 과거를 만난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지만.
이걸 쓰는 동안 라디오에서는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리처드 막스의 One More Time 내가 해야 할 일도/ 내가 가야 할 곳도 없어요/ 내 삶 속엔 나를 제외하고…… 애절하다. 이미 지나간 것들에 '한번만 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