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최애 소설가, 정찬을 드디어 만난다.


양의 냄새 


그를 만난 것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8년 1월 20일 저녁이었다. 룰렛테이블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를 보았다.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을 쓴 그는 룰렛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않았다.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도박은 사람의 본성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정교한놀이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해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쾌락이 보이지 않았다. 쾌락 대신 슬픔이 얼굴에 비쳤다. - P9

사람은 동물 가운데 표정을 가장 풍부하게 짓는 존재다. 한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문명의발전으로 표정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 사람의 얼굴이 가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면의 얼굴은 마음을 숨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 - P11

음의 상태와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런 가면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가면 뒤에 다른 가면이 있으며, 그 가면 뒤에 또다른 가면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요구한다.
카지노는 가면을 벗기는 공간이다. 일상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놀이의 세계이다. 놀이 세계에서 가면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다. 사람의 민얼굴을 볼 수 있는 희귀한 공간이 카지노인 것이다. 카지노가 얼굴 연구자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공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카지노는 ‘얼굴연구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게 객실과 함께 CCTV실 출입증을 제공했다. - P12

히스 레저가 뉴욕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은 그날로부터 이틀 후인 1월 22일 오후 3시 30분경이었다. 뉴스로 그 사실을 알았다. 뉴욕 경찰청은 히스레저의 집에서 여섯 가지약물을 발견했다면서, 마약 같은 불법적인 약은 아니었다고발표했다. 2월 초순에는 뉴욕 병원이 검시 결과 약물 과량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너무나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는 스물여덟살 청년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생의 곁에 싸여 백년을 넘게 산 늙은이처럼 보였다. 죽음이 어쩌면 그에게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 P36

새의 시선 


박민우가 손목 관절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것은 2010년12월 중순이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서른일곱 살의 건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고 언제부턴가 목과 다리에도 통증이 일어난다고 호소하더니 급기야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정도로 근육 마비 증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한 달 후에는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정형외과 과장이 나를 찾은 것은 박민우의 상태가 병리학적으로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장은심리적 충격과 고통, 욕구 등이 신체의 이상 증세로 발현하는전환장애가 아닌가 의심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혔다. - P39

그는 나의 생각을 정확히 짚었다. 카메라를 쥐는 행위,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손의 동작이다. 사진 예술의 기본 행위가손의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손목 관절 통증은 기본 행위를 못 하게 함으로써 그를 카메라에서 해방시킨다. 하지만완전한 해방이 아니다. 손목 관절 통증 속에서도 카메라를 쥘수 있고,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그러나 근육 마비는 다르다.
찍는 행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와의 첫 대화에서 사진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카메라의 무거움은은유적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전환장애의 요인들이 너무나 다양한 데다, 사진에대한 나의 편애가 생각을 그쪽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3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기억이 영화의 주인공이니까요."
"선생님에게 기억이란 무엇이죠?"
"어떤 정신분석가가 말하길,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실을 덮어버리는 일에 뛰어난 전문가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진실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바꾸어도 되지요. 저 영화가 관객에게 괴로움을 불러일으켰다면 인간의 그런 속성을 거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도 괴로움을 느꼈습니까?" - P48

잠시 후 그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가만히 섰다. 불안정한 자세이긴 했지만근육 마비 환자가 섰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모르는 어떤 존재를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데도 그의 몸이 수많은 움직임으로 들끓고 있는 듯했다. 몸 안에서 들끓고 있는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시작한 것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슬픔으로 변하면서였다. 괴로움에 싸인,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픔이었다. - P51

인터뷰어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그는 끝까지 침묵했다.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는지 시선을 그의 뒷모습, 열린 대문과 그 너머의 풍경으로 이동했다. 불길에 사라진 자식을 기억해야 하는 그에게 침묵은 기억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을 것이다. 김세진은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 P56

공허해 보이던 그의 눈이 고흐를 말할 때 잠시 빛났다.
"고흐가 동료 화가인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최근에 그린 풍경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고흐는 그 풍경화를 언덕 위에서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풍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흐가 단순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새의 시선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 P59

새의 감각을 갖는다는것은 새의 영혼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고흐의 그 풍경화를 들여다보면서 새의 감각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감각은어머니 몸속에서 형성됩니다.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빚는 율동에 싸여 먼 우주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순수한 감각을 깊이꿈꾸면 새의 감각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P60

내렸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박민우는 완전한 움직임이 주는 기쁨에 취해 추위를 잊고 있었을까. 아니면 누런 피부 밑에 숨겼던 두려움에 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까. 불현듯 나자신이 낯설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나라는존재가 세상과 우주 공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를 낯설게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낯선 대상이 되어버린 그전의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강렬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검은 물처럼일렁이는 의문 속에서 나는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새의 시선이었다. - P78

사라지는 것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나는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5시 30분 장터목대피소를 나와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종주 마지막 날이었다.
3월 하순 모 문학관에서 전화가 왔다. 4월 18일 작고 문인추모 행사에 소설가 박영도를 선정했다면서, 그와의 추억을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문학 선배이기도 한 그와는 여섯 살 차이지만 안산 예술인아파트에서 이웃으로 6년 가까이 살면서 추억이 많았다.
문학관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박 선배가 세상을 떠난 지어느덧 8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가 그의 마지막 나이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P81

세월호 침몰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천왕봉을 내려와 치밭목 대피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10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어떤 등산객이 알려주었다. 제주도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그 여객선에 타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술인아파트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였다. 단원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화가 김홍도의 호인데, 안산과 연고가 있는 그를 기려 안산시 단원미술관을 만들었고, 단원미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 P82

형조는 몽롱한 눈빛으로 갯벌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가 1986년 가을이었으니 내가 살아온 생의 반 가까이흘러간 것이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사리포구의 사라짐이었다.
사리포구가 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수가 사라진 것은 본 적이 있다. 예술인아파트 뒤쪽 들판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곳을 자주 찾은 것은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있는 물의풍경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낯섦이었다.  - P86

"고흐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했어. 일상의 시선으로는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던 거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보이는 것을 뚫어야 하겠지. 보려고 하는것을 막고 있으니까. 사물과 풍경, 인간과 역사를 뚫는다는것이 나에겐 아득해."
그의 눈빛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고흐가 자살한 것은 필연이었을까?"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막대기와 이젤과 캔버스와그 밖의 다른 그림 도구들을 잔뜩 짊어진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이 자신이라고 했어. 그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의 사내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곤 했어. 목적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걸음을 멈추어야겠지. 하지만 사내는 멈출 수 없었어.
머물 곳이 없었으니......" - P90

형조가 새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숨을 거두기 35일 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파괴적으로 술을 마셨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차명아가 못 마시게 하면 나가서 마셨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차명아의 말로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돌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술도 멀리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불길한 예감도들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닌가 하는 당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06

나는 그녀가 잘 견디고 있느냐고 물었다.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서 김윤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득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깊이의 허 - P106

공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명아가 앞으로 겪어야할 고통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 P107

식사를 마치고 별실에서 나왔을 때 식당 홀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에 "여객선 침몰 특보, 세월호 선체 완전 침수"라는자막이 보였다.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일행을 따라 식당을 나왔다. 박 선배 부인은 아들 차로 귀가한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어두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형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었다. 그가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내 눈이 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리포구 언덕에서 형조와 함께 보았던 별들이 아른거리면서 형조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나무처럼 서서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날개를 활짝 펼쳐 별을 향해 날아가고있는 한 마리 새를 찾고 싶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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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지 ~!
뭔가 미진한... 마침표.
막 음악에 빠져들고 있는데,
아직 덜 들었는데,
갑자기 광고가 튀어나오는 라디오인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꾸 뒤 페이지를 찾게된다.
이렇게 마친건가.
다음 권을 위한 장치라 해도 얍삽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몇군데서 인쇄 상태가 진하다 흐리다를 만났어도 정희진이기에 문제 되지 않았는데 마무리는 아쉽다.

오늘 별스럽게 고된 하루였는데 아주 잠깐씩의 책 펼침도 이렇게 아쉽게 되었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







문명은 융합의 산물이며 이미 세상은 융합되어 있다.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현실을알 수 없는 이유다. 코언 형제의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독일의 프리츠인가 워너인가 - P145

하는 학자의 이론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과학적으로 테스트하려면 관찰을 해야 하는데 관찰을 하면 관찰을 하는 행위 자체가 현상을 변화시킨다는 거죠. 그래서 현상의 실체를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현실은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매 순간 변화하고 이동한다는의미에서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새롭다. 그러므로 융합 그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무조건 추구할 가치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진짜 융합은 인간의 필요에 따른 대단히 목적의식적인 작업이다. 안보 신화를 종식할 수 있는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논리・・・・・・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 융합이다.
융합은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다. - P146

지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융합‘은 융합의 반대말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융합 개념은 ‘절합(折合, articulation)‘에 가깝다. 모든 질서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이 단어는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 흔히 쓰이지만,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단어는 관절(joint)이란뜻의 라틴어 ‘articulus‘에서 온 말이다. 하나하나 구분되는 마디를 뜻한다.  - P147

하나로 화(化)하여 합친다는 ‘융합‘으로 차이를 분명히 하자는 ‘절합‘을 설명하려니, 다시금 아버지의 연장-언어의 식민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실천과 거리가 먼 단어는 ‘연대‘와 ‘성찰‘이 아닐까? 연대는 융합에 대한 최악의 이해다. 통용되는 연대 개념은
"우리가 99퍼센트(?)이니, ‘나쁜‘ 1퍼센트(?)를 제거하자"는 논리다. 문제는 99퍼센트 안에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의 교차 영역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한 가지 억압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노학 연대, 청년 빈민연대, 성소수자 연대, 사회적 약자와의연대…………. 그런데 연대 과정에서 각 집단은 등가 사슬(chain ofequivalences), 즉 하나의 ‘마디 (article)‘가 되지 못하고 약자는연대에 동원된다. 인구수가 많은데도 여성이나 장애인 이슈는대동단결, 일치단결의 ‘대의‘에 종속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대의를 약자와 대립시킨다. 예를 들면 "민족 문제냐, 여성 문제냐"가 있다(이 말 자체가 여성을 민족에서 배제한다). 장애인 문제는 시혜적이고,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다.  - P148

만물 중에 같은 것은 없다. 우주는 차이들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차이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건 의외로 쉽다. 사회가 선택한 차이만차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는 분업이나 차별이 필요할 때 발명된다. 그래서 어떤 차이는 다양성으로 인식되지만, 어떤 차이는 차별의 ‘이유‘가 된다.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언설이다. 이 언설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이때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정함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이다. 차이는 해소하거나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 P151

더구나 인류는 공통어가 없다. 외국어는 물론이고 수어, 방언도 존재하는데 이는 축복이다. 만일 한 가지 언어(지금은 영어)만 있다면 끔찍할 것이다(완벽한 지배는 완벽한 소통 상태일 때만가능하다). 또한 소통 불가능한 구조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마다젠더, 계급, 인종 등 사회적 위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이다. 저마다 자기 입장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을 내면화하는 통념과 상식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든, 모든 개인은 입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무섭다. 이것은 생각하지 않는 상태, 폭력이다.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 P153

우리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 놓여있다. 융합은 차이들을 재배치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기존 인식과 갈등 상황에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다른 목소리가 유리하다. 이것이 뉴 노멀이다. 뉴 노멀은 특정 시기에만 요구되는 기준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생명의 본성이다. 인생무상이다. 삶에는정상(正常), 노멀(normal)한 상태가 없는 법이다. - P156

당연히 하나의 기준(uni/versal)이나 다양한 기준(poly/versal)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와 ‘여러 개‘를극복하는 융합으로서 횡단의 정치(trans/versal), 연대의 정치(coalition), 유목적 사유(과정적 사유)가 등장했다. 이것이 융합이다. 니라 유발 데이비스, 퍼트리샤힐 콜린스, 로지 브라이도티가 대표적인 학자들인데 모두 페미니스트이다(이들의 책은 국내에 번역, 출간되어 있다).
"통일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것이다"(둘은 적대적 공존이라는 통치 세력 간의 ‘하나된 상태를 말한다)는 한국 현대사에 기록될 명언이다. 1984년에 창립된 여성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가 외쳤던이 주장을 생각하면 지금의 여성주의 언어는 후퇴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영어 표기(Alternative Culture)에서 보듯, ‘또 하나‘는 다양성 중의 하나가아니라 대안이라는 의미다. - P162

모든 지식이 저절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노력이 없 - P162

으면 보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 그래서 나는 보수의 반대말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진보‘도 공부하지 않으면 보수적, 방어적이 된다. - P163

하지만 세상은 복잡한 법. 인간사는 합리적이지 않고 법칙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없다. 아니, ‘해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할 수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나마 자기 갱신만이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 P167

 ‘독도‘와 ‘위안부‘는 다른 이슈다. ‘우리‘는 논쟁하지 않았다. 군 위안부 운동 논란의 쟁점인 ‘돈, 피해자, 조직, 역사 쓰가. 전반에 걸쳐 비위(非違) 제보가 넘쳤는데도 명백한 사실조차 발설이 금기시되었다. 금기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아무도!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은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 P170

실업, 기후 위기에 시달리고 미세 플라스틱이 몸에 축적되는시대에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나 엄청난 부자를 제외하곤 나이 불문하고 모두가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더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러니 누가 더 억울한가를 두고 경쟁하지 말자. ‘적‘은 따로 있다. 나는 조금은 비굴한 태도로 젊은이들에게 부탁한다.
당신들은 시간이 있지 않은가.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애정어린 조언을 잊지 말라. 나이 들었다고 모두 ‘설명충‘은 아니다.
당신들이 적대해야 할 이들은 청년층의 ‘취업‘을 ‘시간당 최저임금‘ 논의로 변질시킨 정치인과 자본가들이다. 사회 변화를 원하진 않으면서 당신들에게 아부하는 이들을 믿지 말라.
우리는 각자 나이를 감당해야 한다. 하지만 가난하고 나이든 이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다고 간주되는 이들을존중하자. 이것이 공정이다. - P177

문명은 여성의 타자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남성을 인간의 대표로 만들기 위해 다른 인간은 배제되어야 했다. 겉보기에 남성과 다른 존재, 타자(the others)가 필요했고 ‘바로 옆에 있는‘ 대상인 여성이 가장 적합했다. 백인과 유색인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것처럼 남성과 여성도 대칭적이지 않다. 단지 가부장제가 인간을 남녀로 구분했기 때문에 여성이 인구의 반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타자 중에서가장 큰 집단이기에 대칭적으로 보이기 쉽다. - P182

짧은 머리 여성과 김건희 씨를 향한 비난을 여성 혐오라고 보는 것은 환원주의지만, 세 남성의 결혼의 성격이 같다는 주장은 환원주의에도 미달한다. 성차별주의 같은 ‘쉬운 지배 이데올로기‘도 실천할 줄 모르는 분별력이 없는 경우다. 말로 인해 화(禍)를 부르거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일을 면하는 방법은 침묵뿐이지만, 침묵 여부를 결정하는 일도 판단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 P185

요약하면 융합은 원래 존재했고(혼종성, hybridity), 대화가 필요하며(learning), 기존의 지식을 넘어서야 한다(trans~). 물론세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경제학의 예를 들어보자. - P191

기본 소득은 지구 전체의 긍정적인 상호 작용을 위한 생명 자체의 권리이다. 기본 소득은 자본 중심이 아니라 자연 중심 글로벌주의의 일례다.
대개 기본 소득을 부의 재분배라고 생각하는데, 실은 사회적 관계속 존재 자체에 대한 대가다. 물론 그 액수는 사회마다,
구성원마다 다를 수 있다. 인간의 경제활동을 ‘노동‘보다 ‘기여분‘으로 논의하자는 것이다. 기본 소득을 받게 되면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은 손해본다고 생각하는데, 실상 임금 노동자의
‘억울함‘은 사회 전체의 부를 나눔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자본가의 횡포, 금융 자본의 ‘장난‘으로 인한 것이다. - P195

그런 의미에서 한글(Hangeul)도 전 세계 수많은 언어 문자중 하나의 지칭이지, 한글 자체가 우리글/말(이하 우리말)은 아니다. 아마도 외국인 유학생을 유치하기 위해서겠지만 최근 몇몇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대신 ‘한국어문학과‘라고 표기하는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과 한국어는 다른 단어다. 우리말은 ‘나(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현지어‘다. 한국어는 우리말의 일부일 뿐이다.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자주 하는 말, "한국어를 잘하시네요"와 "우리말을 잘하시네요"는 한국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가 맞다. ‘우리말‘에서 누가 우리인가?
‘우리‘는 이미 상대방을 배제한 말이다. 또한 칭찬일지라도 타인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는 표현도 실례에 속한다. - P204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인종, 계급, 젠더를 둘러싼 고정 관념이 있다. 물론 흑인, 여성,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편견이 강하고 대개 ‘생물학‘이 근거로 동원된다. 고정 관념에는두 가지로 대응이 가능하다. 하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차이는 개인차일뿐, 집단 전체를 특징지을 수 있는 동일성은 없다. 또 하나는 ‘현실‘임을 인정하고 이를 재해석하는것이다. 여성은 주차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는 그만큼주변을 살피는 안전한 운전자라는 의미다. - P210

우리가 아는 모든 지식은 자신의 입장을 경유한 부분적인 것이다. 진실을 전제하면 부분성, 상황성, 맥락성은 드러날 수 없다. 두 ‘백서‘의 사례 중에는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건도있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일, 무관심한 사건도 있다. 이것은 회색인의 관점이 아니라 나의 이해(利害)와 관련한 사안별접근이다. 그래서 내 입장에서는 사안마다 설득력이 다르고, 내가 아는 ‘팩트‘와 달랐다. 흑백으로 나누지 말고, 사안별 횡단이필요하다.
흰색과 검은색은 본디 명도 차이가 커서 조화가 잘된다. 색상 차이가 클수록 조화롭다. 그래서 도로의 위험 경고 표지는검은색과 조화롭지 않은 노란색을 사용한다. 중학교 미술 시간에 나온다. - P223

융합이 왜 융합일까. 융합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 자본은 융합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그대로인데 학생을 유치한다고 다양한 학과 이름을 만든다. 나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이를 위해 어떤실천이 필요한지를 아는 데 융합이 중요한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융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다. 가치관, 당파성이 문제를 인식하는 범위와 초점을 정한다.
문재인 정부 내내 우리 사회는 검사 한 명이 의제를 장악하고전 국민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공동체 구성원의 안목이 부족하면 이런 일이 발생한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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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에 아직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교육이나 환경 문제는 중대한 일이어서 당장 필요에 따르기보다는 멀리 보고 큰 틀에서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들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구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 언제 백년 후를 생각한단 말인가. 마르크스는 1883년에 사망했다. 마르크스의 사후 백 주년인 1993년이 PC통신 시대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 ‘발전‘ 속도는 얼마나빠른가. 백 년 전 지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매일 집계되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코앞의 뉴스다. 2021년에는 북미 대륙 서부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으면서 수백 명이사망했다. 교육이 아니라 하루의 생존이 큰일, 대계(大計)다. - P129

학교의 역할은 공부를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다. 학교는 ‘가정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돌봄 기관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가족도 학교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말 때가 왔다. 학교를없앨 수 없다면, 다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 P133

융합은 초월적 위치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합하는 관념이 아니다. 현실에서 출발해 (rooting) 필요한 실천으로 옮겨 가는(shifting) 이동의 사고이자 해결책을 찾는 전술적 사고(실사구시)다. 현실 인식이 너무 늦으면 우리의 자리(뿌리)는 썩는다. 이글은 "타인의 편집된 삶과 나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불행"이라는 문장을 읽은 후의 감상이다. 나는 근래 이보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통찰을 읽은 적이 없다. 앞에서 말한 김영우 작가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의 중학교 3학년 자녀가 쓴 글이다. - P133

방송인이나 정치인의 학위 논문 표절은 일상의 뉴스다. 청문회에서 표절이 문제 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사회는 표절을 관례(ritual)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통과 의례(ritual, ‘儀式)도 있다니! 의례가 아니라면 이 관대함을 설명할길이 없다.
대개 표절을 윤리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절로받은 학위를 근거로 삼아 방송에 나와 큰돈을 벌거나 평생 고용의 수혜를 입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행위가 아니므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학계의 표절은 대중적으로 잘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횡행한다. 관련 전공자들은 알고 있지만 동료를 고발해서 좋을 일이 없다. - P134

인생 공부를 포함해 공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상, 읽기, 여행, 경험과 그 해석, 인간관계, 쓰기………. 그중에서도 나는 ‘쓰기‘가 공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중 쓰기가 가장 어렵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수학 공부의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 P138

이럴때는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쓰다가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 틀(‘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애초에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다거나….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 P139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訓練)이라고 하는 이유다. ‘훈(訓)‘은 해석,
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몸에 도장을 ‘새길 만큼‘ 익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인생은 있지 않을까‘하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 P139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표절 문화는 우주로 떠나고 싶을 만큼의 절망이다. 한국 지식 사회의 절도 문화는 왜 이리 당당할까.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 - P140

"아버지(master)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이 말의 주인공인 미국의 시인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스트, 흑인, 동성애자, 유방암 환자로 살았다. 로드는 자기만의 언어로현실을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언어는 ‘중층‘의 억압 속에 살았던 로드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 P143

언어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매일 마주치는 삶의 장벽이다. 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희망을 걸겠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절망과 분노로 바뀌기 쉽다. 세상에서통용되는 말들은 대개 나와 무관한 이들이 만든 말, 소위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그런 말조차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인생이대다수다. "속 시원히 한번 말해봤으면" 같은 소망을 품어보지만, 그 말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도 문제다. 이 시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몸부림이 아닐까. 코로나 시국에 이른바 유명인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든 파티를 하든 누가 알겠는가. 그들 자신의 업로드로알려진다. 욕을 먹어도 좋으니 자기를 봐 달라는 이들의 표정은행복하다. - P144

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니 ‘아버지의 도구‘조차 제대로 그 기능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연장‘일까.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단어가 산더미다. ‘노동 시장 유연성‘
‘성희롱‘ 같은 노동과 젠더에 관한 번역어들은 현실을 완전히왜곡한다.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검열과 사회적 검열까지 겹치면 침묵이 답이다(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내게 침묵은 완벽한 좌절 혹은 들끓었던 몸이 소진된 상태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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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 P1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P17

사람의 금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매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욕탕에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젓ㄴ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다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족히 사 미터가 되는 길 걷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집에 앉아 정신 놓은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 P46

퀘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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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잘 읽혀야 한다. ‘위대한소설가‘가 아니라면 문장이 짧고 간결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수식어, 감탄과 개탄 같은 ‘감정적인 표현, 작은따옴표도 자제할수록 좋다.
이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을자제하는 일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작은따옴표는 중요한 문제다. 작은따옴표는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표식이다. 글쓴이는 작은따옴표를 표기함으로써 사용하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공지한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는 - P113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작은따옴표가 들어간 ‘자유‘일 수밖에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문장은 온통 작은따옴표투성이가 될 것이다. 작은따옴표는 읽기를 방해한다. 독자를 생각하는 읽기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문장을 지저분하게 만들기 쉽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원래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였지만 작은따옴표를 생략했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 혹은정명(正名)을 거부하는 경합하는 언설이다. 논쟁도 익숙해야 가능한데 일단 이 세 가지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다. 내용을알기도 전에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 사상들은 왠지 기력이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 우연히 어느 경제 전문지에 실린 한 경영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 글에대한 이야기였다. 내 글이 이상하다는 요지였다. 발전주의를 향한 나의 문제 제기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그 글에서는 비판이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대한민국에 경제 발전을 싫어하는 이도 있다니・・・・・."). - P114

법과 문학은 여성과 법, 흑인과 법과 같은 위상의 언설이 아니다. ‘법과 문학‘ 같은 주제에도 글쓴이의 관점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문학은 불법 행위의 구성 요건이나 형량을 좌우하는 영역은 아니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 융합에필요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학과‘
‘환경대학원‘ 등 전공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의 경우
‘북한학‘이 운영되고 있어 더 복잡하다. - P117

융합은 정치(학)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접속이되, WAF처럼 목적이 분명한 사회 운동이다.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융합인가, 증오와 파괴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융합인가. 내가지향하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공통점은 모두 발전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이다. 발전주의는 부국강병주의, 즉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을 부추긴다. 강자들끼리 경쟁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발전주의의 결과가 지금의 팬데믹이다. 코로나 블루는 이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울감이지 ‘증상‘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의 경우 수도권 인구 분산이라도 해야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다. - P119

미국에서 9.11 사건이 벌어졌을 때, 텔레비전에 나온 어느여성 노인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부자입니다. 너무 많이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를 나누고 타인을 향한 증오를 멈춥시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요약한다. - P119

마르크스주의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근대 발전주의의 일환이었다. 발전주의적 사고를 누가,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K-방역‘과 백신 개발 모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 P120

학교와 군대는 근대 초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훈련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계가 일자리를 차지해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 물질숭배, 첨단산업의 지속적인 등장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자연파괴다. 환경 파괴로 인한 고통도 가난한이들의 몫이다. - P123

영어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자 근대성의 요란한 흔적이다. 영국의 지배로 시작된 영어의 세계사적 등장은 북미 대륙을접수했고 이후 맥도널디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불리는미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영어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번역 기능이 있긴 하지만 매일 전 세계 수십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영어로 된 구글 문서를 찾는다.  - P123

‘모든 권력은 끝이 있다. 팍스 로마나는 망했고 팍스 아메리카나도 망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망해도 영어는 안 망한다.
영어로 쓰인 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 권력이다.
내가 아는 한 인문·사회·문학 분야에서 미국은 지식 생산이가장 활발한 나라다. 그들은 지식, 돈, 무기를 다 가졌다. 특히지식은 자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 중의 자원이다.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도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고 많은 진보 담론이 미국에서 생산된다. - P124

미국 내 대학을 제외하고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계열 불문하고 미국 박사 취득자의 출신 학부 1위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있는 서울대다. 사실, 이 부분이가장 놀라운 일이다. 미국 전체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에 이어 두 번째다. 중국과 인도가 그 뒤를 이었지만, 세 나라의 인구 비율을 고려할 때 이는 ‘편향‘ 정도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한 주(州)다. 미연방 대접을 받지 못할 뿐이다. - P125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못하면 취업과 진학에 지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능력은지식, 교양, 학력(學力)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와 직결된 업무를 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반인‘에게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 "외국인에게길 안내를 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다니기 위해"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막연한 불안감이다.
- P125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어의 의미가 커질수록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이 후퇴한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이 자국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이라고 우길 때 우리는 영어를공부한다. 지배자는 자국의 언어 능력만으로도 잘난 체하는데피지배자는 두 가지 언어 능력을 갖춰도 억압받으며 지배자의언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두 언어를 동시에 잘하기 힘든상황에서 피억압자만 이중 노동을 하는 구조다. 식민주의가 작동하는 간단한 원리다. - P126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어공부에 관해 두가지 입장을 가지고있다. 첫째, 모국어가 정확해야 외국어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2개 국어‘가 가능하다. 외국어도 모국어로 배운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둘째,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자체는 지식이 아니다. 도구일 뿐이다. 영어를 절대시하기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되면 저절로통역이 제공된다. 세상은 콘텐츠를 원한다.
예전에는 동네에 하버드 보습학원 같은 소박한 이름이 흔했다. 최근 나는 다음과 같은 상호를 발견했다. "(캐나다의 ‘명문대) 맥길대 박사 직강" 초등학생 대상의 작은 학원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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