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 P1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P17
사람의 금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매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욕탕에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젓ㄴ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다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족히 사 미터가 되는 길 걷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집에 앉아 정신 놓은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 P46
퀘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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