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잘 읽혀야 한다. ‘위대한소설가‘가 아니라면 문장이 짧고 간결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수식어, 감탄과 개탄 같은 ‘감정적인 표현, 작은따옴표도 자제할수록 좋다. 이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을자제하는 일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작은따옴표는 중요한 문제다. 작은따옴표는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표식이다. 글쓴이는 작은따옴표를 표기함으로써 사용하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공지한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는 - P113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작은따옴표가 들어간 ‘자유‘일 수밖에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문장은 온통 작은따옴표투성이가 될 것이다. 작은따옴표는 읽기를 방해한다. 독자를 생각하는 읽기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문장을 지저분하게 만들기 쉽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원래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였지만 작은따옴표를 생략했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 혹은정명(正名)을 거부하는 경합하는 언설이다. 논쟁도 익숙해야 가능한데 일단 이 세 가지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다. 내용을알기도 전에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 사상들은 왠지 기력이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 우연히 어느 경제 전문지에 실린 한 경영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 글에대한 이야기였다. 내 글이 이상하다는 요지였다. 발전주의를 향한 나의 문제 제기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그 글에서는 비판이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대한민국에 경제 발전을 싫어하는 이도 있다니・・・・・."). - P114
법과 문학은 여성과 법, 흑인과 법과 같은 위상의 언설이 아니다. ‘법과 문학‘ 같은 주제에도 글쓴이의 관점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문학은 불법 행위의 구성 요건이나 형량을 좌우하는 영역은 아니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 융합에필요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학과‘ ‘환경대학원‘ 등 전공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의 경우 ‘북한학‘이 운영되고 있어 더 복잡하다. - P117
융합은 정치(학)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접속이되, WAF처럼 목적이 분명한 사회 운동이다.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융합인가, 증오와 파괴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융합인가. 내가지향하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공통점은 모두 발전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이다. 발전주의는 부국강병주의, 즉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을 부추긴다. 강자들끼리 경쟁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발전주의의 결과가 지금의 팬데믹이다. 코로나 블루는 이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울감이지 ‘증상‘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의 경우 수도권 인구 분산이라도 해야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다. - P119
미국에서 9.11 사건이 벌어졌을 때, 텔레비전에 나온 어느여성 노인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부자입니다. 너무 많이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를 나누고 타인을 향한 증오를 멈춥시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요약한다. - P119
마르크스주의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근대 발전주의의 일환이었다. 발전주의적 사고를 누가,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K-방역‘과 백신 개발 모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 P120
학교와 군대는 근대 초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훈련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계가 일자리를 차지해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 물질숭배, 첨단산업의 지속적인 등장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자연파괴다. 환경 파괴로 인한 고통도 가난한이들의 몫이다. - P123
영어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자 근대성의 요란한 흔적이다. 영국의 지배로 시작된 영어의 세계사적 등장은 북미 대륙을접수했고 이후 맥도널디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불리는미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영어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번역 기능이 있긴 하지만 매일 전 세계 수십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영어로 된 구글 문서를 찾는다. - P123
‘모든 권력은 끝이 있다. 팍스 로마나는 망했고 팍스 아메리카나도 망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망해도 영어는 안 망한다. 영어로 쓰인 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 권력이다. 내가 아는 한 인문·사회·문학 분야에서 미국은 지식 생산이가장 활발한 나라다. 그들은 지식, 돈, 무기를 다 가졌다. 특히지식은 자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 중의 자원이다.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도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고 많은 진보 담론이 미국에서 생산된다. - P124
미국 내 대학을 제외하고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계열 불문하고 미국 박사 취득자의 출신 학부 1위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있는 서울대다. 사실, 이 부분이가장 놀라운 일이다. 미국 전체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에 이어 두 번째다. 중국과 인도가 그 뒤를 이었지만, 세 나라의 인구 비율을 고려할 때 이는 ‘편향‘ 정도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한 주(州)다. 미연방 대접을 받지 못할 뿐이다. - P125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못하면 취업과 진학에 지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능력은지식, 교양, 학력(學力)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와 직결된 업무를 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반인‘에게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 "외국인에게길 안내를 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다니기 위해"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막연한 불안감이다. - P125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어의 의미가 커질수록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이 후퇴한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이 자국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이라고 우길 때 우리는 영어를공부한다. 지배자는 자국의 언어 능력만으로도 잘난 체하는데피지배자는 두 가지 언어 능력을 갖춰도 억압받으며 지배자의언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두 언어를 동시에 잘하기 힘든상황에서 피억압자만 이중 노동을 하는 구조다. 식민주의가 작동하는 간단한 원리다. - P126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어공부에 관해 두가지 입장을 가지고있다. 첫째, 모국어가 정확해야 외국어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2개 국어‘가 가능하다. 외국어도 모국어로 배운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둘째,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자체는 지식이 아니다. 도구일 뿐이다. 영어를 절대시하기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되면 저절로통역이 제공된다. 세상은 콘텐츠를 원한다. 예전에는 동네에 하버드 보습학원 같은 소박한 이름이 흔했다. 최근 나는 다음과 같은 상호를 발견했다. "(캐나다의 ‘명문대) 맥길대 박사 직강" 초등학생 대상의 작은 학원이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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