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냄새
그를 만난 것은 라스베이거스의 한 카지노에 머문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2008년 1월 20일 저녁이었다. 룰렛테이블을 지나가다 우연히 그를 보았다. 테가 굵고 검은 안경을 쓴 그는 룰렛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이를 헤아리기가 쉽지않았다. 청년처럼 보이기도 했고, 노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얼굴 표정 때문이었다. 도박은 사람의 본성을 대단히 효율적으로 자극하는 정교한놀이로,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을 해체시킬 정도로 강렬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쾌락이 보이지 않았다. 쾌락 대신 슬픔이 얼굴에 비쳤다. - P9
사람은 동물 가운데 표정을 가장 풍부하게 짓는 존재다. 한사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은 만 개가 넘는다. 하지만 문명의발전으로 표정에 제한이 가해지면서 지속적으로 위축되어가다가 어느 시점부터 사람의 얼굴이 가면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면의 얼굴은 마음을 숨길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마 - P11
음의 상태와 다른 표정을 짓는다. 그런 가면이 하나만 있는게 아니다. 가면 뒤에 다른 가면이 있으며, 그 가면 뒤에 또다른 가면이 있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일수록 더 많은 가면을요구한다. 카지노는 가면을 벗기는 공간이다. 일상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카지노는 놀이의 세계이다. 놀이 세계에서 가면은 거추장스러운 장식물일 뿐이다. 사람의 민얼굴을 볼 수 있는 희귀한 공간이 카지노인 것이다. 카지노가 얼굴 연구자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공간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카지노는 ‘얼굴연구학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게 객실과 함께 CCTV실 출입증을 제공했다. - P12
히스 레저가 뉴욕의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은 그날로부터 이틀 후인 1월 22일 오후 3시 30분경이었다. 뉴스로 그 사실을 알았다. 뉴욕 경찰청은 히스레저의 집에서 여섯 가지약물을 발견했다면서, 마약 같은 불법적인 약은 아니었다고발표했다. 2월 초순에는 뉴욕 병원이 검시 결과 약물 과량으로 인한 사고사라고 발표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너무나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 비친 그는 스물여덟살 청년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생의 곁에 싸여 백년을 넘게 산 늙은이처럼 보였다. 죽음이 어쩌면 그에게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 P36
새의 시선
박민우가 손목 관절 통증으로 병원을 찾은 것은 2010년12월 중순이었다. 손목이 부어 있었지만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당시 그는 서른일곱 살의 건강한 남자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졌고 언제부턴가 목과 다리에도 통증이 일어난다고 호소하더니 급기야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할정도로 근육 마비 증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나 한 달 후에는 입원하기에 이르렀다. 정형외과 과장이 나를 찾은 것은 박민우의 상태가 병리학적으로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장은심리적 충격과 고통, 욕구 등이 신체의 이상 증세로 발현하는전환장애가 아닌가 의심된다고 자신의 견해를 조심스레 밝혔다. - P39
그는 나의 생각을 정확히 짚었다. 카메라를 쥐는 행위, 셔터를 누르는 행위는 손의 동작이다. 사진 예술의 기본 행위가손의 동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손목 관절 통증은 기본 행위를 못 하게 함으로써 그를 카메라에서 해방시킨다. 하지만완전한 해방이 아니다. 손목 관절 통증 속에서도 카메라를 쥘수 있고,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그러나 근육 마비는 다르다. 찍는 행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와의 첫 대화에서 사진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카메라의 무거움은은유적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다. 전환장애의 요인들이 너무나 다양한 데다, 사진에대한 나의 편애가 생각을 그쪽으로 몰고 간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 P43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기억이 영화의 주인공이니까요." "선생님에게 기억이란 무엇이죠?" "어떤 정신분석가가 말하길,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것은 자신에게 하는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진실을 덮어버리는 일에 뛰어난 전문가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진실을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바꾸어도 되지요. 저 영화가 관객에게 괴로움을 불러일으켰다면 인간의 그런 속성을 거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도 괴로움을 느꼈습니까?" - P48
잠시 후 그가 스르르 일어나더니 침대에서 내려와 가만히 섰다. 불안정한 자세이긴 했지만근육 마비 환자가 섰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모르는 어떤 존재를 애원하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나무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데도 그의 몸이 수많은 움직임으로 들끓고 있는 듯했다. 몸 안에서 들끓고 있는움직임이 금방이라도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시작한 것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슬픔으로 변하면서였다. 괴로움에 싸인,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픔이었다. - P51
인터뷰어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그는 끝까지 침묵했다. 그의 얼굴을 응시하던 카메라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는지 시선을 그의 뒷모습, 열린 대문과 그 너머의 풍경으로 이동했다. 불길에 사라진 자식을 기억해야 하는 그에게 침묵은 기억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을 것이다. 김세진은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그들이 마지막 숨을 쉬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 P56
공허해 보이던 그의 눈이 고흐를 말할 때 잠시 빛났다. "고흐가 동료 화가인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이 최근에 그린 풍경화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고흐는 그 풍경화를 언덕 위에서 새의 시선으로 내려다본 풍경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고흐가 단순히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새의 시선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 P59
새의 감각을 갖는다는것은 새의 영혼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저는 고흐의 그 풍경화를 들여다보면서 새의 감각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감각은어머니 몸속에서 형성됩니다. 양수의 아늑한 촉감 속에서, 어머니의 움직임이 빚는 율동에 싸여 먼 우주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한 어머니 몸의 소리를 듣습니다. 이 순수한 감각을 깊이꿈꾸면 새의 감각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 P60
내렸다. 살을 에는 추위였다. 박민우는 완전한 움직임이 주는 기쁨에 취해 추위를 잊고 있었을까. 아니면 누런 피부 밑에 숨겼던 두려움에 싸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까. 불현듯 나자신이 낯설어졌다. 내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인지, 나라는존재가 세상과 우주 공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를 낯설게바라보는 지금의 나는 낯선 대상이 되어버린 그전의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강렬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검은 물처럼일렁이는 의문 속에서 나는 내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새의 시선이었다. - P78
사라지는 것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을 때 나는 지리산을 종주하고 있었다. 그날 아침 5시 30분 장터목대피소를 나와 천왕봉을 향해 걸었다. 종주 마지막 날이었다. 3월 하순 모 문학관에서 전화가 왔다. 4월 18일 작고 문인추모 행사에 소설가 박영도를 선정했다면서, 그와의 추억을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선배이면서 문학 선배이기도 한 그와는 여섯 살 차이지만 안산 예술인아파트에서 이웃으로 6년 가까이 살면서 추억이 많았다. 문학관 관계자와 통화하면서 박 선배가 세상을 떠난 지어느덧 8년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내 나이가 그의 마지막 나이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P81
세월호 침몰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천왕봉을 내려와 치밭목 대피소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10시 조금 못 되어서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던 어떤 등산객이 알려주었다. 제주도 수학여행 가는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그 여객선에 타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예술인아파트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학교였다. 단원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화가 김홍도의 호인데, 안산과 연고가 있는 그를 기려 안산시 단원미술관을 만들었고, 단원미술제를 개최하고 있다. - P82
형조는 몽롱한 눈빛으로 갯벌을 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때가 1986년 가을이었으니 내가 살아온 생의 반 가까이흘러간 것이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그중의 하나가사리포구의 사라짐이었다. 사리포구가 사라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호수가 사라진 것은 본 적이 있다. 예술인아파트 뒤쪽 들판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 그곳을 자주 찾은 것은 황량한 들판 가운데 있는 물의풍경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낯섦이었다. - P86
"고흐는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고 했어. 일상의 시선으로는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했던 거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돼? 보이는 것을 뚫어야 하겠지. 보려고 하는것을 막고 있으니까. 사물과 풍경, 인간과 역사를 뚫는다는것이 나에겐 아득해." 그의 눈빛도 아득해지고 있었다. "고흐가 자살한 것은 필연이었을까?" "고흐는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막대기와 이젤과 캔버스와그 밖의 다른 그림 도구들을 잔뜩 짊어진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이 자신이라고 했어. 그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의 사내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쉼 없이 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불현듯 깨닫곤 했어. 목적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걸음을 멈추어야겠지. 하지만 사내는 멈출 수 없었어. 머물 곳이 없었으니......" - P90
형조가 새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숨을 거두기 35일 전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자기파괴적으로 술을 마셨다. 식사는 거의 하지 않았다. 차명아가 못 마시게 하면 나가서 마셨다.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차명아의 말로는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사람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돌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술도 멀리했다.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불길한 예감도들었다.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아닌가 하는 당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 P106
나는 그녀가 잘 견디고 있느냐고 물었다.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면서 김윤희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득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떤 깊이의 허 - P106
공이 가로놓여 있는지, 알고 싶었다. 차명아가 앞으로 겪어야할 고통 앞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 P107
식사를 마치고 별실에서 나왔을 때 식당 홀 벽에 걸린 텔레비전 화면에 "여객선 침몰 특보, 세월호 선체 완전 침수"라는자막이 보였다. 화면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일행을 따라 식당을 나왔다. 박 선배 부인은 아들 차로 귀가한다고 했다. 그들과 헤어져 어두운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형조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줍은 듯 해맑은 미소가 입가에 어려 있었다. 그가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흐린 것인지, 내 눈이 흐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리포구 언덕에서 형조와 함께 보았던 별들이 아른거리면서 형조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는 나무처럼 서서 별자리를 찾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날개를 활짝 펼쳐 별을 향해 날아가고있는 한 마리 새를 찾고 싶었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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