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딘 브룩스의 
피플오브 더북 People of the Book
2008년


미합중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오래지 않아, 우리 지역 신문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사진을 한 장 내보냈다. 바그다드 도서관을 서둘러 나서는 어떤 이라크 남자의 사진이었는데, 연기 가득한혼란스러운 길거리에 선 그 남자의 품에는 책이 가득, 아니 흘러넘치도록 무겁게 담겨 있었다. 몇 권은 화집이나 오래된 기록물처럼크고 무거워 보였으니 희귀한 보물들이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불타는 건물의 혼란 속에서 건질 수 있는 책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남자는 사서였을 수도 있고, 그저 독자였을 수도 있다. 약탈자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얼굴에는 고통과 두려움만이 아니라 열렬한 비탄도 보였다. - P364

제럴딘 브룩스의 피플 오브 더 북 도서관 파괴로부터책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읽고 싶어졌다. 그 시의적절함에 지금이다 싶고 그 역설에 가슴이 저미니, 저항할 수 없는유혹이었다. 이 소설은 어느 무슬림 사서가 화재에서 오래된 유대교 경전을 구한 실화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사라예보를 폭격하면서 도서관과 박물관들을 겨냥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보스니아의 자랑이자 영광인 소장품 ‘사라예보 하가다‘를 도서관에서 빼내어 은행 금고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그 원고가 구출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반세기전에는 그 경전을 나치의 코앞에서 빼돌려서 내내 어느 마을 모스크에 숨겨 두기도 했다. 1941년에 경전을 구한 사람은 이슬람교 학자인 데르비스 코르쿠트였다. 1992년에는 무슬림 사서인 엔베르 이마모비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잊지 못하는 그 사진 속 이라크인과 마찬가지로) 불타는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나오려던 이마모비치의 동료 하나가 스나이퍼에게 저격당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아이다 부투로비치였다. - P365

‘사라예보 하다‘는 유대교 경전으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기독교 성무일도서처럼 엄청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삽화를넣은 책이다. 14세기 중반에 스페인에서 쓰고 삽화를 넣었는데,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사제가 "레비스토 페르미(revisto per mi)", 즉 내가 살펴보고 승인했다고 적고 서명을 해둔 덕분에 1609년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종교재판에서 불타지 않 - P365

을 수 있었다. 어쩌다가 그 원고가 베네치아에서 보스니아로 가게되었고, 그래서 20세기에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구출되었는지사연은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의 전쟁과 곤란을 다루던 배경이있고, 넓은 역사 캔버스를 좋아하며 퓰리처 상을 타기도 한 제럴딘브룩스라면 그 이야기를 맡기에 딱 맞는 소설가 같다. 브룩스의 성과는 많은 독자를 만족시킬 것이다. 이야기엔 복잡한 우여곡절이가득하고, 심지어 끝에 가서는 살짝 미스터리 플롯까지 가세한다.
섹스, 다소 보잘것없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의무적인 폭력 행위 묘사도 있다. 소설은 실제 사건과 상상 속의 우여곡절을 통해 이 고문서의 기원을 따라가느라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번갈아 나오는 챕터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킨다.  - P366

그러나 중심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나아가며, 해나 히스라는 이름의 동시대 오스트레일리아 희귀본 전문가이자 똑똑한 교양인을 다룬다. 해나는 (가상의) 하가다를 분석하기 위해 사라예보로 불려 가고, 하가다를 구해 낸 (가상의) 사서에게 빠져든다. 우리는 이 책의 모험가들을 따라 5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이사이에 해나의 직업적인 의무,
해나가 애정 없는 어머니와 겪는 어려움, 해나 자신의 민족 유산에대한 뜻밖의 발견을 뒤쫓는다. 이야기는 넓게 뻗어 나가지만 모두탄탄하게 짜여 있다. 어쩌면 너무 탄탄한 구성인지도 모른다.
해나가 1인칭으로 서술하는 챕터들에는 대화가 가득하고, - P366

활기 넘치고 산뜻하며 저널리스트스러운 스타일로 쓰인 데다, 산문으로서 탁월하거나 미학적이진 않을지 몰라도 읽기 쉽고 실용적이다. 안타깝게도 이 자신만만한 확실성은 첫 번째 과거 챕터에서, 빨치산에 합류하는 어느 유대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쓴 1940년유고슬라비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자마자 사라진다. 스타일은투박해진다. 힘겹게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다. 1492년 바르셀로나에 갈 무렵에는 대화가 에드워드 불워리턴 수준으로 떨어지고 -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 서술은 유용한 정보와 예측 가능한 행동, 다방면의 묘사가빡빡하게 섞인 글이 되어 버렸다. 주머니 속에 돌을 집어넣듯, 수많은 역사소설을 무겁고 굼뜨게 만드는 조합이다! - P367

사건은 가득하지만 유머도, 심리적인 깨달음도, 묘사에 주의를 집중시킬 선연한 언어도 없는 이 챕터들은 끼긱거리며 이어진다. 역사소설로서는 정말 안타깝게도, 지역 특유의 생각과 정서에 대한 감수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있다 해도 인간의 차이에 대한 포용력으로 과거를 생생하게 살려낼 정도는 못 된다.
브룩스는 현대식 정의와 윤리 판단을 맞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가져다 놓으려 애타는 노력을 쏟아붓는다. 사람들은 그런 갈망을 "정치적 적절성(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부르는데, 한때는 의미 있었지만 이제는 대개 반발의 비웃음만 초래하는 용어다. 브룩 - P367

스의 진지한 선의는 존중해 마땅하지만, 사실 소설이 시대착오를저지르고도 빠져나갈 수 있을 때는 그 시대착오가 전혀 눈에 띄지않을 때뿐이며, 오래된 부적절함을 바로잡으려는 브룩스의 노력은지나치게 눈에 띈다. 페미니즘 때문에 브룩스가 귀한 책을 만들고지켜 내는 데 중요했던 여성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늙은 랍비들 사이에 그런 여성들을 넣다니 무리한 시도지만, 작가는 고집대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삽화를 그린 화가가 여자였고, 그것도 흑인 여자였음을 알게 된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설명은 그럴듯하다. 나도 믿고 싶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이 사람, 이 화가, 이 화가의 세계는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진짜같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냥 소망 충족이다. 진정한 픽션다운 치열한 현실성을 띠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만일 경험 많은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지어내기를 포기하고 사라예보 하가다의 놀라운 실화를 그대로 따라갔다면 더 나은 책이 되진 않았을까 생각하고 만다. 누군가가 아이다 부투로비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소설이나 시를 지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하고 만다. 괴로움 가득한 얼굴로 품에 책을가득 안고 있던 그 이라크인의 사연은 영영 알 수 없을 것을 알기에. - P368

여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독서는 드러누워서 푹 빠져들길고 두툼한 멋진 장편 소설 한 권, 아니면 여름 과일바구니처럼한 번에 한두 개씩 빼먹으며 온전히 음미하기 좋은 훌륭한 단편 잔뜩이다. 여기, 이탈로 칼비노가 보낸 큼지막한 이야기 바구니가 있다. 복숭아, 살구, 천도복숭아, 무화과, 다 있다.
그것이 『우주만화Le cosmicomiche』 (1968년에 영어로 출간)의 개요다. 『세상의 기억과 다른 우주만화La Memoria del mondo』(1968)에서 새로 번역한 일곱 편, 『시간과 사냥꾼 Ticon zero』(1969) 수록작 전체, 『어 - P369

둠 속의 숫자들 Prima che tu dico Pronto 』 (1995) 수록작 네 편, 그리고 묶여 나오지 않았던 단편 몇 개까지. 우주만화 전체를 한 권으로 보게 되다니 기쁜 일이거니와, 멋진 책이고 잘 만든 책이다. 수록작의3분의 1 이상이 나에게는 새로운 글이었고, 영어로 읽는 독자들 대부분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중 몇 편은 그야말로 보석이다. 윌리엄위버와 팀 파크스, 마틴 맥러플린의 번역은 다 만족스럽고, 맥러플린 씨의 서문은 이 눈부시게 색다른 이야기들에 더 좋을 수 없는안내서다. - P370

이탈로 칼비노는 무엇이었을까? 선(先)-포스트-모더니스트? 아무래도 모더니즘에서 온갖 접두사들을 없앨 때가 됐나 보다. 나치의 이탈리아 점령 기간 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싸우던젊은 레지스탕스 전사였던 칼비노는 독창적인 지적 판타지 작가가되었고 쭉 독창적인 작가로 남았다. 그리고 그가 작가 생활 중반쯤 만들어 낸 이 형식은, 우주만화는 무엇일까? 분명히 SF의 한 아종일 이 형식은 보통 (대개 진짜지만, 때로는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과학 가설에 대한 진술로 서술 무대를 설정하며, 서술자는 대개Ofwfq"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게 언젠가는‘이 시작된다. - P370

부디 그 정어리들을 주시하라. 그게 칼비노의 기법과 스타일이 지닌 특징이자 핵심이다. 이야기는 이런 도입부에서부터 지극히 논리적으로 전개되는데, 적어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논리에 현대 천체물리학만이 아니라 제논의 역설, 보르헤스의 알레프, 그리고 미친 모자 장수의 티파티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 그렇고, 또 그래야 한다.
칼비노의 나중 작업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단편이라기보다는 콩트로 여겨질 수 있다. 지적인 통각(apperception)의 서술 예시, 하나의 아이디어 또는 가설, 심지어는 착상이다. 콩트는 계몽주의가 제일 좋아하는 매개체로, 풍자와 코미디에 적합하다. 볼테르의 『캉디드』가 이런 유형의 걸작이다. 콩트는 인물보다는 캐리커처를, 공감보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 P371

칼비노는 너무나 많은 면에서 시대를앞서 나갔던탓에,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그의 작품이 판타지라는 이유로 하찮은 취급을 받지 않고 획기적인 소설이자 거장의 작품으로 널리여겨지게 되었다. 칼비노가 글을 쓰던 시기에 SF는 문학으로 거론되지 않았고, 만화는 심지어 그보다 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만화를 진지하게 논한다는 상상조차 하는 문학 평론가가 거의 없었다. 그 평론가들은 칼비노가 이이야기들에 부여한 이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둘 때조차도 그게한 가지 암시이고 우주 코미디를 강조하려는 제목이라 여겼다. 하지만 칼비노는 분명 우리가 급작스러운 접근을 비약과 방대한 단순화를, 테두리 안에 그려진 그림 서사를, 카툰을, 만화를 생각하기를 의도했다. 그리고 단편 「새의 기원‘origine degli Uccelli」은 정확히그런 심상을 가지고 놀면서 독자에게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지시한다. "여러분이 효과적으로 그려 넣은 배경에 온갖 자그마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카툰 시리즈를 상상해 보면 좋겠지만, 그와 동시에 여러분은 어떤 인물도, 배경도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 P375

열여덟에서 열아홉 권에 이르는 마거릿 드래블의 소설들은 나온 시기의 표현양식으로 각 시기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기록해 왔으나, 진정으로 유행을 따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지성 때문에 유행을 빈틈없이 알았고, 역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드래블의 소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특징들은 모더니즘이라 부르기도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포스트모던도 아니다.
물론 나는 구식이라는 말을 피하려고 노력 중인데, 드래블이 그 말을 죽음의 입맞춤으로 여길까 걱정스러워서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 근본적으로 솔직하지만 즐겁도록 절묘하기도 한 강렬한 서사추진력, 선명하지만 대부분 말로 하지 않는 도덕적 부담, 사회와 젠 - P376

더와 예절과 유행에 대한 적확하고도 즐거운 관찰, 어쩌면 성격이곧 운명인지도 모를 강렬한 개성을 갖춘 등장인물들 세상에, 내가지금 제인 오스틴에 대해 말하고 있나?
얼마 전, 드래블은 연쇄살인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발휘한다고 하는 매력 같은 가짜 사안들에 열중하다가 조금 방황하려는것 같았다. 나는 그것 때문에 드래블의 소설들이 나빠졌다 생각했다. 바다 숙녀』를 읽으며 『바늘의 눈The Needle‘s Eye』를 썼던 영리하고 빈틈없고 속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 저자를 다시 찾아 기쁘다.
흉을 잡자면, 바다 숙녀」에서 딱 한 인물이랄까 목소리, 아니면 페르소나에게 이의를 제기하련다. ‘공개 연설자(PublicOrator)‘로 남성인데, 한번씩 자의식을 얻어 이야기에 대해 의견을내놓으면서 메타픽션적으로 개입하는 저자, 독자들에게 던지는 새커리 스러운 방백, 그리고 희미한 번연의 향기를 아우른다. 그를 다루는 몇 대목은 이렇게나 달변이다. - P377

그리고 배경이 있다. 이 나라의 동쪽 절반에 사는 사람들은다발풀 무성한 방목장과 목장에 사는 카우보이들을 진지한 소설배경이 아니라 마초 영화용 소도구로 보는 경향이 있다. 뭐예요, 거기 진짜 사람들이 산다고요?
엠시윌러가 그리는 1905년 시에라 산맥 비탈의 캘리포니아는 루이스 라모어‘와는 아주아주 거리가 멀고 할리우드와도 다른행성에 있다. 그러나 메리 오스틴의 『비가 오지 않는 땅 Land of LittleRaing에서는 길만 건너면 바로다. 여기는 "성공"이 아무 의미가 없는 미국, 건지 농업과 궁핍한 목축업의 땅, 외톨이 하나하나가 옆에있는 외톨이를 아는 곳이다. 이들은 기대치가 낮고 강인한 사람들, 특이한 실패자와 도망자들, 사막 사람들이다.  - P387

이 무정하게 위험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람의 행동과 관계들은 깊은 정적을 깨뜨리는 어떤 목소리나 몸짓과도 같은 중요도를 띤다. 하지만 엠시윌러는 사막의 삶을 열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작가는 그곳을 목장 일꾼들이 알듯이 풍경이 아니라 땅으로 안다. 그곳 사람들을 원형이 아니라 개인으로 안다. 그 땅의 정적에, 그리고 사람들의 정적에 귀 기울일 줄 안다.
산과 사막 지역에서 온 ‘머나먼 서부인들‘인 내 어머니 쪽 친척들이 딱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엠시윌러는 그 사람들을 완벽하게 잡아냈다. 어린 로티가 쓰는 일기가 소설 내내 계속 다시 나온 - P387

다. 그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1880년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우리 이모할머니 벳시를 생각했다. 이건 꼭 벳시 같네, 생각했다. 벳시라면 이 애를 알았을 거야. 벳시가 이 애였어. 서부인이 소설 속에서 자기 친척들을 발견하고, 친척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말하는소리를 듣기란 아직까지도 드문 경험이다. 20세기 초에는 그들을아는 여자 작가들이 있었다. 월러스 스테그너가 출처 표시 없이 작품을 도용해서 소설을 썼던 메리 할록 푸트도 그런 작가였다. H. L.
데이비스의 뿔 속의 꿀과 몰리 글로스의 점프오프 크리크』는서부 지역과 인물들에 대한 확고한 솔직성을 갖췄다. 캐럴린 시, 주디스 프리먼, 디어드리 맥네이머, 앨리슨 베이커 같은 작가들이 그전통을 최근으로 불러오고 있다. 마침내, 그리고 서서히, 그리고 대부분 여성 작가들이 서부를 쟁취하고 있다. - P388

하지만 엠시윌러가, 너무나 뉴욕스럽고 세련된 글을 쓰는데다 뉴욕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그가 어떻게 우리 이모할머니에 대해 다 아는 걸까? 아마 뛰어난 소설가라서이리라. 소설가란 상상력을 이용하고, 그래서 회고록 작가들과 다른 법이니. 엠시윌러는 자기 소설의 배경을 속속들이 알고, 자작 목장에서의 삶이어떤지 알며, 말을 탈 때 어느 쪽에서 오르는지 안다. 책 뒤표지에실린 사진에서 작가는 잘생긴 애팔루사말을 향해 효율적인 안장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하지만 배경의 나무인지 덤불인지는 바스토 근처의 개울 바닥일 수도 있고, 롱아일랜드일 수도 있고, 어디든 가능하다. 내가 확신하는 건 그녀가 『레도잇」에서 무엇에 대 - P388

해 쓰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건 쓸 가치가 있었고, 달리 아무도 그런 소설은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쓰는 이 소설 『레도잇』이 아직도 절판 상태라는 사실을 적게 되어 유감이다. 혹시 요새 모두가 책을 사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레도잇』을 찾아본다면, 나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은 『레도잇』이지만 벨라루스에 대한 책이 한 권 있다. 또 이런 꼴이다. 노도 없이 아마존 강을 거스르는 꼴. 그저 어느출판사가 「레도잇』을 재출간할 분별을 발휘해 주길 빌 뿐이다. 격렬하고도 다정하게 성장하는 어느 소녀의 격렬하고 다정한 초상.
애정과 슬픔에 재능이 있는 남자의 슬픔 가득하고 애정 어린 초상.
서부극이자, 감상적이지 않은 사랑 이야기, 이상화하지 않은 미국의 과거 모습, 강인하고 달콤하며 고통스럽고 진실한 소설을. - P389

머릿속에서나 포스터에서나 콜로라도 하면 온통 산봉우리와 그림 같은 스키 산장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동쪽에서 운전해서콜로라도로 진입해 본다면, 대체로키산맥은 어디다 감춘 걸까 의아해질 수도 있다.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서서히 높아지는 평원은광대하고 단조로우며, 가끔 하나씩 못생긴 소도시가 튀어나올 뿐이다. 미국의 서부는 온갖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며, 그 장엄함은 피상적인 게 아니다.
그런 못생긴 소도시 중 하나인 홀트는 소설가 켄트 하루프의 창작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세 장편 『플레인송』, 『이븐타이드Eventide』, 그리고 『축복』을 읽은 독자라면 이제 그 마을을 거리 하 - P395

나하나, 주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안다. 피에르와 나타샤, 아니면 헉핀 같은 하루프의 인물들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가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건조하고 수수하며 서부 특유의 느긋한 운율을 띠고, 저자의 서술도 그렇다. 대화에 따옴표를 넣지 않으니 이 연속성이 부드럽게 강조된다. 절제하는 목소리, 조용한 음악이다. - P396

다수가 타고나기를 외톨이인 홀트 사람들의 열정은 미국소도시의 억압적인 인습과, 가난과 무지와 가차없는 고된 노동이라는 온갖 구속에 매인 채, 가끔은 폭력으로, 가끔은 연민의 손을뻗는 행위 또는 그러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폭력은 이 시대 소설들에 흔히 나오고, 연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하루프는 인간관계를극도로 사려 깊고 신중하게 다루며 격분과 충절, 동정, 도의심, 소심함, 의무감을 탐구한다. 그는 복잡하며 거의 언급되지 않는 도덕문제들을 다루며, 아마도 이심전심의 경지를 향해 밀고 나아간다.
때로는 감상적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 한두 번은 감상주의에빠지기도 하지만, 홀트 소설을 통틀어 평범한 사랑의 형태를 지속되는 좌절, 헌신적 애정이 치르는 오랜 대가, 일상적인 애정의 위안을 탐구하는 하루프의 용기와 성취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동시대 소설도 능가한다. - P396

서술은 이 중심인물과 그 주위를 돌면서 보조적인 이야기와 인물과 세대들로 복합적이고 풍성한 결을 자아낸다. 하루프는어른 여자와 여자아이들을 이상화 없이 애정을 담아, 개별 인간으로 쓴다. 청소년기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떤 단정도 없이 공감하고,
조악함과 위선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본다. 성애와 무관한 애정 관계를 보여 주는 기술,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양쪽 관점에서 묘사하는 그의 기술은 드문 만큼 반갑다.
하루프는 아주 많은 면에서 놀랍도록 독창적인 작가다. 그독창성은 특성상 많은 전통적 비평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가식을 부리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차분하게, 친밀하게, 그러면서도 어려워하면서, 한 어른으로서 다른 어른에게 말을 건다. 그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조심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냈다. 딱좋다. 진실되게 와 닿는다. - P399

일상에 대해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비범한 것, 전율스러운것, 초월적인 것은 자동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심지어 특별히 불행하지조차 않을 만큼 흔한 삶을 묘사하려면 용감한 저자여야 한다.
게다가 행복이라니, 성적인 만족도 아니고 야심에 대한 보상도, 황홀경도, 지복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행복이라니 이건 사실상 소설에서 사라진 무언가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감상주의로 보거나,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쓰기 쉽지가 않다. 진실성 있게 울리려면 가장 초라한 종류의 성취와 만족에 대한 묘사조차도 인간의 부족함과 잔인함, 언제나 질병과 몰락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야만 한다. - P400

한 마디만 잘못 써도 모든 게 믿기지 않아진다.
켄트 하루의 밤에 우리 영혼은』에는 잘못 쓴 한 마디가없다. 구어체의 편안함과 투명함을 갖춘 산문체와 단순해 보이는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말이나 뻔한 말 하나가 없다.
보통 어떤 소설을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는 독자인 나에게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저자가 죽어 가면서 쓴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동받고 경외감마저 느낀다. 이 책은삶의 먼 가장자리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책임감을 품고 써낸보고서다. 하루프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보다 멀리 가서, 그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루프가 자신의 상황을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오직 해야만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과 함께한다는 귀한 특권을 고맙게 여겼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다. 그곳에는 모든 어둠이 다 있으나, 우리는 빛을 보고 있다. 콜로라도의 어느 소도시, 어느 침실에 켜진등불 빛을. - P401

향해 깊게 뿌리를 뻗는다.
홀트는 뉴욕에서 멀다. 어쩌면 런던이나 프라하보다 더 멀것이다. 많은 동부 미국인에게, 서부 미국은 오직 선인장과 할리우드, 문학이 아니라 서부영화의 무대일 뿐이다. 어쩌면 편협한 도시비평가들은 매력도 없고 유행과도 거리가 먼 홀트에 바치는 하루프의 신의 때문에 그의 사려 깊고 섬세하며 능란한 작품에 마땅한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하루프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성공을 열망하여 움직이지도, 홍보용 유명인 공장의 기계적인 과대 선전을 겪지도 않고 고집스레 켄트 하루프로 남아서 자기 일을 계속 하고, 방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게 옳긴 한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 - P402

게나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이 모두가 탄탄하고 만족스러운 장편의 재료인데, 이 마지막 책에서는 거기에 아주 희귀한 뭔가가 더해졌다. 수많은 소설이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
"그러다가 애디 무어가 루이스 워터스를 찾아가는 날이 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편과 사별한 애디는 아내와 사별한 이웃을 찾아가서, 혹시 가끔 같이 자러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뭐요?" 루이스는 당연히 깜짝 놀라서 말한다. "그게 무슨뜻입니까?" 그러자 애디가 말한다.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너무오래 혼자 지냈어요. 몇 년이나 그랬죠.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 밤에 와서 나와 같이 잘 생각 있나요. 대화도 하고요." - P403

변한 것이 있다면, 글쓰기의 본질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언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군살 없이 팽팽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용사들은 상당히 많은 현대 서사 산문을 묘사하기도 한다. 유행에 맞는 식욕 억제 스타일로 스릴러와 경찰소설, 실존 누아르에 잘 맞지만 아우르는 영역이 무척 한정되어 있다. 얀손의 영역은 효율적으로 통제되어 있긴 해도 크다. 얀손의 간결한 정확성은 긴장과 스트레스만이 아니라 깊은 감정, 확장, 휴식, 평화까지 표현할 수 있다. 묘사는 서두르지 않고 적확하며 선명하다. 화가의 눈이다. 스타일은 "시적"이긴커녕 정반대로 가장 잘 짜인 산문이다. 순수한 산문이다. 그 고요하고 명료한 글을 통해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를 위협적인 어둠을 약속된 보물을 본다. 문장은구조, 움직임, 운율 모두 아름답다. 필연적으로 어울린다. 심지어번역인데도! 토머스 틸은 표지에 토베 얀손과 같이 이름을 올려야마땅하다. 그는 진정한 번역가의 기적을 일으켰다. - P406

COMPAGE디스토피아는 그 천성이 음울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다. 초기 탐험가들에게는 온갖 발견의 흥분이 있는 곳이었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글에 꽉 찬 그 흥분이 디스토피아를 신선하고 강력하게 유지해 준다. E. M. 포스터의 기계 멈추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렇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디스토피아는 흔한 관광 상품이었다. 모두가 그곳에가서 책을 한 권씩 쓴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다 비슷비슷하다. 디스토피아의 영역은 한정되어 있고 그 본질은 단조롭기에,
디스토피아에서 제일 익숙한 그림은 대재난으로 망가졌거나 방치된 야생의 풍경에, 자연과 다른 종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외 - P415

부 대기로부터도 차단된 인간 정착지가 드문드문 흩어진 모습이다.
이런 지하, 아니면 돔 속, 아니면 벽 안의 거주지들에는 인간이 빽빽하게 모여서 정부와 정해진 일과의 통제를 받으며, 엄격하게 관리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대단히 비자연적이며 종종 사치스러운
"유토피아" 생활을 영위한다. 거주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에사는 사람들을 원시적이고 무법하며 위험하다 여기고, 바깥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지만, 또한 자유롭기도 하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에는 영웅이 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거주민이다. - P416

이창래의 디스토피아 안내서는, 문예창작 교수라면 예상하다시피 예측 가능한 주제들의 독창적인 변주로 가득하고, 디스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처럼 보이기는 할 정도로 복잡하고 교묘한 관점에서 쓰였다. 소설은 전형적인 안밖 패턴을 따라간다.
‘당국‘이라고 불리는 모호한 단체가 두 종류의 정착지를 유지한다.
인구밀도 높고 부지런한 노동계급 정착지들은 ‘차터‘라는 상류층정착지에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고, 차터 사람들은 경쟁적으로사치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다. 이 (어느 정도) 보호받는 구역들 바깥은 자치주라고 불리는 무질서한 황야다. 서술자 겸 안내자는 차터를 위해 식량을 키우는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거주지 B-모어 (볼티모어)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말하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우리"의 목소리는 또한 바깥에 나가는 영웅의 여정과 감정을 알고 이야기할 수 있다. - P416

상상 문학에서는 이토록 기본적이고 합리적인 질문들을무시하는 것이 문학적인 자유로 양해를 받거나, 심지어 정당화되는 일이 많다. 저자는 문학 작가로 알려져 있으니, 아마 자기가 가진 그런 자유를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과학소설은 그런 무책임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강력한 정치 통제 하의 미래 사회를 그리는 소설은 사회과학소설이다. 코맥 매카시와다른 작가들이 그랬듯, 이창래는 진지한 장르의 핵심 요소들을 무책임하게, 피상적으로 이용한다. 그 결과로 이창래의 상상 세계에는 현실감이 거의 없다. 체제 전체가 너무 자기모순이 심해서 경고나 풍자로도 알맞지 않다. 설령 책 끝에 가서는 서술자가 그 비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해도 그렇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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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도『타임머신』에서 음침한 몰록과 무기력한 엘로이라는 인류분화가 일부러 사회 계급 체계를 인간 유전자에 짜 넣은 것이라면, 그 역효과는 무시무시하다. 귀족들은 노동 계급의 고기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모로 박사의 섬』에 나오는 사고 실험의 결과도 나을 게 없다. 유전 법칙을 잘 모르던 시절 소설의 무대 속에서, 강박에 사로잡힌 과학자가 벌인 진화 조작은 오직 괴물들만 낳는 끔찍한 실패이다.
「달의 첫 방문자』에서는 실험 조건이 다르고 결과도 모호하다. 다양한 쓰임과 장점으로 스스로를 선택하고 개량하는 존재는인간이 아니라 외계인, 월인들이다. 월인(Selenites)들이 이성적이고실용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곤충들은 오랜 시간의 무작위 선택에 의해 맡은 일에 완벽하게 맞도록 만들어졌기에, 월인들은 유전자 통제와 태아나 유아 조작을 통해 신중하게 자신들을 개량하여, 가난도 폭력도 없는 효율적이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사 - P304

회를 만들었다. 그들의 고도로 전문화한 개별 신체가 인간의 눈에기괴하고 무서워 보인다는 점은 그들의 도덕성이 아니라 우리의편견을 비춘다. 미학적으로는 우리에게 소름 끼치는 존재지만, 윤리적으로는 아마도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을까?
웰스는 이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판단을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윤리적 판단을 내리기에는 특히 부족한 서술자 두 명에게 맡김으로써, 결국 판단을 독자에게 맡긴다.
주요 서술자인 베드퍼드는 무엇에든 준비되어 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모는 없는 부패하고 자아도취 심한 무능력자다. 잔인한면이 터져 나올 때면 역겹지만, 너무나 무능하지만 스스로의 무능함을 알지조차 못한다는 점에서 그는 악당이라기보다는 코믹 히어로로 받아들일 만하다. 홀로 귀환하는 여행에서 그는 한순간 우주적인 이해와 날카로운 자기 인식을 경험하지만ㅡ"머저리…………수많은 머저리들의 자손의 자손...….." - 하지만 그 순간은 곧 날아간다. 지구에 돌아온 베드퍼드는 다시 원래 모습 그대로다. - P305

소설 속에서처럼 삶에서도 웰스의 충동은 언제나 스스로의 해방이었던 것 같지만, 그는 부정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려고 힘들게 노력했다. 이렇게 정착하지 못하는, 혹은 정착을 거부하는 성향은 아마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질 것이다. 동세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시대의 끝이자 다른 시대의 시작에살고 있다고 보았고, 그럴 만도 했다. 웰스의 소설들은 자신이 "두시대 사이"에 존재한다고 느끼고, 이쪽저쪽으로 당겨지며 어느 쪽에도 편히 머물지 못하는 남자의 강렬한 시간적 고통을 보여 준다.
두 개의 시대에 살고, 두 시대 사이를 오가며 산다는 아이디어는웰스의 긴 경력 내내 강박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주제다.
그리고 여기, 그의 첫 장편에 그 정수가 담겨 있다.
내가 일곱 개의 과학 로맨스 seven Scientific Romances』라는 뚱뚱한 진녹색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몇 살이었는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통틀어 타임머신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하얀스핑크스 아래 철쭉 사이에 펼쳐진 잔디밭은 내가 성장한 집의 정원처럼 친숙하다. 그 직접적이고 명료하며 자신감 있는(모방자들이생각한 "빅토리아 산문과 너무나 다른) 운율은 아직도 본보기가 된다. - P313

멜로드라마 같은 폭력이 펼쳐지는 한두 단락을 제외하면 이야기는 모두 가볍고 빠르고 확실한 필치로 쓰인다. 여행자가 집에 가져온 물건의 전부인 "아주 커다란 하얀 당아욱을 닮은 듯도한 두 송이 꽃이라든가, 타임머신이 실험실에 다시 놓였을 때 정확히 어디에 있었으며 왜 딱 그곳이었는지 설명하는 문장처럼 우아하고 능숙한 부분이 많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이야말로 SF적인 상상의 가장 순수한 정수이다. 흠잡을 데 없이 단단하다.
정원 전체가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 속의 두꺼비들은 진짜다.
타임머신은 잘 지은 제목이었다. 지금까지 낡아 가는 징후도 없이 3세기를 보았다. 상아와 니켈로 만든 막대며 석영 막대기도 온전하고 놋쇠 난간 구부러지지 않았으며, 그 언어와 통찰은 107년 전에 출발했을 때와 똑같이 새롭다. 이것이 몇 번이고 몇번이고 거듭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 여행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기계를 처음 타려는 독자들 모두를 질투했을 것이다. - P316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잠시 페이비언 협회에도 들어갔으나, 그곳은 웰스에게 충분히 활동적이지 않았다. 그는 유토피아미래주의자이자 (어느 정도는 페미니스트였고, 사회와 불평등과 자본주의 상업주의의 비평가요, 당선되지 못한 노동당 후보였고, 대격변과 사회개조 양쪽에 대해 지치지 않는 선지자였다. 『막다른골목에 다다른 정신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을 쓰던 70대 후반, 모든다툼과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고 대공세 내내 런던에서 폭격을 겪고 나서도 그는 아직도 인류를 위해 희망을 찾고 있었지만, 그 희망을 새로운 인류, 개선하고 변화시킨 새로운 인간 종이라는 아이디어에서밖에 찾지 못했다. "적응하느냐 소멸하느냐는 자연에 주어진 불변의 과제입니다." - P319

대단히 뛰어난 스승 밑에서 생물학자로 훈련받은 웰스는다윈의 역동적인 생물관을 받아들이는 데 흔들린 적이 없었다. 생명을 사회적 다원주의자처럼 우세를 점하기 위한 투쟁으로 보지않았고, 기독교인 다윈주의자처럼 인간으로 올라가는 것이 마지막 목표라고 보지도 않고 오직 진화로 이해했다. 멈추지 않는, 필요한 변화로 변하지 않고 머물면 죽는다. 적응하면 계속 살아간다.
유연하게 적응할수록 더 멀리 간다. 포용력이 전부다. 변화는 어리석고 잔인할 수도 있고, 지적이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도덕성은 오직 생각하고 선택하는 정신이 있을 때만 체제에 들어간다. 웰스는어둡고도 밝은 미래 양쪽을 상상했는데, 그의 신념이 양쪽 다 약속하지 않으면서 양쪽 다 허용했기 때문이고 그의 80년 인생이 어마 - P319

살아생전에, 그리고 작가 자신의 눈에 웰스의 중요 저작은리얼리즘 소설들이었다. 「앤 베로니카Ann Veronica』와 『토노-번게이같이 개념 중심적이고, 사회 계층과 압박을 잘 관찰하며, 시사적이고 도발적이고 자주 풍자적인 데다가 때로는 열렬히 분개한 작품들은 버나드 쇼‘의 희곡에 비견할 만하다. 버나드 쇼는 그렇게 진부하지 않지만 말이다. 웰스는 별나고 때로는 서툰 소설가였으며,
그의 소설 대부분은 재미있고 번득이는 데가 있긴 해도 시대에 뒤떨어졌다. 스스로의 기대를 넘어서고,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모든평론가들의 저항을 넘어서서 남은 것은 그의 "과학 로맨스"들이었다. 판타지와 SF 소설들이었다. - P320

『타임머신』, 『달의 첫 방문자』, 『우주전쟁』, 『투명인간』, 모로 박사의 섬』…… 오늘날 우리에게 H. G. 웰스라는 이름은 이런 의미이고, 마땅히 그럴 만하다. 이 짧은 장편이나 중편 소설들은 장르 전체를 확립했다. 몇 세대 독자들의 마음속에 그리고영화 제작자, 그래픽 아티스트, 만화 애호가, TV 사이파이 팬, 팝 컬처 열광자, 포스트모던 전문가들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선명한 이미지와 표상, 원형을 남겼다.
웰스는 과학소설이 과학소설이라는 이름을 갖기 오래전에과학소설을 썼다. 그는 그것을 "과학 로맨스"라고 불렀다가 나중에는 "가능성의 판타지"라고 불렀는데, 지금 정착한 이름보다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웰스의 독창성과 창의력은 놀라웠다. 어떤 SF를 보든 웰스에게서 그 최초의 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SF와 판타지를 구별하지는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아무도 그 둘을 구별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수십년간 그랬기 때문이다.  - P321

"나는 단편소설의 어떤 변함 없는 확고한 형식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웰스가 그렇게 한 것은 확실히 옳았다. 그러나 단편에대한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설명, "이 간결하고 유쾌한 글쓰기 방식"
은 좀 더 못한 작품들에는 잘 맞는 말일지 모르나 헨리 제임스나키플링, 심지어는 본인의 최고 작품들은 포함시키지 못한다.
물론 그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1939년, 아마도 그의 가장 뛰어난 단편일 눈먼 자들의 나라 수정을 논하면서 웰스는 아이디어 중심에 비밀 장치, 교묘한 결말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자신이 돈을 벌기 위해 써 보인 수많은 사례와 같은 작품들에 대한 인내심을 잃었다고 썼다. "웅웅거리는 발전기, 퍼덕이는 박쥐, 세균학자의 실험관, 뭐든 도움이 되는 것은 거의 손을 대어……… 그 장치를 둘러싼 인간의 반응을 살짝 첨가하고 오븐에 집어넣으면, 짜잔." 그는 언제까지라도 그럴 수 있었지만 "단편도 매력적이고 만족스러우며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느낌, - P323

그는 17세에 도제 생활을 그만두었을 때 천을 잘라 파는 일도 그만두었다. 단어를 길이당으로 판매하는 작업이 그를 작가로만들었으나,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런 형식 자체를 못 견디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890년대에 단편소설이 꽃을 피우고 그 후에 시시해졌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편이라는 형식은 20세기 내내 발전하고 번창했다. 나는 혹시 웰스가 단편을 쓰지않게 된 것이 편집자들이 뛰어난 작품을 알아보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비평가들이 갈수록 소설을 사회적 심리적 리얼리즘에 구속하고, 그렇지 않은 작품은 다 문학 이하의 오락으로 치부하던 경향탓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이 아무리 좋다 해도 주제가 환상적이거나 소재가 과학이나 역사나 다른 지적 훈련에 쏠려 있으면 "장르소설" 분류로 일축당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상상 영역을 다루는 작가들은 모두 겪는 위험이다. 문학적인 존경을 갈망하는 작가들은 아직까지도 자기들이 쓴 SF가 SF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웰스는 상상의 총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 총을 쏘는 일은 그만두었다.
그런 한편, 타임머신』은 이제 10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절 - P324

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웰스의 단편소설 중에서 진정 영원히 읽힐 문학에 다가간 작품은 몇 편뿐이지만, 최고작들은 생생하게 살아있고, 놀랍도록 적절하며, 때로는 불안할 정도로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악몽처럼 달라붙거나 기억할 수 없는 꿈처럼 빛을 발한다.
나는 존 해먼드의 귀하고 거대한 『H. G. 웰스의 단편소설전집에 수록된 여든네 작품 중에서 스물여섯 편을 골랐다. 물론여기에서는 별 쓸모도 의미도 없는 리얼리즘 기준에서의 탁월함이 아니라 포괄적인 탁월함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이야기가 지적인 긴박감이나 도덕적인 열정, 특별한 미덕이나 기이함이나 아름다움 면에서 그 자체로 두드러지는가? 이야기가 같은 종류 중에서뛰어나며, 그 종류는 흥미로운가? 유익하고 중요하며, 다른 작가들의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가? 나는 오직 "위대함"만을 소중히 여기고 "위대한 예술은 흉내낼 수 없이 유일무이한 막다른 길로 정의하는 독자가 아니다. 나는 예술을 공간과 시간 양쪽에서 다 공동체 산업으로 보며, 홀로 뛰어난 불모의 작품보다는 더 많은 예술로이어지는 예술이 더 가치 있다 믿는다. - P325

그 이야기들을 다 합쳐서 한 세트로 요약하기는 어렵다. 웰스는 포착하기 힘든 작가다. 확실히 책 전체에 걸쳐 웰스의 독특한스타일이 보이기는 한다. 많은 단편이 저널리스트 분위기로 쓰여, 쉽고 경쾌하며 극도로 자신감이 있지만 가식은 없고 명료하고 휙휙 나아간다. 하나같이 아주 단순하고 꾸밈없어 보이는데, 정확히저자가 원한 대로다. 웰스는 고도로 심미적인 태도를 불신했다.(헨리 제임스와 웰스의 우정에 따라붙는 매력적인 주석은, 두 작가 모두 서로의작품을 다시 쓰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주의 깊은 작가이자 지칠 줄 모르고 다시 쓰는 작가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자각했고 자신의 기술에 예민하고 능숙했다. 웰스의 글투를 바꾼다는 건 음악에서 조성을 바꿔 버리는정도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 P326

여기 수록한 조각글 중 많은 수는 원래 발표했을 때와 세세한 차이가 있다. 이 책에 실을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편집했기 때문이다. 많이 바꾼 글은(주로 업데이트하느라 그랬다.) 실비아 타운센드 워너의 「도싯 이야기 Dorset Stories 』 서평 딱 한 편이다.
이 서평들은 연대순으로 정리할지, 알파벳 순으로 정리할지망설이다가 독자들이 찾고 싶은 작가를 쉽게 찾을 수 있게 알파벳순에 만족했다. 대부분 서평의 원래 발표 버전은 내 웹사이트에서찾을 수 있으며, 처음 발표한 지면 목록은 뒤에 실어 둔다.
나는 서평을 좋아하고, 서평을 계속 하기 위해서 읽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많은 책을 읽어 보아야 했다. 폐부를 쥐어짜는서정성을 갖춘 최고의 걸작이라고 선언하는 광고문들의 구름을몰고 도착한 책을 미리 읽어 봤더니 완전히 실패였을 경우는 슬프다. 하지만 대개는 내가 이미 흥미를 품고 있는 저자의 책이나, 별기대 없이 잡았다가 나를 완전히 사로잡은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받는 행운을 누렸다. - P330

여기 수록한 서평 대부분은 《맨체스터 가디언>에 실렸는데,
그곳 편집자들에게는 훌륭한 책을 서평할 기회를 많이 주셨다는점에서도, 놀랄 만큼 유연하고 지적인 편집에 대해서도, 1만300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마울 따름이다. 뉴욕과미국 동부 해안 문학계는 언제나 내가 그 문학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뻐했을 정도로 외부에 관심이 없고 편협하다. 하지만런던에 살 때 나는 진지한 영국 문학 파벌들, 악랄한 경쟁, 허용되는 만행의 정도에 상당히 겁먹었다. 그런 심술도 이제는 어느 정도누그러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가디언》에 영국책 서평을 쓸 때마다 내가 오리건에 산다는 게 기뻤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늘 그렇기는 하다. 캘리포니아에 대한향수를 느낄 때만 빼고 언제나. - P331

단편 하나는 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붕 떠 있다. 우리는 두 번째 단편을 시작으로 넬을 따라가며 여동생과 부모와 함께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고, 반(半)결혼의 우여곡절과(티그가 정말로그 끔찍한 아내와 이혼하고 넬과 결혼하긴 할까?) 아마추어 농사일과 늦은 부모됨의 시련을 거쳐 마지막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의중년 딸이 되기까지 지켜본다. 하지만 첫 번째 단편은 연대상 마지막에 해당한다. 그것은 노년이 되어, 스스로 죽음의 문턱에 이른 부모가 된 빌과 티그의 초상이다. 왜 이런 역배치가 그토록 성공적인지 모르겠다. 첫 단편 「나쁜 소식」이 재치와 에너지, 애트우드 특유의 공포와 고통에 대한 가슴 아리도록 날카로운 감각이 전기처럼흐르는 눈부신 1번 타자라서일까. 이 단편에서 애트우드는 이보다더 날카롭고, 건조하고, 웃기면서 슬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단편을 마지막에 놓지 않은 데에는 지혜로운 구석이 있는데, 마지막 단편의 두 사람은 곧 죽을 테고, 이 두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 P336

인류에게 그나마 좋은 얼마 안 되는 것들, 애정과 의리와 인내심과 용기가 우리의 오만한 어리석음과 원숭이 급의 영리함과 미친 혐오에 갈려 먼지가 되어 버린 데 대한 애도곡.
유전 실험이 인류를 대체할 휴머노이드들을 만들었다는사실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누가 섹스를 원할 때면 파랗게 변하는,
그래서 남자들의 거대한 생식기가 늘 파란색인 사람들에게 대체당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누가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야기가 SF가 아니라고믿고 싶어 할까??)책의 마지막 몇 문장은 뜻밖이었다. 언뜻 피할 수 없어 보였던 무자비한 결말이나 죽어 가는 내리막도 아니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해결법도 아니라니, 놀라움이자 수수께끼였다. 횃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오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 없는 홍수의 해에는 오직 정원사들만이 노래를 했다. 정원사는 다 죽은 게 아닌가?
어쩌면 이번에도 내가 단서를 놓쳤을지 모른다. 여러분이 이 비범한 소설을 읽고 직접 판단해야 마땅하다. - P345

지난 세기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진지한 시인들은 오직 시만 쓰지, 소설은 쓰지 않는다고 배웠다. 그런 순수주의자들에게 괴테는 무의미했다. 그와 동시에, 모더니즘 소설 비평가들은 상상 문학을 쓰면 진지한 소설가로서 자격이 없어진다고 선언했다. 현실주의자들에게 메리 셸리는 무의미했다. 교수와 문학상 수여자들은순수주의를 더 좋아했기에, 타고난 재능 탓에 국경을 서성인 이단아 작가들은 계속 가시철조망에 부딪치고 말았다.
젊은 마거릿 애트우드는 그 울타리를 쉽게 뛰어넘어, 일찌감치 시와 소설은 물론이고 문학 비평에서도 캐나다 총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오웰의 1984처럼 - P346

뛰어난 근미래 사회풍자 경고 SF의 본보기인 「시녀 이야기』로 높은 울타리와 맞섰다. 헉슬리와 오웰은 아무 문제 없었지만, 1980년대 중반까지는 문학 영역에서 미래가 추방당해 있었다. 문학상을바라보는 출판인은 누구나 SF라는 딱지를 두려워했다. 회피의 귀재인 애트우드는 그 딱지를 피했고, 그때도 그 후로도 약간의 대가를 치렀지만 유연하고 적응력 높고 매우 지적이며 대단히 고집스러운 재능 탓에 계속 기존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멀리 배회했다. 최근에는 애트우드도 장르를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는 일은 변함없이 흥미롭다. - P347

포위전 이후, 폭력과 인종차별자들의 공격이 수그러들고,
텔레비전도 가족 정보와 독서클럽 토론으로 되돌아가자 피어슨은우리에게 말한다. "일단 사람들이 소설에 대해 열렬히 말하기 시작하자 자유에 대한 희망은 죽지 않았다." 그러나 한 페이지를 넘겨,
책 마지막 문장은 이러하다. "분별 있는 이들이 깨어나 연대하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더욱 강력한 공화국이 문을 열고 낙원으로손짓해 부르는 회전문을 돌릴 것이다." 여기에서 자유라거나 분별공화국 같은 말들은 의미가 손상된 나머지 무의미해진다. 이 서술자에게는 아무것도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고, 아무것도 있는 그대로가 아니다. 하지만 정보 조작의 달인에게 이야기를 시켰을 때 문제는 독자가 그에게 그 자신이 던졌던 질문을 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때서요?" - P355

침대에 누워서 크리스 앤드루스가 멋지게 새로 번역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팽 선생」을 읽던 나는 갑작스러운 불안감과 더불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대한 엄청난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연민의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계속 깜박거리는 독서등이 문제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아주 오래된 영화 속 길거리 장면의 회색빛과 구름 낀 12월의 화요일에 내리쬐는 평범한 빛 사이를 오묘하게 오가는 햇빛 자체가 문제였을까? 더 심란한 건, 구체적인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건만, 이전에 이 책은 아니라도 이 책과 무척 비슷한 책을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읽었다는 기분, 그런데 그 어느 것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 P356

혹자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도 하는세자르 바예호는 활동적인 공산주의자로, 조국 페루의 정부에서박해를 받아 인생 후반을 망명지에서 살았고, 1938년에 진단 미상의 병으로 파리에서 죽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을 구하려고 "대체요법"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이제는 보르헤스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후계자로 불릴 때가 많은 로베르토 볼라뇨는 독재자 피노체트가 권력을 잡자 조국칠레를 떠났고, 여생의 대부분을 망명지에서 보냈다. 『팽 선생쓴 것은 1983년, 서른 살 때였다. 그는 2003년에 죽었다.
사실이라는 씨앗에서 상상의 거대한 덩굴이 자라나 한데얽히고 감기며 그림자를 드리우니, 그 덩굴이 맺는 열매는 때로는달고 때로는 쓰도다. - P359

ㄹㄹㄹㄹㅁ이 책에는 안식도, 평화도 없다. 화창한 캘리포니아의 아침햇살 속에서 먹는 아침식사마다, 채널 아일랜드의 아름답고 호젓한 해안과 산비탈을 찾는 순간마다 곧 닥칠 재난의 위협에 대한 예감에 내리눌리고 부질없어진다. 어떤 행복이든 의미 있기에는 너무 짧은 환상이다. 그 에너지와 긴박감에도, 그 역사적인 정확성과범위에도, 그 뛰어난 사건 쓰기와 동시대의 말과 생활에 대한 흠 없는 재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심장이 식을 만큼 황량하다. 그점에서는 우리가 우리 세상에 한 짓을 바라보고 책임질 방법을 찾는 대부분 사람들의 기분을 정직하게 반영하고 있다. 난파로 시작해서 어둠 속의 방울뱀으로 끝나는 이야기는 희망할 여지를 많이남겨 두지 않는다.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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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스의 글쓰기 스타일은 확실히 언어의 의미와 소리가 모두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스타일이다. 1958년의 SF에서는 드문일이었는데, 밴스는 실재적이며 개인적인 문체를 구사했다. 대화는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품위 있고 정중할 때가 많다. 사람들이 이런식으로 말한달까. "당신이 비난하는 그 신빙성이라는 게 단지 사실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매너리즘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인다면 꽤 사랑스러운 매너리즘이다. 밴스의 서술 리듬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음악적이다. 설명하는 부분은 정확하고 직접적이다. 날씨가 어떤지, 사물의 색깔은 어떤지를 알려 주고 배경 속에 들어가게해 준다. "뒤쪽으로는 바위 경사가 회색 하늘 높이 치솟았고, 하늘에는 작고 사나운 하얀 태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깡통 원반처럼 비틀거렸다. 베란은 그의 자취를 되짚었다." - P296

이 짧은 대목이 전형적이다. 첫 문장은 생생한 묘사를 시적으로 정확하게 절제하여 담아냈고, 두 번째 문장은 살짝 구식 표현을 단순하게 담았다. 밴스는 단어를 낭비하지 않았다. 단도직입식의 행동형(action) 글쓰기와는 아주 거리가 멀면서도, 행동형 작가이기도 했다. 플롯은 빠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전진하고, 독자들을 제대로 끌고 가는 추동력이 있다. 밴스는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했다. 등장인물들과 플롯, 장면, 묘사, 행동,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어쩌면 통제야말로 밴스의 큰 주제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 P296

우리에게 달까지 갈 장치가 있다면(60년 안에 생기긴 했다. 카보라이트는 아니었지만.), 달에 대기가 있다면(웰스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달나라 주민들이 고도의 지능을 가진 종족인데 자기들의 차가운 손으로 직접 사회 진화를 이룬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마지막 질문은 크다. 웰스의 기획은 현재 기술에서 가능한미래 기술을 추정하는 쥘 베른의 주요 원칙보다 더 크고 위험하다.
베른은 미래의 기술 경이들을 행복하게 경탄하는 반면, 웰스는 도덕이 없는 진화력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의문하고, 더욱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의도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화를 통제한다면 그 사회적 도덕적 함의는 무엇일지를 생각한다. 100년 후의 우리가 기업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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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는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동사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을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최승자의 시 <이제 가야만한다>

어찌 보면 돈의 만족보다 삶의 만족을 이루기가 더 쉽다. 이른 나이부터 안빈낙도하기는 어렵겠지만, 일찌감치 돈에 정신을 묶어 두는 것도 서글프다. 마흔일곱에 겨우 벼슬에 오른 두보는 어지러운 정국과 부패한 관료사회에 실망해 시를 짓고 숨을 마셔 가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두보를 봐도 그렇다. 부귀영화에 이 한 몸 던져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고, 멋진 영화에 이 한몸 얽맬 필요가 있으랴 노래하는 이가 있다. 둘 다 자기 선택이 - P204

겠으나 젊은 날들 경험과 감각이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됨은분명해 보인다. 인생의 꽃 시절은 짧고, 삶은 예상보다 오래 지속된다.
- P205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김혜순의 시 <첫>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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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서나 서평에서나 예외와 배제를 실천한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가 위대한 영국 소설가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는비평가는 애써 울프가 예외임을 보여 줄 수 있다. 멋진 요행이라고말이다. 예외와 배제의 수법은 다양하다. 여자 작가는 소설의 "주류"에 속하지 않았다고 밝혀진다. 그 작가의 글은 "독특하며 후대작가들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어떤 "컬트"의 대상이다.
그 작가는 매력적이고, 우아하며, 가슴 저미고, 감성적인 연약한 온실의 꽃이며 그러니 남성 소설가의 강력하고, 선 굵고, 대가다운) 활력과 경쟁한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P164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 쪽이 기념비적인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 - P164

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지속적으로 풍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전주의자들은 결코 여자에게 중심을 부여하지않는다. 여자들은 반드시 주변에 남겨져야 한다.
어떤 여자 소설가가 1급 예술가라는 사실이 인정되더라도,
배제 수법은 여전히 작동한다. 제인 오스틴은 존경을 많이 받지만,
그래도 어떤 본보기로 여겨지기보다는 독특하고 흉내 낼 수 없는놀라운 우연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실종될 순 없어도, 완전히 포함되지도 않는다.
작가 생존기에 일어나는 폄하, 누락, 예외화는 작가의 죽음이후 일어나는 실종의 준비 작업이다. - P165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SF 쓰는 방법 배우기


시도하는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은 아니지만, SF를 읽은 적이 없다면 SF를 쓸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른 것을 읽은 적이 없어도SF를 잘 쓸 수 없기도 하다. 장르는 윤택한 방언과 같아, 그 언어를쓰면 어떤 것들을 특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보편 문학 언어와의 연결을 포기해 버린다면 내집단에게만의미가 있는 은어가 되어 버린다. 장르를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유용한 본보기들을 찾을 수 있다. 나는 언제나 전복적이었던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면서 많이 배웠다.
올랜도Orlando』를 읽었을 때 나는 열일곱살이었다. 그 나이에는 그 책이 반은 계시 같고 반은 혼란이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 - P171

다. 작가가 우리와 많이 다른 사회를, 아주 색다른 세상을 상상하고극적으로 살려 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 장면들을, 템스 강이 얼어붙은 겨울을 생각하고 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나는 그곳에 있었고, 얼음 속에 타오르는 모닥불들을 보고 500년전 그 순간의 경이로운 기이함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어딘가‘로 실려 가는 진짜 설렘이 있었다.
울프는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마구 쌓이지도 않고 설명이붙지도 않는 정확하고 구체적이며 자세한 묘사가 비결이었다. 독자가 상상력으로 그림을 채워 넣어 선명하고 완전하게 보도록 북돋는, 고도로 선별한 선연하고 효과적인 심상이었다. - P172

소설 『플러시 Flush』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개의 마음속으로들어가는데, 말하자면 비인간의 뇌이자 외계의 정신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대단히 SF적이다. 다시 한 번, 그 책에서 내가 배운 것은정확하고 선명하고 고도로 선별된 세부 사항이 가진 힘이었다. 울프가 글을 쓰느라 앉은 추레한 안락의자 옆에서 자고 있는 개를 내려다보며 ‘무슨 꿈을 꾸고 있니?‘라고 생각하고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바람 냄새를 맡으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개의 세상에서, 산에 나가서 토끼를 쫓고 있는 개……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다. - P172

우리 손끝에 달린 온갖 유혹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 읽기를 익힌 고집스럽고 내구력 있는 소수가 오랫동안 그러했듯 앞으로도 계속 책을 읽으리라 믿는다. 종이든 화면이든 찾을 수 있다면어떻게든 읽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 경험을공유하고 싶어 하기에, 그리고 아무리 막연하다 해도 그 공유가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어떻게 해서든 책이 다음 세대에도 존재하도록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술 세대가 아니라 인간 세대 말이다. 지금 기술의 한 세대는 생쥐 수명만큼 짧아질 판이고, 이러다가는 초파리 수명만큼 짧아질지도 모른다.
책의 수명은 그보다는 말이나 인간의 수명, 때로는 참나무, 심지어는 레드우드의 수명과 비슷하다. - P183

문학 소설을 장르소설과 대립시킬 때의 문제점은, 소설 종류의 합리적인 차이를 말하는 척하면서 비합리적인 가치 판단을숨긴다는 겁니다. 문학이 우월하고, 장르가 열등하다고 말이죠. 이건 편견에 불과해요. 우리는 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지적인 토론을 해야 합니다. 많은 영문학과가 다가오는 우주선을 다 쏘아 떨어뜨려서 담쟁이 우거진 상아탑을 지키려는 시도를 그만뒀습니다.
많은 비평가가 많은 문학이 근대 리얼리즘의 성스러운 숲 바깥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문학과 장르의 대립은 남았고, 그게 남아 있는 한 잘못된 단정적 가치 판단도들러붙어 있을 겁니다.
이 지겨운 곤경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설을 제안하죠.
문학은 문자 예술의 현존체이다.
모든 소설은 문학에 속한다. - P186

우리, 미국인들은 첫 번째 종류를 더 편안해하는 편이에요.
우리는 뭔가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사실"과 "실제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편안해하죠. 우리는 "리얼리티"에 대해 말해주는 이야기들을 원해요. 어쩌나 원하는지, 심지어는 완전히 가짜상황을 꾸며 놓고 찍으면서 그걸 리얼리티 TV"라고 부를 정도죠.
이 모든 것들의 문제는, 당신의 진짜는 나의 진짜가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현실(리얼리티)을 같은 방식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상 현실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죠. 폭스 뉴스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리얼리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대한 이런 차이가아마 우리에게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일 거예요.
‘사실(fact)‘이 우리의 공통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상식같지요. 하지만 사실, ‘사실‘은 너무나 구하기 어렵고, 너무나 관점에 달려 있으며, 너무나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차라리 소설에서나 - P190

서로 공유하는 현실을 만날 수 있을 가능성이 더 높답니다. 실제로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었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를, 실제 사람은 아니지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수도 있을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읽어 줌으로써 우리는 상상의 문을 열어요. 그리고 상상은 우리가 서로의 머리와 마음에 대해 알 가장 좋은 방법,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지요.
글쓰기 워크숍에서 저는 오직 회고록만 다루고 싶어하고,
자기들의 경험과 자기들의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작가들을 많이 만나 봤어요. 그런 분들은 이렇게 말할 때가 많지요. "전 뭘 지어낼 수가 없어요. 그건 너무 힘들어요. 하지만 일어난 일은 말할수 있죠." 그분들에게는 경험을 재료로 써서 이야기를 짓는 것보다,
경험을 바로 가져다 쓰는 게 더 쉬운 모양이에요. 그분들은 일어난일을 그냥 쓸 수 있다고 여기죠. - P191

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걸 조작하기 시작한다면, 그러니까 일이 멋지고 깔끔한 이야기가 되는 방향으로 일어난 척하려다간 상상을악용하는 거예요. 지어낸 걸 사실인 척하는 거고, 그건 적어도 아이들이라면 거짓말이라고 할 일이죠.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소설은 사실 파악이나 거짓말이 아닌 다른 층위의 현실로 넘어가죠.
상상과 소망 충족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요, 둘 다글쓰기에서나 삶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망 충족은 현실에서 잘라 낸 생각이고, 어린아이 같을 때가 많지만 위험할 수 있는방종이에요. 상상은 아무리 마구잡이일 때라 해도 현실과 떨어져있죠. 상상은 현실을 알고, 현실에서 출발하고, 돌아가서 현실을풍성하게 만들어요. 돈키호테는 기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과의 접점을 잃고 인생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죠. 그게 소망 충족이에요.  - P192

미겔 세르반테스는 기사이고 싶어 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함으로써 우리의 웃음과 인간이해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그게 상상입니다. 소망 충족은 히틀러의 천년왕국이고, 상상은 미합중국 헌법이에요.
이 차이를 알지 못한다면, 그 자체로 위험해요. 우리가 상상을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는 한갓 현실도피라 여기고, 그래서 믿지않고 억누른다면, 상상은 손상되고 왜곡되어 침묵에 빠지거나 거짓말을 하게 될 거예요. 모든 기본적인 인간 능력이 다 그렇듯, 상상력도 어려서부터 평생 연습하고 단련하고 훈련해야 해요. - P192

상상력을 연습하는 좋은 방법 하나는, 어쩌면 제일 좋은 방법은 지어낸 이야기들을 듣고 읽고 말하거나 쓰는 거예요. 훌륭한창작이라면, 아무리 기발하다 해도 현실과 일치하는 지점과 내적일관성이 있어요. 그냥 소망 충족의 헛소리이거나, 서사인 척하는설교에는 지적인 일관성과 진실성이 없어요. 온전하지 않고, 유효하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않아요.
스스로에게 충실한 이야기를 읽거나 말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건 정신이 받을 수 있는 거의 최고의 교육입니다. 여기 미국에서조차도, 많은 이들이 아이들에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샬럿의 거미줄>같이 상상력 풍부한 책을 읽히죠. 고등학교에서는SF와 판타지가 드디어 영문학 커리큘럼으로 인정이 됐어요.  - P193

시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말해야만 하는 내용을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말하며, 그것이 이야기 자체의 정확한 말(words)입니다. 그래서 말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그토록 오래 걸리는 거예요. 침묵과어둠, 시간과 인내심, 그리고 어휘와 문법에 대한 탄탄한 진짜 지식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경험에서 길어낸 진실한 상상은 알아볼 수 있으며, 독자들도 공유한답니다. 위대한 상상 이야기들에는 어떤 메시지든 넘어서는 의미가 있고, 수백 년이 넘도록 온갖 부류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습니다. 『오디세이』, 『돈키호테」, 「오만과 편견, 크리스마스캐럴』, 『반지의 제왕』, 『뿔 속의 꿀』, 『점프오프 크리크』. 이 중에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요. 다 순수한 허구죠. 그리고우리 모두에 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더 큰이야기에, 인간의 역사에, 인간 존재의 리얼리티에 포함시키는 작품들이죠. - P195

바로 그래서 저는 소설을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지어 보라 격려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하죠. 말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자면 시간이 좀 걸려요. 연습이 필요하죠. 노력이, 그것도 몇 년의 노력이 필요하고요.
그러고 나서도 여러분이 쓴 글이 영영 출간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출간된다 해도 여러분이 생계를 꾸릴 정도로 팔리지 않을 게 거의확실해요. 하지만 그게 여러분이 원하는 거라면 그 무엇도, 세상그 무엇도 여러분에게 글쓰기보다 더 달콤한 보상을 줄 순 없어요.
글을 쓰는 일 자체도, 그리고 자신이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것도, 말을 제대로 하고 있으며 이야기를 만들고 진실하게 말했다는사실을 아는 것도 엄청난 보상이죠. 진실을 말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고, 희귀한 일이에요. 즐기세요! - P196

어떻게 하면 전자출판과 인터넷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서 쓰고 싶은 걸 쓰고 그 대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전 좋은 생각을 해내기엔 너무 늙었어요. 여기 온 여러분들은 답을 생각해 내야 할 거예요. 그리고 생각해 낼 겁니다.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가끔은 모든 사람이 쓰고만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제 말 믿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은 읽고 싶어 해요. 그리고 자본주의 기술이 만든거대 기계의 뒷구멍과 틈 속 어딘가에서 작가들과 독자들은 언제나 그랬듯 서로를 찾아낼 거예요. 그렇게 되게 만드는 게 여러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방법은 여러분이 찾아낼 겁니다. 여러분에게 용기를, 그리고 세상 모든 행운을 빕니다.
- P198

이 소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이 굉장한 비중을 차지하던대공황기에 쓰였다. 이 소설이 그리는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이다. 기술 변화의 속도를 감안하면, 그 한 세기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긴 100년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데이비스가 그리는 그림이 무의미할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매혹적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인간이 문화를 시작하고부터 지금의 한두 세대 이전까지는 모두가 데이비스가 그리는 일의 세계 속에 살았다는 점을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주 쉽게 그 세계로 돌아갈수 있다는 사실도. - P210

선연하고 박력 있는 언어, 건조하고 장난스러운 유머 슥슥휘두르는 붓질로 표현하는 광활한 풍경, 스스로와 두 산맥에 걸쳐있는 다른 모두에게 요란한 말썽을 일으키는 괴팍한 인물들 떼거리를 보면서도 이 책이 나에게 남긴 본질적인 느낌은 외로움이다.
아니면 미국식으로, 고독함이라고 할까. 고독한 사람들 거부감이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는 고독한 히어로를 찬양할지 모르나, 그런영웅이 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고독이란 우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TV와 휴대전화와 소셜미디어 덕분에 벗어난 무엇이다. 그렇다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서부에 그 고독을 찾으러 갔다. 공간을, 빈자리를, 정적을 말이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영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고독을 갈망한다.  - P210

어떤 목표도 이루지 못하고, 심지어 어지간히 이해가 가는일조차 해내지 못했다 해도 이 책의 등장인물들은 격렬한 생명력을 지녔다. 터무니없이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게 웃기고, 모든 도피처가 그렇듯이 저속하다. 광대하고 무관심한 오리건 풍경 전체에데이비스는 이단아와 외톨이들의 대열을 반대하는 목소리들로 이루어진 미친 교향곡을, 고집스러운 영혼들의 순례를 보낸다. 나는그 속에서 조금은 마지못해, 또 조금은 안도하고 어쩌면 기쁘기까지 한 마음으로, 내가 아는 시골 사람들을 본다. 인간으로 사는 방법을 찾는 비범한 미국의 실험에서도 가장 끝자락, 머나먼 서부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 P213

개연성이야 관심 없다는 듯 무작위적인 일이 거듭 일어나고, 현실처럼 보이는 것과 현실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 점점 서로를침투하면서 우리는 딕의 심연 가장자리로 끌려간다. 가능과 불가능, 진짜와 가짜, 역사와 창작의 괴리…… 일어난 일과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 일어나지 않은 일,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 대치하는 영역, 단단한 바닥도 없고 믿을 수 있는 것도 없는 장소 아닌 장소……이 정신적 소용돌이에서 보는 딕의 상상은 지독히도 친숙하며, 딕은 이 소용돌이를 독자들에게 직설적이고 그럴듯한 방식으로, 아주 평범한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소설가들이 산책이나 디너파티를 묘사할 때처럼차분하게 우리가 아는 세상을 해체한다. 무섭도록 전복적이다. - P223

자신의 계급과 문화에 맞게 침착하면서도 극도로 절박하게 쓰였고, 불꽃놀이 같은 창의력 뒤에 난해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동기들을 숨겼으며, 쾌락을 혐오스럽고 모멸적인 것으로 그리고 자유를 무분별의 자격증으로 그리면서 쾌락과 자유 말고는 추악한 세계로부터 탈출할 다른 선택지를 내밀지 않는 『멋진 신세계는 심란하고 골치 아픈 책이며, 불안의 시대가 낳은 걸작이고,
20세기의 고통을 담아낸 선명한 기록이다. 그리고 또 아마 올더스헉슬리가 80년도 더 전에 그 태동을 보았던 길로 문명을 계속 끌고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아주 이른, 그리고 유효한 경고일것이다. - P235

어떤 독자들에게는 이것이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일수도 있다. 이 책이 대놓고 제기하는 역설적인 질문들, 그 밀도 높고경이로운 이미지로 우리를 괴롭히며 모든 정보를 불신하도록 자극하고, 우리가 환각을 뚫고 어쩌면 이 또한 착각일 수 있는 통찰에 이르게 하는 질문들보다 더 말이다. 반드시 물어야 하지만 답은 없는질문들을 묻는 것, 잊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이미지들을 창조하는 것…… 이거야말로 가장 대담한 예술가들의 특권이다. - P242

침묵당한 이들을 위해 말하는 일과,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화자의 목소리로 묻어 버리는 일은 다르다. 후자와 같은 잘못을 너무나 오랜 기간 저질렀기에, 어쩌면 정직한 선의 선행을 아무리 쌓는다 해도 인디언에 대해 쓰는 백인 소설가(또는 회고록 저자,
또는 인류학자)가 또 강탈하겠구나 하는 의심을 완전히 씻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디언과 백인이 관계를 맺은 역사 전체에서 죄의식은 피할 수가 없다.
죄의식이란, 죄의식을 인정함으로써 더 나은 곳으로 갈 수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주로 인디언 작가와 활동가들이 쉼 없이 의식화해 준 덕분에 우리는 서서히 더 나은 곳으로 향했다. 백인 작가들은 열렬한 동일시가 역겨운 침해일 수 있고,
이상화는 악마화 못지않은 모욕일 수 있음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이제 순진하게도 "인디언의 관점에서 소설 쓰기에 나서는 사람은별로 없다. - P253

50년 전의 9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영어로, 여기 미국에서 출간됐다. 작가는 자기 나라에서 이책을 출간하지 못했다. 10.
이 책은 그해 10월 내 스물여덟 살 생일선물이었다. 나에게 충격을 안긴 책이었다. 1950년대에는 냉전이 우리의 생각을 흐렸고, 이 책에 담긴 복잡한 정치적 입장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감정으로 이해되는 책이었다. 맹렬하게 지적인 책이지만, 반드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스테르나크는 우리에게 인간 역사의 기묘한 한 시기에대해 이야기할 능력을 갖춘 신비주의 리얼리즘 작가였다. 위대한 - P261

1917년 혁명기에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보내는 매일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말이다. 모든 것이 바뀌고, 친숙한 것들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거칠게 세워지더니 또 갑자기 무너져 내리고, 분파간 전쟁과 파괴가 끝없이 이어지던 신념과 이상의 거대한 혼돈 - 그리고 어떻게인가 그 혼란을 매일매일 헤쳐 나가는 평범한 사람들정신적인 회복력을다른 피난민들로 미어터지는 화물차에 아내와 아이와 함께 올라 모스크바에서 우랄까지 가는 유리 지바고의 긴 기차 여행과도 같은 이 엄청난 여정에 돌아가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이 책에는 시베리아의 눈밭 속 선로에 시커멓게 죽은 채로 서 있는텅 빈 기차처럼 잊을 수 없는 심상이 가득하다. 그리고 유리가 우랄에서 모스크바까지의 먼 길을 홀로 걸어서 돌아가는 동안 바람이 아니라 쥐 떼로 일렁이고 바스락대는 무르익은 곡물 밭을 말하는(마을 사람들은 죽어서 작물을 베지 못했고, 쥐들은 수백만으로 불어났기에) 그 조용하고 무시무시한 문장들이란. - P262

이 책은 모두 여행과 헤어짐과 만남이다. 등장인물 수십 명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그들은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지지만 서로를 붙들고 있지 못하고, 열렬한 미움은 사랑만큼이나 끈끈하게 그들을 묶는다. 그들은 만났다가 헤어지고울고 다시 만나고도 만났음을 알지 못한다. 무질서가 아니라, 거대한 기차역의 선로들처럼 다루기 힘들고 복잡한 상호연결이다. 이 모든 교차하는 운명들, 진지하게 애쓰는 이 모든 영혼들, 모두가 혁명이라는 거대한 - P262

바람에 날려가는 먼지처럼 무력하다.
지금 나는 내가 파스테르나크에게서 소설 쓰는 방법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올바른곳에 착륙하는 방법, 감정을 구현하는 정확한 상세 기술(記述), 더많이 생략해서 더 많이 얻는 방법…….
이건 거대한 책이다. 500페이지 분량은 러시아 전역과 40년의 역사, 한사람의 일생과 꿈을 담아낼 만큼 길지는 않다. 그러나 이책은 한 인간의 영혼처럼 방대하다. 여기에는 막대한 고통과 배신과 사랑이 담겨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거니와, 이건 위대한러시아 소설의 마지막 작품일지 모른다. 끔찍한 시기에 나온 이 아름답고 숭고한 증언은. - P263

그런데 그 덤불 속을 계속 나아가다 보니 곧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돌려 말해도 악몽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현실적인 스릴러들도 이 책에 비하면 커스터드 크림이나 다름없었다. 한도시의 모든 사람이 갑자기 눈이 먼다는 아이디어, 그것도 한꺼번에도 아니고 며칠에 걸쳐 무작위로 눈이 먼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끔찍하다. 평범한 한 사람 한사람의 눈을 통해(문자 그대로) 상황을 묘사하는 사라마구의 단조롭고 고요한 이야기 투는 그공포를 더 뼈저리게 전한다. 통제해 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그 노력 때문에 도시는 빠르게 무너져 내린다. 눈먼 운전자들이 자동차를 몰고, 집집에 불이 나고, 공황에 빠진 군인들이 공황에 빠진 시민들과 마주한다. 초반에 눈이 먼 사람들을가둔 폐쇄된 정신 병원은 곧 두렵고 약해진 상태가 사람들에게 불러낼 수 있는 최악이 농축된 지옥으로 변한다. 괴롭힘, 노예화, 까닭 없는 잔인함, 강간……. 이 시점에서 나는 독서를 멈췄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 P265

정확히 말하면, 영어로 구할 수 있는 모든 작품을 다 읽었다. 사라마구는 모어인 포르투갈어로 글을 쓴다. 그의 소설들을탐색하면서 나는 작가 본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는 훌륭하고 솔직하며 설득력 있고 신중한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우리가 알아야 한다 싶은 내용을 다 말해 줬다. 1922년에 어느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열네 살이 될 때까지 맨발로 다녔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돼지 여섯 마리로 생계를 꾸렸고, 추운 밤이면 약한 새끼돼지들을 침대에 데리고 들어가 재웠다. 그는 가난 때문에 대학으로 이어지는 학교로 가지 못하고 직업 학교에 갔으며, 몇 년간 정비사로 일하다가 문학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노벨상 연설에서 쓰기를 "(이들이) 제가 알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국가와 대농장 지주들의 공범이자 수혜자였던 카톨릭 교회에 속은 사람들, 끊임없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사람들, 제멋대로 휘두르는 거짓 정의에 수없이 당한 무고한 피해자들.....… 그래도 저는 광활한 알렌테주 평원에서 제게 주어졌던 존엄의 예시와 같은 위대함을 조금 더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아직은 잃지 않았어요." - P266

그는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지금도 공산주의자다. 44세가되었을 때 첫 시집을 냈다. 여러 신문에 글을 쓰고 사설과 에세이를 냈으며, 몇 년간은 번역가로 일하면서 콜레트와 톨스토이 같은작가들을 포르투갈어로 옮겼다. 1980년대, 60대가 되어서야 모든에너지를 소설 쓰기로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소설수도원의 비망록Memorial do convento』은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그때부터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미국의 후원을 받고 있는이스라엘의 정책들에 대해 공공연히 비판한 대가를 몇몇 비평으로 치르기는 했지만, 비평가들은 그의 정치 견해를 무시할 때가 많아 보인다. 지금 누군가가 사회주의를 진지하게 고수할 수 있다는생각 자체를 무시한달까. 실제로 그러려면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소설가는 아니고, 설교하려 드는 소설가는 전혀 아니다. 그의 소설 주제는 복잡하고, 솔직하면서도 교묘하다. - P267

그에게는, 젊었을 때 우리가 모두에게 말하던 내용을 또 말하려 드는 젊거나 젊어지고 싶어 하는 작가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 질린 나이 든 독자들까지 포함해서, 모두에게 들려줄 소식이 있다. 사라마구는 힘겹게 헐떡이는 수십 년 세월 모두를 뒤로했다. 그는 성장했다. 젊음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이단의 말이겠지만, 사라마구는 남자로서나 사람으로서나 예술가로서나 젊은 시절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그는 아버지가되어 보았고 더 배웠다. 20세기 대부분을 보았고 그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며,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고 그 중요한 것을 어떻게 말할지 익혔다. 사라마구가 이야기할 때 쓰는 에너지와 장악력은 경이롭다. 그는 나와 같은 세대의 소설가 중에서 내가 몰랐던것, 아니 어쩌면 내가 아는 줄 몰랐던 것들을 말해 주는 유일한 소설가다. 내가 아직도 배우게 되는 유일한 소설가다. 그에게는 우리가 부족하나마 지혜라고 부르는 예리하고도 꾸밈없는 이해력을 얻어 낼 시간과 용기가 있었다. 지혜라고는 부르지만 흔히 지혜라고딱지 붙이는 번지르르한 다독임이 아니다. 그는 전혀 사람을 안심시키지 않는다. 체념하라는 조언을 읊어 대진 않지만, 친절한 트릭스터인 희망에 대해서도 별로 확신하지 않는다. - P271

모국에 대한 그의 사랑이 전자책 앤솔러지로 나온 유일한 논픽션 작품인 포르투갈로 가는 여행 Viagem a Portugal』의 원동력이다. 이 책은북쪽부터 남쪽까지 포르투갈을 훑는 자세한 여행 안내서이면서또한 발견과 재발견의 항해요, 정부의 종교적인 편협 행위에 대한저항으로 몇 년 동안이나 스스로 떠나 있었던 나라로 (돌아)가는여행이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이 보수적이었는데, 이 말은사라마구가 경멸하는 네오콘들의 반동적인 헛소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무신론자이자 사회주의자로서 그는 그냥 믿음이나 견해가 아니라 합리적인 신념에 따라 발언하고 그 발언으로 고통받았다. 그 신념이란 거의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는 또렷한 윤리 체계에 기반하는데, 한 문장이기는 해도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정치적,
사회적, 영적 함의를 담고 있다. 그건 바로 ‘너보다 약한 사람들을해치는 건 잘못이다‘라는 문장이다 - P272

사라마구는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은 우주의침묵이고, 인간은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침이다." 그가 그렇게 극적인 경구를 내놓을 때는 자주 없다. 나라면 신에 대한 사라마구의 평소 태도를 꼬치꼬치 따지고, 회의적이고, 유머러스하고, 끈기 있다고 표현하겠다. 흔히 보는 절규하는 전문 무신론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자이고 교권 반대론자이며 종교를 믿지 않고, 신실한 지도자들도 당연히 그를 싫어하거니와 그역시 진심으로 그들을 싫어한다. 매혹적인 책 노트북 The Notebook』(2008년과 2009년에 쓴 블로그 모음)에서 그는 10세 소녀의 결혼을 합법화함으로써 소년애 행위를 합법화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프티(율법학자)를, 또 사제들이 벌이는 소년애를 저주하기를 너무나 꺼리는 로마 교황을 혹평하는데, 이 또한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심하게 해치는 문제다. 사라마구의 무신론은 페미니즘의 한 조각이고 그의 페미니즘은 여자들에 대한 학대와 저임금 지불과 평가 절하에 대한 격분, 모든 사회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권력을 오용하는 방식에 대한 격노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그에게는 사회주의의한 부분이다. 그는 약자 편에 서 있다. - P273

노벨상 연설에서 사라마구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사는 작은 경작지 너머로 모험을 떠날 수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기때문에, 남은 가능성이라곤 뿌리를 향해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제 뿌리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야심을 부려도 된다면 세상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그 힘겹고 끈기 있는 파내려가기가 이토록 가볍고 기분 좋은 책에 깊이와 무게를 더한다. 16세기 유럽의 어리석음과 미신 속을 여행하는 코끼리 이야기라면 우화가될 수도 있었겠으나, 이건 그냥 우화가 아니다. 여기엔 교훈이 없다.
행복한 결말도 없다. 그렇다, 솔로몬은 비엔나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의 발자국은 독자의 마음속에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흙 속에 찍힌 깊고 둥근 그 발자국은 오스트리아 궁정이나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어디도 아니고, 어 - P286

쩌면 좀 더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방향을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그 발자취는 이제 흙이나 책장, 머릿속만이 아니라 전자 위에도 찍혔다. 이제는 우리 컴퓨터의 진동 속에도 있고, 우리 화면의상징으로도 빛 자체만큼 무형이면서도 실제로서 존재하여, 앞으로 볼 모든 사람이 보고 읽고 따라가게 될 것이다. 사라마구는 심금을 울리는 품위와 재치를 담아, 그리고 자기 작품을 완전히 제어하는 위대한 예술가답게 단순하게 글을 쓴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원로이며 눈물이 있는 남자, 지혜로운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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