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럴딘 브룩스의 
피플오브 더북 People of the Book
2008년


미합중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오래지 않아, 우리 지역 신문에서 내가 잊을 수 없는 사진을 한 장 내보냈다. 바그다드 도서관을 서둘러 나서는 어떤 이라크 남자의 사진이었는데, 연기 가득한혼란스러운 길거리에 선 그 남자의 품에는 책이 가득, 아니 흘러넘치도록 무겁게 담겨 있었다. 몇 권은 화집이나 오래된 기록물처럼크고 무거워 보였으니 희귀한 보물들이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불타는 건물의 혼란 속에서 건질 수 있는 책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남자는 사서였을 수도 있고, 그저 독자였을 수도 있다. 약탈자가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얼굴에는 고통과 두려움만이 아니라 열렬한 비탄도 보였다. - P364

제럴딘 브룩스의 피플 오브 더 북 도서관 파괴로부터책을 구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읽고 싶어졌다. 그 시의적절함에 지금이다 싶고 그 역설에 가슴이 저미니, 저항할 수 없는유혹이었다. 이 소설은 어느 무슬림 사서가 화재에서 오래된 유대교 경전을 구한 실화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사라예보를 폭격하면서 도서관과 박물관들을 겨냥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보스니아의 자랑이자 영광인 소장품 ‘사라예보 하가다‘를 도서관에서 빼내어 은행 금고에 숨겨두었다. 하지만 그 원고가 구출받은 건 처음이 아니었다. 반세기전에는 그 경전을 나치의 코앞에서 빼돌려서 내내 어느 마을 모스크에 숨겨 두기도 했다. 1941년에 경전을 구한 사람은 이슬람교 학자인 데르비스 코르쿠트였다. 1992년에는 무슬림 사서인 엔베르 이마모비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잊지 못하는 그 사진 속 이라크인과 마찬가지로) 불타는 도서관에서 책을 들고 나오려던 이마모비치의 동료 하나가 스나이퍼에게 저격당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아이다 부투로비치였다. - P365

‘사라예보 하다‘는 유대교 경전으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기독교 성무일도서처럼 엄청나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삽화를넣은 책이다. 14세기 중반에 스페인에서 쓰고 삽화를 넣었는데,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사제가 "레비스토 페르미(revisto per mi)", 즉 내가 살펴보고 승인했다고 적고 서명을 해둔 덕분에 1609년 베네치아에서 있었던 종교재판에서 불타지 않 - P365

을 수 있었다. 어쩌다가 그 원고가 베네치아에서 보스니아로 가게되었고, 그래서 20세기에 두 번이나 아슬아슬하게 구출되었는지사연은 우리가 거의 알지 못한다.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유럽과 아프리카와 중동의 전쟁과 곤란을 다루던 배경이있고, 넓은 역사 캔버스를 좋아하며 퓰리처 상을 타기도 한 제럴딘브룩스라면 그 이야기를 맡기에 딱 맞는 소설가 같다. 브룩스의 성과는 많은 독자를 만족시킬 것이다. 이야기엔 복잡한 우여곡절이가득하고, 심지어 끝에 가서는 살짝 미스터리 플롯까지 가세한다.
섹스, 다소 보잘것없는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의무적인 폭력 행위 묘사도 있다. 소설은 실제 사건과 상상 속의 우여곡절을 통해 이 고문서의 기원을 따라가느라 몇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번갈아 나오는 챕터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대거 등장시킨다.  - P366

그러나 중심 이야기는 시간순으로 나아가며, 해나 히스라는 이름의 동시대 오스트레일리아 희귀본 전문가이자 똑똑한 교양인을 다룬다. 해나는 (가상의) 하가다를 분석하기 위해 사라예보로 불려 가고, 하가다를 구해 낸 (가상의) 사서에게 빠져든다. 우리는 이 책의 모험가들을 따라 5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이사이에 해나의 직업적인 의무,
해나가 애정 없는 어머니와 겪는 어려움, 해나 자신의 민족 유산에대한 뜻밖의 발견을 뒤쫓는다. 이야기는 넓게 뻗어 나가지만 모두탄탄하게 짜여 있다. 어쩌면 너무 탄탄한 구성인지도 모른다.
해나가 1인칭으로 서술하는 챕터들에는 대화가 가득하고, - P366

활기 넘치고 산뜻하며 저널리스트스러운 스타일로 쓰인 데다, 산문으로서 탁월하거나 미학적이진 않을지 몰라도 읽기 쉽고 실용적이다. 안타깝게도 이 자신만만한 확실성은 첫 번째 과거 챕터에서, 빨치산에 합류하는 어느 유대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쓴 1940년유고슬라비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자마자 사라진다. 스타일은투박해진다. 힘겹게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다. 1492년 바르셀로나에 갈 무렵에는 대화가 에드워드 불워리턴 수준으로 떨어지고 -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른단 말입니다!" - 서술은 유용한 정보와 예측 가능한 행동, 다방면의 묘사가빡빡하게 섞인 글이 되어 버렸다. 주머니 속에 돌을 집어넣듯, 수많은 역사소설을 무겁고 굼뜨게 만드는 조합이다! - P367

사건은 가득하지만 유머도, 심리적인 깨달음도, 묘사에 주의를 집중시킬 선연한 언어도 없는 이 챕터들은 끼긱거리며 이어진다. 역사소설로서는 정말 안타깝게도, 지역 특유의 생각과 정서에 대한 감수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있다 해도 인간의 차이에 대한 포용력으로 과거를 생생하게 살려낼 정도는 못 된다.
브룩스는 현대식 정의와 윤리 판단을 맞지 않는 공간과 시간에 가져다 놓으려 애타는 노력을 쏟아붓는다. 사람들은 그런 갈망을 "정치적 적절성(political correctness)"이라 부르는데, 한때는 의미 있었지만 이제는 대개 반발의 비웃음만 초래하는 용어다. 브룩 - P367

스의 진지한 선의는 존중해 마땅하지만, 사실 소설이 시대착오를저지르고도 빠져나갈 수 있을 때는 그 시대착오가 전혀 눈에 띄지않을 때뿐이며, 오래된 부적절함을 바로잡으려는 브룩스의 노력은지나치게 눈에 띈다. 페미니즘 때문에 브룩스가 귀한 책을 만들고지켜 내는 데 중요했던 여성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늙은 랍비들 사이에 그런 여성들을 넣다니 무리한 시도지만, 작가는 고집대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운 삽화를 그린 화가가 여자였고, 그것도 흑인 여자였음을 알게 된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설명은 그럴듯하다. 나도 믿고 싶다…… 그러나 믿을 수가 없다. 이 사람, 이 화가, 이 화가의 세계는 내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진짜같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건 그냥 소망 충족이다. 진정한 픽션다운 치열한 현실성을 띠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만일 경험 많은 저널리스트인 저자가 지어내기를 포기하고 사라예보 하가다의 놀라운 실화를 그대로 따라갔다면 더 나은 책이 되진 않았을까 생각하고 만다. 누군가가 아이다 부투로비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소설이나 시를 지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하고 만다. 괴로움 가득한 얼굴로 품에 책을가득 안고 있던 그 이라크인의 사연은 영영 알 수 없을 것을 알기에. - P368

여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독서는 드러누워서 푹 빠져들길고 두툼한 멋진 장편 소설 한 권, 아니면 여름 과일바구니처럼한 번에 한두 개씩 빼먹으며 온전히 음미하기 좋은 훌륭한 단편 잔뜩이다. 여기, 이탈로 칼비노가 보낸 큼지막한 이야기 바구니가 있다. 복숭아, 살구, 천도복숭아, 무화과, 다 있다.
그것이 『우주만화Le cosmicomiche』 (1968년에 영어로 출간)의 개요다. 『세상의 기억과 다른 우주만화La Memoria del mondo』(1968)에서 새로 번역한 일곱 편, 『시간과 사냥꾼 Ticon zero』(1969) 수록작 전체, 『어 - P369

둠 속의 숫자들 Prima che tu dico Pronto 』 (1995) 수록작 네 편, 그리고 묶여 나오지 않았던 단편 몇 개까지. 우주만화 전체를 한 권으로 보게 되다니 기쁜 일이거니와, 멋진 책이고 잘 만든 책이다. 수록작의3분의 1 이상이 나에게는 새로운 글이었고, 영어로 읽는 독자들 대부분에게 그러할 것이다. 그중 몇 편은 그야말로 보석이다. 윌리엄위버와 팀 파크스, 마틴 맥러플린의 번역은 다 만족스럽고, 맥러플린 씨의 서문은 이 눈부시게 색다른 이야기들에 더 좋을 수 없는안내서다. - P370

이탈로 칼비노는 무엇이었을까? 선(先)-포스트-모더니스트? 아무래도 모더니즘에서 온갖 접두사들을 없앨 때가 됐나 보다. 나치의 이탈리아 점령 기간 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싸우던젊은 레지스탕스 전사였던 칼비노는 독창적인 지적 판타지 작가가되었고 쭉 독창적인 작가로 남았다. 그리고 그가 작가 생활 중반쯤 만들어 낸 이 형식은, 우주만화는 무엇일까? 분명히 SF의 한 아종일 이 형식은 보통 (대개 진짜지만, 때로는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과학 가설에 대한 진술로 서술 무대를 설정하며, 서술자는 대개Ofwfq"라고 한다. 이와 같이 "모든 게 언젠가는‘이 시작된다. - P370

부디 그 정어리들을 주시하라. 그게 칼비노의 기법과 스타일이 지닌 특징이자 핵심이다. 이야기는 이런 도입부에서부터 지극히 논리적으로 전개되는데, 적어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논리에 현대 천체물리학만이 아니라 제논의 역설, 보르헤스의 알레프, 그리고 미친 모자 장수의 티파티가 포함되어 있을 경우에 그렇고, 또 그래야 한다.
칼비노의 나중 작업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단편이라기보다는 콩트로 여겨질 수 있다. 지적인 통각(apperception)의 서술 예시, 하나의 아이디어 또는 가설, 심지어는 착상이다. 콩트는 계몽주의가 제일 좋아하는 매개체로, 풍자와 코미디에 적합하다. 볼테르의 『캉디드』가 이런 유형의 걸작이다. 콩트는 인물보다는 캐리커처를, 공감보다는 아이러니를 제시한다.  - P371

칼비노는 너무나 많은 면에서 시대를앞서 나갔던탓에, 사후 25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그의 작품이 판타지라는 이유로 하찮은 취급을 받지 않고 획기적인 소설이자 거장의 작품으로 널리여겨지게 되었다. 칼비노가 글을 쓰던 시기에 SF는 문학으로 거론되지 않았고, 만화는 심지어 그보다 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이 되기 전까지는 만화를 진지하게 논한다는 상상조차 하는 문학 평론가가 거의 없었다. 그 평론가들은 칼비노가 이이야기들에 부여한 이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둘 때조차도 그게한 가지 암시이고 우주 코미디를 강조하려는 제목이라 여겼다. 하지만 칼비노는 분명 우리가 급작스러운 접근을 비약과 방대한 단순화를, 테두리 안에 그려진 그림 서사를, 카툰을, 만화를 생각하기를 의도했다. 그리고 단편 「새의 기원‘origine degli Uccelli」은 정확히그런 심상을 가지고 놀면서 독자에게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지시한다. "여러분이 효과적으로 그려 넣은 배경에 온갖 자그마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카툰 시리즈를 상상해 보면 좋겠지만, 그와 동시에 여러분은 어떤 인물도, 배경도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합니다." - P375

열여덟에서 열아홉 권에 이르는 마거릿 드래블의 소설들은 나온 시기의 표현양식으로 각 시기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기록해 왔으나, 진정으로 유행을 따른 적은 없었다. 그녀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지성 때문에 유행을 빈틈없이 알았고, 역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드래블의 소설을 소중하게 여기도록 하는 특징들은 모더니즘이라 부르기도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포스트모던도 아니다.
물론 나는 구식이라는 말을 피하려고 노력 중인데, 드래블이 그 말을 죽음의 입맞춤으로 여길까 걱정스러워서다. 그러나 뭐라고 할까? 근본적으로 솔직하지만 즐겁도록 절묘하기도 한 강렬한 서사추진력, 선명하지만 대부분 말로 하지 않는 도덕적 부담, 사회와 젠 - P376

더와 예절과 유행에 대한 적확하고도 즐거운 관찰, 어쩌면 성격이곧 운명인지도 모를 강렬한 개성을 갖춘 등장인물들 세상에, 내가지금 제인 오스틴에 대해 말하고 있나?
얼마 전, 드래블은 연쇄살인자들이 우리 모두에게 발휘한다고 하는 매력 같은 가짜 사안들에 열중하다가 조금 방황하려는것 같았다. 나는 그것 때문에 드래블의 소설들이 나빠졌다 생각했다. 바다 숙녀』를 읽으며 『바늘의 눈The Needle‘s Eye』를 썼던 영리하고 빈틈없고 속지 않으며 타협하지 않는 저자를 다시 찾아 기쁘다.
흉을 잡자면, 바다 숙녀」에서 딱 한 인물이랄까 목소리, 아니면 페르소나에게 이의를 제기하련다. ‘공개 연설자(PublicOrator)‘로 남성인데, 한번씩 자의식을 얻어 이야기에 대해 의견을내놓으면서 메타픽션적으로 개입하는 저자, 독자들에게 던지는 새커리 스러운 방백, 그리고 희미한 번연의 향기를 아우른다. 그를 다루는 몇 대목은 이렇게나 달변이다. - P377

그리고 배경이 있다. 이 나라의 동쪽 절반에 사는 사람들은다발풀 무성한 방목장과 목장에 사는 카우보이들을 진지한 소설배경이 아니라 마초 영화용 소도구로 보는 경향이 있다. 뭐예요, 거기 진짜 사람들이 산다고요?
엠시윌러가 그리는 1905년 시에라 산맥 비탈의 캘리포니아는 루이스 라모어‘와는 아주아주 거리가 멀고 할리우드와도 다른행성에 있다. 그러나 메리 오스틴의 『비가 오지 않는 땅 Land of LittleRaing에서는 길만 건너면 바로다. 여기는 "성공"이 아무 의미가 없는 미국, 건지 농업과 궁핍한 목축업의 땅, 외톨이 하나하나가 옆에있는 외톨이를 아는 곳이다. 이들은 기대치가 낮고 강인한 사람들, 특이한 실패자와 도망자들, 사막 사람들이다.  - P387

이 무정하게 위험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람의 행동과 관계들은 깊은 정적을 깨뜨리는 어떤 목소리나 몸짓과도 같은 중요도를 띤다. 하지만 엠시윌러는 사막의 삶을 열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작가는 그곳을 목장 일꾼들이 알듯이 풍경이 아니라 땅으로 안다. 그곳 사람들을 원형이 아니라 개인으로 안다. 그 땅의 정적에, 그리고 사람들의 정적에 귀 기울일 줄 안다.
산과 사막 지역에서 온 ‘머나먼 서부인들‘인 내 어머니 쪽 친척들이 딱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엠시윌러는 그 사람들을 완벽하게 잡아냈다. 어린 로티가 쓰는 일기가 소설 내내 계속 다시 나온 - P387

다. 그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1880년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우리 이모할머니 벳시를 생각했다. 이건 꼭 벳시 같네, 생각했다. 벳시라면 이 애를 알았을 거야. 벳시가 이 애였어. 서부인이 소설 속에서 자기 친척들을 발견하고, 친척들이 말하는 방식대로 말하는소리를 듣기란 아직까지도 드문 경험이다. 20세기 초에는 그들을아는 여자 작가들이 있었다. 월러스 스테그너가 출처 표시 없이 작품을 도용해서 소설을 썼던 메리 할록 푸트도 그런 작가였다. H. L.
데이비스의 뿔 속의 꿀과 몰리 글로스의 점프오프 크리크』는서부 지역과 인물들에 대한 확고한 솔직성을 갖췄다. 캐럴린 시, 주디스 프리먼, 디어드리 맥네이머, 앨리슨 베이커 같은 작가들이 그전통을 최근으로 불러오고 있다. 마침내, 그리고 서서히, 그리고 대부분 여성 작가들이 서부를 쟁취하고 있다. - P388

하지만 엠시윌러가, 너무나 뉴욕스럽고 세련된 글을 쓰는데다 뉴욕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그가 어떻게 우리 이모할머니에 대해 다 아는 걸까? 아마 뛰어난 소설가라서이리라. 소설가란 상상력을 이용하고, 그래서 회고록 작가들과 다른 법이니. 엠시윌러는 자기 소설의 배경을 속속들이 알고, 자작 목장에서의 삶이어떤지 알며, 말을 탈 때 어느 쪽에서 오르는지 안다. 책 뒤표지에실린 사진에서 작가는 잘생긴 애팔루사말을 향해 효율적인 안장을 들어 보이며 웃고 있다. 하지만 배경의 나무인지 덤불인지는 바스토 근처의 개울 바닥일 수도 있고, 롱아일랜드일 수도 있고, 어디든 가능하다. 내가 확신하는 건 그녀가 『레도잇」에서 무엇에 대 - P388

해 쓰는지 알고 있었으며, 그건 쓸 가치가 있었고, 달리 아무도 그런 소설은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쓰는 이 소설 『레도잇』이 아직도 절판 상태라는 사실을 적게 되어 유감이다. 혹시 요새 모두가 책을 사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레도잇』을 찾아본다면, 나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은 『레도잇』이지만 벨라루스에 대한 책이 한 권 있다. 또 이런 꼴이다. 노도 없이 아마존 강을 거스르는 꼴. 그저 어느출판사가 「레도잇』을 재출간할 분별을 발휘해 주길 빌 뿐이다. 격렬하고도 다정하게 성장하는 어느 소녀의 격렬하고 다정한 초상.
애정과 슬픔에 재능이 있는 남자의 슬픔 가득하고 애정 어린 초상.
서부극이자, 감상적이지 않은 사랑 이야기, 이상화하지 않은 미국의 과거 모습, 강인하고 달콤하며 고통스럽고 진실한 소설을. - P389

머릿속에서나 포스터에서나 콜로라도 하면 온통 산봉우리와 그림 같은 스키 산장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동쪽에서 운전해서콜로라도로 진입해 본다면, 대체로키산맥은 어디다 감춘 걸까 의아해질 수도 있다.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서서히 높아지는 평원은광대하고 단조로우며, 가끔 하나씩 못생긴 소도시가 튀어나올 뿐이다. 미국의 서부는 온갖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며, 그 장엄함은 피상적인 게 아니다.
그런 못생긴 소도시 중 하나인 홀트는 소설가 켄트 하루프의 창작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세 장편 『플레인송』, 『이븐타이드Eventide』, 그리고 『축복』을 읽은 독자라면 이제 그 마을을 거리 하 - P395

나하나, 주민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안다. 피에르와 나타샤, 아니면 헉핀 같은 하루프의 인물들은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가며,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의 대화는 건조하고 수수하며 서부 특유의 느긋한 운율을 띠고, 저자의 서술도 그렇다. 대화에 따옴표를 넣지 않으니 이 연속성이 부드럽게 강조된다. 절제하는 목소리, 조용한 음악이다. - P396

다수가 타고나기를 외톨이인 홀트 사람들의 열정은 미국소도시의 억압적인 인습과, 가난과 무지와 가차없는 고된 노동이라는 온갖 구속에 매인 채, 가끔은 폭력으로, 가끔은 연민의 손을뻗는 행위 또는 그러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폭력은 이 시대 소설들에 흔히 나오고, 연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하루프는 인간관계를극도로 사려 깊고 신중하게 다루며 격분과 충절, 동정, 도의심, 소심함, 의무감을 탐구한다. 그는 복잡하며 거의 언급되지 않는 도덕문제들을 다루며, 아마도 이심전심의 경지를 향해 밀고 나아간다.
때로는 감상적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 한두 번은 감상주의에빠지기도 하지만, 홀트 소설을 통틀어 평범한 사랑의 형태를 지속되는 좌절, 헌신적 애정이 치르는 오랜 대가, 일상적인 애정의 위안을 탐구하는 하루프의 용기와 성취는 내가 아는 그 어떤 동시대 소설도 능가한다. - P396

서술은 이 중심인물과 그 주위를 돌면서 보조적인 이야기와 인물과 세대들로 복합적이고 풍성한 결을 자아낸다. 하루프는어른 여자와 여자아이들을 이상화 없이 애정을 담아, 개별 인간으로 쓴다. 청소년기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떤 단정도 없이 공감하고,
조악함과 위선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본다. 성애와 무관한 애정 관계를 보여 주는 기술,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양쪽 관점에서 묘사하는 그의 기술은 드문 만큼 반갑다.
하루프는 아주 많은 면에서 놀랍도록 독창적인 작가다. 그독창성은 특성상 많은 전통적 비평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는 가식을 부리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차분하게, 친밀하게, 그러면서도 어려워하면서, 한 어른으로서 다른 어른에게 말을 건다. 그는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조심한다. 그리고 제대로 해냈다. 딱좋다. 진실되게 와 닿는다. - P399

일상에 대해 쓴다는 건 힘든 일이다. 비범한 것, 전율스러운것, 초월적인 것은 자동으로 매력을 발하지만 심지어 특별히 불행하지조차 않을 만큼 흔한 삶을 묘사하려면 용감한 저자여야 한다.
게다가 행복이라니, 성적인 만족도 아니고 야심에 대한 보상도, 황홀경도, 지복도 아니고 그저 일상의 행복이라니 이건 사실상 소설에서 사라진 무언가다. 우리가 그것을 믿지 않고 감상주의로 보거나, 진짜와 가짜를 혼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쓰기 쉽지가 않다. 진실성 있게 울리려면 가장 초라한 종류의 성취와 만족에 대한 묘사조차도 인간의 부족함과 잔인함, 언제나 질병과 몰락과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쓰여야만 한다. - P400

한 마디만 잘못 써도 모든 게 믿기지 않아진다.
켄트 하루의 밤에 우리 영혼은』에는 잘못 쓴 한 마디가없다. 구어체의 편안함과 투명함을 갖춘 산문체와 단순해 보이는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말이나 뻔한 말 하나가 없다.
보통 어떤 소설을 어떤 상황에서 썼느냐는 독자인 나에게별로 흥미를 일으키지 않지만, 이 경우에는 저자가 죽어 가면서 쓴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동받고 경외감마저 느낀다. 이 책은삶의 먼 가장자리에서,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책임감을 품고 써낸보고서다. 하루프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보다 멀리 가서, 그곳에서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고 싶어 한다. 하루프가 자신의 상황을알고 있었고, 내가 그 사실을 알면서 책을 읽었기에, 나는 오직 해야만 하는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과 함께한다는 귀한 특권을 고맙게 여겼다.
그 목소리는 조용하다. 그곳에는 모든 어둠이 다 있으나, 우리는 빛을 보고 있다. 콜로라도의 어느 소도시, 어느 침실에 켜진등불 빛을. - P401

향해 깊게 뿌리를 뻗는다.
홀트는 뉴욕에서 멀다. 어쩌면 런던이나 프라하보다 더 멀것이다. 많은 동부 미국인에게, 서부 미국은 오직 선인장과 할리우드, 문학이 아니라 서부영화의 무대일 뿐이다. 어쩌면 편협한 도시비평가들은 매력도 없고 유행과도 거리가 먼 홀트에 바치는 하루프의 신의 때문에 그의 사려 깊고 섬세하며 능란한 작품에 마땅한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마 하루프는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성공을 열망하여 움직이지도, 홍보용 유명인 공장의 기계적인 과대 선전을 겪지도 않고 고집스레 켄트 하루프로 남아서 자기 일을 계속 하고, 방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그게 옳긴 한건지조차 잘 모르면서도 옳다고 여기는 일을 계속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에게나 스스로에 - P402

게나 얼마나 가혹한지에 대해서, 우리들 대부분이 얼마나 힘들게일하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갈망하고 얼마나 조금에만족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쓸 수 있었다.
이 모두가 탄탄하고 만족스러운 장편의 재료인데, 이 마지막 책에서는 거기에 아주 희귀한 뭔가가 더해졌다. 수많은 소설이행복 추구에 대해 썼지만, 이 소설은 실제 행복의 빛을 발한다.
"그러다가 애디 무어가 루이스 워터스를 찾아가는 날이 왔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남편과 사별한 애디는 아내와 사별한 이웃을 찾아가서, 혹시 가끔 같이 자러 올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다.
"뭐요?" 루이스는 당연히 깜짝 놀라서 말한다. "그게 무슨뜻입니까?" 그러자 애디가 말한다. "우리 둘 다 혼자잖아요. 너무오래 혼자 지냈어요. 몇 년이나 그랬죠. 난 외로워요. 당신도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혹시 밤에 와서 나와 같이 잘 생각 있나요. 대화도 하고요." - P403

변한 것이 있다면, 글쓰기의 본질에 일어난 변화가 아니다. 언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군살 없이 팽팽한 미니멀리즘을 선보인다. 그러나 이런 형용사들은 상당히 많은 현대 서사 산문을 묘사하기도 한다. 유행에 맞는 식욕 억제 스타일로 스릴러와 경찰소설, 실존 누아르에 잘 맞지만 아우르는 영역이 무척 한정되어 있다. 얀손의 영역은 효율적으로 통제되어 있긴 해도 크다. 얀손의 간결한 정확성은 긴장과 스트레스만이 아니라 깊은 감정, 확장, 휴식, 평화까지 표현할 수 있다. 묘사는 서두르지 않고 적확하며 선명하다. 화가의 눈이다. 스타일은 "시적"이긴커녕 정반대로 가장 잘 짜인 산문이다. 순수한 산문이다. 그 고요하고 명료한 글을 통해 우리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를 위협적인 어둠을 약속된 보물을 본다. 문장은구조, 움직임, 운율 모두 아름답다. 필연적으로 어울린다. 심지어번역인데도! 토머스 틸은 표지에 토베 얀손과 같이 이름을 올려야마땅하다. 그는 진정한 번역가의 기적을 일으켰다. - P406

COMPAGE디스토피아는 그 천성이 음울하고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다. 초기 탐험가들에게는 온갖 발견의 흥분이 있는 곳이었고, 아직까지도 그들의 글에 꽉 찬 그 흥분이 디스토피아를 신선하고 강력하게 유지해 준다. E. M. 포스터의 기계 멈추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그렇다. 하지만 지난 30여 년간, 디스토피아는 흔한 관광 상품이었다. 모두가 그곳에가서 책을 한 권씩 쓴다. 그리고 그 책들은 다 비슷비슷하다. 디스토피아의 영역은 한정되어 있고 그 본질은 단조롭기에,
디스토피아에서 제일 익숙한 그림은 대재난으로 망가졌거나 방치된 야생의 풍경에, 자연과 다른 종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외 - P415

부 대기로부터도 차단된 인간 정착지가 드문드문 흩어진 모습이다.
이런 지하, 아니면 돔 속, 아니면 벽 안의 거주지들에는 인간이 빽빽하게 모여서 정부와 정해진 일과의 통제를 받으며, 엄격하게 관리되고 안전하게 보호받고 대단히 비자연적이며 종종 사치스러운
"유토피아" 생활을 영위한다. 거주지 안에 사는 사람들은 바깥에사는 사람들을 원시적이고 무법하며 위험하다 여기고, 바깥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지만, 또한 자유롭기도 하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에는 영웅이 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거주민이다. - P416

이창래의 디스토피아 안내서는, 문예창작 교수라면 예상하다시피 예측 가능한 주제들의 독창적인 변주로 가득하고, 디스토피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처럼 보이기는 할 정도로 복잡하고 교묘한 관점에서 쓰였다. 소설은 전형적인 안밖 패턴을 따라간다.
‘당국‘이라고 불리는 모호한 단체가 두 종류의 정착지를 유지한다.
인구밀도 높고 부지런한 노동계급 정착지들은 ‘차터‘라는 상류층정착지에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고, 차터 사람들은 경쟁적으로사치하며 풍요롭게 살아간다. 이 (어느 정도) 보호받는 구역들 바깥은 자치주라고 불리는 무질서한 황야다. 서술자 겸 안내자는 차터를 위해 식량을 키우는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거주지 B-모어 (볼티모어) 사람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위해 말하는 1인칭 복수의 목소리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이 "우리"의 목소리는 또한 바깥에 나가는 영웅의 여정과 감정을 알고 이야기할 수 있다. - P416

상상 문학에서는 이토록 기본적이고 합리적인 질문들을무시하는 것이 문학적인 자유로 양해를 받거나, 심지어 정당화되는 일이 많다. 저자는 문학 작가로 알려져 있으니, 아마 자기가 가진 그런 자유를 당연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과학소설은 그런 무책임함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강력한 정치 통제 하의 미래 사회를 그리는 소설은 사회과학소설이다. 코맥 매카시와다른 작가들이 그랬듯, 이창래는 진지한 장르의 핵심 요소들을 무책임하게, 피상적으로 이용한다. 그 결과로 이창래의 상상 세계에는 현실감이 거의 없다. 체제 전체가 너무 자기모순이 심해서 경고나 풍자로도 알맞지 않다. 설령 책 끝에 가서는 서술자가 그 비현실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해도 그렇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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