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산



​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당신 떠난 그 자리에
사람들이 서성이며 울고 있습니다
아아 천둥 번개 비바람 지난 뒤에도
당신 떠난 빈자리에
사람들은 숲이 되어 서 있습니다

정희성시집 [그리운 나무]중에서





다시 오월,
여전히 당신이 그립고, 그리운 ... 시절입니다.
당신이 떠난지 벌써 15년이라니요.
그립고 그리운 나의 대통령님~
세월호 아이들과 이태원의 젊은이들과 김용균과, 또 다른 김용균들을 잘 보듬어주세요. 신경림선생님과 세상 얘기를 나누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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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신경림

 

이쯤에서 돌아갈까보다
차를 타고 달려온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찻집도 기웃대고 술집도 들러야지
낯익은 얼굴들 나를 보고는
다들 외면하겠지
나는 노여워하지 않을 테다
너무 오래 혼자 달려왔으니까
부끄러워하지도 않을 테다
내 손에 들린 가방이 텅 비었더라도
그동안 내가 모으고 쌓은 것이
한줌의 모래밖에 안된다고
새삼 알게 되더라도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 2014 )]중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 이쯤에서를 되뇌면
행간과 자간 사이의 여백이 강렬해집니다.
감히 노시인의 곡진한 삶과 생의 관조가 엿보여서
코끝이 찡하기도 합니다.
시집[사진관집 이층]은 겨우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에 서서
한편, 한편 읽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보지 못한 꽃도 구경하고 듣지 못한 새소리도 들으면서’
오래 오지 않는 버스에 손발이 시리고
늦을까봐 마음 조리다가 슬그머니 각진 모서리들이 무뎌지던 경험을 하게했지요.
시는, 시인은
그리하여 우리를 세상 안에 살게 합니다.



2014년 7월에 포스팅했던 시집입니다.
˝농무˝ 이후 참 좋아했던 시집이기도 하구요.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시인은 결정하셨나봅니다. 이렇게 존경하는 원로를 또 보냅니다. 폭폭한 세상에서 숨통을 트게 해주시던 고 신경림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더 자주, 더 많이 시를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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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꼍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뒤꼍에 밤낮 없이 열어 두는문이 하나씩 있다 언제나 예감은 불륜의 발자국처럼 그리로 드나들었다 기일게 개미 떼들이 서둘러 피신한 뒤내리는 소낙비에 그러나 나는 왜 번번이 노박이로 흠씬젖었을까 그해 겨울도 그랬다 순천 선암사 뒤꼍 줄로서 있는 홍매화들이 노구를 이끌고 이 엄동에도 꽃눈부풀어 만삭이라는, 통통하게 벌서고 있다는, 숨이 차다는 전갈을 그날 아침 받기도 하였지만 그런 뒤꼍일때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날 우리집 뒤꼍 간장독이새벽부터 캄캄하게 뒤집혔고 이윽고 한 채 꽃상여가 산모롱이를 돌아갔다 눈발 날렸다 어머니가 이승을 하직하셨다

마지막 가을


여름을 여름답게 들끓게 하지도 못하고 서둘러 가을이 왔다 모든 귀뚜라미들의 기인 더듬이가 밤새도록 짚은 울음으로도 울음으로도 다 가닿지 못한 어디가 따로이 있다는 게냐 사랑이 멍든 자죽도 없이 맞이하는 가을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른 새벽길 아직도떠나지 못하고 있는 바닷가 민박집 여자의 아침상도 오늘로 접어야 하리 늘 비가 내렸다 햇살들의 손톱 사이에낀 푸른곰팡이들이 아직도 축축하다 부끄럽다 이 손으로 따뜻한 네 손을 잡겠다 할 수는 없구나 딸이 늦은시집을 간다는 편지를 객지에서 받는다 노동의 지전을센다 마지막 그물을 거두었다 이러는 게 아니지 너무오래 혼자 있는 가을에 익숙해졌다 서둘러 돌아가야 하리 왜 이토록 서성거리는 게냐 슬픔이 떠난 자리는 늘불안했다 낡은 입성으로 오는 마지막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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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위험한 모험

"내 직감은 그것을 단어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더욱 명백해진다." 이런 문장을 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착각이었다. 글을 쓸 때 직감은 어딘가에 붙거나 고착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까 ㅡ 그것이 진심이라면, 단어의 힘으로 파괴되거나 자멸한다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 수면 위로 절대떠오르지 않길 바랐던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다. 환경이 지옥 같아질 수도 있다. 직감이 통과하려면 심장은 순수해야 한다. 세상에, 언제 심장이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순수한 것을 정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때로는 부정한 사랑 속에 몸과 영혼의모든 순수함이 있다. 성직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랑으로 축복을 받는다. 이 모든 것을 보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ㅡ본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직감을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쓰는 행위를 가지고는 장난칠 수 없다. 사냥감은 사냥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 P328

저항

수술한 손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실밥을 풀었을 때 비명을 질렀다. 나는 아프고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는데, 통증이 온전한 육체를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통증을 핑계로 과거와 현재의 분노를 내질렀던 것이다. 세상에, 미래의 분노도.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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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봄비 내린다


겨우내 꿰맨 마음의 솔기가 촘촘하다 冬安居를 끝낸 중들이 주섬주섬 길 떠날 채비로 궁성대는 새벽, 봄비 내린다 연한 비, 비린내 난다 한 그루 산수유에서도 수런거리는 소리 노랗다 봄 春字 벌레 蟲字 그대로 준동蠢動이다 벌레들 우듬지 끝까지 따라 오르다 저런! 봄신명이 잘못 지폈나 보다 헛발 디뎌 제 몸 패대기친다 터진 속내가 벌써 초록色이다 새순들 과식하셨구나 몸이 무거우셨구나

껍질


어머니로부터 빠듯이 세상에 밀려 나온 나는 또 한번나를 내 몸으로 세상 밖 저쪽으로 그렇게 밀어내고 싶다 그렇게 나가서 저 언덕을 아득히 걸어가는 키 큰 내뒷모습을 보고 싶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준비 중이다 확인 중이다 나의 구멍은 어디인가 나갈 구멍을 찾고 있다 쉽지 않구나 어디인가 빠듯한 틈이여! 내 껍질이 이다음 강원도 정선 어디쯤서 낡은 빨래로 비를 맞고 있는 것이 보인다 햇살 쨍쨍한 날 보송보송 잘 말라주기를 바란다 흔한 매미 껍질같이는 싫다그건 너무 낡은 슬픔이지 않느냐

마른 들깻단


다 털고 난 마른 들깻단이 왜 이리 좋으냐 슬프게 좋으냐 눈물 나게 좋으냐 참깻단보다 한참 더 좋다 들깻단이여, 쭉정이답구나 늦가을답구나 늙은 아버지답구나 빈 밭에 가볍게 누운 그에게서도 새벽 기침 소리가들린다 서리 맞아 반짝거리는 들깻단, 슬픔도 저러히반짝거릴 때가 있다 그런 등성이가 있다 쭉정이가 쭉정이다워지는 순간이다 반짝이는 들깻내, 잘 늙은 사람내그게 반가워 내 늙음이 한꺼번에 그 등성이로 달려가는게 보인다 늦가을 앞산 단풍은 무너지도록 밝지만 너무 두껍다 자꾸 미끄럽다

늦가을


上等品으로만 온 마을이 가득 비었다 들앉을 자리가넘친다 태양초 고추 멍석이 빠알갛다 살림 차리자 빠알갛게 들어앉거라 바로 너인 줄 모를 리 없다

장마


비 듣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진종일 귀가 열리고 있다 안이 꽤 깊다 틈서리마다 젖어들어서 불어난 집의 부피와 무게들이 내 마음의 容量 위에 푸른곰팡이의 눈금을 하나씩 더 올려놓고 있다 슬픔이 살찐다 다친 다리가 쑤시기 시작한다 감당키 어려운 대목이 이런 날엔 어김없이 응답을 해야 直性이 풀린다 내가 새고 있다 집이 새고 있다 그게 몸이다 새는 낮게 낮게 뒷산 허리를 날아가고 있다 비리게 속까지 젖어서 높게 뜨지 못한다 새는 어디를 다치셨는가 새도 새고 있다 둥지가 새고있다 슬픔이 새로 살찐다 한참 비안개 자옥하다 새어서 새어서 너에게서도 새어서 나는 여기까지 왔구나 다친 몸은 정직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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