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입구에 씌어지기 시작, 이제 1990년대입구를 넘어선 오늘에까지 민족의 근현대사를넉넉하고도 깊이있게 펼쳐가고 있는 朴景利씨의「土地」는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욕과 삶에의 강렬한 회원에 뿌리를 내리고서, 19세기 후반부터 불행한 식민지 전기간에 걸친 우리 민족사(民族史)를 다루고 있다. 사람답게 사는 문제를 포함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민족의 구체적 생활사(生活史) 속에서 풀어 헤치고 있는「土地는 한 작가의 정신적 노력의 위대함을 고스란히 실증해주고 있다.

-金允植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 P-1

"제발 그렇기나 됐이믄, 원통한 말을 어느 곳에 가서 으흐흣. 내 그렇기 되는 날이믄 머리털을 뽑아서 신이라도 으흐흣..."
석이네는 또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운다.
"김훈장 헹펜이 젤 딱한 모양이고... 아무튼지간에 그렇기 알고접던 소식을 들었는데 우째 이리 가심에 구멍이 펑 뚫린 것맨치로 앉아도 그렇고 서도 그렇고 갈 바를 잡을 수가 없는지 모르겠소?"
들은 얘기는 다 털어놨고 눈물도 다 짜냈건만 허하기론 마찬가지, 기화는 멀거니 석이네를 바라보고 석이네는 또 우두커니 방바닥만 내려다본다. 시원할 것 같지만 시원치가 않다. 희망이 잡힐 것같지만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은 남편은 영원히 잠들어 깨어날 리 없고 날아가버린 길상이 품에 돌아올 리 없다. 방에 마주보고 앉은 사람은 봉순이 아닌 기생 기화와 오동지 섣달에도 빨래품을 팔아야 하는 가난한 홀어미, 웃음도 말도 허공에 먼지되어 날아갔다. 무슨 희망이 있는가.
점심을 먹은 뒤
"김서방댁이 죽었다 캅니다."
풀쑥 말을 꺼내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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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위어서 서희의 눈동자는 커다랗고 한결 짙어진 눈시울은 눈가장자리에 병적인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입술도 다소 푸르스럼한 것 같다. 그러나 병적인 음영과 초췌해 보이는 얼굴은 오히려 처연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여러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할것없이 모두 두려운 눈으로 서희를 바라본다. 숨이 막히고 고뇌스러우며 탄식하게 되는, 아무튼 보는 사람에게 황홀감을 주기보다 괴로움을 주는 서희의 미모, 용정 바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뿌린 여자이던가, 전설과 같은 얘기들, 어떻게 하여 저 흑요석(黑曜石) 같은 눈동자의 어린 여자는 어마어마한 그 재산을 삼사 년 동안 쌓아올렸을까. 기적이다. 그 기적을 상징하는 것이 독특한 그의 용모다. 기품과 요기(妖氣)와 교만과 총명의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여자. 서희의 시선은 일순도 머문 곳이 없었다. 길상에게조차 단 일별을 허용치 않고 마차에 오른다. 털을 바닥에 깐 작은 단화, 역두에 선 사람들이 마지막 본 것은 서희의 그 귀여운 구둣발이었다. - P383

이상한 일이다. 순간적인 심리 변화라는 것은. 서희는 거짓 없이 말했던 것이다. 사실 당초부터 서희에게는 경쟁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얼굴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따위는, 그런 것을 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슴푸레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길상은 무엇을 원했으며 어떤 결과를 만들려는가. 서희가 거짓 없이 말했다는 것은 길상이 이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이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니 사랑하고 있지 않아.
그건 설움 때문이야. 서희는 속으로 뇌이며 눈길을 여자도 목도리도 아닌 곳으로 옮긴다. 서희가 알기로도 길상에게는 좋은 혼처가 많았다. 그것을 다 마다하고 볼품없고 가난에 찌들은, 아이까지 딸린 과부와의 관계를 숨기지 않고 떠벌리고 다녔다는 것은, 그것이길상의 슬픔이라는 것을 서희는 비로소 느낀다.
"앙입매다. 거짓말은 마옵소꽝이. 어째 모르겠습니까. 생각으 해보옵소. 어째 새총각으 처지 알라까지 따른 가스집과 혼인하겠슴? 사람으 괄시하면 앙이 됩매다. 누귀 그 말을 믿겠소꽝이? 그러잖애도 그분이 도와준 돈을 갚겠다아 그 일념으로 밤 새워가문서리 바느질으 하는 기요." - P405

‘고아 같다. 뭐 언제는 내가 고아 아니었었나? 그렇지만 더욱더 고아 같다.‘
못에 매달린 목도리를 보았을 때 서희는 여자를 집에 데려다놓고 길상에게 고통을 주리니 생각했었다. 길상이 자기를 낯선 여관에다 내버려두고 여자 집을 찾아간 행위가 애정 없는 것이었다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 그 무자비한 감정을 무엇이 풀어놨다. 풀린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서희는 스스로, 자기 자신마저 질곡에서 풀어버린 것이다. 용정에 쌓아 올려놓은 자기 성으로 돌아간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나 그끈질긴 숙원과 원한에 사무친 보복심과 잠들 수 없는 자긍을 내어버린 자유, 무겁고 숨막히는 철갑을 벗어버린 자유다. 사랑할 수 있는 자유, 다 버리고 어디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러나 바람에날려가는 나뭇잎같이 왜 슬프고 외로운지, 고아의 느낌이 가슴을저미는지 서희는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걷는다. 하늘 끝까지 내처걸어갈 것처럼 걷는다. 여관과는 사뭇 방향이 다른 것도 개의치 않는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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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외면하려 드는 마음, 용이는 혼자 화를 낸다. 어쩌란 말인가. 제에기! 다 뿌리치고 달아날까? 눈밭을 달려가는 늑대맨치로 달아날까? 꽁꽁 묶어놓은 이놈의 줄을 끊어부리고 그러나 가슴에 젖어드는 것은 연민의 눈물일 뿐이다. 살인 공범자 칠성의 아낙, 마을에서 개처럼 쫓겨났던 여자, 아이 셋을 앞세우고 한 끼의 끼니를 위해 매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여자는 지금 홍이어미로서 용이 아낙으로서 이곳에까지 왔다. 증오했고 한 마리의 뱀으로 치부하며 저주했고 죽어지라고 구타했으며 인연을 원망했던 그 여자에 대한 한가닥의 아픔은 용이 인생에 있어 어떤 뜻을 갖는 것일까.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험악한 전력(前歷)에서 여자를 숨겨주고 싶은 거의 본능인 그 충동적 아픔은 도대체 어떤 형태의 애정이란 말일까?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그를 위해주고 따스하게 대하는 사람은 없지만 과거사를 드러내어 여자를 천대하는것만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싸웠으면서도 용이는 여자의 과거만은 절대로 건드린 일이 없다. 당초부터 그들의 관계도 그런 것에서 시작되었다. 도대체 어떤 형태의 애정일까.
용이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간도로 떠나오면서부터 일행에게 있어서 임이네는 불문(不問)의 존재였다. 그리고 은근히 서희와의 접근을 막는 데 신경을 써온 존재이기도 했다. 그 불문의 존재가 거복이로 인하여 풀쑥 떠오른다는 것, 떠올라 일행의 마음을 산란스럽게 하는 일이 두려웠고 여자를 데리고 산다는 죄책감도 되살려져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가만히 그 일을 덮어두고 싶은 연민의 정이 더 짙게 마음을 지배한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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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地」 2부는 1부의 말미로부터 몇년 후인191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삼고, 경남하동의 평사리에서 광막한 불모의 고토간도(間島)로 무대가 옮겨간다. 최참판댁의 가명(家名)을 떠맡은 딸 서희는 고향에서 갖고 온 재물을 밑천으로 토지와 식량에 투기,
대부호가 되어 자기네 재산을 횡령한조준구로부터 잃어버린 땅을 다시 사들이기 시작한다. 서희는 양반이며 독립투사인 이상현의 구애를 거절하고 하인과 진배없는 길상이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고 마침내 득의귀향(得意歸鄕) 한다. - P-1

누리에 스스로 있는 빛을 모아 글로 빚고, 그로써민생(民生)의 이목耳目)을 깨우쳐준 이가朴景利 선생임은 세상이 다 아는 지 이미 오래인터이다. 사람들이 선생을 사람의 위로서,
기리고 배우기를 도모하며, 여느 무리와 더불어의논하기를 저어함도 실로 까닭이 그에 있었던것이다.
그렇듯 선생의 문학은 당신의 생애와 뜻을달리하지 않았으니, 그 정신의 이바지는 자못 모든 생령(生)의 근본에까지 미치는 바 되고도오 히려 남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너무 어려워서 선생의 그 빛남과 너르고 깊음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 하물며 사해(四海) 의물망(物望)을 함부로 이를 것인가.

李文求 作家 - P-1

1911년의 오월, 용정촌(龍井村) 대화재(大火災)는 시가의 건물 절반 이상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사진塵沙)을 거슬러올리며 달려든,
오월에 흔히 부는 서북풍이 시가를 화염의 바다로 몰아넣고 걷잡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아직 공사가 진행중에 있는 절(雲興寺]에 피신한 서희 일행은 용이와 길상, 월선이 임이네 훙이, 그리고 간도(間島)에 오면서부터서희 시중을 들게 된 새침이와 부엌일을 하는 달래오망이, 일꾼 두사람이었다. 절로 오게 된 것은 지난 삼월 포교하러 왔었던 중 본연(本然)이 일본 통감부(統監府) 파출소의 서기였던 최기남(崔)의 협조를 얻어 사찰 건립에 착수하였을 때 서희는 적지 않은 금액을 희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절로 피신해온 사람은 서희 일행만은 아니었지만, 용정촌의 교포 이재민의 대부분은 천주교 성당으로 혹은 일본 영사관으로 몰려갔다는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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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은 한숨을 내쉰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만 같았던것이다. 어느 집의 담장인가. 바로 두리네 집 담장이구나 하고 길상은 생각했다. 담 안의 감나무가 담 밖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감꽃은 벌써 져버린 모양이다. 발밑에 감나무 가지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감나무는 분명 담장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허상이 왜흔들리는가. 걸음을 멈추고 나무 그림자를 밟은 길상이 입에서 아아, 이번에는 신음 소리였다. 길상은 감나무 그늘을 떠나 한복이 집에 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마을 집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살짝이 있는가 하면 판자문이 있고 속대로 엮은 문이 있고, 울타리는 있으나 숫제 삽짝이 없어 허기진 사람의 떡 벌린 아가리같이, 역시나 문짝 없는 시커먼 부엌이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집도 있다. 수수깡 울타리, 이영을 얹은 흙벽담, 돌담이 이어진 기와집을 향해 읍하듯 납짝하니 웅크리고 있었다. 우물이 바라다보인다. 조밭이 바람 따라 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달이 밝다. - P297

마음속으로 별렀던 것이다. 일본 헌병들이 오기까지 안심할 수없어서 참았을 뿐이다. 삼수가 공포감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수가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도 틀림이없다. 언약 따위 저버리는 것쯤은 능사라 하더라도 죽이기까지, 그러나 삼수는 이제 성가신 존재, 없어져주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도 어쩌면 조준구 머릿속에 삼수를 폭도로 몰아버릴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이틀 만에 진주서 출동한 일본군이 개 소대는 소위 그네들이 일컫는 폭도들의 행방을 쫓아 지리산 방면으로 향했고 읍내서 온 헌병들은 마을을 결딴내고 있었다. 아낙들과 늙은 부모들은 매를 맞고 총칼로 위협받으며 읍내로 끌려가기도 했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이 북새통에 한조가 돌아왔다. 그 동안 진주에 있다가 솔가할 결심으로 마을에 돌아온 그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을 리만무다. 사건의 내용조차 모르고 왔다. 한데 그는 삼수 다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 P395

용이 온 것을 모르는 김서방댁은 임이네가 떠났다는 말을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는 않는다.
"그라믄 나는 우짤 기고, 주막이나 채릴래?"
"내사 머절에 가서 공양이나 지어주고 
살라요."
터무니없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결정되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쉴새없이 지껄이는 김서방댁 말을 귓가에 흘려듣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문간까지 나온 월선은
"집을 팔아서 돈이 좀 생겼이니, 운제 우리가 만낼지도 모르겠고."
일본 돈 삼 원을 쥐여준 뒤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5월 16일 일행은 하동을 떠나서 부산에 닿았다. 물색해놓았던 객줏집에 들어 하룻밤 여독을 풀고 17일, 진주서 올 사람들을 기다렸으나 하루해는 초조하게 저물었다. 다음날에야 그들은 도착하였다. 예정보다 하루가 늦은 셈인데 봉순이를 기다려보느라 늦어졌으며행여 하동에서 애기씨와 함께 오는 게 아닌가고 생각하기로 했었다는 용이 말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했으나 길상은 충격을 받는다. 서희도 무엇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지 아무말이 없었다.
번화하고 낯선 밤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겠다고 나선 길상의 눈에 불빛이 아물거린다.
‘봉순아!‘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낯선 거리에는 찝찔한 바닷바람이분다. - P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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