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은 한숨을 내쉰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운명만 같았던것이다. 어느 집의 담장인가. 바로 두리네 집 담장이구나 하고 길상은 생각했다. 담 안의 감나무가 담 밖으로 가지를 내뻗고 있다. 감꽃은 벌써 져버린 모양이다. 발밑에 감나무 가지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감나무는 분명 담장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허상이 왜흔들리는가. 걸음을 멈추고 나무 그림자를 밟은 길상이 입에서 아아, 이번에는 신음 소리였다. 길상은 감나무 그늘을 떠나 한복이 집에 어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서 가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마을 집이 하나하나 지나간다. 살짝이 있는가 하면 판자문이 있고 속대로 엮은 문이 있고, 울타리는 있으나 숫제 삽짝이 없어 허기진 사람의 떡 벌린 아가리같이, 역시나 문짝 없는 시커먼 부엌이그대로 눈에 들어오는 집도 있다. 수수깡 울타리, 이영을 얹은 흙벽담, 돌담이 이어진 기와집을 향해 읍하듯 납짝하니 웅크리고 있었다. 우물이 바라다보인다. 조밭이 바람 따라 쏠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달이 밝다. - P297
마음속으로 별렀던 것이다. 일본 헌병들이 오기까지 안심할 수없어서 참았을 뿐이다. 삼수가 공포감을 안겨준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삼수가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도 틀림이없다. 언약 따위 저버리는 것쯤은 능사라 하더라도 죽이기까지, 그러나 삼수는 이제 성가신 존재, 없어져주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젯밤의 일이 없었더라도 어쩌면 조준구 머릿속에 삼수를 폭도로 몰아버릴 생각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이 난 이틀 만에 진주서 출동한 일본군이 개 소대는 소위 그네들이 일컫는 폭도들의 행방을 쫓아 지리산 방면으로 향했고 읍내서 온 헌병들은 마을을 결딴내고 있었다. 아낙들과 늙은 부모들은 매를 맞고 총칼로 위협받으며 읍내로 끌려가기도 했고 아이들은 울부짖었다. 이 북새통에 한조가 돌아왔다. 그 동안 진주에 있다가 솔가할 결심으로 마을에 돌아온 그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을 리만무다. 사건의 내용조차 모르고 왔다. 한데 그는 삼수 다음의 희생자가 되었다. - P395
용이 온 것을 모르는 김서방댁은 임이네가 떠났다는 말을 조금도 이상히 생각지는 않는다. "그라믄 나는 우짤 기고, 주막이나 채릴래?" "내사 머절에 가서 공양이나 지어주고 살라요." 터무니없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은 결정되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쉴새없이 지껄이는 김서방댁 말을 귓가에 흘려듣다가,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는 것을 뿌리치고 문간까지 나온 월선은 "집을 팔아서 돈이 좀 생겼이니, 운제 우리가 만낼지도 모르겠고." 일본 돈 삼 원을 쥐여준 뒤 도망치듯 골목을 빠져나왔다. 5월 16일 일행은 하동을 떠나서 부산에 닿았다. 물색해놓았던 객줏집에 들어 하룻밤 여독을 풀고 17일, 진주서 올 사람들을 기다렸으나 하루해는 초조하게 저물었다. 다음날에야 그들은 도착하였다. 예정보다 하루가 늦은 셈인데 봉순이를 기다려보느라 늦어졌으며행여 하동에서 애기씨와 함께 오는 게 아닌가고 생각하기로 했었다는 용이 말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체념했으나 길상은 충격을 받는다. 서희도 무엇인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지 아무말이 없었다. 번화하고 낯선 밤거리에 바람이 불었다. 떠나기 전에 머리를 깎겠다고 나선 길상의 눈에 불빛이 아물거린다. ‘봉순아!‘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낯선 거리에는 찝찔한 바닷바람이분다. - P436
|